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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상언격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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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언격쟁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은 백성들의 억울하고 원통한 사정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합법적인 소원제도(訴?制度)이다. 상소(上疏)가 사회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에 비해 상언과 격쟁은 주로 개인적인 사정을 소원하는 수단이었다. 실행주체는 개인인 경우가 많지만 집단인 경우도 있는데, 집단일 경우를 등소(等訴)라 한다. 상언은 사전적으로 백성이 임금에게 글월을 올린다는 뜻으로, 규정에 의하면 한문으로 쓰여진 문서의 형태로 당사자가 직접 작성하고 직접 바치고 정해진 기한 내에 직접 나와 본인이 상언했는가의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다. 이처럼 상언은 한문으로 작성해야 했으므로 문자에 익숙하지 못한 일반 백성들에게는 작성에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상언은 문자에 익숙한 관원, 생원, 진사, 유생, 양반부인,잡직관인 등의 양반과 중인이 주로 하였다. 상언은 두 차례로 한정하였으며, 승정원에서 내용에 따라 뷴류한 후 각방 승지에게 넘기면 이들이 검토한 후 자신의 의견을 첨부하여 국왕에게 올렸다. 격쟁은 임금에게 하소연하기 위해 임금이 거둥하는 길가에서 징 꽹가리를 쳐 하문(下問)을 기다리는 형태의 소원수단이다. 따라서 격쟁은 문자에 익숙지 못한 이들도 참여 할 수 있어 하층 세력인 양인(良人), 소사(召史), 역민(驛民), 승려, 노비 등 평민과 천민이 선호하였다. 규정에 따라 격쟁인을 먼저 붙잡아 형장(刑杖)으로 때린 후 형조에서 그 내용을 구두로 조사하여 국왕에게 간단하게 요지를 써서 올렸다. 상언과 달리 격쟁은 횟수에 제한이 없었으며 외람된 내용도 빠짐없이 보고되었다. 상언과 격쟁은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각사에서 접수한 이후 3일 내에 국왕에게 상주해야 했다.

참고문헌 :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상언.격쟁 연구- (한상권,일조각,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내용

정조대에 올린 상언(上言) 격쟁(擊錚)은 총 4427건으로 이중에서 상언은 3,092건이고 격쟁은 1,335건으로 상언이 격쟁에 비해 2배 이상 많았다. 그 내용은 주제에 따라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각종 은전(恩典)을 요구하는 것을 간은(干恩)으로 분류한다. 이는 전체의 40%이상을 차지하고 격쟁에 비해 상언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양반 중에서도 유학(幼學)이 주도하였다. 둘째 사회 경제적인 비리와 침탈을 호소한 내용이 민은(民隱)으로 전체의 20%이상을 차지하며 주로 격쟁을 통해 호소하였으며 평민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였고 그 중에서도 양인이 가장 많았다. 또한 민은을 호소할 때 여럿이 함께 하여 집단성을 띤 등소(等訴)형식의 상언 격쟁과 외람된 내용으로 저항적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모람(冒濫)된 상언 격쟁의 형태가 많았다. 구체적인 내용은 부세수탈, 토지침탈, 상공업이익의 침탈, 노비추쇄(奴婢推刷), 징채남징(徵債濫徵), 비리횡침(非理橫侵), 토호무단(土豪武斷), 읍폐(邑弊)등이 있다. 셋째 산림의 소유권 이용권과 관련하여 묘지의 투장(偸葬)과 금장(禁葬)을 둘러싼 송사(訟事)를 산송(山訟)으로 분류한다. 산송은 전체의 13%정도 차지하며 상언의 형태가 더 많았고 양반이 압도적으로 많이 호소했으며 역시 유학이 주도하였다. 넷째 살인죄, 억울한 옥살이, 역적죄 관련, 국고유용과 절도, 문서 위조, 직부 불이행, 윤리범죄, 고을 수령에 대한 능멸, 과거장 문란죄 등과 관련된 내용은 신원(伸寃)으로 분류하며 이는 전체의 13%정도 차지하며 격쟁이 더 우세하였다. 신원은 양반과 평민이 함께 주도하였다. 마지막으로 후사(後嗣)가 없을 때 제사를 받들 자손을 맞아 들이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원하거나 적자와 서자의 판단, 양자관계를 끝내는 파양(罷養),, 지손이 종손을 대신하게 되는 탈종(奪宗) 등의 문제를 호소하는 내용은 입후(立後)로 분류하는데 이면에는 재산권 분쟁과 관련된 복잡한 사회적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것은 전체의 10%정도를 차지하며 주로 양반의 상언이 많았다.

참고문헌 :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상언.격쟁 연구- (한상권,일조각,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 밖의 민은-노비추쇄(奴婢推刷)

도망친 노비를 찾아내는 노비추쇄(奴婢推刷), 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노비 주인이 노비신공[奴婢身貢:노비가 신역(身役)대신 바치는 공물]을 받기 위해 노비대장에 올라 있지 않은 노비를 찾아내는 것과 이미 종의 신분을 면하여 양인이 된 속량(贖良) 노비를 다시 천민으로 떨어뜨리는 압량위천(壓良爲賤)을 통한 노비신공의 강제징수 등이었다. 이 중에서 압량위천에 대해 주로 상언 격쟁이 이루어졌다. 압량위천은 주로 토호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이들은 속량된 양인에 대해 가혹한 형벌을 가하거나 고리대를 빙자하거나 문권위조 등을 하였다. 이는 군현, 내수사, 향교, 성균관 등에 의해서도 자행 되었다. 노비추쇄에 대한 정부대책으로 영조는 노비신공을 줄여 나가는 정책을 추진하여 18세기 중엽에 역노비(驛奴妃)와 시노비(寺奴婢:궁중사무를 맡아보는 관아에 소속되어 있는 관노비)의 신공은 거의 폐지돠었고, '속대전(續大典)'에 은루노비 추쇄시 3년 이상 신공을 받을 수 없음과 속량노비에 대한 압량위천의 엄금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정조2년(1778)에 내수사의 노비추쇄관을 혁파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그 밖의 민은-강제채무징수

강제 채무징수은 상업활동 관련 부채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지방세력자의 침탈, 역(役)운영을 둘러싼 과정에서 발생한 부채가 있었다. 징채남징은 특히 사채에서 고리대의 형태로 지방세력가에 의해 자행되었는데 이들은 무단적인 형벌과 살인 등의 행위로 빚진 돈을 마구 거두어들이거나 집과 논밭을 빼앗기도 하였다. 또한 봄에 돈으로 빌려주고 가을에 곡식으로 받는 전분곡렴(錢分穀斂)도 징채남징의 한 형태였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속대전'에 징채남징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여 공사채의 이자를 상한선을 어기거나 곡식으로 나누어주고 돈으로 받는 곡분전렴(穀分錢斂)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였다. 징채범위를 한정하여 공사채로 인해 친부자 이외 형제 일족 지인을 일체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고 사채를 빌미로 타인의 전토(田土)를 탈취하거나 자녀를 강제로 노비삼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징채남징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 조선시대 생활사(안길정, 사계절, 2000)

그 밖의 민은-관원의 비리

수령이나 관속들의 법을 어긴 비리와 위법행위는, 이들이 제멋대로 지나친 형벌을 가하는 남형(濫刑)과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다. 수령의 남형과 뇌물수수는 유리(由吏), 이방(吏房), 좌수(座首) 등 관속과 구조적 결탁을 통해 저질러졌다. 이러한 관리의 비리에 대해 백성들은 상언 격쟁을 통한 고발도 했지만 이임하는 수령의 짐을 탈취하거나 방화하는 등 보복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남형이란 수령이 집행할 수 있는 형의 상한선인 태형(笞刑) 50을 넘는 경우를 말한다. 신장(訊杖:고문에 사용하는 형장으로 볼기 넙적다리를 침) 과 곤장(棍杖)은 군문(軍門)이나 도적을 다스릴 때 사용할 수 있는 형벌로 수령은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이를 지키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대책으로 영조는 명화적(明火賊) 강도 절도인 등을 다스리기 위한 난장(亂杖:가리지않고 닥치는 대로 마구 치는 매) 주뢰(周牢:주리,죄인을 심문할 때 두 발목을 묶고 다리사이에 두 개의 주릿대를 끼워 엇비슷이 비트는 형벌)와 같은 혹형과 악법을 폐기하였다 정조는 '흠휼전칙(欽恤典則)'을 작성하여 형구지식(刑具之式)을 제정 반포하고 법식에 어긋나는 형구는 모두 거두어들이고 어사를 파견하여 이를 어기는 지방관은 엄중 처벌할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수령들의 비리와 불법적인 남형은 줄어들지 않았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그 밖의 민은-지방세력의 불법행위

지방세력가들의 불법행위는 주로 자기 가문 내에서 사사로이 백성들에게 형벌을 가하고 이를 통해 각종 침탈을 자행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향촌에서 일상적으로 행하는 무단행위로 민전징납(民錢徵納), 남의 땅을 억지로 헐값에 사들이는 전토억매(田土抑買), 땅이나 집문서를 형벌로 협박 빼앗는 문기탈취(文記奪取) 등이 있었다. 정부는 이러한 지방세력의 불법적인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으며 오히려 18.19세기를 거치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참고문헌 : 조선양반사회연구(이성무,일조각,1995),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민은_부세수탈-민은의 상소

민은(民隱) 일반을 시무책(時務策)의 형식으로 상소한 것을 읍폐[邑弊: 시폐(時弊)]라고 하여 유학(幼學)과 양인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거주하고 있는 고을의 문제점이나 환곡 군역의 폐단 등 향촌사회의 사회경제적 폐해을 시정하고자 상언 격쟁을 통해 호소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상언.격쟁 연구- (한상권,일조각,1996),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간은(干恩)

각종 은전을 요구하는 간은은 다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후손 또는 후학이 조상이나 선현의 학행과 공덕을 추앙하기 위해 왕이 시호를 내려주는 증시(贈諡), 종 묘안의 위패를 영녕전으로 모시는 부조(不伯), 공신의 신주를 죵묘에 모시거나 학덕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서원에 모시는 배향(配享), 임금이 사당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편액을 내리는 사액(賜額), 비석이나 사당을 세워달라는 건비건사(建碑建祀) 등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둘째 자손이 그 선조에게 당상관 품계로 올려달라는 가자(加資), 부친의 봉작을 이어받는 승습(承襲), 관원으로 채용하거나 훈공을 장부에 기록하는 녹용(錄用), 사후에 벼슬을 주거나 높여 주는 증직(贈職) 의 요구 등이 해당된다. 셋째 효(孝) 충(忠) 열(烈) 등 삼강오륜의 덕목을 기려 은전을 베풀어 달라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호(戶)에 부과되는 부역을 면제해 주는 급복(給復),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들이 살던 고장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정려(旌閭), 상을 주며 장려하는 포상(褒賞)과 포장(褒奬) 등이 있었다. 이러한 간은은 크게 자손이 부모와 조상의 덕을 드높이기 위한 것과 한 고을에서 동향인을 기리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18세기에 이처럼 선조를 현양 하려는 분위기가 강화된 배경은 사회변동으로 인해 사족들이 향촌사회에서 지배력이 현저히 약화되자 자신들의 지배력을 혈연적 기반 위에서 구축하고자 친족 결속을 강화하는 노력으로 문중계(門中契),족계(族契), 학계(學契) 등이 성행하고 문중서원, 사당, 가묘 등을 마구 설치한 것과 연관이 있다. 그리고 동향인을 효 충 열등의 윤리로 포장하려는 상언 격쟁은 이를 통해서 마을 공동체의 지위를 선양하고 각종 잡역을 면제 받으려는 사회경제적 목적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상언.격쟁 연구- (한상권,일조각,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원(伸寃)

신원을 호소하는 상언 격쟁은 다시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옥사(獄事)와 관련된 것으로 신원 전체의 과반수를 차지하고있다. 옥사에는 살인사건, 억울한 옥살이, 역적관련 죄 등이 있다. 국고유용과 절도[국곡투절(國穀偸竊)]는 고직(庫直), 창색(倉色), 색리(色吏), 궁가(弓家), 감관(監官), 별장(別將), 역리(驛吏) 등이 전세 대동(大同) 환곡(還穀) 결전(結錢) 곡식이나 군포(軍布)를 사사로이 써버리거나 훔치는 경우이다. 문서 위조는 문과 회시에 급제한 사람에게 주는 홍패(紅牌)의 위조가 가장 많았고, 도장 위조로 전답을 몰래 파는 행위도 있었으며, 옥새와 옥보를 위조하여 공명첩(空名帖)을 발매하기도 하였다. 색리, 나장(羅將), 수세감관(收稅監官), 이방(吏房), 좌수(座首), 별감(別監), 능속(陵屬) 등 하급관리들이 직무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해 처벌된 경우는 불근전수(不謹典守)이라고 하였다. 윤리범죄는 강상의 윤리와 관련된 호소로 과녀겁탈, 간통, 음란한 행위 등이 많은 양을 차지하고 양반과 평민, 노비와 주인간의 대립 갈등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관리에 대한 능멸은 읍민이나 이속 하인 등이 고을 수령을 업신여긴 경우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과거장 문란죄로 처벌된 경우는 활쏘기 시험을 대신하는 차사(借射), 대사(代謝), 제술시험을 대신하는 차술(借述), 남의 성명으로 응시하는 환명(換名), 월장(越牆), 모입(冒入:난입), 작란(作亂)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상언.격쟁 연구- (한상권,일조각,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산송(山訟)

산송은 17세기말부터 사회문제화 되고 18세기에 더욱 격화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묘지다툼만이 아니라 산림 이용권과 소유권 다툼이었다. 산송은 투장(偸葬)과 금장(禁葬)으로 구분된다. 먼저 투장은 남의 묘역에 몰래 장사지내는 것으로 수령 관찰사 양반토호 등 유력자가 주로 잔반의 분묘에 투장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산송에 관한 상언 격쟁의 70%이상이 세력자들의 투장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또 양반토호들의 평민 천민의 분묘에 대한 투장도 있지만 반대로 평민이나 노비가 잔반 또는 상전의 분묘를 침탈하기도 하였다. 투장의 주체는 특히 향리에서 막강한 위세를 떨치던 토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은 투장에 대한 관청의 처결에 불복할 뿐 아니라 결정을 번복토록 압력을 행사하거나 심지어 투장을 고발하는 상언 격쟁인에 대한 보복도 서슴지 않았다. 금장은 서울의 세력가나 지방의 토호들이 산림을 널리 독점하기 위해 타인의 입장(入葬)을 금지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들은 분묘 경내에 나무를 심어 가꾸는 것을 빙자하거나 심지어 빈 무덤을 설치하기도 하여 타인이 장사 지내는 것을 막는다. 이렇게 산송이 18, 19세기에 격화된 원인은 당시 풍수설의 유행과 온돌 보급으로 인한 땔감수요 증가, 사회 경제적으로 부유한 계층의 몰락한 계층에 대한 침탈, 지방관의 송사처결의 지연과 객관성 상실 등으로,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 세력간의 대립 갈등은 더욱 첨예화 되었다.

참고문헌 :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상언.격쟁 연구- (한상권,일조각,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은-부세수탈

부세와 관련되는 민은은 전정, 군정, 환곡 등의 삼정(三政)과 대동공물, 잡역, 천역(세)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부세는 민생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민은 중에서도 부세문제가 전체의 23%정도를 차지하여 가장 많았고 그 중에서도 삼정과 관련된 것이 부세 전체의 60% 가까이 된다. 18, 19세기 조선왕조에서 재정의 주종을 이루었던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 세 가지 수취 행정을 삼정이라 하고 그 경영의 파탄상을 삼정의 문란이라 한다. 이로 인해 가장 피해를 본 계층은 양민 중에도 가난한 소농민 이었고 삼정 가운데에서도 환정의 폐해가 가장 극심하여 결국 19세기 초 중엽의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상언.격쟁 연구- (한상권,일조각,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은(民隱)-토지침탈(土地侵奪)

토지침탈에 관한 상언 격쟁은 민은 전체의 약 17%를 차지하여 부세수탈 다음으로 많다. 그 이유는 18세기에 이르러 중앙권세가, 지방수령, 토호, 궁방[宮房: 궁가(宮家), 대군 왕자군 공주 옹주의 집], 각 아문(衙門:관청) 등에 의한 토지 집적이 심화되면서 소농민의 몰락이 가속화되어 이들이 토지로부터 분리되어 유랑민으로 떠돌거나 도적집단으로 전락하여 약탈 행위를 하는 등 사회적 불안의 요인이 되었고,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계층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지침탈에 관한 상언 격쟁의 내용은 주로 소유권 추심(推尋:찾아내어 가져오는 것)을 둘러싼 쟁송, 토호나 궁방의 민전침탈(民田侵奪), 궁방이나 아문의 지대남징(地貸濫徵) 등이었다. 먼저, 소유권 추심을 둘러싼 쟁송에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침탈되거나 몰수된 전토의 추심과 전답문권의 위조를 통한 투매(偸賣) 도매(盜賣)문제, 토지매매 관행을 둘러싼 소송의 제기 등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 토호나 궁방에 의한 민전침탈에서 특히 기경전(起耕田,기간전:개간하여 만든 논 밭)에 대한 궁방과 아문의 침탈이 빈번하였다. 궁방이 백성들이 개간한 땅을 권력을 매개로 빼앗는 과정에서 궁방의 명목적 소유권과 개간자인 백성의 실질적 소유권이 중첩되면서 이중적 소유구조의 형성이라는 문제점이 야기되었고, 궁방전의 확대는 국가적으로도 수세지의 감소 라는 문제점을 야기하였다. 한편 토호들은 향촌에서 고리대를 통해 농민을 괴롭히고 고리대는 결국 농촌사회의 피폐와 민전의 강제수탈로 이어졌다. 끝으로 궁방이나 아문에 의한 지대남징의 호소는 소유주가 궁방인 유토면세(有土免稅)와 소유주가 일반 농민인 무토면세(無土免稅) 모두에서 있었는데 특히 무토면세에 집중되었다. 수세액의 차이를 무시하고 무토면세에서도 유토면세와 같이 1결당 조(租) 200두를 거두어들였고, 무토면세의 궁방 수세권은 10년으로 정해져 이 기한이 지나면 수세권이 호조로 이관됨에도 불구하고 궁방에서 계속 수세함으로 인해 농민들은 이중 수세라는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참고문헌 :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상언.격쟁 연구- (한상권,일조각,1996),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은(民隱)-상공업이익의 침해

상공업이익의 침해에 민은 중 부세 다음으로 많았다. 18세기 후반 이후 조선 시회에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도시발달을 배경으로 상공업 분야에서 막대한 이권이 발생하고 이를 둘러싼 사회 세력간의 갈등과 대립이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에 상공업이익의 침탈에 관한 상언 격쟁은 거의 서울에서 올렸으며, 특히 신흥 상공업 중심지로서 한강 연안을 따라 인구가 집중된 마포, 서강, 용산 등의 서울 서부지역이 가장 많이 하였다. 그 내용은 주로 금난전(禁亂廛), 공인권(貢人權), 운송권(運送權)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은 금난전권을 둘러 싼 대립으로, 하나는 원료구입 및 제품 판매를 둘러싼 상인과 수공업자간의 대립이 있고, 또 하나는 취급품목 및 상권확보를 둘러싼 상인 상호간의 대립이었다. 상인 상호간의 대립은 다시 시전상인 간의 대립, 시전상인과 사상인과의 대립, 사상인 상호간의 대립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시전상인과 사상인과의 대립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사상도고의 출현과 이들이 특히 서울의 외곽상권을 장악하면서 시전상인의 해체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공인권에 있어서는 공인들의 몰락을 지적하면서 그 해결책을 제시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18세기 들어와 공물에 대한 국가의 용도가 많아짐에 따라 원공 외에 바치는 물품이 증대되었으나 호조에서 이에 대한 대가 지급이 원활하지 않음으로 인한 문제점이 컸었다. 이에 따라 공인들은 공가(貢價)의 변통 및 공가를 더 지급할 것, 축소된 원공 복구, 경작공(京作貢)을 설치하여 각지방에서 공납하는 물품을 서울의 해당 공계(貢契)를 통해 공납하게 할 것과 이를 위해 공계를 다시 설치 할 것 등을 호소하였다. 한편 상공업의 발달로 화물 운송량이 크게 증대돠어 경강 중심의 하역운수업을 둘러싼 세력간의 대립이 형성되었고, 신흥세력이 대두하여 강상(江商)들이 장악해온 운송권에 대한 침탈이 빈발하자, 이에 대한 상언 격쟁의 주를 이루었다.

참고문헌 :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상언.격쟁 연구- (한상권,일조각,1996),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도의 변화

상언과 격쟁은 16세기에 들어와 빈발했는데 이는 종전의 신문고(申聞鼓)가 유명무실해지면서 새로운 소원 수단으로 상언 격쟁이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정부는 그 내용과 절차에 대해 통제를 가하며 명종12(1557)에 상언 격쟁의 사안을 사건사(四件事)로 범주화 하는 조치가 있었다. 사건사란: 자신이 형벌을 가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경우. (형륙급신:刑戮及身):부자관계를 밝히는 일(부자분간:父子分揀), 본처와 첩을 가리는 일 (적첩분간:嫡妾分揀), 양 천을 가리는 일(양천분간:良賤分揀)이었다. 그러나 규제에도 불구하고 상언 격쟁은 더욱 확대되자 숙종대인 18세기초에 자손이 부모를 위하는 일, 부인이 남편을 위한 일, 동생이 형을 위한 일, 노비가 상전을 위한 일 등을 상언 격쟁할 수 있다는 새로운 사건사가 확립되었다. 이것은 『경국대전』의 자기원억에 한정된 소원규정과 달리 대리신소(代理申訴)를 허락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후 영조47년(1771)에 신문고를 부활 설치하기도 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정조대에 이르러 상언 격쟁은 더욱 활성화 되었다. 그 이유로 첫째 18세기 후반에 토지겸병 부세수탈 상공업 이익 침탈 등 사회모순의 심화에 따른 백성들의 저항의지가 성장하였다는 점과 둘째 민의를 적극 수렴하여 이상사회를 실현하려는 정조의 통치철학을 들 수 있다. 정조는 민폐를 파악하기 위해 대민접촉을 활발하게 하고 백성들의 사회 경제적 고통인 민은(民隱) 해소 방안을 다각적으로 강구하는 가운데 상언 격쟁에 관한 중요한 조치를 하였다. 먼저 위외격쟁(衛外擊錚)의 허용인데, 종래의 격쟁은 궁궐내의 격쟁을 의미하였으나 이 조치로 임금이 거둥할 때 할 수 있는 것으로 개념이 바뀌었고 상언 역시 임금의 가마 앞에서 하는 가전상언(駕前上言)을 지칭하는 것으로 통용되었다. 또 정조9(1785)에 민은에 관한 상언 격쟁 허용 조치를 내려 백성들이 사회 경제적인 문제까지도 청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바탕으로 18세기말 상언 격쟁은 더욱 활성화되어 양적으로도 증가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상언.격쟁 연구- (한상권,일조각,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소(等訴)형식

여러 사람이 연명(連名)하여 집단적으로 호소하는 것을 등소형식의 상언 격쟁이라 한다. 등소 형태의 상언 격쟁은 성명 뒤에 '모모인(某某人) 등' 이라 표기한 것, 상언 격쟁의 내용에서 거등(渠等)이라 표기한 것, 각사(各司)에서 상언 격쟁을 처리하면서 호소인을 장두(狀頭) 또는 두목(頭目)으로 표기하는 것 등 세가지가 있다. 정조대의 상언격쟁 중 등소형식은 4,427건 중 737건으로 16.5%를 차지하여 등소형식이 상당히 많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주제가 확인된 등소형식 729건 중 간은(干恩)은 58.3%, 민은(民隱)은 35.8%로 간은이 민은보다 높다. 그러나 민은 전체(920건)로 볼 때는 등소형식은 28.4%이고 간은 전체(1,795)의 등소형식은 23.7%가 된다. 따라서 민은과 관련된 내용에서 등소형식의 상언 격쟁이 상대적으로 가장 많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729건 가운데 상언은 87.5%, 격쟁은 12.5%로 상언이 격쟁의 8배에 이른다. 등소형식에 있어서는 격쟁보다는 상언을 선호하여 압도적으로 많이 행했음을 알 수 있다. 신분적으로 보았을 때는 신분이 확인된 682건 중 양반이 64.1%, 평민이 24.3%로 양반과 평민이 주도했으며, 직역별로 보았을 때 유학이 57.3%, 양인이 15.8%이므로 주로 유학과 양인이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대적으로 등소형식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민은을 내용별로 알아보면 등소형식인 261건 중 상공업문제, 부세문제, 읍폐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상공업 문제를 둘러싸고 등소가 활발한 이유는 상공업인이 높은 결속력과 집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18세기 후반 일반 백성들은 각종 사회 경제적 침탈에 맞서 높은 응집력을 보이면서 결속력을 다져서 위와 같은 문서를 통한 등소 이외에도 집단적인 행동을 통한 호소도 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상언.격쟁 연구- (한상권,일조각,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모람(冒濫)된 상언, 격쟁

모람이란 말은 사전적으로 윗사람에게 버릇없이 덤빈다는 뜻이다. 따라서 모람된 상언, 격쟁은 저항성을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각사(各司)가 상언 격쟁을 처리하면서 각 사안별로 검토 후 국왕에게 보고할 때 외월(猥越), 외람(猥濫), 무엄(無嚴), 외설(猥屑),설월(屑越), 모람이라고 표기한 것들인데 속대전(續大典)에는 이러한 성격의 상언, 격쟁을 모람이라 규정하였다. 각사들이 여러 가지로 표현한 모람된 상언, 격쟁은 다음 중 하나 혹은 두 가지 이상의 경우에 해당할 때이다. 첫째, 영읍이나 각사에 정소해도 될 미세한 일을 국왕에게 직소함으로써 소원 절차를 무시한 경우. 둘째 소원의 내용이 심의중인 관계로 아직 국왕의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는데도 거듭 상언, 격쟁을 올리는 경우. 셋째, 국왕이 이미 판결을 내렸음에도 불복 거듭 상언 격쟁을 올리는 경우. 넷째, 국왕의 판결이 집행되지 않은 것에 항의하여 다시 시행을 촉구하는 상언, 격쟁을 올리는 경우. 다섯째, 상언 격쟁의 내용이 단순한 소원 수준을 넘어서는 경우 등이다. 각사에서 모람이라 규정한 상언, 격쟁은 정조대 상언 격쟁 4,427건 중 770건으로 17.4%를 차지한다. 그 중에서는 간은, 민은, 신원의 순서로 간은이 가장 많으나, 각 주제별로 자체 비교를 해보면 민은에서 모람된 상언, 격쟁의 분포율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모람된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격쟁이 상언에 비해 선호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민은 중에서도 부세와 상공업 문제가 가장 큰 불만이었으며 궁방과 토호의 침탈에 대해서도 저항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신분별로는 확인된 655건 중 양반과 평민이 주도하였고 양반 내에서는 유학이, 평민 내에서는 조이(양민의 아내 혹은 과부), 양인이 주도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상언, 격쟁 연구- (한상권,일조각,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