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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이야기백두산천지와 단군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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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천지와 단군신화

풍수는 자연과의 조화와, 사람 사이의 공동체를 이루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자는 것을 주장한다. 이것을 위한 방법은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의 길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라는 것은 현재의 소박한 자연주의와는 좀 다른 것이다. 풍수의 자연에는 당연히
인간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나만을생각하는 이기심이 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자생풍수의 귀결이다. 남의 길을 방해하며 자연에
순응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와같이 풍수에서 말하는 자연순응은 단군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일맥상통한다. 단군이 말한 널리 인간에 이익 되게 하는 일, 이것은 바로
자생풍수가 말하는 땅에 대한 사랑과도 같은 논리면 내용인 것이다. '홍익인간'하지 못할 짓을 해서는 안 되고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당연히
모든 인간에 흥익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출발이 바로 사랑이 아니겠는가.
그 사랑에는 꼭 땅만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도(道)는 만물에 통한다. 지리(地理)니 땅만이 대상이 되고, 천시 (天時)니 하늘에만 대상이 있고,
인화(人和)이니 사람만이 그 대상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하늘, 땅, 사람 모두에게 통용되는 사랑이라야 진정한 사랑이 된다.
이러한 인식을 같고 단군과 풍수를 생각해보자. 겨레의 시조 단군 하면 당연히 태백산이나 백두산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풍수와 자연순응의 이치를 탐구하기 위해 좀 색다른 단군을 만나보고자 한다. 제일먼저 화악산 아래에 있는 가평의 단군부터 만나보자.
화악산은 해발 1,468미터로 경기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그리고 이곳의 정상인 신성봉은 입산금지구역으로서 인적이 미답한 산지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화악리에는 고인돌이 있다. 왜 선사시대인들은 이런 곳까지 와서 삶터를 구했을까? 인근의 가평읍 마장리와 북면 이곡리에는 석기, 토기와 함께 철기도
발굴되었고 수혈식 주거지도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관광지로 개발하지 않으면 심산유곡의 신비함을 잘 간직할 수도 있다.
이곳은 단적으로 말해 선사인들이 먹고 살기에 적당한 곳은 아니다. 아마도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산령 (山靈)에 대한 이끌림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전제하에 가평읍 승안리 용추계곡의 절경을 살펴보자. 이곳에서 우리는 산신령(山神靈)과 선경(仙境),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한에서는
찾기 어려운 단군을 만날 수 있다.
용추계곡의 단군을 만나려면 계량내(桂良川)를 지나야 한다. 읍사무소가 있는 승안리의 으뜸되는 마을인 이곳은 앞 냇물이 맑아 보름달이 뜨면 계수나무가 비친다고 한다. 이곳은 도인의 풍모가 비치는 명당임에 분명하다 또 우무동 북쪽에 있는 조록절(熙玉洞)에도 인사를 올려야 하는데 냇물이 맑아 돌들이
옥처럼 빛난다고 한다. 맑은 물, 옥 같은 돌은 귀한 땅의 조건이니 이 또한 단군을 뵙는 예일 것이다.
단군은 중국의 천자로 있는 친형과 용녀, 웅녀라는 두 부인이 있었다. 천자가 수려하고 풍성한 우리 땅을 넘보자 용녀가 홍수로 혼을 내어 다시는 이 땅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홍수 때문에 단군과 용녀도 돌로 만든 배를 타고 평양을 떠나 춘천으로 피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신하들이 하나 둘 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그래서 다시 승안리 용추계곡 미륵바위로 피난을 왔는데, 비는 그쳤지만 단군과 그 가족이 모두 죽고 말았다. 그리고 돌배에 싣고 왔던 소, 쥐 , 닭 등 12지신(支神)의 짐승들은 모두 석상으로 변했다. 단군이 묻힌 이곳은 바로 한반도의 가장 중심인 곳이라고 한다. 설화에 의하면 박모라는 여인이 이곳 웅추계곡에서 천일기도를 드리고 석상을 찾아냈으나 공사 중의 불찰로 지금은 미륵바위, 쥐(子)바위, 소(牛)바위 세 개만 남아 있다고 한다.
화악산이 한반도의 정중앙(正中央)이란 지적은 지리적으로는 거의 정확한 말이다. 화악산은 북위 38도, 동경 127도 30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은 『정감록』에도 '화악노정기 (華岳路程記)' 라 하여 그 위치를 상술하고 있다. 여기에 의하면 "가평 북쪽 40리에 홍적리가 있는데 낭천(狼川)의 넓은 언덕 수구(水口)에서 남쪽으로 15리 가서 산 정상이 머리를 돌이켜 바라보는 듯한 형상[山上回頭處]을 가진 곳에서 손씨 6형제가 살며 임진왜란을 피했다'고 되어 있다. 홍적리는 지금도 위홍적마을과 아래흥적마을로 남아 있고 그 터 또한 못 찾을 바는 아니지만 중요치는 않다. 꼭 보고 싶다면 위흥적에서 계속 고개를
올라 경기도와 강원도의 도계가 되는 곳이 바로 그곳일 것이다.
화악산 능선 동쪽으로 여우대란 곳이 있다. 이곳은 [화악노정기가]말하는 낭천의 수원지일 가능성 또한 높다. 게다가 이리(狼)란 짐승은 뒤를 잘 돌아보는
놈이므로 거기서 머리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 형상의 산 모습을 찾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곳은 근자에 이르기까지 승지를 찾으려는 우매한 사람들이
많았다. 결국 큰 길을 내는 바람에 아무리 좋은 땅이 있었다 하더라도 부질없는 짓이다. 제 한 몸, 혹은 제 가족만 병화와 질병과 흉년에서 벗어나보고자
하는 편협된 이기심은 홍익인간과 배치되며, 풍수의 자연순응과도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조화, 사람 사이의 공동체를 이루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향에서 명당을 골라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풍수사상이며, 단군의 이상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북한의 단군을 만나보자. 황해도는 비교적 넓은 들판의 땅이다. 서해의 바다에서 시작한 저평(低平)은 은률과 남포를 거쳐 갑자기 우뚝 솟은 평지돌출(平地突出)의 구월산(九月山)을 만난다. 들판은 지배층을 상징한다. 평지돌출의 구월산은 그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다. 민중은 저항의 선봉인 구월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당연히 지배층의 터전인 들판 가운데 서지도 못하고 구월산과 들판이 만나는 점이지대에 의지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나라 마을 입지의
풍수적 골간을 이루는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것이다. 보수(保守)로 대변되는 들판에 대하여 돌출되게 저항하는 산, 그 사이에 속하여 부대끼는 민중이란
뜻이다.
그들에게는 정당한 저항이지만 반대로 보수적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보자면 반역이 될 수밖에 없는 구월산, 세상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그런 평지돌출의 성격을 가진 산의 품에 안겨 혁명과 개벽을 꿈꾸는 것은 마침내 산과 사람이 상생 (相生)의 궁합(富合)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간혹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더 나아가 그런 산에 깊이 파묻혀 신선을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 도피이며 또 다른 이기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자생풍수는 양생수기(養生修己)의소박한 자연주의를 별로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구월산에는 저항의 맥이 흐르는 한편, 단군 신화가 곳곳에 스며 있는 기묘한 민족주의적
특성이 살아 숨 쉰다.
황해남도 안악군 월정리에 접어들면 구월산 전모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불꽃같은 석봉들이 능선에 즐비한데 최고봉이라야 956미터임에도 불구하고 그
위용은 대단하다 아마도 평지돌출의 산이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산은 마치 안악군을 휘감듯 둘러쳐져 안악이란 지명이 구월산 안자락이란 유추를 가능케 한다. 아낙네란 말도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설화가 있을 정도이니 풍토가 지명을 만들었다는 가정은 그리 생소한 것은 아니다. 구월산 자체가 서해의 바닷
바람을 막아주기 위한 방풍의 긴 성처럼 안악, 신천, 재령 일대를 감싸주는 형세는 그것이 꼭 단군과 결부되지 않았더라도 주민들의 존숭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런 형세가 단군신화를 불러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옛날 어떤 안악군수가 마누라 등쌀에 군정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그녀의 치마폭에
싸여 벌였다는 데서 '안악네'가 나왔고 그것이'아낙네'가 되었다는 얘긴데 그보다는 구월산 품안이란 뜻으로 '안악'이 되었다는 것이 훨씬 그럴 듯하다. 실제
현장은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구월산(九月山)의 구는 우리말로 아흡이고 월은 달이니 아달산, 즉 아사달산에서 이름이 나오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것은 이곳의 단군설화가 뒷받침 한다. 1994년 북한 '문학 예술 종합 출판사' 에서 발간한 『구월산 전설(1)』에 보면, "구월산은 원래
아사달이라 일컬어졌다고 고기는 밝히고 있다. 아사는 아침이란 이두 말이고 달은 산이란 뜻이니 아사달이 바로 구월산'이라는 것이다.
단군이 하늘에서 맨 처음 내려온 곳은 묘향산이다. 조선을 세우면서 도읍을 평양에 두었다가 나중에 도읍을 다시 구월산 아래 당장평으로 옮겨 모두 1,500년 동안 인간을 다스리신 후 마지막으로 구월산에 들어가 신령이 되셨다는 데서, 단군을 모시는 산도 묘향산에서점차 산신이 된 구월산으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육당 최남선은 전한다.
그리고 그는 "신천, 안악을 거쳐 구월산에 다가가보라. 멀리서는 정다워 보이고 가까이 가면 은근하고 전체로 보면 듬직하고 부분으로 보면 상큼하니, 빼어나지 못하다고 했지만 옥으로 깎은 연꽃 봉오리 같은 아사봉이 있고 웅장하지 못하다고 했지만 일출봉, 광봉, 주토봉 등이 여기저기 주먹들을 부르쥐고 천만인이라도 덤벼라 하는 기개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산이 구월산이다"고 덧붙였다.


이제 평양의 단군릉을 살펴보자. 단군릉은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에 있다 그 부근에 가면 어디서나 단군릉이 보인다. 단군릉에 관해서는 최근 많은 자료가
북한에서 출판되었다. 1996년에 발간된 『조선 유물 유적 도감』에는 원색 화보가 고급아트지에 30여 쪽에 걸쳐 실려 있고 '사회과학 출판사' '력사편집실'에서 1994년 펴낸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연구 론문집』은 제목 그대로 14장의 흑백 화보와 함께 발굴 보고서를 포함하여 모두 19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금성
청년 출판사'가 1995년 펴낸 『우리나라 건국시조 단군 전설(1)』이란 책은 강동군 일대에서 전해오던 단군 전설 14편을 수록한 것이다.
여기서는 단군릉의 진위(眞僞) 여부는 언급할 수 없다. 그리고 전설에 관한 것은 땅과 결부되어 풍수적 의미를 갖는 경우에만 설명할 것이다. 어쨌던 북한
자료에 의하면 “단군은 현재를 깃점으로 5,023년 전 평양에서 태어나 25살 때인 기원전 2993년 평양에서 나라를 세운 후 주변 소국들을 통합하여 점차 령토를 넓혀 나갔으며 이후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근 3,000년 동안 존속하면서 멀리중국의 만리장성 경계선까지 령역을 확장하고 아세아의 강대한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단군이 죽어서 묻힌 곳도 역시 평양 일대였다”고 한다.
현재의 단군릉은 본래 위치에서 5킬로미터쯤 이동된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풍수적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단군릉의 원래 자리는 대박산 기슭이었다고 한다. 능은 대박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고 대박산 동남쪽의 절맥처(節脈處)를 그 혈장(穴場)으로 삼은 듯하다. 대박산이란 박달나라의 큰 임금이란 뜻이니, 즉 단군이다. 산의 북동쪽은 연맥(連脈)인데 아달산이다. 『삼국유사』에 단군의 도읍이 아사달이라 한 것을 보면 그것과 관련된 지명이 아닌가 짐작된다. 인근에는
나라에 변란이 생기면 아달산이 웅웅거리며 운다는 전설도 있다.
서쪽도 낮은 구릉이고 상당히 넓은 들판을 건너 남쪽으로는 동서 방향으로 산들이 수성(水星)으로 형자(形姿)를 취하고 있으니 전형적인 현무(玄武), 주작(朱寒), 청룡(靑龍), 백호(白虎)의 사신사(四神砂)를 갖추고 있는 명당 형세이다. 대박산이 크게 보아 금성 (金星)이고 조안(朝業, 명당의 앞쪽을 말함) 방향이 수성이니 금생수(金生水)의 상생 관계요, 좌향 또한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정남향이라 중국식 이론 풍수가들이 보자면 대단한 길지 (吉地)가 된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벌판 남쪽 귀통이를 흐르는 수정천이 동에서 서로 흘러 대동강에 합류하는 식이라 명당수(明堂水)가 서출동류(西出東流)하기를 바라는 지관들의 관점에서는 어긋나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식 자생풍수는 오직 풍토 적응성에 관심을 갖는 것이므로 고사성어 (古事成語)식으로 된 풍수 원칙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전설 한 가지만 더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명산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마고할미 전설이 있다. 그 내용은 가지가지이지만 일종의 여성 산신으로 보면
된다. 그 마고할미가 단군과 화해한 전설이 강동군 남쪽 구빈마을에 남아 있다.
단군이 거느리는 박달족은 인근 마고성에서 마귀할미가 족장으로 다스리고 있는 마귀족을 공격한다. 전투에 진 마귀할미는 달아나서 박달족과 단군 족장의 동태를 살피는데 알고 보니 자기 부족에게 너무도 잘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마귀할미는 단군에게 심복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마귀할미의 신하인 아흡
장수를 귀한 손님으로 맞이하여 대접한 곳을 구빈(九賓)마을이라 하고 마귀할미가 단군에 복속되어 마고성으로 되돌아온 고개를 왕림 (征臨)고개라 한다는 것이다. 단군과 마고는 둘 다 자생적인 우리 민족 고유의 신이다. 하나는 남성이고 또 하나는 여성이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 우리 민족이 만들어낸 신으로서의 특성 때문에 명산(名山) 혹은 영산(靈山)에서 떠받듦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두 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화해하여 하나가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전설을
남한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 고유의 신은 어디선가는 합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