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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산성

역사적 배경
이성산성 동문지역 치 전경 이성산성 동문지역 치 전경

서울, 경기지역에 신라의 성곽이 축성되는 것은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으로 진출하고 난 이후부터이다. 신라는 진흥왕 12년(551)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로부터 남한강 상류지역의 10개 군을 빼앗고, 이어서 553년에는 백제가 점령하였던 한강 하류지역마저 탈취한 뒤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신주는 지금의 경기도 일원과 충청도 강원도의 일부지역을 포괄하는 넓은 지역이었으며 치소는 하남시의 이성산성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중간에 위치하게 되어 두 나라의 진출을 억제하고 서쪽으로 중국과 통하는 해로를 얻어 한반도 제패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한강유역 진출 이후 신라는 한강유역에 대한 방어를 위하여 하남 이성산성과 함께 강남 대모산성, 인천 계양산성 등을 축성하는 한편 파죽지세로 영토 확장을 계속하였다. 북쪽으로는 함경도까지 진출하였고, 남으로는 대가야를 병합하면서 영역을 확장하였다. 7세기 이후 고구려와 신라의 전투는 칠중성과 낭비성, 북한산성 등 한강 이북지역에서 주로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한강 이북지역에 북한산성으로 추정되는 아차산성과 양주 대모산성, 포천 반월산성, 고양 고봉산성, 파주 오두산성 등 많은 성이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이후 신라는 당나라의 세력을 끌어들여 삼국통일을 도모하게 된다.본래 신라와 당은 648년(진덕여왕 2)에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 평양이남, 즉 패강 이남의 영토는 신라의 소유로 한다는 협정을 맺은 바 있다. 그러나 당은 신라와의 약속을 어기고 백제와 고구려 고지에 각각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두어 직접 지배하려 하였다. 심지어 당은 신라까지도 그들의 영토로 편입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신라는 이에 대하여 문무왕 10년(670년)부터 백제 고지를 신라 영토로 편입시키는 군사작전에 돌입하는 한편, 고구려 부흥운동을 후원하면서 당과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신라는 당으로부터 한강유역을 방어하기 위하여 문무왕 12년(672) 당시 신라로서는 가장 큰 규모인 4,360척에 달하는 주장성(晝長城: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추정)을 쌓았으며, 전국적으로 많은 성을 쌓아서 당과의 전면전에 대비하였다. 이 시기 신라군과 당군이 전투를 벌인 곳은 주로 한강에서 대동강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특히 호로고루가 있는 호로하와 행주산성부근에서 9번에 걸친 치열한 접전이 벌어져 말갈 거란과 연합한 당군 2천여 명의 목을 베기도 하였다. 나당전쟁에서 신라의 승리가 어느 정도 분명해지자, 신라는 675년 2월에 예성강 이남의 고구려 땅을 신라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나당전쟁의 승패가 신라의 우위로 돌아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675년 매초성 전투와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매초성 전투가 벌어지기 전 신라는 천성(泉城)에서 보급부대로 추정되는 당의 병선 40척과 1,400명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보급로를 먼저 차단한 신라군은 이어서 이근행의 20만 군이 주둔하고 있던 매초성을 공격하여 격퇴하고 말 3만여 필을 얻는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매초성은 연천의 대전리산성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당시의 전황과 군사의 규모를 고려하면 전곡리토성을 중심으로 한 가사평일대의 넓은 평지였을 가능성이 더 클 것으로 생각된다. 매초성 전투에서의 승리로 신라는 패강 이남 지역의 땅을 모두 확보하고 곳곳에 성을 다시 쌓았다. 이 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확인되는 성이 덕진산성과 호로고루, 당포성 등인데 대부분 고구려의 보루를 확장하여 쌓거나 성벽을 덧붙여 쌓은 것들이다. 그러나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지역만을 신라의 영토로 편입시켰을 뿐, 그 이북 지역으로는 더 이상 진출하지 않았다. 당시 신라로서는 새로 영토로 편입된 백제 고지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신라가 예성강 이북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8세기 전반 성덕왕대부터였다. 신라는 대외적으로 발해가 세력을 확대하여 서로 국경을 맞닿게 되자, 발해의 남하에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성덕왕 12년(713) 개성을 쌓고, 성덕왕 17년(718)에는 한산주 도독 관내의 여러 성을 쌓기도 하였다.
발해가 남쪽으로 진출하여 신라와 동해안지역에서 국경이 맞닿은 것은 성덕왕 20년(721) 무렵이었다. 신라는 이미 그 이전부터 발해의 남하에 대비하였다. 성덕왕 20년(721) 가을 7월에 하슬라(何瑟羅) 지역의 장정[丁夫] 2천 명을 징발하여 북쪽 국경에 장성(長城)을 쌓았으며, 효소왕 3년(733)에는 발해가 당을 침공하자 당의 요청으로 발해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하였으나 가는 도중 추위로 인하여 회군하였다. 당은 신라의 발해공격에 대한 보답으로 735년에 패강 이남의 영토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었다. 이 지역에 대한 신라의 개척은 이를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신라의 북방개척은 경덕왕 7년(748) 10개의 군 현을 설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성덕왕 3년(782)에는 왕이 한산주를 두루 돌며 살펴보고 패강진(浿江鎭)이라는 강력한 군사기지를 구축하였다.
신라는 경덕왕 21년(762)에 오곡 휴암 한성 장새 지성 덕곡 등 6곳에 성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고, 그곳에 각각 태수를 파견하였다. 성을 쌓은 지역은 황해도 서흥, 봉산, 재령, 해주등지로 고구려의 휴암성, 대현산성, 장수산성, 수양산성이 있는 곳인데 이 때에 이르러 신라에 의하여 개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이후에도 이 지역에 대한 개척사업을 계속 전개하여 헌덕왕대에 취성군(황주)과 그에 속하였던 토산현(상원) 당암현(중화) 송현현(송현)을 더 설치하였다.『삼국사기』 지리지 한주 조에 나오는 28군과 49현은 바로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갖추어졌으며,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 이남지역을 모두 영토로 편입하게 되었다.
한편 이외에도 신라 하대에 한산주 관내에 당성진과 혈구진, 장구진을 설치하였다. 당성진은 829년(흥덕왕 40년 2월)에 당은군, 즉 오늘날 화성군 남양면에 설치한 군진으로서 현재 당성에 비정되고 있다. 당성은 1998년부터 한양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먼저 있던 내성에 후대에 외성을 덧붙여 쌓았음을 확인하였다. 문성왕 6년(844) 강화읍에 혈구진을 설치하였으며 황해도 해안, 즉 오늘날 장산곶 근처에는 장구진을 설치하였다.
신라는 한강유역의 지정학적인 여건을 발판으로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한산주는 한강하류지역과 경기도, 충청도 및 황해도지역까지 포괄하는 핵심주로서 삼국시대 말부터 삼국통일을 이루기까지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서울과 인천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일원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300여 개소의 성중 상당수가 삼국시대 신라에 의하여 축성된 성임을 감안해 보면, 신라가 한강유역을 방어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합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신라의 발달된 축성술에 기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성산성의 축성에는 바로 이러한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성산성에 얽힌 이야기
이성산 정상에서 출토된 토마와 철마

이성산성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유물 중에서 가장 특이한 유물들로는 철마와 토마가 있다. 이 조그만 조소품들은 1986년 실시된 1차 발굴조사 당시 장방형 건물지주변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어떤 것은 흙으로 빚어 음각으로 눈이며 코, 입, 갈기 등의 형상을 묘사하였고 또 어떤 것은 철재로 대략적인 형상을 통해 간신히 말 모양임을 알 정도로 간단하게 만든 것도 있다그러나 한 가지 공통적인 점은 모두 완전한 형태가 아니고 다리며 몸통이 부러진 채로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이 유물들의 용도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발굴단 단장이었던 김병모 교수는 한 에세이를 통해 김유신과 기생 천관에 얽힌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해석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화랑이었던 김유신과 기생인 천관과 사랑에 빠졌다. 한창 무예와 학문 정진에 힘써야 할 김유신이 천관과의 염문을 뿌리며 술집을 드나들자 김유신의 어머니는 김유신을 크게 나무라고 깨우친다. 김유신은 어머니 앞에서 다시는 천관의 집을 찾지 않겠노라 맹세한다. 그런데, 김유신이 아끼던 애마가 평소 천관의 집에 드나들던 습관대로 말 등에서 졸고 있던 김유신을 태운 채로 천관의 집에 들어간다. 김유신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지만 곧 상황을 알아채고 천관의 집 앞에서 애마의 목을 베버린다. 그리고 이후 학문과 무예에 정진한 김유신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있어 중심적인 인물이 된다는 내용인데, 이 이야기 속에는 고대 사회에서는 무척 귀한 존재인 말의 희생을 통한 대의의 달성이라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고 그러한 말의 희생 의식이 이성산성 신앙유적에 나타난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여하간 이성산성 출토 철마와 토마는 고대인의 신앙의식과 매우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을 틀림없는 사실이며 천안 위례산성, 남양주시 국사봉 등지에서도 동일한 유물들이 출토된 바 있다. 이러한 토마와 철마에 대한 신앙 의식은 지금도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성덕리 등지에서도 마을신앙 속에 일부 남아 있기도 한데, 이러한 몸통과 다리가 부러진 철마와 토마에 대해서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수호하기위해 이놈들이 애를 쓰다가 다쳤다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고 전한다

이성산성 출토 토마 이성산성 출토 토마
1,400년 전의 기록 문서를 찾아서

이성산성내 저수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제3차 조사에서 이루어 졌다. 이성산성내에는 C지구와 A지구에 각각 저수지가 존재하였으며 A지구 저수지의 경우 2차례 중첩되어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저수지에서는 일반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유기질 유물들이 잘 보존되곤 한다. 그래서 각종 나무로 만든 제품들과 뼈로 만든 장신구 등이 발견되곤 하였는데, 이중 가장 기대되는 유물은 목간(木簡)이었다. 목간은 종이가 활발하게 이용되기 전 동아시아 고대사회에서는 중요한 기록 수단이었다. 즉, 지금의 종이처럼 표면이 매끈한 나무판에 붓과 먹을 이용하여 글씨를 기록하던 것이었다.
목간은 넓게 쓰기 어렵기 때문에 내용이 집약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기록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저수지에서 글자의 판독이 가능한 목간이 발견된다면 이성산성에 얽힌 많은 미스테리를 풀 수도 있으리라 기대되었다. 발굴단에서는 이 목간에 현상금을 걸었다. 오통 진흙과 뻘로 이루어진 저습지 토양 속에서 행여 있을지 모를 목간의 존재에 잔뜩 기대와 조심을 해가면서 발굴단원을 독려하였다. 그런데, 기대한 것처럼 신기하게도 몇 개의 목간이 출토되었다. 그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진(戊辰)”명 목간과 “욕살(褥薩)”명 목간이다.
“무진년”명 목간은 A지구 1차 저수지에서 출토되었다. 과연 이 목간에 쓰여진 무진은 정확히 언제를 가르키는 것일까. 같은 층에서 공반 출토된 유물이 대체로 7세기부터 8세기 전반대의 것들로 편년되는 것들임을 감안하고 당시의 시대 상황을 토대로 본다면 서기 608년 내지 668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른 한 점의 목간은 욕살이라고 하는 고구려 관직명이 쓰여진 목간이다. 이 목간은 C지구 저수지에서 출토되었는데, 당시 발굴조사자의 전언에 따르면 이 목간이 출토된 위치의 층에서는 그 윗층과는 달리 통일신라시대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고 하며 요고라는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고대 악기등이 출토된 점을 들어 이성산성이 한때 고구려가 점유하였던 성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학자들 간에 논쟁이 많기 때문에 단정하기는 어렵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동시대 다른 나라의 직함이 쓰인 목간이나 다른 지방의 문물이 나왔다고 해서 무조건 그 나라가 정치집단이 있었다, 혹은 그 사람들이 성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듯 싶다.
앞으로 이성산성에 대한 연구 테마는 여러 가지가 될 테지만 이 목간에 대한 연구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성산성 이야기
이성산성 12각 건물지 전경 이성산성 12각 건물지 전경
이성산성 8각 건물지 전경 이성산성 8각 건물지 전경
이성산성은 어떤성인가 학자들의 논쟁

지금까지 남아있는 많은 산성 중에서도 하남시에 있는 이성산성(사적 제 422호)은 입지(立地)나 성을 쌓는 방법의 정교함에 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산성은 주로 전망이 좋은 교통의 요충지에 만들어지는데 이성산성은 한강의 수운(水運)과 중부내륙지방으로 가는 주요 육상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고, 배후에 천혜의 요새인 남한산성이 있어 한강유역을 방어하기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이성산성 서쪽 5km 지점에는 백제의 왕도(王都)로 추정되고 있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으며, 북쪽에는 백제시대의 마을유적인 미사리가 있어 많은 학자들이 이성산성과 춘궁리 일대도 백제왕성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하여 왔다.이러한 지정학적인 이유 때문에 춘궁리와 이성산성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백제의 도읍지로 비정되어 왔다.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백제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을 삼각산의 동록인 한양고읍으로 비정하고, 천도지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을 광주고읍인 춘궁리 일대로 비정하였다. 정약용(丁若鏞),강역고(疆域考), 권삼 위례고(卷三 慰禮考),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범우사, 1995
또한 홍경모(洪敬模)는 『남한지(南漢誌)』에서 이성산성을 온조의 고성으로 보았으며, 왕궁은 광주고읍인 궁촌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경모(洪敬模), 남한지(南漢誌)1864년에 발간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이성산에 백제의 성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金正浩,『大東地志』, 광부지(廣州府), 성지조(城池條) 조선시대에는 춘궁리 일대에 백제의 왕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일제시대의 사학자인 금서룡(今西龍)은 춘궁리 일대를 백제의 도읍지로 보고 이성산성을 『삼국사기』개로왕조의 북성(北城)으로, 남한산성을 남성(南城)으로 보았다. 금서용(今西龍), 조선고적조사보고(朝鮮古蹟調査報告), 대정오년(大正五年) 이병도는 백제 한성시대의 도읍지가 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한성)으로 천도해 간 것으로 보고 위례성을 세검동 일대로, 하남위례성을 춘궁동 일대로 보았으며, 잠시 천도하는 한산을 남한산 일대로 보았다.

이성산성 9각 건물지 전경 이성산성 9각 건물지 전경

등도 하남위례성과 한성을 동일한 곳으로 보고 그 위치를 춘궁리 일대로 비정하는데에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한편 최몽룡 권오영은 백제의 도읍이 하북위례성→하남위례성→한산→한성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고 하북위례성을 중랑천 일대로 하남위례성을 몽촌토성으로, 한산을 이성산성으로 한성을 춘궁리 일대로 비정하였다. 崔夢龍 權五榮,「考古學的 자료를 통해본 백제초기의 영역고찰『천관우선생 환역기념한국학론』,1985
성주탁도 같은 견해이나 다만 한산의 위치가 남한산일 가능성도 있다고 하였다. 성주탁,『백제성지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5 그러나 1986년부터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10여차에 걸친 조사 결과 이성산성은 백제성이 아니라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난 이후에 쌓은 성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성벽은 옥수수알 모양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성돌로 쌓은 2차 성벽 안쪽에서 장방형의 성돌로 쌓은 1차 성벽이 확인되어 1차성벽이 무너지고 난 이후 그 바깥쪽에 다시 성벽을 덧붙여 쌓았음이 확인되었으며 다락문이라고도 하는 현문식(懸門式)의 성문과 치(雉)도 확인되었다. 성내에는 평면적이 80평이 넘는 대형 장방형 건물을 4개소를 포함하여 8각, 9각, 12각 건물지 등 20여개에 달하는 대규모 건물지가 노출되었다. 그 중 동서로 대칭을 이루는 E지구의 9각 건물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天壇)으로, 8각 건물은 토지신에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으로 추정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성내에 거주하는 군사들의 식수해결을 위하여 돌로 쌓아 만든 네모난 형태의 저수지가 확인되었고, 쇠나 흙으로 만든 말을 부러뜨려 묻어 놓은 신앙유적도 조사되었다.
이성산성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대체로 굽이 낮은 고배류와 항아리, 인화문토기 등 신라 토기와 경질의 기와가 대부분이다. 그 외에도 수십여 점의 벼루가 출토되어 당시의 문화생활의 일면을 알 수 있게 하는데, 목간(木簡)중에는 “남한성(南漢城)”이라는 성의 명칭이 확인되어 이성산성이 남한성 또는 한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저수지 내에서는 철제 도끼와 쇠스랑, 짚신, 나무자 목척[木尺], 목제 인형, 바구니, 팽이, 동물뼈를 갈아 만든 빗치개 등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성산성은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었던 신라 한산주(漢山州)의 치소성(治所城)으로서 한반도의 한쪽모퉁이인 경주에 왕도(王都)가 있었던 신라가 한반도를 경영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중요한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성산성을 쌓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이성산성을 쌓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얼마나 오랫동안 쌓았을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이성산성과 비슷한 규모의 산성인 삼년산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성산성도 얼추 그 정도 기간이 소요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성산성에 대한 10차 발굴조사에서 1,2차 성벽에 대한 구조와 규모가 어느 정도 밝혀지게 되어 이성산성을 쌓는데 동원된 인력을 대략적으로 추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성산성의 축성방법을 보면 먼저 성을 쌓을 위치를 정하고 자연경사면을 따라 ㄴ자 형태로 파서 다듬은 후 바닥에 너비 7m 정도의 구획을 하여 외곽부에는 기단석을 놓고 안쪽에는 뒷채움을 하면서 한 단 한 단 쌓아 올라갔다. 성벽은 거의 수직에 가깝게 쌓아올렸는데 대략 80°내외의 기울기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안쪽부분은 역시 위로 올라가면서 약간 좁아들어 상단부의 석축의 너비는 5m 내외를 유지하고 있다. 내벽 안쪽과 생토면 사이의 공간은 점토를 다져서 물이 스며들지 않고 성벽도 밀려나지 않도록 하였다.

이성산성 동문지 전경 이성산성 동문지 전경

이성산성 성벽은 높이가 7m이고, 기저부의 너비가 7m, 상단부의 너비가 5m 정도이며, 전체 둘레가 1,665m 이므로 돌의 부피는 69,930㎥에 달한다. 이성산성 성돌은 대부분 화강편마암이고 화강편마암은 비중이 2.6정도이므로 전체 돌의 무게는 181,818톤에 달하여 10톤트럭 1만 8천여대에 달하는 석재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돌의 숫자를 개략적으로 추산할 때 성돌하나가 35cm×21cm×35cm 라고 가정하면 1㎥당 38.2개 정도의 성돌이 사용되므로, 전체 성돌의 개수는 2,685,312개이다. 그중 성벽의 외면에 사용된 다듬어진 성돌은 1㎡당 16개정도가 사용되었으므로 전체 성벽에 사용된 면석의 숫자만 하더라도 186,480개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모든 석재가 산성으로부터 1km 범위 내에서 채석되었을 것으로 가정하고 토목 건축 품셈을 기준으로 소요인력을 산출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성벽을 쌓는 공정은 대략 터파기-채석 및 석재다듬질-석재운반-성돌쌓기-점토뒷채움 의 공정으로 이루어진다.
터파기 인력 : 흙의 양 81,585㎥× 1㎥당 0.2명= 16,317명
채석및 석재다듬질 : 석재량 69,930㎥×㎥의 석재당 0.8명=87,412명

이성산성 장방형 건물지 전경 이성산성 장방형 건물지 전경

운반(1km등짐운반) : 무게181,818,000kg÷400kg(1회1인50kg×1일 8회)=454,545명
성돌쌓기 : 69,930㎥×1㎥당 0.88명=79,465명점토
뒷채움 : 흙의 양 23,310㎥×1㎥당 0.25명=5,827명
이상의 합계를 내면 이성산성을 쌓는데는 연인원 643,566명 정도가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하루에 3천명이 인부가 동원될 경우 성을 쌓는데 약215일이 소요되며, 휴식이나 일기 등을 감안하여 한 달에 25일 정도 작업이 이루어진다고 할 때 약9개월 정도가 소요된다. 일반적으로 성쌓기는 농한기에 이루어지므로 1년에 3개월 정도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대략 3년 정도가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축성에 필요한 비용을 환산해 보면 축성에 동원된 인부들에게 하루 600g 정도의 식량을 제공할 경우 386,140kg의 곡식이 필요하며, 이는 80kg들이 가마로 4,827가마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다. 물론 당시에 일당을 주지는 않았겠지만 인부1인당 1일 5만원의 인건비를 계상할 경우 322억원 정도가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인구와 물자가 부족한 삼국시대의 재정여건을 고려할 때 성을 쌓는 일에 얼마나 국가의 재정이 집중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성산성은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이성산성이 언제 초축되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백제 한성시대의 도읍지 비정이나 삼국이 한강유역을 점유하기 위하여 취한 전략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성산성을 백제의 도읍지라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9차에 걸친 고고학적인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결론은 이성산성은 신라에 의하여 초축된 산성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차의 발굴조사가 실시되는 과정 속에서, 이곳에 백제의 유적이 있었거나 더구나 백제의 왕도가 있었다고 한다면 어떠한 형태로든 증거가 남을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산성에서 발굴된 수많은 유물 중에는 백제의 특징적인 유물은 단 한점도 발굴되지 않았다. 시대를 판별할 수 있는 가장 표식적인 유물은 토기류이며, 한성백제시대의 가장 중심되는 유적이라고 생각된는 몽촌토성 출토의 백제토기류와 이성산성 출토토기의 특성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몽촌토성과 이성산성 출토 토기 비교
몽촌토성 이성산성
- 삼족토기류가 많이 발견된다.
-유개합의 형태가 없다.
-원저호가 많다.
-고배가 많으며 턱이 작고 구연이 길게 직립하고 있다.
-4~5세기 중엽경의 유물이 대부분이다.
-삼족토기가 전혀 없다.
-유개합이 주류를 이룬다.
-원저호가 전혀없고, 말각을 이루고 있다.
-고배의 수가 적으며 구연이 안으로 기울고
뚜껑받이 턱이 길게 뻗어있다.
-6세기 중엽부터 통일신라기의 유물이 대부분이다.
이성산성 체성벽 옥수수알 모양 성돌 이성산성 체성벽 옥수수알 모양 성돌
C지구 저수지 출토 목간 C지구 저수지 출토 목간

이러한 차이점은 이성산성을 축조한 집단은 몽촌토성을 축성한 집단과 문화적인 원류를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성산성이 백제에 의하여 초축되었다고 한다면 이성산성을 공략한 고구려에 의해 약 80여 년 동안 장악되었을 것이지만 이성산성에서는 고구려의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는 반면 몽촌토성에서는 상당량의 고구려 유물이 출토된바 있다.
또한 이성산성에서 보이는 이러한 유물의 양상은 오히려 경주지역에서 출토되는 신라의 유물들과 유물조합상이나 형태등에서 매우 유사하다. 특히 1차저수지에서 출토되는 합과 단각고배류는 553년에 축조되기 시작하는 황룡사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양상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은 결국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게 되는 역사적인 맥락과도 부합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증거로 볼 때 이성산성은 진흥왕 14년(553)을 전후한 시점에 축조되기 시작했다고 판단된다. 553년은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신주를 설치하는 해이며, 이 新州의 치소가 廣州 일대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李丙燾譯,『三國史記』,1980.p58(여기서는 주치가 지금의 광주 고읍이라 하였다.)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신주의 주치소와 한강유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이성산성을 요새화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신주를 설치하면서, 바로 이성산성의 축성공사를 시작하였으며, 축성공사가 완료된 것은 진흥왕 18년(557) 경으로 추정된다.
6세기 중엽에 축성된 이성산성은 이후 한차례의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남벽에서 보이는 1차성벽과 2차성벽 및, 2차에걸쳐 축조된 저수지 및 부대시설, 그리고 축조시기를 달리하는 건물지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시기는 1차저수지의 윗층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인화문토기와 벼루, 그리고 건물지의 用尺의 변화를 통해 대략 삼국통일 무렵으로 추정할 수있다.
이성산성이 개축되는 7세기후반을 중심으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전기 / 중기(7세기후반) / 후기
양상
-1차성벽 및 1차저수지 축조
-E지구 건물, C지구 1,2호건물축조
-저장구덩이 축조
-2차성벽 및 2차저수지 축조
-8각, 9각, 12각 건물축조
-저장구덩이 매립
특징
-고배, 호형토기 성행
-적갈색의 선조문와
-병영, 창고위주의 장방형 건물
-용척 : 고구려척
-인화문토기, 합, 대상파수부시루 성행
-회청색경질의 격자문와
-행정, 의례용의 다각형건물
-용척 : 당척
C지구 저수지 출토 목제 빗 C지구 저수지 출토 목제 빗

즉 이성산성 1차저수지가 자연폐기되고 정연하게 쌓았던 성벽이 붕괴되자 2차성벽을 축조하고 2차저수지를 만들었다. 또한 장방형 건물위주에서 8각, 9각, 12각 등 다각형 건물들이 구축되면서 이성산성의 기능도 전략적 군사적인 기능보다는 오히려 행정적, 문화적인 기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토기의 구성비도 변화하게 되며, 용척도 고구려척에서 당척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성산성이 언제 폐기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지금까지의 발굴과정에서 C지구에서 약간의 청자편이 출토되고 E지구의 신앙유적에서 청자편 몇 조각이 발굴된 외에는 고려시대 이후의 유물은 전혀 발굴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이성산성이 고려초기 이전에 이미 폐기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교적 후기에 축조된 8각 건물지에서 발견되는 기와나 토기를 살펴보면 퇴적층의 층위구분이 없고, 유물변화의 시간 폭이 그렇게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8각건물의 사용 시기를 대략 100년에서 150년 정도로 잡게 되면 이성산성의 폐기는 9세기 중엽이나 말경에 이루어진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는 신라 하대가 되면서 지방행정이 문란해지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면서 산성의 개축과 관리능력의 상실로 말미암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산주 일대가 궁예에게 완전히 장악되는 것은 효공왕 2년(898)의 일이다. 이성산성에서 당시에 사용된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이성산성은 이미 그 이전에 폐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발굴과정에서 건물지 출토 유물이 거의 없고, 화재의 흔적 또한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성산성의 건물들은 전쟁이나 화재 등의 재난으로 인하여 붕괴된 것이 아니라 방치됨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붕괴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성산성 건물지의 영조척

영조척(營造尺)은 건물을 짓거나 도로를 만드는데 사용된 자를 말하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고려척 또는 고구려척(高句麗尺)이라고 불리는 자를 사용하였다. 고구려척 1자의 길이는 대략 35.6cm로 고대에 사용된 가장 긴 자이다. 고구려의 평양도성, 익산의 미륵사지, 부여 백제오층석탑, 황룡사건물지, 감은사 등이 고구려척으로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 통일신라시대부터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당척(唐尺)이 사용되는데 당척은 1자가 30cm 정도이며 불국사, 석굴암, 사천왕상, 망덕사 등은 당척을 영조척으로 하였음이 밝혀졌다.
이성산성 건물지의 영조척은 고구려척과 당척 모두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는데 장방형건물지들은 대체로 고구려척으로 다각형건물들은 당척을 영조척으로 하였음이 밝혀졌다. 1999년 7차 발굴조사 도중 C지구 저수지에서 길이 29.8cm 인 당척의 실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C지구 저수지 출토 목제 자 C지구 저수지 출토 목제 자
출토유물로 본 이성산성 생활문화

이성산성의 출토유물을 통하여 당시의 생활문화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먼저 식생활과 관련하여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토기와 목기 등 식생활 용기류이다. 먼저 조리기구로는 무쇠솥이 있었을 것이나 발굴에서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곱돌로 만든 용기편이 몇 점 발견되었다. 토기 중에는 대형의 시루가 여러 점 발견되었는데 시루는 음식물을 쪄서 조리하는 조리법이 상당히 성행했음을 말해준다.또한 물을 담는데 쓰인 동이류와 쌀을 이는데 쓰인 자배기류도 있다. 그 외에 날박을 삶아서 만든 바가지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나무를 깎아서 만든 이남박과 옻칠을 한 칠기도 사용되었다. 저장용기로는 곡물이나 소금 등을 보관하고 장이나 술을 빚어서 담그는 용기로 대형항아리나 옹 단지류가 많이 발견되었다. 식기로는 밥을 담았을 것으로 보이는 합과 뚜껑이 있고 국그릇이나 반찬그릇으로 사용된 완과 고배류가 있다. 잔이나 종지와 같은 소형의 반찬접시들이 보이지 않는데 이러한 종류의 식기들은 목기(木器)로 대체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식기 종류를 통하여 통일신라시기의 식생활문화는 개인용식기가 사용되었으며, 주식과 부식 및 각종 반찬을 곁들인 식사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음식물의 종류로는 쌀과 잡곡을 주로 하는 밥과 국이 주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식으로는 개와 돼지, 소, 말 등이 주로 단백질공급원이 되었으며, 김치를 포함한 각종 야채류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돼지의 경우는 야생의 맷돼지 종류로서 주변에서 사냥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저수지에 물고기를 양식하여 잡아먹기도 하였다.


잣, 밤, 복숭아 등의 과실류를 섭취하였음도 출토되는 유물자료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주거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로는 건물지와 기와류가 있다. 기와는 매우 탁월한 지붕재료이지만 제작과정이 까다롭고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므로, 근래에 이르기까지도 서민들은 함부로 쓸수 없는 고가의 재료였다. 특히 삼국시대의 경우에는 기와는 왕궁이나 관청,나 사찰 외에는 거의 사용할 수 없었다. 이성산성에서 출토되는 기와의 종류는 타날 문양에 따라 격자문, 선조문, 무문, 어골문 등으로 매우 다양하지만,
그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격자문계통이다. 수키와는 언강이 있는 것은 전혀 없는 토수기와이며, 일부의 암 수키와에서는 점토판을 사용하지 않고 점토띠에 의한 제작기법이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건물지에서는 온돌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어 어떤 형태로 난방이 이루어졌는지 궁금하다.

C지구 저수지 출토 목제품 C지구 저수지 출토 목제품

생활문화를 살펴보면 나무를 깎아서 만든 빗과 동물뼈를 갈아서 만든 빗치개와 나무로 깎아 만든 얼레빗이 여러 점 출토되어 당시에도 머리를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목제 인물상과 짚신을 만드는 도구로 보이는 목제 방망이, 철제도끼와 쇠스랑, 삽등의 생활도구와 아이들의 장난감이었을 팽이가 출토되었다. 팽이치기는 중국 당나라 때 성행하여 우리나라에는 고려때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우리나라에도 팽이치기가 최소한 통일신라시대 이전부터 성행했던 놀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짚신과 버들고리 등의 생활용품과 천조각, 한자의 길이가 당척과 같은 목제자 등이 출토되었으며, 고구려벽화고분 속에 보이는 요고(腰鼓)가 출토되어 음악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당시의 문자생활의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벼루와 목간이 있다. 벼루는 40여점이 출토되었는데 기본적인 형태는 요즈음을 벼루와 달리 원형을 기조로 하고 있으며 형태는 여래개의 다리가 있는 백족연과 원통형으로 된 것으로 나뉜다. 또한 저수지에서는 나무에 먹으로 글씨를 쓴 여러점이 목간이 출토되었으며 그중 1차 저수지에서 출토된 목간에는 ‘戊辰年’이라는 干支 南漢城 須城 등의 명칭과 고유명사와 道使 村主라는 관직명이 기록되어 산성의 축성시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성산성 연못에서의 연회

남한성의 성주이자 신주를 관할하는 촌주. 그는 야트막한 굽다리 잔속에 어리는 술잔을 는 오늘 대 고구려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공로로 경주에서 왕이 하사한 하사주를 받아 들고 연회를 베풀었다. 아직 전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제 한 번 쯤 장졸들의 사기를 복돋아 줄 만한 시점이라 판단하였다.
한편, 고구려 욕살을 폐퇴시킨 그날의 전투를 떠올리며 연못가 정자에 앉아 성벽위에 도열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멀리 고향 경주를 떠나 생면부지의 지방 호족들을 이끌고 이들을 규합하여 왕명을 받는 신라의 군속으로 만들기에 얼마나 고생하였던고. 이제 그 고생 끝의 작은 열매가 맺는가 싶었다.
“쌔애액” 명적이 올랐다. 아마 정찰을 나섰던 일속들이 돌아오는 모양이다. 다소 지친 모습이지만 사기는 여전히 높다. 한손에 장창이며 도끼등을 거머쥔 손들이 다부져 보인다.
연회의 막이 올랐다. 머리를 곱게 빗어 말아 올린 여속들이 물소뼈를 갈아 만든 머리꽂이 장식이며 각종 장신구가 연못에 비치는 햇빛 속에서 현란하다.

이성산성 시설물
2차 저수지와 남쪽 성벽 모습 2차 저수지와 남쪽 성벽 모습
9각 건물지 복원도 9각 건물지 복원도
성벽

이성산성은 해발 209m인 이성산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계곡을 감싸도록 쌓은 포곡식(包谷式)의 석축산성이다. 전체 둘레는 1,665m 이며 성 내부의 면적은 약 128,891㎡(약 3만 9천평)으로 삼국시대의 산성중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성벽은 전체적으로 한쪽을 산의 경사면에 의지하여 쌓는 편축식의 성벽이지만 남동쪽의 계곡을 가로지르는 부분은 양쪽으로 성벽을 쌓아올려 협축(挾築)을 하였다.
성은 2차에 걸쳐서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1차 성벽을 쌓고 일정기간이 지난 후 성이 붕괴되자 1차 성벽의 바깥쪽 4m 지점에 다시 성벽을 덧붙여 쌓았다. 1차 성벽은 성을 쌓을 지점을 선정하여 표토를 제거하고 생토면을 ‘ㄴ’자 모양으로 다듬은 후 바깥쪽에 면을 맞추어 면석을 놓고 안쪽으로는 대략 7~8m 정도 너비로 뒷채움돌을 채워 넣으며 한 단 한 단 쌓아 올렸는데 위로 올라가며 양쪽을 약간씩 좁혀 들어가 전체적인 형태는 사다리꼴 모양이 되도록 하였다. 생토면과 뒷채움돌 사이에는 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점토를 다져서 채워 넣었다. 1차 성벽의 높이는 대략 7m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성벽의 기울기는 81°~84°로 거의 수직에 가깝다. 성돌은 화강편마암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면석은 장방형으로 다듬었으나 모서리부분은 다듬지 않았다. 성돌의 크기는 너비 40~50cm 두께 15~24cm 정도이며 두께와 너비의 비는 대략 1:2.2-1:3 정도인 너비가 긴 장방형이다. 뒷채움돌은 마름모꼴로 양쪽을 뾰족하게 다듬었으며, 상호 치밀하게 결합될 수 있도록 성 안쪽을 향하여 길이 방향으로 쌓았다.
1차성벽 바깥쪽에 쌓은 2차성벽은 바닥을 점토와 잡석으로 다진 후 1m 정도크기의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옥수수모양으로 잘 다듬은 성돌로 쌓아올렸다. 면석은 1차성벽성돌보다 작아서 너비는 30cm 내외 두께는 20cm 내외인데 표면에 굴곡을 주어 면을 맞추어 쌓더라도 윗단은 아랫단 보다 10cm 정도 들여쌓기를 하게 됨으로써 성벽의 경사는 69° 내외를 유지하고 있다. 2차 성벽은 1차 성벽에 비하여 외관이 아름답고 웅장하며 쉽게 붕괴되지 않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문

성벽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 남문지와 동문지가 조사되었다. 남아있는 문지는 모두 사다리를 걸쳐놓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懸門式) 성문이다. 현문은 다락문이라고도 하는데 온달산성이나 삼년산성, 아차산성, 양주 대모산성, 충주남산성 등 신라성의 특징으로 이해되고 있다.

9차발굴조사 시에는 동문지에 접하여 능선방향으로 구축된 치(雉)가 조사되었다. 치는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것을 말하는데 1차성벽의 치는 너비 13.2m, 길이 2.1m로서 길이에 비하여 너비가 넓어 후대의 일반적인 치와 차이가 있다. 2차성벽의 치는 너비 24.5m, 길이 5.1m로 역시 너비가 넓은 장방형이다.

성내 교통로

성내의 도로망은 성벽과 성문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다. 남문지에서 C지구, D지구, E 지구를 가로지르는 도로가 주도로였을 것으로 보이며, 성벽의 안쪽에는 폭2-3m 정도의 회곽도가 조성되어 있다. 이 회곽도를 통하여 신속한 병력의 이동과 배치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성내부의 물을 밖으로 빠지도록 하는 배수구가 있다. 남벽의 배수구는 바닥이 계단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동문지 바닥의 배수구는 입수구와 배수구가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다.

이성산성 동문지역 치 전경 이성산성 동문지역 치 전경
이성산성 신앙유적 전경 이성산성 신앙유적 전경
건물지(建物址)

산성 안에 축조되는 건물들은 일반적으로 창고, 병영, 장대 등 전투에 필요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이성산성은 이 외에도 행정적, 의례적인 요소의 건물들이 보이고 있다. 이것은 이성산성의 기능이 단순히 군사적인 목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행정중심지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음을 말해준다. 이성산성에서 있는 건물지 중 현재까지 발굴된 것만 11개소이며, 주춧돌이 일부 노출되었거나 건물지가 확실한 것을 포함하면 최소한 20개소 이상의 대형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산성 체성벽 1차 성벽 이성산성 체성벽 1차 성벽

이들 건물지의 특징은 다각형 건물이 많다는 점이다. 그중 9각 건물은 9자가 완전무결함을 상징하는 하늘의 숫자이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天壇)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와 대칭되는 지점에 있는 8각건물은 가운데에 건물의 구조와 전혀 관계가 없는 돌기둥(石柱) 4개가 세워져 있고 8은 땅의 숫자이므로 사직단(社稷壇)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성산성 내의 주요 건물지
명칭
형태
크기(cm)
면적(평)
방향
용척
기능
비고

E지구건물지

C지구1호건물지

2호건물지

H지구건물지

D지구8각건물지

E지구9각건물지

B지구9각건물지

C지구12각건물지

장방형

장방형

장방형

장방형

8각(2열)

9각(2열)

9각(2열)

12각(3열)

3,202×788

3,620×800

3,400×790

1,370×660

직경880

직경1,032

직경1,024

직경1,078

76.5

89.4

82.9

27.9

18.8

25.8

25.4

32.6

남서

남동

남동

북서


고구려척

고구려척

고구려척



당척

당척

당척

당척

창고


사직단

천단


누각형건물

누각형건물

누각형건물

벽의 흔적

벽의 흔적

벽의 흔적

벽의 흔적

벽의 흔척

저수지(貯水池)

산성을 근거로 하여 적과 오랜 기간 동안 대치할 때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물이다. 병사들이나 거민들이 마실 식수뿐만 아니라 군마나 가축, 또는 취사, 세면, 세탁 등에 필요한 물이 공급되지 않을 경우 단 며칠을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성에는 샘이나 우물, 또는 저수지 등의 수원이 있었다. 성의 입지조건에 따라 물의 부족함을 해결하기 위해 계곡물을 가두어두거나 빗물 등을 저장하기 위한 저수지 등을 만들어 최대한으로 물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성산성에서는 모두 A지구와 C지구에서 저수지가 확인되었다. A지구의 저수지는 2차에 걸쳐서 축조되었음이 확인되었다. 1차 저수지는 산성의 축조와 동시에 형성된 것으로 형태는 타원형이고 크기는 대략 54×30m이며 2차저수지는 장방형이고, 크기는 18×27m 이며 깊이는 230cm 내외이다. 1차저수지가 자연퇴적되어 저수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자 1차저수지 내부를 파내고 2차저수지를 축조하였다. 2차저수지 바깥에는 2m 두께로 점토를 다져서 물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저수지 사면은 석축으로 견고하게 쌓았다. 이들 저수지의 水源은 해발 170m 지점에서 솟은 샘물에서 흘러 내려오는 두 줄기의 개울물이다. 이 개울물은 수량은 많지 않지만 1년 내내 마르지 않아 성내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였다. C지구의 저수지는 동서 21m 남북 15m 정도 규모로 A지구 저수지 보다는 작은 규모이다.

이성산성 체성벽 2차성벽 이성산성 체성벽 2차성벽
이성산성 E지구 저장공 전경 이성산성 E지구 저장공 전경
저장공(貯藏孔)

성내에서 3개의 저장구덩이가 발굴되었다. 이중 2개는 입구가 좁고 밑으로 내려갈수록 넓어지는 복주머니 형태이다. 저장공은 산성내에 만들어지는 일반적인 시설중의 하나로서 음식물 등을 저장하기 위한 것으로 대부분의 산성에서 확인되고 있다.

신앙유적(信仰遺蹟)

8각, 9각 건물지와 함께 이성산성에서 발견된 특이한 유적의 하나가 신앙유적이다. 건물지 발굴을 통하여 모두 4개소의 신앙유적이 조사되었는데 건물의 초석이나 초석에서 가까운곳에 100~150cm 크기의 큰돌을 올려놓고 그 주변으로 돌아가며 잔돌을 쌓아 놓은 형태이다. 이것은 이들 신앙유적은 건물이 무너지고 난 이후에 조성되었으며 그중 E지구 신앙유적에서는 17마리분의 토제마와 절체마가 출토되었다. 이처럼 유적에서 토제나 철제마가 발굴되는 예로는 안압지, 한계사지, 대모산성, 미륵사지 등이며 또 천안 위례산성 등지에서도 출토되었다. 또, 고구려 유적이라고 전하는 북한의 철령 유적에서는 철마가 대형의 군진을 이룬 채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성산성 발굴이야기
이성산성 9각 건물지 전경 이성산성 9각 건물지 전경
발굴단원이 전하는 산성 생활

한양대학교 박물관 유적발굴단의 산성 생활은 고고학의 현장 교육장이자 추억이 서린 곳이다. 이 현장을 통해서 많은 문화재조사 전문가가 배출되었고 지금도 계속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산성생활의 제일 어려운 점은 잠자리와 식수 그리고 전기의 확보다. 물은 산 위에서 쫄쫄쫄 내려오는 작은 개울에 깊게 웅덩이를 파고 플라스틱

통을 심은 다음 구멍을 내어 호스를 연결하여 사용하였다. 비가 많이 올 때면 가끔 지렁이라든지 작은 민물새우, 심지어 가재새끼 등이 이 호스를 통해 나오기도 하였다. 전기는 산성 아래에 있었던 민가로부터 전기를 얻어서 길게 전선을 연결하여 사용하였다. 그런데, 전력이 약해서 냉장고는 쓰지 못했다. 냉장고가 없으니 여름철 발굴에는 여러모로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 대형 아이스박스를 준비해 두고 큰 얼음을 사서 부식을 쟁여 두었다. 그 얼음을 이고 메고 들고 이성산성의 산길을 오르다 보면 온몸이 같이 어는 것 같았다.
그 다음의 문제는 음식 쓰레기였다. 쓰레기를 묻기 위해 유적지를 파고 구멍을 낼 수도 없는 일. 그렇다고 그냥 버리면 파리와 냄새 때문에 고통을 당해야 한다. 발굴단의 단장이셨던 김병모 교수님께서 아이디어를 냈다. 오리를 기르기로. 그 놈들은 뭐든지 잘 먹어 치웠다. 음식물 찌꺼기는 물론 비누며 자질구레한 것 까지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어 치웠다. 그런데, 발굴이 완료된 다음이 문제였다. 그놈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철수하기 전 날 그간 열심히 현장을 지키며 발굴단의 친구가 되어 준 오리 11마리가 모두 참수를 당했다. 그런데, 요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거의 먹지는 못했다.

발굴단의 휴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비오는 날이다. 비오는 날이면 그간 밀린 각종 기록작업이며 개인 정비를 하고 단체로 목욕탕엘 갔다. 하남에서 제일 번화한 신장에 가면 대중 목욕탕이 있다. 그때의 따뜻한 목욕물의 느낌은 잊을 수가 없다.
발굴 현장엔 여러 가지 안전사고의 위험이 많다. 그 중에서도 2차 발굴조사 당시 경운기 전복사건은 천만다행으로 인명사고는 없었지만 이후 발굴현장에서 안전에 대한 주의를 높여준 계기가 되었다. 급한 경사를 오르내리며 토사를 계곡 아래로 버리던 도중 경운기 앞쪽이 경사를 못이기고 번쩍 둘려 버렸다. 다행이 경운기를 운전하던 조사원은 핸들과 짐받이 사이의 좁은 공간에 몸이 끼어 살아남았다. 지금 그 조사원을 보면 절대로 그 사이에 끼어 들것 같지 않은 몸매여서 더욱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이 든다.
발굴현장에서는 술을 많이 마시게 된다. 엄청나게 많이 마신다. 그런데, 어떤 신입생이 발굴단에 들어와서 처음 술을 마시게 된 적이 있었다. 그 조사원은 소주 한 잔이 치사량이었는데, 마친 현장을 방문한 발굴단장님과 같이한 회식자리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꿋꿋하게. 그리고 단장님을 배웅하고 다시 산으로 올라오다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하필 그 조사원이 기절한 장소는 산성에 오르는 길목에 있던 스산한 묘지였다. 한참이 지나도 신입 조사원이 올라오지 않자 선배들이 찾으러 갔다. 그 중 유난히 겁이 많은 선배가 있었다. 그런데, 급기야 으슥한 묘지 근처에서 부시럭 거리며 쓰러져 자고 있던 그 조사원 때문에 혼비백산 놀라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신입생이었던 조사원은 지금은 술을 잘 마시지만 겁 많던 선배는 지금도 겁이 많다.

이성산성 A지구 2차저수지 전경 이성산성 A지구 2차저수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