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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박녹주의 예술과 비운의 사랑

박녹주의 本名은 命伊, 雅號는 春眉, 藝名은 錄珠이다. 흔히 판소리하면 호남을 떠올리게 된다. 판소리가 거기서 시작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시대에는 그 사정이 달랐다. 1920년대부터 40년대에 이르기까지 영남은 그야말로 판소리의 고장이었다. 박녹주는 영남 출신의 선배 김추월(金秋月:1896∼1933), 김녹주(金綠珠:1897∼1932), 이화중선(李花中仙:1898∼1943), 김초향(金楚香:1900∼1983), 권금주(權錦珠:1903∼1971) 그리고 후배였던 이소향(李素 香:1905∼1989), 신금홍(申錦紅:1906∼1942), 신숙(愼淑:1916∼1982), 오비취(吳 翡翠:1918∼1982), 임소향(林素香), 박귀희(朴貴嬉:1921∼1993), 박초향(朴楚香:1 923∼1964) 등과 함께 달구벌을 판소리 고장으로 만든 주역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박녹주의 은퇴공연이 1969년 10월 15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있었다. 인산인해를 이룬 이 날 무대에서 박녹주는 “여러분들을 이 자리서 보고 언제 다시 뵐지 이제 기약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저의 무대생활은 마지막입니다. 소리가 잘못되더라도 허물없이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간략한 인사말과 함께 단가 <백발가>와 흥보가 중 <박타령>을 불렀다. 박녹주는 울먹이며 간신히 <백발가>를 마쳤다. 객석도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 은퇴 공연은 부산, 대구, 대전으로 이어졌다.


박녹주는 1905년 경북 선산군 고아면 관심리 437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박중근, 모친은 권순이이며 박녹주 밑으로 남동생 태술, 만호, 만술이 있었다. 박록주의 어릴 적 이름은 모친의 이자를 딴 命伊였다. 박녹주의 부친은 한량으로 집안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노름과 술로 세월을 보냈고, 그리하여 박녹주는 10살 때부터 모친을 도와 농사짓고 소를 몰며 물레도 돌리며 억세게 자라났다.

박녹주는 그녀의 아버지가 박수무당으로 소리선생도 겸했던 터라 어린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판소리를 접하면서 자랐는데 1916년 그녀가 12세 때, 그녀가 살던 선산에 협률사 공연이 있었다. 협률사는 소리, 춤, 줄타기, 등의 갖가지 재주를 보여주는 순회 공연단체인데, 박녹주의 부친이 이 공연의 판소리를 보고 크게 감동하여 평소 목소리가 우렁찬 박녹주를 명창으로 길러내 그녀가 벌어들인 돈을 자신의 노름과 술값으로 쓰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연유로 부친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박기홍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 때 그녀의 부친은 딸에게 명창이 되라며 命伊라는 이름 대신 錄珠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박녹주는 하루 24시간 가운데 먹고 자는 시간 외에 약 20시간 동안 꼬박 소리를 질러가며 박기홍에게 소리를 배웠다. 그러나 소리할 때의 자세가 매우 엄했고 사설은 거의 한문 투로 되어 있어서 외우기가 무척 어려웠다. 음식은 참기름만 먹었고 고된 연습으로 목에선 피가 터져 나오기 일쑤였다. 지옥훈련 같았던 박기홍의 가르침으로 판소리의 기틀을 확고하게 갖춘 그녀는 그때부터 경상도 곳곳에 초청되어 다니며 소리를 하기 시작했으나 사례비가 생기는 족족 그의 부친이 술값으로 써버렸다. 그러던 그녀의 나이 14세가 되던 해 그녀는 김창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김창환은 좀처럼 소리를 가르쳐 주지 않고 자신의 소리를 듣고 그저 따라하도록 지시할 뿐이었다. 박녹주는 김창환이 무대에서 부르는 <제비노정기>를 유심히 듣고 모르는 것을 물어보며 한 구절씩 익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덕택에 김창환의 <제비노정기>가 지금까지 전승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박녹주의 세 번째 스승인 강창호는 명창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지만 실력이 대단했고, <심청가>에 장기가 있었다. 그녀는 수궁가 중 <고고천변>을 두 달 동안 배웠다. 강창호에게 소리를 배운 뒤 그녀는 다시 부친의 손에 끌려 대구로 가서 억지로 기생 수업을 받게 된다. 그녀의 부친은 박녹주를 당시 달성권번의 행수기생이던 鸚鵡에게 3년동안 양딸로 맡기는 대신 2백원을 받았고 박녹주는 행수기생의 소유가 되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겨우 14세였다. 앵무는 너그러운 품격의 소유자였고, 재주가 뛰어난 박녹주를 아꼈다. 박녹주는 앵무를 통해 기생수업을 받으면서 춤, 시조, 소리 등을 연습했으며 예의바른 행동거지를 배워나갔다. 그러던 중 그녀 나이 15세 때 李某라는 한량이 박녹주의 딱한 처지를 듣고 2백원의 빚을 대신 갚아 주는 일이 생기게 되어 자유의 몸이 된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박녹주였지만 그녀는 또다시 아버지의 손에 끌려 대구로 갔다. 역시 기생수업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 때 그녀는 김점룡, 임준옥, 조진영에게 남도민요 <육자백이>와 <화초 사거리>를 배우게 된다. 당시 그녀는 김초향 다음 가는 소녀 명창으로 이름이 알려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하룻밤 초청되어 가면 10원을 받았다고 한다. 쌀 한 가마니가 50전 할 때의 일이니 그 명성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무렵 충청도의 갑부 변씨가 그녀에게 화초머리를 얹어주고 세간을 사주었다.

1922년, 박녹주는 서울로 가서 송만갑에게 단가 <진국명산>과 춘향가 중 <사랑가>부터 <십장가>까지를 배우게 된다. 그리하여 1923년 그녀는 우미관에서 열린 명창대회에 참가하게 되면서부터 눈부신 활동을 시작한다. 그렇게 전성기를 보내던 1928년 봄 그녀는 조선 극장에서 열린 8도 명창대회에 참가하였다. 이 공연이 끝난 후 두 사람이 그녀를 찾아가는 데 한 명은 전 부통령 김성수의 부친 김경중 영감이었고 다른 한 명은 김유정이었다.

김유정의 박녹주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은 그녀가 평생 사랑의 고달픈 행로를 걸어야 했던 전주곡의 시작과도 같았다. 원래 김유정의 집안은 천석지기의 지주였고, 고향은 강원도 산골이었지만 서울에도 백여 칸 되는 집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그러나,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뒤로 집안을 관리하던 큰형의 방탕한 생활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어린나이에 부모 모두를 잃고 외롭게 성장기를 보냈던 그는 늘 어머니 사진을 품고 다니며 연상의 여성에 대한 원초적인 그리움을 품게 되었는데 그것이 비극의 시초였다.

박녹주에게 첫눈에 반한 유정은 그날 이후 심한 가슴앓이를 하게 되었다. 유정을 매일 밤마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연모의 마음을 글로 옮겨 보냈다. 편지를 받고 무척이나 당황했던 녹주는 편지를 다시 하숙집으로 돌려보냈지만, 이번엔 레코드판에서 뜯어낸 자신의 사진 밑에 ‘당신을 연모합니다. 저의 사랑을 받아주옵소서’ 라고 적힌 편지가 전해져 왔다. 하루가 멀다 오는 편지를 보며 근심하게 된 녹주는 행랑어멈을 시켜 유정을 오게 한 뒤 학생은 오로지 공부에 전념해야지 딴 생각을 하면 아니 된다하고 자신은 기생의 신분임을 내세워 조용히 타일러 보았지만 이미 유정은 사랑에 눈이 멀어 있었다. 편지를 아무리 보내도 답장이 없자 유정은 녹주의 집을 찾아가 대성통곡을 하게 되고, 이를 보다 못한 녹주의 동생 태술이 유정을 달래어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날로 태술과 친해진 유정은 친구 태술을 만나러 간다는 핑계로 녹주의 집을 찾아갔고, 태술을 통해 편지를 직접 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녹주의 마음은 요지부동으로 자신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협박과 공갈 등으로 그녀를 괴롭히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다음은 박녹주가 「한국일보」에 38회 연재(1974. 1. 5~ 2. 28)된 「나의 이력서」에 고백한 내용이다. 우리는 그 자료를 통해 유정이 박녹주에게 한 말의 내용과 그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살펴 볼 수 있게 되고 유정의 슬픈 집착이 잘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 듯이 그렇게 고고한척 하는 거요. 보료 위에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하듯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김유정이 나한테 죽이겠다고 협박편지를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김유정이 나를 부른 칭호도 금새 달라져 갔다. 처음에 “선생”이라고 하더니 “당신”이라고 변했고 나중에는 “너”라고 자기 부인을 칭하듯이 불렀다. 하루는 인력거를 타고 돌아오는데 검은 그림자가 인력거를 향해 돌진해왔다. 직감적으로 김유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력거꾼에게 정거하지 말고 빨리 앞으로 달려가라고 소리쳤다. 김유정은 번쩍이는 뭔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칼이다’ 하는 생각이 들자 온몸이 오싹해졌다. 인력거꾼은 재빠르게 앞으로 달려갔으나 김유정이 더 빨랐다. 그는 인력거채를 움켜잡고 나에게 소리쳤다. “녹주, 오늘 밤은 너를 죽이지 않으마. 안심하고 내려라.” 그가 들고 있던 것은 하얀 몽둥이였다. 그는 자기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 들이대더니 불뿜는듯한 눈초리로 노려보면서 물었다. “너는 혹 내가 돈이 없는 학생이기 때문에 나를 피하는 거지?” 나로서는 너무나 의외의 질문이었다. 잘못 대답하면 내가 돈에 의해 좌우되는 천한 여자가 될 것만 같았다.....

“오늘 너의 운수가 좋았노라 그 길목에서 너를 기다리기 3시간, 만일 나를 만났으면 너는 죽었으리라.” 이 정도의 협박편지가 들어온 것은 그해 즉 1928년 겨울쯤이다. “엊저녁에는 네가 천향원으로 간 것을 보고 문앞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를 않았다. 만일 그 때 너를 만났다면 나는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단 며칠 목숨이 연장될 따름이니까.” 나는 몸이 오싹해졌다. 편지는 잉크로 쓴 게 아니라 혈서였다.

이렇듯 유정의 감정은 병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박녹주는 직업상 사람들과의 만남이 잦았고, 그로 인해 그녀는 일상은 활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정은 늘 어디론가 가서 소리를 하는 그녀를 문 밖에서 기다리며 나올 시간만 기다렸지만 끝내 나오지 않으면 온갖 상상을 일삼으며 그녀를 이런 식으로 비난하는 것이었다.

박녹주는 유정이 구애하는 동안 매년 그를 피해 피서를 가는데 1928년에 한 달, 그리고 1929년에는 두 달동안 원산에 있는 삼방 저수지에 머물며 창 공부를 한다. 그녀가 종적을 감춘 동안 매일 그녀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며 초조해하던 유정은 감정이 한층 더 격해진다. 후에는 그의 감정이 연모의 감정인지 혹은 복수의 감정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가 된다. 이 때 그의 음주량은 그의 몸 상태에 비해 과도했으며, 늑막염을 앓고 있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허약한 상태였다. 혈서를 쓰고, 협박을 하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등의 행동은 그녀가 그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오히려 역효과만을 낳을 뿐이었다. 박녹주가 자신은 소리하는 사람이므로 학생과 연애할 수 없다고 하자, 유정은 학생과 소리하는 사람이 사랑해서 안된다는 규정이 어디에 있냐고 대들며 사랑이란 국경이 없는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남의 소실이었던 박녹주는 그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었는데, 부친 문제 등으로 인생을 비관해 자살하려고 약을 먹었던 박녹주가 일주일여만에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바로 유정이었다. 그는 “당신 장례를 치루려고 기다렸다” 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것을 보면, 유정 그는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아주 서툴거나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정은 박녹주와의 사랑을 이룰 수 없음에 큰 상처를 입어 학교도 그만두고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내려간 1930년 여름부터 그가 타계하는 1937년 봄까지 약 7년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30여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쓰지만 유정의 가슴앓이는 폐결핵과 늑막염으로 이어져 결국 나이 서른에 눈을 감는다. 이때의 작품 중 「생의 반려」와 「두꺼비」는 그와 박녹주의 관계에 대한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룰 수없는 사랑에 대한 유정의 恨은 그렇게 작품 속으로 용해되고 승화되어 갔던 것이다.

김유정과 같은 시기에 알게 되었던 김경중은 박녹주의 소리일생에 지대한 영향과 주게 된다. 김경중은 8도 명창대회에서 박녹주의 모습에 반하여 그녀에게 집을 한 채 선사하는 등 아낌없이 그녀에게 베품을 주었다. 그 뒤에도 김경중은 박녹주를 귀애하며 그녀에게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당시는 일제의 수탈이 가혹해 먹고사는 것이 힘든 사정이었고, 박녹주는 한량인 아버지에 의해 착취당하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경제력은 중요한 것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기생수업을 받고 2백원에 팔려 다니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또 그런 와중에 몇 차례의 사랑에 빠지기도 했는데 15세 때는 임준옥과 사랑에 빠졌다가 부친의 반대로 헤어지게 되었고, 17세 되던 1921년에 열린 원산 명창대회에서 남백우와 만나 이내 혼인하였으나, 그녀는 첩이었고, 그 결혼생활은 그녀에게 무의미한 것이었다. 수많은 역경을 통해 그녀는 이미 인생의 많은 부분을 경험했었고, 누구보다 뛰어난 현실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으므로 낭만적이고 현실감각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김유정과의 사랑을 받아드리기에는 그녀의 굴곡많은 삶이 허락하지 않았을 터이다. 김경중은 1929년에 송만갑의 수제자인 김정문에게 박녹주가 소리를 배우도록 주선해 주어 21일동안 김정문에게 흥보가 중 초입부터 <제비 후리러 나가는 데>까지를 배우게 된다. 이 때 배운 소리 가운데 <박타령>과 <비단 나오는 데>는 흥보가 중에서 박녹주가 가장 즐겨 불렀던 대목이다. 박녹주는 김정문에게 소리를 배우고 집으로 돌아온 1929년 3월, 부친에 대한 원망과 복잡한 가정사를 비관하여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자살을 기도을 기도하게 되는데 앞에서 서술한 것과 같다.

자살 소동 이후 몸을 회복하게 된 박녹주는 1930년, 다시 김경중의 권유에 따라 김정문에게 <심청가>를 배우기 위해 남원으로 가서 열흘 동안 심청가 전 바탕을 익히게 된다. 김정문은 송만갑이 “제자가 무섭다.”고 할 정도로 극찬한 명창이었다. 김경중의 후원이 없었다면 김정문의 <심청가>의 전승이 끊어질 뻔했는데, 다행이 박녹주를 통해 전승되어 온 것이다. 남백우의 첩으로 사는 데 회의를 느낀 박녹주는 이별을 결심하고 申某의 사랑 고백을 받아들여 함께 살다가 1931년에 김종익과 재혼하게 된다. 김종익은 박녹주와 송만갑을 위해 조선성악연구회의 사무실로 서울시 종로구 익선동 159번지에 있던 9천 5백원짜리 건물을 사주었다. 일제시대가 되면서 양반 등 상류계층이 몰락하게 되자 전통음악인들은 돈 많은 한량과 서민을 상대로 공연하여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그런 장소에 음악인들을 공급하는 구실을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박녹주는 생활을 했고, 송만갑에게 틈틈이 소리를 배웠다. 박녹주는 김여란, 이기권과 함께 정정렬에게 <춘향가>와 <숙영낭자전>을 배웠는데, <숙영낭자전>은 전승이 끊어진 판소리로서 정정렬이 창작해서 불렀고 그것을 박녹주가 배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유성준에게서 <수궁가>를 익혔다. 1935년,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창극을 춘향전을 공연했는데, 이 때 박녹주가 춘향 역할을 하였다. 공연이 끝난 후 춘향을 직접 보려는 관중으로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940년 박녹주의 부친이 타계했다. 박녹주는 한평생 부친을 원망하며 살았으나, 막상 그가 타계하자 며칠 동안 슬피 울었다고 한다. 박녹주에게 있어 예술과 사랑의 길 모두가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을까? 훗날 그녀는 아편흡입과 아편소지 매매 등의 죄명으로 공판에 회부되고 철창에서 탄식하는 절망의 날들을 맞기도 했으니 말이다.

박녹주는 여류명창이면서도 매우 남성적인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는 데 독특한 매력이 있다. 그가 투박하고 꿋꿋한 소리제를 구사했던 것은 그가 남자 명창들에게 소리를 배웠던 데 가장 큰 이유가 있겠고, 또 그가 타고난 성음 자체가 강한 인상을 주며 그의 고난에 찬 인생살이가 그를 강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박녹주의 제자인 이옥천은 박녹주의 소리를 가리켜서 “통이 크고 박력이 있으며, 부드럽기 보다는 꿋꿋하며, 맺고 끊음이 무섭다.”고 평했다. 박녹주는 대체로 전바탕 공연보다는 토막소리 위주로 공연을 하였기 때문에 아니리는 극히 짧으며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멋이 있다. 판소리 명창들의 출신지가 대부분 전라도 지역이라서 전라도 방언으로 아니리를 구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선산에서 태어난 박녹주는 경상도 방언으로 아니리를 구사하기 때문에 매우 특이하다. 남성을 능가할 정도의 통성을 위주로 해서 소리를 끌고 나가며 소리 맺음에 있어서 군더더기가 없고 분명하다. 이런 박녹주소리의 특징이 「?조선 창극사」?에는 모지락스럽게 맺고 끊는다고 적혀 있다. 성음은 엄성이 많이 쓰이고 정대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각 대목마다 상황에 맞게 성음, 장단, 선율에 변화를 주어 이면을 살려내는 기량이 출중하다. 또 서편제의 더늠을 부르더라도 동편제의 특성을 가미해서 소리가 매우 진중하다. 이러한 박녹주의 소리는 별로 힘 안들이고 쉽게 부르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엄청난 공력을 내보인다. 또한 박녹주는 발림이 요란하지 않았다. 발림보다는 성음과 선율에 변화를 주어 목소리만으로 각 대목의 상황을 적절히 묘사해냈던 것이다.

1940년대 후반에 박녹주는 국악계가 남자들 편의 위주로 운영되는 것에 불만을 갖고 김소희, 박귀희 등을 이끌며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전라도 사투리가 아니면 안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판소리계에서 유독 경상도 사투리를 고집한 박 녹주가 남긴 음반은 명물로 꼽히며, 40년대에 김소희.박귀희 등과 함께 결성한 여성국악동호회는 남성 전유물처럼 인식되던 판소리계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6. 25 발발 후에는 월북을 강요당하기도 했으며 전쟁통에 한쪽 눈을 실명하여 그 뒤로 검은 안경을 쓰고 다녔다. 6. 25때 그녀는 오태석, 김세준, 박춘홍, 조농옥, 이용배등 30여명과 함께 방위대에 입대하여 군인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다니기도 하였다.

이러한 박녹주는 5명창이 타계한 후 여류 국창으로 군림하였고 인간문화재로 소리판을 지켜냈다. 박녹주의 콜럼비아에서 나온 음반이 인기를 끌자 여러 음반회사에서 앞다투어 그녀의 음반을 제작했다. 박녹주는 음반 취입, 무대 공연, 잔칫집 초청 공연 등으로 돈을 벌어 월수입이 무려 5-6백원이나 되어 자가용차를 전세내어 타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저축하는 성품이 아니어서 돈이 생기면 모두 써버리곤 하여 말년의 곤궁함을 면하기 어려웠다.

박녹주는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서 50대 전반기였던 1955년~1960년에 가장 좋은 소리가 나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국가 경제가 극도로 악화되어 대다수의 국민이 음악을 즐길 여유가 없었기에 음반 제작이 활발하지 못했다. 그녀 또한 6. 25 이후부터는 유랑극단 생활을 통해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녀는 1960년 초에 급성 폐렴을 얻어 경찰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그 때 그녀의 유랑생활은 끝이 났다. 그녀는 젊을 때 벌어놓은 돈을 저축해 놓지 않아, 6. 25 이후에는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어렵게 삶을 꾸려나가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1965년 박녹주는 김여란, 김연수, 김소희, 정광수, 박초월과 함께 <춘향가>로 중요 무형 문화재 제 5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다가 중요무형문화재 지정대상이 판소리 다섯마당으로 확대되면서 그녀는 <흥보가>의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69년 10월 15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박녹주의 은퇴공연을 하고도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1970년대에 집에서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운영했다. 김소희, 한애순, 박귀희, 성우향, 조상현, 박초선, 성창순, 이옥천, 한농선, 박송희, 정성숙, 조순애, 정의진 등이 그녀에게서 소리를 배웠다.

1978년 박녹주는 고향인 선산에서 공연을 했다. 이 무대에서 그녀는 <백발가>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소리를 하면 할수록 폐가 붓는 지경으로 몸상태가 악화되어 있었다. 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녀가 74세의 병든 몸을 이끌고 고별무대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생각하면 징그럽도록 사연도 많고 한도 많았던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단가 <백발가>를 목놓아 부르자 객석은 순식간에 눈물바다로 변해버렸다. 그러던 1979년 5월26일 오후 1시, 시대의 명창 박녹주는 셋방을 전전하다가 면목동의 단칸방에서 혈육한 점 없이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그에게는 오직 양아들로 맞아들인 조상현이 있을 뿐이었다.

구미시 선산읍 노상리 마을회관 앞 놀이터. 화강석 장구와 북을 깔고 앉은 ‘인간문화재 제5호 박녹주(朴綠珠:1905∼79)여사 기념비’가 외롭게 서 있다. 1981년 세워진 이 비석의 주인공 박녹주는 젊어서는 대구 달성권번, 서울 한남권번의 名妓로 이름을 날렸고, 늙어서는 동편제의 거목으로 판소리<춘향가>, <흥보가> 분야 인간문화재로 예우를 받았지만, 삶 자체는 판소리 서편제처럼 너무나도 서글펐다. 조상현, 박송희, 신영희 등 그의 뜻을 기리려는 후학 들은 매년 그녀가 타계한 5월26일, 비석 앞에서 판소리 한마당으로 기제사를 올린다. 지금은 구미문화연구회 등이 주축이 되어 추모사업회가 구성되었고,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한 전국국악대회도 2001년부터 매년 10월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