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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유록

제목 : 백두산유록
저술자 : 박종
기록일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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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유록(白頭山遊錄)』은 조선 후기 함경도 경성의 유학자 박종(朴琮:1735~1793)이 지은 백두산 유람기이다. 1764년(영조 40) 5월 14일부터 6월 2일까지 당시의 경서부사 겸 북병사 신상권(申尙權) 일행과 함께 백두산을 다녀오면서, 도중에서 견문한 내용과 자신의 감상을 일기의 형대로 기록한 것이다.
박종의 본관은 함양, 자는 계옥(季玉)이며 호는 당주(鐺州)이다. 그의 아버지는 박원양(朴遠揚), 어머니는 남양 홍 씨로 홍제구(洪濟九)의 딸이다. 그는 경성 어랑면 지방(鏡城漁郞面芝坊)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장성한 후에는 담와(澹窩) 홍계희(洪啓禧)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함경북도의 변경 지대에 살았던 박종이 어떠한 인연으로 홍계희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홍계희는 명문 남양 홍 씨로서 박종의 외가와 동성이었으므로 먼 친척뻘이 되어 그의 문하에 들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홍계희가 함경도에 어사로 갔을 때 박종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1777년(정조 1) 홍계희가 아들 홍술해(洪述海) 등의 역모에 연루되어 관작을 삭탈 당하자, 박종도 이 때문에 영해에 유배되어 16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그 곳에서 죽었다.
그러나 그는 이 기간에 더욱 학문에 진력하여 많은 저술을 하였다. 그는 문집 21권 7책을 남겼는데, 1931년 6대손 치룡(致龍)에 의해 신활자(연활자)로 간행되었다. 『중용강록(中庸講綠).』과 『주역강의(周易講義).』가 특히 정밀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대학자였던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은 그의 글을 ‘송시열 이후 처음 보는 문장’이라고 극찬하였다. 본『유록.』은『당주집.』 제15권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번역한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200여 년 전인 조선시대에는 백두산을 다녀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산길이 워낙 험난하기도 하지만 길이 멀고 인적이 드물어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내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간혹 이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들 중에 뜻있는 사람들은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길을 닦으면서 다녀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박종은 가난한 선비였으므로 오랫동안 뜻은 가지고 있었으나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1764년 경성부사 겸 북병사로 와 있던 신상권이 백두산을 등정하는 길에 동행할 수 있었다.
박종의 『백두산유록』은 다른 백두산 기행문들과 유사한 면도 있지만 몇 가지 점에서 유의할 만한 특징이 있다. 첫째는 이것이 함경도 현지에 살던 재야학자의 등산 기록이라는 점이다. 물론 경사 부사 일행을 따라가기는 하였지만, 현지의 토착 양반이었기 때문에 일반 관료들의 기행문에 비하여 매우 자세한 편이다. 이 때문에 그의 『유록』은 당시의 이 지역 사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둘째, 그들은 장마철에 출발하였으나 운이 좋아 비교적 순탄하게 여행하였고, 백두산 등정 당일에도 날씨가 좋아 장시간 정밀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노정에서 관찰한 사실이나 현지 실정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
특히 백두산 일대의 지형이나 정상에서의 경치 묘사는 매우 탁월한 편이다.
셋째, 그는 성리학을 강마하던 유학자였기 때문에 사색이 깊고, 철학적인 설명이 심오한 느낌을 준다. 즉 자연을 관찰하면서 형이상학적 도의 체득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의 기행문과 다른 점이라 하겠다.
넷째, 그의 기행문에는 우리의 산하와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백두산을 중국 곤륜산의 적장자로 인식하고 기타 중국의 여러 산들은 모두 서자나 지자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동방의 문물을 요순 공자의 정통을 계승한 소중화의 문화로 인식하였다.

백두산유록
백두산은 동국의 곤륜산이다. 생각건대 나는 조선의 북쪽 변경 지방에 태어나서 중국의 곤륜산에 올라 나의 마음과 눈을 호쾌하게 해 보지 못하였다. 늘 바라기를 우리 동방의 곤륜산에 올라 좁은 소견이나마 펴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길이 험난하고 맹수들이 우글거리므로 가난한 선비가 언감생심 뜻을 이룰 수 없어 한스럽게 생각한 지 오래였다.

갑신년(1764) 5월 14일
백두산으로 출발하다.
갑신년(1764, 영조40) 여름에 일이 있어서 우리 고을 사또(鏡城府使兼北兵使)였던 신상권(申尙權)을 찾아뵈었다. 마침 사또도 이러한 계획(백두산 등정)이 있어 무산 부사(茂山府使)와 약조를 하고 있었다. 이에 동행하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고 물러나왔다. 한 열흘 지난 후 사또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요지는 아무 날 출발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여비나 양식도 넉넉하지 못하였고, 마침 그때 아들이 병을 앓아 근심이 많았으므로 주변 사람들도 모두 곤란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집안의 우환이 모두 없어지고 여비가 갖추어질 때까지 기다리자면 끝내 그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즉시 말을 타고 출발하였으니, 그 해 5월 14일 을축일이었다. 지닌 물건이라고는 산천도(山川圖) 1장과 책 몇 권뿐이었다. 비촌(碑忖, 5리)에 도착하여 종형(從兄)을 배알하였다.
“자네의 산행은 진실로 좋은 일이다. 다만 고요히 마음 수양을 한다면 방 안에 앉아서 저절로 천하의 경치를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하필 위험을 무릅쓰고 극단적이고 신기한 것을 찾아야만 호연지기를 기르는 방법이 되겠는가? 자네의 마음 쓰는 것을 보니, 분방하고 거친 방향으로만 빠져 마음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하는 영정(寧靜)의 공부에는 흠이 있는 듯하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훌륭하신 가르침은 과연 지당하시니 감히 승복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 마음의 즐거움을 경전 공부에서 얻고 산수에서 체험하게 된다면, 실로 심신을 함께 함양하는 방법이 됩니다. 또 이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한 것은 활동하고 정지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고, 오직 사람이 함양하는 것이 어떠한가에만 달려 있는 것입니다. 비록 밝은 창가에서 깨끗한 책상을 마주하여 고요히 서책을 보더라도 사악한 생각과 망령된 잡념이 분주히 일어나는 것을 억제하지 않으면, 진실로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들길을 치달리거나 만 가지로 일을 처리하더라도 마음속에 주체가 있어 어지럽게 되지 않으면, 편안하고 고요히 하는 공부에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마음을 고요히 하는 정신 수양에는 진실로 부족한 점이 많지만, 다만 그 고요하고 고요하지 않은 것은 백두산을 유람하고 아니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을 듯합니다.”
정오에 주촌(酒忖, 15리)에 도착하니, 이 선생(莊仲)이 반갑게 맞이하여 웃으면서 말하기를,
“과연 백두산 산행을 하는가? 나는 늙어서 따라갈 수 없으니, 진기한 경관과 별난 경험들을 그대의 웅장한 필치로 하나하나 자세히 기록해 주게. 내가 방 안에서나마 유람하는 자료로 삼겠네.” 하였다.
날이 저물 무렵 경성 성내(90리)에 들어가 사또를 배알하고 행장도구들을 준비하였다.
인정(人定 : 밤에 통행을 금하기 위해 종을 침)을 칠 때에 향교에 가서 어간(漁澗)에 사는 내종(內從) 형님의 임시 처소에 도착하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곳에서 머물러 잤다. 이 날은 날씨가 맑아 110리를 여행하였다(종형은 즉 月潭 이다).

5월 15일 병인
이른 아침을 먹고 나니, 사또는 이미 출불 준비를 마치고, 나에게 먼저 가라고 하였다. 내가 탄 말이 느리기 때문이었다. 어제 집에서 출발할 때는 말만 있고 마부가 없었으나, 이곳에 도착하여 비로소 견마 잡이를 고용할 수 있었다.

어린 제자 황화룡(黃化龍)이 나를 전송하려고 따라왔다가 북문에 이르러 작별하고 돌아가니 섭섭하였다. 수창(輸倉)에서 점심을 먹었다. 감영의 막료인 조 첨지(趙添知)가 함께 동행하였다. 고씨(高氏) 성을 가진 어떤 자가 와서 말하기를, “제가 산길을 잘 아는데, 삼지연을 지난 후에는 길이 험난하여 오르기 어렵습니다. 또한 여름철에도 지난겨울의 얼음과 눈이 녹지 않아, 가다가는 엎어지고 넘어질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돌아가셔서 가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였다. 그가 매우 힘써 말하므로 일행 중에는 벌써 안색이 어두워지는 자가 많았다.
오후에 먼저 출발하여 15리를 가니, 사또의 행차가 우리를 앞질러 갔다. 20리를 더 가니 문득 말 탄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언덕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드러누워 나무 그들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사또는 개울가 나무 그늘에서 풀을 깔고 앉아 있었는데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숲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니, 사또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를 기다렸다”고 하였다. 곧장 길을 떠나니, 오른쪽으로 형제 바위가 나왔다. 비록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볼 때 마다 가파른 것이 진기하게 생각되었다. 바위가 위에 있는 것은 작고, 아래에 있는 것은 크다. 사람들이 이 바위 형제를 나눌 때 위아래로 말하기도 하고, 크고 작은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전자는 서열로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외모로서 말하는 것이다.
해질녘에 부령에 도착하였다. 이 날은 100리를 여행하였다.
이른 아침에는 일기가 화창하였으나, 다만 산 아래에 구름 기운이 어둑어둑하여 오래지 않아 비가 올 것 같았는데 저녁 무렵에 과연 두 번씩이나 우레가 치다가 곧 그쳤다. 사또가 말하기를, “무산 백성들이 방금 세곡(稅穀) 운반하는 일로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백성을 동원하여 길을 닦는 것은 형편상 차마 할 수 없다. 길을 닦지 못하면 여행이 낭패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 경성으로 돌아가 무산 부사에게 편지를 보내야겠다. 다시 기회를 잡는 것이 만전을 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였다. 읍내에 사는 한 사령[及唱]이 일찍이 관원을 모시고 백두산을 다녀온 일이 있어 불러 물어보았더니,

“무산에서부터 백두산 아래까지는 대략370여 리가 되고, 아무 곳에는 물이 깊고 아무 곳에는 진창이어서 길을 닦지 아니하면 절대로 갈 수 없습니다.” 고 하였다. 고을 사람들과 장교와 아전 관노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대답이 같았다. 이에 사또가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여 내가 말하기를, “무산 백성들이 세곡 운반으로 곤궁한 형편에 처하여 짐을 이 고진 사람들이 도로에 즐비하니, 그 고을 수령이 손님을 위하여 백성들을 동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수령이 백성들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고 망령되이 손님을 대접하더라도, 손님된 사람이 어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또 듣건대, 종성 부사 조영순(趙榮順) 대감이 신사년(1761, 영조37) 가을에 산행을 떠났는데, 갑자기 무산에 도착하여 길을 닦은 후에야 비로소 백두산에 올랐다 합니다. 조 대감이 산수를 지나치게 좋아하였지만, 처음에는 길이 닦아지지 아니하여 그냥 돌아갔으니, 백두산은 쉽게 갈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형편이 이와 같은데 억지로 강행한다면, 이는 산수로 욕심이 동하였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호 문정공(胡文定公 : 宋의 학자, 이름은 安國)이 형산(荊山)을 보러 갔다가 사정상 그냥 돌아간 고사가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거취를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또가 드디어 고을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무산 부사에게 편지를 써서 아전에게 시켜 무산부에 통지하도록 하였다. 날이 저문 후에 객관에 돌아와 잤다.

5월 16일 정묘
아침 일찍 일어나니 많은 고을 사람들이 나를 보러 왔다. 내가 백두산 허항령 사이의 산천 형세와 길의 험난함을 이리저리 물어보았다. 몇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허항령 길은 갑산으로 직통하는 길이라 상인들이 즐비하게 다니는데, 비록 한 겨울 눈이 쌓였을 때라도 길이 막히지 않으며, 허항령 길을 벗어나 백두산 밑으로 꺾어 들어가는 것은 겨우 50리입니다.

길이 비록 험하기는 하나 물로 인한 장애는 심하지 않습니다. 조영순 대감이 입산할 때 가마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어제 행차를 정지키로 한 것은 백성을 동원하여 길을 닦기 어려운 때문이었다. 그런데 백성을 동원하지 않고도 혹시 길을 통할 수만 있다면, 어찌 중도에서 포기할 수 있겠는가? 드디어 사또께 들어가 고하였다.
“길이 어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 것은 실제보다 과장된 것이니, 아마 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어떻게 천하의 명승지를 볼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사또가 어제 그 급창 사령을 불러 반복하여 힐문하자, 사령이 말하기를, “상인들은 혹시 말을 끌고 왕래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양반들의 행차는 반드시 불가능합니다.” 하였다. 사또가 말하기를, “상인들의 말은 갈 수 있는데, 관가의 말은 갈 수 없겠는가?” 하자, 그 자의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부령 부사가 또 극력 만류하였다. 이에 사또가 말하기를, “무산까지 가 보아서 얼마나 험난한지 체험해 보고 나서 거취를 정해도 무슨 해가 되겠는가?”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사또께서 무산에 가서 거취를 정하고자 하시면, 무산 사람들이 곤란하다고 말하는 것이 부령사람들보다 천 배나 더할 것입니다. 오늘의 행차는 모름지기 당 헌종(唐憲宗)이 채(蔡) 지방을 정벌한 것처럼 독단적으로 결정하여야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남의 말만 듣고 결정하고자 한다면 3년을 지나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또가 드디어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부령 부사가 만류해도 되지 않자, 나에게 냉소를 띠며 말하였다.
“모름지기 무산이나 잘 보고 오게!”
이것은 반드시 무산에서 되돌아오게 되리란 말이었다. 타고 온 말이 심히 지쳐 있는지라 부령 부사에게 말하여 말 한 필을 빌렸다. 골짜기 입구로 들어가자, 세곡 운반하는 수레들이 10리나 이어져 흡사 제갈량이 만들었다는 목우유마(木牛琉馬)와도 같았다.

포사곡(褒斜谷)을 따라 나오며 물어보니, 모두 무산 고을 백성들이었다. 풀밭에서 자고, 모래 밥을 지어 먹으며 주야로 행진하여 비바람을 피하지도 못하였다는 것이다. 머리가 허연 늙은이가 부러진 수레바퀴의 축을 고치고 있었다. 나를 보고 울며 말하기를, “자식 하나는 병으로 죽고, 사위 하나는 병으로 누워 있는데, 관아의 위엄으로 성화같이 독촉하여 늙은이가 길을 나섰습니다. 몇 고랑의 밭을 일구었는데, 아직 한 번도 김을 매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살아 돌아간들 장차 어떻게 입에 풀칠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아마도 내가 관원의 행차를 따라가고 있으니, 혹시라도 자기를 구원해 줄까 해서였다. 내가 오랫동안 측은한 마음으로 있다가 말하기를, “나는 가난한 선비라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소.” 라고 하였다. 폐허가 된 옛 무산(茂山) 고을에서 점심을 먹었다. 변방의 한 쇠잔한 진지가 황폐한 골짜기에 남아 있었다.
진지의 지휘관[堡將]은 할일이 없어 채소밭이나 가꿀 뿐이었다. 지휘관이 말을 빌려 주어, 부령에서 빌린 말은 돌려보냈다. 5리쯤 가면서부터 소나무 · 삼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는데, 종일토록 나무 그늘 속으로 행진하였다. 차유령 고개 위에서 조금 쉬었다. 고개는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여기가 부령과 무산 두 고을의 경계가 된다. 해가 질 때 신참(新站)에 도착하여 촌가에 투숙하였다.
이 날은 100리를 여행하였다. 아침 식사 전에 안개가 끼고 가랑비가 오더니 곧장 개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는 작은 우레가 쳤다. 투숙한 집은 온돌이 뜨거워 밤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5월 17일 무진
정오 무렵에 출발하여 곧장 골짜기 입구로 들어갔다. 50리를 가 강변(두만강)에 이르렀는데, 여기가 바로 무산 읍 소재지이다. 이곳은 여진족 노토(老土) 부락의 옛 땅으로, 무산 읍터는 바로 마을우(亇乙于 : 여진족 추장 이름)의 진지가 있던 곳이었다. 이곳은 회령 · 부령 · 경성 3개 고을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여,

장백산에서부터 남으로 내려가면 명주 ·길주 · 단천 등지로 가는 도로가 산재해 있다. 이른바 노왕(老王)이라는 자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남북 여러 고을에 노략질을 하였다.
회령에서 단천에 이르기까지 각 읍에서 수십 곳의 산간 초소를 세운 것은 이 도적들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오랑캐들이 물러가고 우리가 진지를 설치한 지 이미 백여 년에 이른다. 사람과 물자가 모여 땅을 개척하여 농업이 날마다 번창하고 태평의 꽃이 피어 산수가 그림 같으니, 임금님의 큰 은택이 멀리까지 미쳤음을 볼 수 있다. 다만 이곳은 이미 우리나라의 영토가 되었으니, 남북의 여러 초소들은 내지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설치할 필요가 없는데도, 아직까지 그대로 유지하여 현지 군사들의 원망을 모으고 있으니 한탄스럽다.
최석륜(催錫倫) 형(나의 친척 형으로 무산에 와서 산다)이 내방하였다. 이 고을의 무인 차천륜(車天倫)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유식하기로 이름이 나고 또 백두산 길을 잘 알고 있으므로 불러서 물어보니, 위태롭다고 말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산 부사도 역시 같은 말을 하였다. 결국 우리 사또도 산행을 어렵게 여기게 되었다. 내가 말하기를, “부령에서 떠나올 때 사람들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무산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곤란을 말하는 것이 부령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 말보다 10배나 더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니, 사또가 말하기를, “과연 사정이 이 사람들의 말과 같다면, 사람들이 목숨이 달려 있는 문제이다. 아무리 등산이 좋지만, 어찌 목숨을 걸고 할 일이겠는가?” 하였다. 무산 부사가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그대가 아직 산에 가 보지 못하였으니, 한 번 성루에 올라가 보게. 무산을 자세히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하므로 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곳으로 올 때 부령 부사가 저를 보고 웃으며, 무산이나 잘 보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과연 그 예언이 맞았습니다.” 하였다. 나는 최 형과 함께 성루로 올라갔다. 강을 사이에 두고 오랑캐 산들이 첩첩이 있어 놀라웠다. 사람들에게서 들으니 차천륜이 아전들의 은밀한 사주와 사또의 명을 받아 말재주를 부려 이번 산행을 저지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대개 산행을 하게 되면 본 고을의 비용이 많이 들게 되는 까닭에 향리와 백성들이 싫어하고, 사또 역시 고역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모두들 산행을 저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그의 말을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였으나, 다만 사람들이 하도 위태롭다고 말하기 때문에, 사또에게 위험을 무릅쓰라고 권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유감이 많아 최 형에게 자세히 물어보니, 더욱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사또 또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사정을 살피고 있었다. 행장을 꾸리려고 하는 참에 종성 관아에서 온 친구 김조언(金肇彦 : 字는 元之)이 도착하였다. 그와 여기서 만나기로 기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오자 다시 조금 기운이 났다. 그가 거느리고 온 급창 사령 한 명이 예전에 조영순 대감을 따라 백두산에 다녀온 까닭에 자세한 형편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드디어 입산하기로 계책을 정하였다. 이 날의 날씨는 반쯤 개었다.

5월 18일 기사
아침 식사 전에 궂은비가 내려 긴 장마가 시작될 것 같았다. 점심 무렵 구름이 걷히고 해가 밝게 비치니, 그 기쁨이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행장 도구 등을 준비하느라고 하루를 유숙하였다. 하인8명을 먼저 산으로 보내어 길을 닦고 임시 움막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최 형이 여러 번 찾아왔다.

5월 19일 경오
일찍 출발하였다. 일기가 쾌청하고 햇빛이 밝게 비추었다. 다만 흰 구름 한 무리가 서북쪽 산 아래에 길게 퍼져 있었다. 강을 따라 15리를 행진하여 산양암(山羊巖)으로 올라갔다. 바위가 두만강에 임하여 천 길이나 솟아올라 있고, 구름이 삼면을 에워싸고 있어 나는 새가 아니면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뒤쪽 한 면은 산에 연하여 가파르게 일어나 있었는데, 찰싹 달라붙어 기어오를 수 있었다. 한 줄기의 긴 강이 벽을 에워싸고 돌아가는데 좌우에는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볼 만하였다. 사또가 묻기를, “이 강산을 칠보산과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나은가?” 하여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단지 강 위의 높은 누대(樓臺)일 뿐입니다. 경치와 기상이 거친 것과 아름다운 것이 크게 다른 것 같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16리쯤 가서 하나의 높은 고개[甲嶺]에 올라가 정서 쪽을 바라보니, 멀리 트인 곳에 하나의 산이 눈을 가리고 있었는데 바랜 모시같이 희었다. 사람들이 소백산이라고 불렀다. 남하창(南下倉, 5리)에서 점심을 먹었다. 박하천(博下泉)의 나무다리를 건너 강을 따라 몇 리를 내려가서 서쪽으로 꺾어드니 조그만 고개가 있었는데 경사가 심히 급하였다.
강을 따라 5리를 더 가서 큰 비탈 하나를 올라가니 홍살문이 있었다. 여기서부터 길이 강과 만났다 헤어졌다 하였다. 또 비탈길을 두 번 올라가고 골짜기[7리]하나를 건너 임강대(臨江臺, 10리)에 도달하였다. 평야가 둥그렇게 열려 있고, 강이 그 입구를 빙 둘러막고 있었다. 들판이 끝나는 곳에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마치 달이 강에 있는 것과 같았다. 인가가 촌락을 이루고 있고, 물레방아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쉬지 않아 보기에도 즐거웠다.
또 5리를 가니 이른바 서북천이 강물과 합치고 있었다. 물을 따라 몇 리를 올라가니 나루터지기가 자피(者皮 : 통나무배)로 사람들을 건네주고 있었는데, 배는 긴 통나무로 만들어 가운데를 파내고 물건을 싣도록 한 것이었다. 나루터지기는 배를 매우 민첩하게 다루고 있었다. 삽시간에 왔다 갔다 하며 일행이 모두 건널 수 있었다. 돌아서 산 위로 올라가니 길이 극도로 험난하였다. 평원은 멀리 광활한데 삼나무와 노송나무[檜木]가 삼대밭같이 빽빽하였다. 현지인들이 나무를 찍고 들에 불을 질러 화전을 개간하였으나, 나무를 다 베지 못하여 간간이 밭고랑 사이에 나무들이 서 있었다. 토양이 비옥하여 벼가 수풀처럼 자라고 있었다. 집은 지은 것이 공을 들이지 않고 겨우 나무를 얽어 벽을 만든 정도였다.

삼산(三山, 5리)의 민가에서 유숙하였다. 이 날은 75리를 여행하였다.

5월 20일 신미
아침 일찍 일어나 날씨를 보니 붉은 색을 많이 띠고 있었다. 아침에 붉은 것은 비가 올 징조이므로 걱정이 되었다. 한참 있으니 구름이 사라지고 밝은 해가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지경으로 들어가게 된다. 백두산 근처는 추워서 풀이 자라지 않으므로 말을 먹일 목초가 없다고 하여, 행장을 꾸릴 때 말 먹일 꼴을 실어야 하였다. 산에 들어가는 사람은 위아래 사람을 합쳐 37명이었고, 말은 모두 13필이었다.
길잡이 전통성(全桶成)이라는 사람을 고용하였는데, 그는 삼산(三山)에 사는 사람으로 지금 동네의 이장[約正]이었다. 자기 말로 열두 번이나 백두산을 다녀왔다고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임진년(1712, 숙종 38)에 국경을 정할 때, 약정(約正)으로서 목책(木柵)을 치는 일을 담당하였고, 길을 만든 것은 무산 사냥꾼 한치익(韓致益)과 갑산 사냥꾼 송태선(宋太善)이라 하였다. 전통성이 산길을 잘 아는 데는 이러한 내력이 있었다.
숲이 태양을 가려 말이 전진할 방향을 분간할 수 없고, 오직 전통성이 가리키는 곳만을 따라서 17리를 가니 풍파(豊坡)가 나왔다. 도중에 두 번이나 갈림길을 만났는데, 모두 오른쪽 길을 택하였다[하나는 서대로(西臺路)의 5리쯤에서 들어가는데 사람이 살고 있다. 또 하나는 오갈암(烏喝巖)으로 들어가는데 60리를 가서 대로평(大盧坪) · 소로평(小盧坪)을 지나면 거기에는 모두 촌락이 있다. 오암을 개간한 지 이제 5, 6년 되었다. 동은 철항이고 북은 장백이며 서는 또암이다. 또 오십리평(五十里坪)이 있다. 여기를 지나면 또 정평(正坪)이라는 곳이 있는데 토양이 비옥하여, 사람들이 살기에는 오암이나 대로평보다 낫다.

지난 해 여기 사창(社倉)을 세웠다.
풍파라고 하는 곳은 광활한 산록에 있는 평원이다. 간간이 만나는 진창 위에는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이것은 조영순 대감이 산에 오를 때 설치한 것이다. 이미 2년이 지나 어떤 것은 허물어지고 어떤 것은 온전하였다. 여기서부터 벌 같은 산등에가 사람을 공격하여 피를 빨았다. 손으로 휘저어도 달아나지 않았다. 말들이 등에에 물려 피를 비처럼 흘리고 있었다.
19리를 가니 협곡이 하나 있었고, 깊이가 천 길이나 되었다. 걸어서 내려가는데 개울의 형세가 어지간히 크고 흐르는 물이 맑았다. 이것이 소홍단수(小紅丹水)이다. 우물가 그늘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남쪽 벽에 평사(評事) 이명환(李明煥)이 새긴 글이 있었다.(“絶三池迫脂下山白途退吾舍”라고 새김).
전통성이 말하기를, “이전에 입산한 사람들은 여기에 도착하면 반드시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니, 시행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조 첨지가 스스로 헌관(獻官)이 되어 축문을 가지고 고하고, 전통성이 일행의 하인을 데리고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 기도하는 말이 매우 많으니 정말 우스웠다.
서쪽 골짜기로 올라가 석류게덕(石留憩德)에 이르렀다. 대개 이곳에서는 산비탈이 약간 평평한 곳을 ‘덕(德)’이라고 불렀다. 사면을 바라보니 삼나무들이 곧게 하늘로 뻗어 있었다. 마치 같은 날 심어서 자란 것과 같았다. 석류게덕을 지나니 장파(長波)가 나오고 수목이 조금 트이게 되었다. 평평한 수풀이 광활하게 전개되고 한 쌍의 학(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하고 있었으나, 붉은 머리는 분명치 않았다)이 날개를 펄럭이며 춤추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치지 않아 매우 정취가 있었다. 내가 묻기를, “이 곳의 학이 약주(掠舟)의 학과 비교하여 어떠한가?” 하니, 선비 김원지(金元之)가 말하기를, “오늘밤 혹 꿈속에 나타날지도 모르겠군.” 하였다. 멀리 동쪽 정면으로 바라보니 그 산이 매우 높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우리가 올라온 지점이 이미 상당히 높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장파수(長坡水)를 건너 녹운동산(綠雲東山)에 이르렀다.

서남쪽에는 증산(甑山)이 있었다(장파동까지 32리이다). 인분들이 나무를 찍어 움막을 지어 놓았는데, 나무껍질로 지붕을 덮어 겨우 방 1칸을 만든 것으로 매우 협소하였다. 돌이켜 보면 나와 사또가 같은 막사에 누워 쉬니, 극히 분수에 어긋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산 속에서 지내면서 밤에는 베개를 같이 베고 낮에는 함께 밥을 먹으니, 예절대로만 행할 수 없는 일도 있다. 이 날은 68리를 갔다.

5월 21일 임신 맑음
새벽에 눈을 뜨니 두세 개의 별이 장막 사이로 보였다. 날이 밝자 한 줄기의 푸른 연기가 소나무 숲 위로 피어오르고 있어 상쾌하였다. 녹운동령(8리)을 넘어 천평(天坪)에 다다랐다. 시야가 망망하여 끝이 없으니, 함흥평야와 비교해 보아 두 배가 더 될 것 같았다. 서쪽에 산 하나가 있는데, 하늘을 이고 땅에 퍼져서 거칠게 옆으로 뻗은 것이 구름과도 같고 눈과도 같아서, 바라보자 바로 백두산인 줄 알 수 있었다. 일행이 마치 불교에서 극락세계를 얻은 것이나, 유교에서 환희의 경지를 얻은 것과 같이 뛸 듯이 기뻐하였다.
서남쪽으로 바라보니 또 보타산(寶陀山)이 높이 솟아 있는데, 눈이 정상 가까이 옆으로 둘러 있었다. 전날 감령에서 어떤 사람이 이를 소백산이라 하였으나 틀린 말이었다. 듣자하니 그 위에 세 곳의 큰 못이 있는데 사람이 올라가면 문득 바람이 불고 우레가 쳐서 쫓겨 내려온다는 것이다. 대홍단수(大紅丹水)를 건너(6리) 소류동(小柳洞) · 대류동(大柳洞)을 지나 오른쪽으로 작봉을 끼고 나아가니 자작나무가 희디희게 죽순처럼 솟아 있다. 좌우로 보나 위아래로 보나 모두 같은 색이어서 흡사 도시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치고 소매를 마주치며 서로 왕래하는 것 같았다.
반교(半僑, 5리)에 도달하여 점심을 먹고 백두산을 바라보니, 해를 끼고 휘황하게 비치는 것이 백층의 옥탑을 만들어 구름 위로 띄운 것 같았다. 여기서 삼나무와 회나무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하여 바라보니 그림 속의 풍경 같았다.

김원지가 말하기를, “이 곳은 비록 평평하지만 이미 백두산에 가까이 왔으므로 다른 산의 정상보다는 높을 것입니다” 하자, 사또가 말하기를, “이것은 마치 임금의 침실이 비록 낮아도 대궐의 축대보다는 높고, 대궐 축대가 비록 낮더라도 뜰의 담장보다는 높은 것과 같다. 그러니 이곳은 백두산의 축대가 되고 장백산 이하는 뜰의 담장이니 외곽이 된다.” 하였다.
반교로부터 5리를 가니 세 개의 봉우리가 있었다. 하나의 산맥에서 나란히 솟은 것이 구슬을 꿴 것 같았다. 이것이 삼태봉(三台峯)이다. 수목이 드문드문하고 풀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였다. 들판이 하늘과 접하여 사방을 돌아보아도 아득하였다. 키가 매우 작은 나무가 있었는데 꽃이 수없이 피어 있었다. 속밍이 두을죽(豆乙粥)이다. 여기서 남쪽으로 25리를 가면 보타산 밑으로 직행하게 된다.
서쪽으로 꺾어 귀롱소(鬼隴所, 10리)를 지나자 비로소 삼지(三池)가 나타났다. 처음 만난 것은 둘레가 4, 5리가 되었고, 두 번째 만난 것은 물이 말라 불과 수백 보밖에 되지 않았다. 세 번째 만난 것은 둘레가 거의 10리나 되었는데 노목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거울의 표면을 펼친 것과 같이 자연 경관과 구름의 그림자가 배회하며 비치고 있었다. 사방의 바위와 모래는 푸르고 깨끗하여 씻은 것과 같았다. 평평한 구름이 서쪽에서부터 못 가운데로 들어와 앉아 마치 작은 섬과도 같았다. 사또가 나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천하에 신선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면 반드시 여기서 살 것이다.” 하였다.
길 북쪽으로 꺾어 들어가 두 번째 못과 세 번째 못 사이가 물가에 임시 움막이 지어져 있었다. 대개 온 길을 따라 서남쪽으로 직행하면 갑산으로 가는 길이 된다. 이른바 허항령(墟項嶺)은 5리쯤에 있다.
장파에서부터 산등에가 더욱 심하여 부채로 쉴 새 없이 저어 어깨 힘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원지는 심지어 휘항을 덮어쓰고 방비하기까지 하였다. 여기에 오자 등에가 비로소 뜸하여졌다. 이 지대의 기온이 차기 때문이었다. 배꽃이 이제 막 피어나고 철쭉꽃은 아직 지지 않았다. 풀은 마른 잎이 많았는데, 전통성이 말하기를, “때때로 서리가 내립니다.” 고 하였다.

올 때에 유게원(留憩院 : 임시로 지은 숙소)에서 쉬니 총성이 들렸는데, 경성 · 부령 · 무산 세 고을의 포수들이라고 하였다. 삼지연에 이르니 또 총성이 들리고 유게소가 있었다. 이들은 갑산 포수들이었다. 전통성이 말하기를, “매년 여름철에 노루와 사슴들이 백두산에 올라와 호수의 물을 마십니다. 호수의 사면이 모두 절벽이고 다만 한 곳에 조그만 골짜기가 트여 노루와 사슴들이 이곳으로 출입합니다. 오랑캐 포수들이 때때로 그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차례대로 잡아간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 날은 89리를 여행하였다.

5월 22일 계유 맑음
아침 일찍 일어나니 맑은 안개가 호수에서부터 피어올라 거대한 무리를 만들어 못 전체를 덮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해가 솟아오르자, 안개는 사라지고 거울 같은 수면이 나타났다. 나무의 그림자가 거꾸로 비치고, 또 한줄기 푸른 안개가 물을 질러오니 바람이 문득 말아가 버려 그윽하고 기이하였다.
북쪽으로 25리를 가 천수동(泉水洞)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수목은 고색창연하고 이끼 꽃이 늙은 나무에 걸려 있어 흡사 두꺼운 모피가 걸려 있는 것 같았다. 북쪽으로 10리를 가니 포석동이 있었다. 골짜기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니 골짜기는 모두 물길인데, 물은 땅 밑으로 흐르고 있을 뿐이고 포석이 땅에 가득하였다. 천 평에서부터는 토맥(土脈)이 모두 이러한 암석들이고 들어갈수록 더욱 많아졌다. 나는 말과 마부를 먼저 가게하고 도보로 천천히 걸어갔다. 조 첨지 역시 말을 버리고 도보로 따라왔다.
개울로 들어가자 두 번씩이나 갈림길 골짜기를 만났는데, 모두 오른쪽을 따라 갔다. 개울이 거의 다하자 다시 갈림길 골짜기가 시작되었는데 오른쪽을 버리고 왼쪽으로 나아가자 백두산 전체가 갑자기 눈앞에 들어왔다. 수목들은 왜소하고 한기가 오싹하게 느껴졌다. 언덕아래에 눈이 쌓인 등성이가 있었다.
연지봉(30리)에 도착하여 임시 움막에서 유숙하였다. 다음 날 새벽에 등정할 계획이었다.

언덕 위에 나무를 꽂아 장막을 친 곳이 있었는데, 전통성이 말하기를, “이것은 오랑캐 포수들이 거처하는 곳입니다.” 하였다. 이 날은 55리를 갔다.
올 때 노기(路記 : 길안내)몇 건을 가지고 왔으나, 거리나 한결 같지 않아 모두 표준이 될 수 없었다. 다만 원지가 가지고 온 노기만 딱 들어맞아 착오가 없었다. 일찍이 임술년(1742, 영조18)에 담와(澹窩) 홍계희(洪啓禧) 선생이 왕명으로 갑산에서 무산으로 들어와 백두산을 두루 보고 무산 사람 백찬귀(白贊龜)를 시켜 거리를 측량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그 때 만든 것이라고 한다.

5월 23일 갑술
전통성이 말하기를,
“예전부터 관원의 행차가 여기에 오면, 반드시 직접 산신에게 제사하였습니다. 종성 부사 조 대감도 역시 친히 축문을 지어 고해서(그 말을 과연 믿을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백두산을 잘 유람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천둥과 변괴가 일어납니다.”
하니 사또가 말하기를, “산이 과연 영험이 있다면, 반드시 착한 사람을 홀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과연 악하다면 산신이 어찌 한 그릇의 제삿밥에 감격하여 망령되이 진면목을 보여주겠는가? 공자님은 (제자들이 제사하는 것을 말리면서) ‘내가 (마음속으로) 기도한 것이 오래 되었다’ 하셨다. 사람들의 마음이 더럽고 깨끗한 것을 신은 이미 아실 것이다. 어찌 외람되게 산신을 속일 수 있겠는가?”
하고 거절하였다.
전통성이 전례에 따를 것을 굳이 청하니, 마침내 소홍단수에서처럼 제사하도록 하였다. 두꺼운 외투와 덧옷을 입고 행장을 단단히 꾸리고 해가 솟아오르자 산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겨우 5리쯤 가니 눈은 더욱 많아지고, 산은 모두 벌거숭이가 되었다. 바람이 포석을 날려서 방죽과 같이 쌓여 있었다.

눈이 조금 녹은 곳에 붉은색, 흰색 꽃이 땅에 붙어 꽃술을 열고 있었다. 줄기와 뿌리 및 꽃잎은 서로 붙어 있어 한 치 길이도 분별되지 않았다. 꺾어 보니 붉은 것은 곧 두견화였다. 사계절 눈에 쌓여 있다가 겨우 잠시 양기를 얻어 생명의 이치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한 번 활짝 피는 것이다.
10리를 올라가니 하나의 물길이 북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담을 쌓고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물이 갈라지는 분수령에 오라 총관 목극등이 세운 정계비가 있었다. 이곳은 토문강(土門江)의 발원지이다. 국경을 정할 때 마땅히 두만강으로 하여야하는 것인데, 경계를 찾을 때에 중신(접반사 박권)과 도백(함경도 관찰사 이선부)이 험난한 곳에 오르는 것을 싫어하여 삼수에 머물러 있고, 단지 군관 몇 사람을 목극동과 함께 올라가게 하여, 토문강으로 잘못 국경을 정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두만강 안쪽 700리의 땅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현지인들이 서로 전해 오면서 지금까지 비난하여 마지않는다. 대개 두만강의 발원지는 건너 골짜기에 있고, 이른바 토문강이란 것은 다만 하나의 작은 개울일 뿐으로 사람들이 바지를 걷고 건너다닐 수 있다. 그것이 200여 리를 흘러 내려와 홍단수의 서북 줄기인 박하수와 합친 연후에 비로소 강이 되는 것이다. 목극등이 정계비를 세우고 난 후에, “소국이 인물이 없어 좋은 땅을 많이 잃었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산언덕은 모두가 거품돌이 퇴적하여 된 것이고, 중간쯤에 말라 죽은 고목들이 있는데, 어떤 것은 한 아름쯤 되고 어떤 것은 몇 아름쯤 되어 보였다. 모두 윗부분이 부러지고 높이가 겨우 1, 2자나 3, 4자쯤 되었다. 지금은 이 산이 여름인데도 눈이 쌓여 한 치의 풀도 자라지 않는데, 나무가 언제 자라서 이와 같이 아름드리 거목이 되었는지 알 수 없고 거품돌에 뿌리를 박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가만히 생각건대, 땅 기운이 열리거나 막히는 것은 천지의 운세가 막히고 열리는 것과 같으니, 비록 음산하고 궁벽한 골짜기라도 한 번 기운이 열리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곳을 돌아보니 지금은 비록 음산하게 막혀 있지만, 억만 년 이전에는 혹시 양기가 열려 있었는지 어찌 알겠는가? 그러므로 이 나무는 그때 자랐다가, 바다와 뽕밭이 뒤바뀌고 이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정오가 지나 정상에 올랐다(20리). 높은 절벽이 둥글게 옹립하여 있고, 바위 봉우리들이 늘어서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큰 난봉(鸞鳳 : 전설 속의 새)이 솟아오르는 듯하였다. 한가운데 큰 못이 있는데, 천 길 아래로 빠져 마치 옹기 속에 물이 담긴 듯하였다. 굽어 내려다보니, 아득하여 검푸른 것이 깊이를 측량할 수 없고, 땅 구멍 속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얼음이 수면에 덮여 있었는데, 녹은 곳은 겨우 4분의 1쯤 되었다. 색은 벽옥 유리와 같았고, 대리석 무늬가 영롱하고 사방의 경치가 비치며, 얼음이 얇아서 거울과 같았다. 때로는 그 색이 청흑색이 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대개 흘러가는 구름 조각이 그림자를 비쳐서 그렇게 된 것이다. 남쪽 벽에는 바위굴이 있었는데, 산 아래로 직통하기 때문에 바람이 그 곳으로 출입하면서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내어 붕붕거리고 있으니, 심히 기묘한 장관이었다. 푸른 새 한 떼가 굴에서부터 비상하여 날아올랐다. 큰 놈들은 꾀꼬리나 비둘기보다 조금 작았고, 작은 놈들은 제비나 참새보다 조금 컸는데, 날고 내리고 하였다. 걸려있는 얼음은 집채만 한데 조금도 녹을 것 같지 않았다. 아마도 이것은 필시 천지가 개벽될 때 응결된 것 같았다. 물을 떠 마시고 싶었으나 절벽이 깎아지른 듯하다 내려갈 수 없었다. 대개 돌 봉우리들이 사면에 늘어서 있는데, 그 수가 큰 것만 해도 16, 17이고, 조금 작은 것은 30여개나 되며, 가장 작은 것은 60여개나 되었다. 뾰죽뾰죽한 것이 형태가 가지각색이었다.
여기에 오르니 비로소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하고 기를 한결같이 하여 마음과 눈이 모두 새로워지는 듯하였다. 몸이 황홀하고 아득한 경지에 있어, 풀무 사이에서 혼돈 개벽하는 기미와 조화가 펼쳐지는 듯한 오묘함을 느끼게 되었다. 예전에 들으니 압록강은 호수에서부터 서쪽으로 트여 주전자 귀와 같은 형세를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보니 사방의 절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다만 북쪽 한 변에만 조그만 골짜기가 트여 있는데, 이것이 흑룡강의 발원지라고 한다. 또 언덕은 높고 물은 막혀 흐리지 않으니, 대개 압록강은 분계령의 서쪽에서 별도로 한 줄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바라보니 몇 줄기의 흰 골짜기가 산 아래에서부터 서쪽으로 나가는 것이 있으나, 가장자리가 아득하여 어느 것이 압록강의 근원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백두산에서 나오는 물은 모두 땅 밑으로 숨어서 흐르고, 백 리나 4, 50리를 지나서야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호수의 표면에는 한 점의 물결 흔적도 보이지 않았으나, 가운데는 여울 폭포 같은 것이 있어 소리가 심히 웅장하였다. 아마도 물이 산 밑으로 숨어 흐르는 까닭에 이런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김원지가 묻기를, “과연 그렇다면 소리가 끊어지기도 하고 이어지기도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요?” 하자,
사또가 말하기를, “바람이 강하면 소리가 높고, 바람이 약하면 소리도 작아진다. 다만 듣는 사람에 따라 끊어지기도 하고 이어지기도 할 뿐이다.” 하였다. 산에 오를 때는 구름이 음산하게 덮여 있었고, 산허리를 반쯤 올라왔을 때는 비가 점점이 적셨다. 정상에 도착하자 안개가 깔리고 구름이 덮여 장차 일을 알 수 없을 것 같더니, 이윽고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찬란하게 나타났다.
최고 정상으로 걸어 올라가니(호수에서 남쪽변), 서북쪽은 푸른색 일색으로 하늘에 닿아 있었다. 다만 망망한 곳을 가리키며 생각하기를, 저쪽은 오라와 영고 지방이고 저쪽은 요양 · 심양 · 연경 · 계주 지방일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나, 방위를 짐작하여 추측한 것일 뿐이었다. 조금 북쪽으로 한 쌍의 봉우리가 있는데, 마치 소 뿔이 마주보고 있는 형상과 같았다. 사람들이 후죽봉(帿竹俸)이라고 하였다.
동남쪽의 구름바다와 같은 지역은 다만 구름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마치 북망산에 첩첩이 쌓인 무덤과 같고, 바둑판에 돌을 늘어놓은 것과 같았다. 다만 보타산(寶陀山) · 가이산(加伊山) · 완항산(緩項山) · 장백산(長白山) 등 서너 산은 마치 소가 누운 것처럼 하고 있었다.

이곳의 산하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몇 천만 리 인지 모르겠으나, 한스러운 것은 두 눈의 시력으로 다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 공자님은 농산(農山)에 올라 오(吳)나라의 서울에 있는 백마를 분별하셨다고 한다. 오나라와 노나라의 거리가 천 리보다 적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말을 색깔을 분별하셨다는 것이다. 만약 산천의 형체와 같이 큰 것이라면 만 리 밖에 있더라도 반드시 분간하셨을 것이다. 공자님께서 만약 여기에 오르셨다면, 서쪽으로 가는 기주(冀州)와 항주(恒州)에까지 미치고 동쪽으로는 해가 뜨는 부상(扶爽)까지도 다 보셨을 것이다. 대지 성인은 마음으로 도를 보시는 것이 눈으로 산천의 먼 것을 보는 것에 비교할 정도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범상한 사람이 도를 보지 못하는 것은 눈으로 산천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들이 어찌 사물에만 항상 눈이 멀 뿐이겠는가? 또한 마음의 도에도 눈이 멀었다 하겠다. 아 어찌 탄식하지 않겠는가!
명나라의 지리지를 보니, 백두산의 높이가 300리 이고 깔고 앉은 땅이 천리이며 못 주변이 80리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산을 보니 수백 리 밖에서부터 점차로 높아져서 깎아지른 듯이 급하지는 않으나, 마침내는 북두칠성과 같이 높이 올라와 겹겹이 쌓이고 굴곡져서 능히 한반도 전 지역을 깔고 앉아 있다. 비유하자면 성인의 가르침은 깎아지른 것처럼 준절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모두 올라 갈 수 있지만, 실제로는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것과 같다. 명나라 지리지에서 말한바 높이가 300리라는 것은 진실로 지나치지 않으나, 깔고 앉은 땅은 천 리에 그치는 정도가 아니다. 그러나 못의 주위는 80리가 되지 않을 듯하였다.
산은 모두 거품돌로 바탕을 이루고 있어, 온 산이 하나의 큰 거품돌 덩어리와 같았다.
처음 천지가 창조될 때 혼돈한 음양의 원기가 팽배하여 밀치고 뜬 거품 액체를 파도치게 하여 점차 바탕을 이루게 하여 된 것이 아니겠는가? 대저 곤륜산은 산의 할아버지인데, 그 정상에서 황하의 근원이 시작되고 모래 밑으로 천 리를 흘러서 비로소 그 흐름이 땅 위로 나타나고,

또 옥산(玉山)에서부터 시작하여 작산(雀山)에까지 다다른다. 지금 백두산은 거품돌이 퇴적하여 정상에 큰 못이 있고, 물이 모래 밑으로 백 리를 흘러가서야 강줄기가 비로소 나타나니 곤륜산을 빼닮았다 하겠다. 다만 강을 황하에 비교하면 백 리와 천 리의 차이가 있고, 거품돌을 옥과 비교하면 대소와 귀친이 매우 다르다고 하겠다. 곤륜산 아래로는 비록 중국의 산천이라도 규모가 백두산에 미치지 못한다. 오악(五嶽)이 높다고는 하지만, 정상에 80리의 큰 못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다만 화산(華山)에는 옥정(玉井)이 있다고 하니, 구경하기는 좋겠지만 규모는 이보다 못할 것이 명백하다. 이로써 백두산이 곤륜산의 적장자가 되고, 오악은 단지 그 가까운 조상의 서자나 지자가 될 뿐임을 알 수 있다.
대개 우리 동방은 문물이 심히 융성하여 소중화라고 칭해지고 있다. 이제 천하가 오랑캐 땅이 되었는데 우리가 능히 중화의 전통 문물을 강하게 보존하고 있다. 산하의 영험함이 이 산에 근거를 두고 있음이 크다고 하겠다. 가만히 생각건대, 천지는 두 가지 이치가 아니다. 땅이 이미 중국의 정통을 계승하였으니, 하늘이 기자(箕子)와 같은 성인을 우리나라에 내려주신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전통성이 말하기를, “평사 이명환이 2월에 산 아래에 도착하였으나, 눈이 심하여 보지 못하였고, 이 도사(李都事)는 6월에 등정하였으나, 바람이 급하여 갓을 짊어지고 겨우 한 번 보았을 뿐입니다.
종성 부사 조 대감 역시 눈이 많이 내려 도보로 겨우 산상에 이르러 천지를 반쪽만 내려다보았을 뿐이고 최정상에 오르지 못하면 중간 산의 벽에 가려서 천지의 전면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 앉아 있노라니 티끌과 같은 속세를 초월하여 바람을 타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또는 이미 자리를 옮겨 가운데 봉우리(조대감이 올랐던 곳)에 이르러 나란히 앉아 요기를 하고 바로 하산하였다. 나는 지체하고 뒤돌아보며 홀로 정상에 서 있었다. 그러나 어른이 먼저 내려갔으므로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연지봉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는데, 정상에서는 뇌성이 은은히 울리고 있었다.

일행이 포석동을 지나며 돌아보니 빗줄기가 정상을 덮고 있었다. 갈 때는 이 골짜기에서 먼지가루가 눈에 들어가 고생을 하였으나 지금은 다행히 가랑비에 젖어서 그러한 고생을 면하였다. 사또가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향음주례를 할 때 술을 실컷 마시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흥취를 지나치지 않게 하려는 뜻이다. 잠깐만 머물다가 바로 하산한 것도 또한 이러한 뜻이었다. 만약 그대의 말을 들어오래 머물렀다면 반드시 뇌우를 만났을 것이니, 어찌 통쾌한 마음이 곤욕이 되지 않았겠는가?”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삼가가르침을 받들어 처신하는 표준으로 삼겠습니다.” 하였다. 삼지연에 도착하여 움막에서 잤다.

5월 24일 을해
새벽에 비가 왔다. 비를 무릅쓰고 출발하니 문득 구름 한 가운데가 갈라지면서 한 줄기는 비를 몰고 남쪽으로 날아가고 한 줄기는 북쪽으로 날아갔다. 가는 곳에는 다만 간간이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비가 온 후에는 일기가 청량하여 산등에 들이 흩어지고 없었다. 산으로 올라갈 때는 이놈들 때문에 고통이 하도 심하여 심지어는 밤을 타고 가볼까 하는 생각이 날 정도였지만, 지금은 다행히 면할 수 있게 되니 운이 좋았다. 반교에서 점심을 먹고 녹운동령에 올라 서쪽으로 백두산을 바라보니, 구름 봉우리와 산봉우리가 함께 솟아올라 기이한 형상이 비치고 빛나는 자태를 더하였다. 원지가 ‘구름백두’라고 불렀다. 장파에서 묵었다.
백두산 아래 끝없이 광활한 곳을 천 평이라고 한다. 천 평 끝에는 남증산(南甑山), 녹운산(綠雲山)이 머리를 나란히 하고 솟아 있다. 두 산은 오르내리며 내려오다가 소홍당수와 토문강이 만나는 합류 지점에서 맥이 끝난다. 그 사이에 있는 들판을 장파(長坡)라 하고, 구릉 지대를 석류게원(石留憩院)이라고 한다. 이곳은 산의 형세와 토양이 사람 살기에 가장 적당하다.

여기에 비하면 천 평은 땅이 척박하고 서리가 일찍 내린다. 대개 삼산(三山)에서부터 풍파(豊坡)를 지나 서쪽으로 장파에 이르고 남으로는 오갈암(烏渴巖)과 소로평(小櫨坪) · 대로평(大蘆坪) · 정평(正坪)에 이르기까지 수 백리의 땅이 모두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이 살 만 하다. 오암과 노평은 근래 사람들이 점차 유입되어 인근에 사창(社倉)이 설치되었다. 이곳은 갑산에서부터 그다지 멀지 않고, 삼수 · 갑산으로부터 압록강을 따라 서쪽으로 70리를 내려가면 후주(厚州)의 폐사군이 강계(江界)에 접하고 있다. 들판이 넓고 토양이 비옥하여 더욱 살기 좋은 곳이다. 지금 삼산에 도착하여 들으니, 어떤 사람이 우물을 파다가 한 꿰미의 동전을 습득하였는데, ‘운흥통보(澐興通寶)’라고 씌어있었다고 한다. 운흥이란 것은 금(金)나라의 연호이다. 때문에 장파에서 서쪽 지방은 일찍이 오랑캐 땅이었음이 명백하다.
내가 백두산에 올라 도내의 산천을 보니, 대체로 배와 등의 형세를 하고 있다. 안변으로부터 경흥에 이르기까지는 장백산 앞에 위치하여 바다를 따라 고을을 이루고 있으니 배에 해당하는 것이다. 무산에서부터 폐사군에 이르기까지 장백산의 뒤에 위치하여 강을 따라 지형을 이룬 것이 등에 해당한다. 지금 삼수와 갑산은 등의 척추 위치에 있는데, 외롭게 매달리고 격리되어서 (방어를 위해) 힘이 되지 못한다. 북으로 풍파에서부터 서로 폐사군에 이르기까지 천이리의 땅은 텅 빈 채로 폐기되어 있으니, 참으로 배는 가득 부른데 등은 빈 것과 같다. 만약 오랑캐 도적들이 백두산에서부터 그 허한 틈을 타고 함흥 · 북청 · 길주 · 경성 · 부령 등지로 나누어 쳐들어오면 연해의 여러 고을들이 삼분오열되어 맥락이 끊어지고, 함경남북도의 원수(병사)들이 비록 손자 · 오자와 같은 병법을 알고 있더라도 그 손발을 써 볼 방도가 없을 것이다. 지금 만약 회령 이남과 단천 이북의 여러 요새의 현지 병사들로 내지(풍산 · 폐무산 · 어유간 · 오촌 · 주을온 · 보노지 · 삼삼파 · 보화 · 서북리동 · 쌍청 · 황척파는 예전에 오랑캐의 노토 부락이 무산에 있었던 까닭에 설치하였으나, 지금 무산이 이미 우리 땅이 되었으므로 이들 요새가 내지에 있게 된 것이다)에 있는 자들과

함경북도의 유민들을 장파와 정평 사이에 이주시킨다면, 몇 년을 지나지 않아 반드시 논밭을 개척하고 곡식을 쌓아 부자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장파와 오암 두 곳에 고을을 설치하여 북쪽으로는 무산을 후원하고 서쪽으로는 갑산과 연대할 수 있다. 또 서쪽에 있는 여러 요새로 내지(자작 · 어면 · 강구 · 신방 · 묘파 등의 요새는 옛적에 장진강으로써 국경을 삼았기 때문에 설치하였으나, 지금은 압록강으로써 국경을 삼고 있으므로 여러 요새들이 모두 내지가 되었다)에 있는 것과 평안도 유민들을 후주와 폐사군으로 이주시켜 고을을 설치하고 관원을 파견하여 삼수와 갑산에 접하게 한다면, 무산에서부터 후주에 이르기까지 1천여 리의 땅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닭이 울고 개가 짖으며 밥하는 연기가 서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요충이 되는 땅에 다시 군영을 설치하여 배후의 여러 고을 군사를 통솔하게 하여, 남병영·북병영과 통하게 하면 등과 배가 상응하게 될 것이고, 기세 좋게 서로 원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들이 노략질을 할 수 없게 되고 우리는 능히 방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토지를 개척하고 백성을 장착시켜 좋을 뿐만 아니라, 국가를 방어하는 계책으로도 이점이 있다는 것이 명백한 것이다. 그러나 일개 선비의 생각이라 덧없이 감개만 일으킬 뿐이니 무슨 소용이 있으랴!

5월 25일 병자
학 한 쌍이 훨훨 날아가며 울었다. 산에 올라갈 때 만난 것은 앞에서 춤추며 환영하더니, 지금은 까악까악 하며 축하하니, 소동파가 꿈속에서 황홀하게 본 것과는 비교도 안 된다고 하겠다. 유게원을 지나자 경성의 사냥꾼들을 만났다. 그들을 따라가 소홍단수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그들은 짐승 고기를 구워 오고, 조종성은 막대기로 물고기를 잡아 국을 끓여 오니, 산수의 진미가 입 안에서 상쾌한 맛을 느끼게 하였다. 풍파를 지나 삼산의 높은 봉우리에 올랐다. 백두산을 바라보고 싶었으나, 산에 가려 보이지 않으니 한탄스러웠다. 저녁에 강구촌(江口忖)에 도착하여 노숙하였다.

무려 5일 만에 비로소 사람 사는 집에 오니, 일행이 모두 자기 집에 온 것처럼 기뻐하였다. 머리가 허연 산골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제가 이곳에서 평생을 늙었습니다. 깊은 산에는 사시사철 천둥과 우박이 변화무상하여, 이전에 산행하던 관원들이 한 사람도 비를 만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왕래하시는 길에 일기가 쾌청하니, 이것은 반드시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아는 일이요, 범속한 일이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이번 행차에는 네 가지 장애를 물리쳤고, 세 가지 위험을 넘겼으며, 두 가지 난관을 극복하였다。 첫 출발할 때의 만류, 수참(輸站)에서의 만류, 부령에서의 만류, 무산에서의 만류가 네 가지 장애였는데 모두 물리쳤다. 산에 들어가 우박과 천둥 번개를 만난 것이 위태로웠고, 계곡 물이 불어 진퇴를 할 수 없었던 것이 위기였고, 여러 날 노숙할 때 뱀·등에·호랑이·곰 등을 만날 뻔한 것이 세 가지 위험이었으나 모두 면할 수 있었다. 비록 산 아래에 이르렀더라도 만약 구름이 덮었으면 백두산의 진면목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평생에 이 산을 두 번 다녀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백 년 안에 단지 한 번 관광할 수 있을 뿐인데, 산이 구름과 안개에 싸이지 않는 것이라든지 혹은 백 년 만에 등정하는 그 날 마침 산의 일기가 쾌청한 것도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또 돌아보면 등산을 시작할 때는 구름과 비가 심하였으나, 정상에 올라가자 곧 구름이 개었고, 하산할 때도 비가 오고 어두웠으나 포석동의 먼지를 씻어 내었고, 천 평과 반교에서 등에를 쫓아 버렸으니, 이는 우연히 아닌 것 같다. 원래부터 구름이 끼고 비가 오지 않는 일은 혹시 있으나, 구름이 끼었다 비가 왔다 하면서 이와 같이 교묘하게 피하는 일이 어찌 있겠는가? 이것이 두 가지 난관이었으나, 모두 이룰 수 있었으니 인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요, 하늘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주인 원경회(元慶會)라는 사람이 쌀밥을 짓고 물고기를 올리며,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도 과거 공부를 하는데 나의 이름을 익히 들었다는 것이다.


5월 26일 정축
일찍 비가 오다가 개었다. 10시쯤에 출발하여 하창(下倉)에서 점심을 먹고, 날이 저물어서 무산에 도착하였다. 무산 부사는 부령으로 출타하고 없었다. 무인 차천균이 와서 알현하는데 매우 부끄러운 안색을 하고 있었다. 최 형은 우리를 맞이하면서 웃었다. 대개 지난번에 우리를 만류하고 권장하던 차이 때문이었다. 유생인 유학수(劉學수)와 손재현(孫齎顯)이 모두 와서 나를 배알하고 쌀과 반찬을 도와주었다

5월 27일 무인
원지가 작별하고 종성으로 향하니,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내년 봄 꽃피는 계절에 다시 만나기로 기약하였다. 읍내의 여러 선비와 벗들이 모두 와서 작별하였다. 신참(新站)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폐무산에서 잤다
5월 28일 기묘
정오에 부령에 도착하였다. 말과 마부가 모두 지쳐 있어서 여기서 유숙하기로 하였다. 무산과 부령의 두 수령들을 알현하고 말하였다.
“갈 때 사또께서 저를 보고 ‘무산이나 잘 보고 오라’고 하셨지만, 이제 백두산을 잘 보고 왔습니다. 두 사또께서 약속을 하고도 같이 가시지 않으니, 이것은 소동파의 두 손님이 따르지 않았던 것과 같으니 또한 어찌 나를 위한 미담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더니 두 사람이 모두 껄껄 웃었다. 선비 이제신(李齊新)이 찾아와 산의 경치가 좋았다는 말을 듣고는, 불쑥 호기를 부리며 자기도 역시 다녀오겠다고 말하였다.



5월 29일 경진 흐림
일찍 출발하였다. 수참을 5리 남겨두고 큰 비가 왔다. 문득 백두산에 들어가 비를 만나지 않았던 행운을 생각하고, 감히 고생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수참에서 점심을 먹은 후 비를 무릅쓰고 바로 향교로 갔다. 어간의 내종형이 또 와서 만났다.

6월 1일 신사 아침에는 맑고 저녁에는 흐림
일찍 일어나 역락헌(亦樂軒 : 경성 관아의 동헌)에 들어가 사또께 하직 인사를 올렸다. 사또가 완강하게 만류하였으나, 산에서 내려온 후 여행 피로가 가시지 않고, 아들의 병과 집안 사정으로 마음이 무거워 부득불 신속히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하였다. 사또가 성대한 음식을 준비하고, 또 조 첨지를 불러오게 하였다. 산에서 굶주린 고생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좌석이 파하자 병영을 찾아가 인사하였다. 느지막이 출발하여 온촌(溫村)의 당숙부 댁에서 잤다.

6월 2일 임오 맑음
방평(方枰)의 외가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비촌의 종형을 찾아뵈었다. 유람중의 경치와 사연들을 다 이야기하고, 해질녘에 집으로 돌아왔다. 가고 온 거리가 모두 1,322리요, 소요된 날짜는 18일이었다.
*[선생은 그때 어랑면 지방에 살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