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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 거주지역 정동

손탁호텔이 서울의 명소가 되었던 당시 정동에는 50여 명의 서양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는 1892년에 발간된 미국인 선교사 길모어(George W. Gilmore)의 "서울풍물지"에 서양인들의 생활이 잘 소개되어 있다. 길모어에 따르면 정동은 ‘외국인 조계’로 인식되었고 50여 명의 서양인들 사이에는 “감정의 일체감과 이익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1882년 12월에 조선에 도착해서 이곳 정동에 거주한 이후 10년 만에 서양인이 50여 명으로 늘어나서 정동은 ‘서양인 마을’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정동이 서양인의 거주지역으로 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미국공사관이 이곳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서양과의 최초의 외교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다음해인 1883년 4월 10일에 초대 미국 특명전권공사(Envoy Extraordinary and Minister Plenipotentiary) 푸트(Lucius H. Foote) 장군이 서울에 부임했다. 푸트 공사의 직책은 일본과 중국에 주재하는 공사와 같은 지위였다. 당시 미국이 영국과 독일에 정식 외교사절이 아닌 영사만을 파견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미국의 외교정책에 있어서 조선의 비중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서울에 부임한 푸트 공사는 처음에 묄렌도르프의 집에 기거하다가 명성황후의 친족인 민계호(閔啓鎬)의 사저(정동 10번지 현 미국대사관저의 위치)를 구입하여 미국공사관 및 공사관저로 사용했다. 이후 정동이 서양인들의 주거지역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푸트 공사는 통역관 윤치호(尹致昊)에게 정동에 공사관 부지를 물색할 것을 지시했고, 그 결과 1883년 5월 20일에 경치 좋은 민계호의 소유지를 구입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청국인 이외의 외국인은 땅을 소유할 수 없었다. 외국인에게 토지 소유를 허가한 것이 1884년 10월이었음을 비춰볼 때 푸트 공사의 부지 매입은 불법 취득이었다. 푸트 공사는 그 주변의 땅과 가옥들을 사들여 공사관 부지를 넓혀나갔다. 이후 미국 선교사들이 미국공사관 주변의 정동지역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정동이 본격적인 서양인의 주거지역으로 변모했다.

미국공사관이 정동에 자리잡은 이후 1884년에 영국공사 파크스 경(Sir Harry Parkes)이 조선에 부임했다. 주중 영국공사인 파크스는 초대 조선주재 영국공사직을 겸임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총영사 애스톤(W. G. Aston)과 부영사 찰스(W. R. Charles)가 서울에 도착하여 정동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영국공사관이 개관된 것은 1884년 4월 16일이지만 이미 그 전 해인 1883년부터 부지에 대한 교섭은 진행되고 있었다. 궁내부대신 이용익(李容翊)이 소유하고 있었던 정동 4번지가 교섭대상 부지였다. 교섭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영국정부는 한성부(漢城府, 서울시의 옛 이름)에 중재를 요청하여 어렵게 이 땅을 매입할 수 있었다. 이로써 영국공사관과 영국성공회가 정동에 자리잡게 되었고 영국인들도 정동에 거주하게 되었다. 프랑스 신부들도 명동성당이 건립되기 이전에 이곳 정동에 숙소를 잡았다. 묄렌도르프 후임으로 부임한 미국인 총세무사 데니(Owen N. Deny)도 정동에 거주하는 등 정동은 자연스럽게 서양인들의 주거지역이 되었다.

서양인 마을로 변모한 정동 안에서 서양인들은 그곳이 마치 중국 내 서양인의 행정관할지역인 ‘조계(租界)’인 것처럼 안심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다. 더욱이 정동은 축소된 유럽 세계에 와 있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로 잘 가꾸어진 정원과 포장된 길로 아늑하게 꾸며지게 되었다. 1883년에 조선을 방문하여 ‘고요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Morning Calm)’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로웰(Percival Lowell)이 목격했던 “외관만 도로일 뿐 시골길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원시적”인 도로는 이곳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서양 공관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서양인들의 집은 조선의 전통가옥을 개조해서 넓은 정원을 갖춘 아름다운 주거지로 변형되었다. 심지어 러시아공사관에서 정동의 덕수궁으로 옮겨온 고종마저도 그 집들을 보고서는 욕심낼 만큼 정동은 조선과 서양이 만나서 이루어낸 파라다이스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열강들 사이에서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