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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의 활터

민간의 활터구조

1. 정자 : 활터에 세운 정자. 일명 사정이라고 함.
2. 사대 : 활을 쏠 때에 서는 자리. 일명 ‘설자리’ 라고도 한다.
3. 화살받이 : 화살을 놓아 두는 받이

고전막 : 화살의 적중여부를 알리는 고전이 머무는 장소.
옛날에는 ‘개자리’라 하여 과녁 앞에 웅덩이를 파고 사람이 들어 앉아 적중여부를 확인하였음.

화살을 주으러 다니는 길. 사대에서 활을 쏜 후 과녁 주변인 무겁에 떨어진 화살을 주워 오던 길
3곳에 설치되는 것이 관례임, 붉은 천으로 만들어 경계 를 알리는 의미도 있었음

살날이 : 연전통을 통해 화살을 이동하는 도구를 살날이라고 함

과녁 : 널판으로 만든 과녁, 과녁은 가운데 검정색으로 관이 표시되어 있고, 관 가운데는 홍심이라 하여 빨갛게 칠한 둥근 부분이 그려져 있음.

풍향기 : 바람의 방향을 알려 주는 깃발, 원래 과녁 좌측과 우측 그리고 뒤편 등

주살대 : 초보자가 활쏘는 자세를 익히기 위해 화살에 끈을 메어 세운 기둥.

연전통 : 무겁에 떨어진 화살을 넣어 사대까지 기계로 실어 나르기 위해 설치한 통

활걸이 : 활을 걸어 두는 대

전국 민간활터

사정에는 官設射亭과 民間射亭이 있다. 고려 선종 8년(1091) 戶部南廊에 사장이 설치되어 군졸과 일반 백성들이 習射할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이 국가가 도성 내 활터를 설립한 시초이다.

조선 태조는 서울을 한양으로 옮기고 도성 동편에 敎場인 훈련원을 설립하였다. 태종은 이곳에 射廳을 세우고 무과의 시험장소로 정하였으며, 동시에 무인과 군졸이 습사할 수 있게 하여 최초의 관설사장이 되었다. 궁중의 관설사장으로는 창경궁 후원의 春塘臺를 들 수 있는데, 이곳에서 閱武와 試射를 행하거나 또는 왕이 직접 親射하였다.

효종 때는 昌慶宮內司僕에 사정을 특설하여 內乘과 別軍職 등의 관리가 습사하도록 하였고, 1868년(고종 5) 경복궁 내에 景武臺를 설치하여 文武科試와 열무를 행하였다.

지방의 사장으로는 營·州·府·牧의 소재지에 將臺·鍊武臺·觀德亭 등의 관설사정이 있어 練兵講武 이외 장교와 軍民이 습사를 행하였다.

민간사정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 때 백성들의 尙武心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경복궁 東墻 안에 五雲亭을 세우고 이것을 개방하여 백성들의 습사를 장려한 것이 그 시초이고, 그 뒤 인조·효종·현종 때 무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여러 곳에 세워졌다.

그 중 도성 내외에 있는 사정에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上村(서울 성내의 북서쪽 지역)의 백白虎亭, 下村(동남쪽 지역)의 石虎亭, 서대문 밖의 盧知射亭, 그리고 江郊(한강주위 지역)의 楓碧亭 등이 있었다. 이 네 개의 사정 이외 도성 내의 南村에는 上仙臺·三門橋·細松亭·倭將臺·靑龍亭·揖拜堂이 있었고, 북촌에는 一可亭·興武亭·翠雲亭이 있었다.

그리고 上村에 있었던 백호정의 뒤를 이은 민간사정으로 風嘯亭·登龍亭·登科亭·雲龍亭·雙碧亭·大松亭·同樂亭이 있었는데 쌍벽정과 동락정을 제외한 5개 사정을 上村 五亭라 하였고, 下村 四亭로는 석호정·左龍亭·華龍亭·梨花亭이 있었다.

이 밖에 東村(동소문내)에는 栗木亭·思泮亭이 있었는데, 모두 도성 안에 있었던 사정이다. 도성 밖 민간사정으로는 동대문 밖의 暎楓亭, 新門 밖의 西虎亭, 西小門 밖의 兌虎亭, 남대문 밖의 靑鶴亭, 水口門 밖의 舞鶴亭, 彰義門 밖의 月川亭 등 많은 사정들이 있었다.

경기도

서울 황학정

종로구 사직동 산1 (02-738-5784)


서울 황학정은 경희궁 안에 있던 사정으로 조선시대부터 역대 임금이 쏘던 활터이다. 그러다가 나라가 망하고 1922년에 일제가 경성중학교와 총독부 관사를 짓는다며 이 활터를 철거하자 인왕산 자락의 필운동에 있던 登科亭 터로 옮겼다. 그곳이 현재의 황학정이 있는 종로구 사직동 산 1번지이다. 황학정은 고종황제가 친히 쏘던 활터이다. 그래서 지금도 사정 건물에 고종황제의 어진을 모셔놓았다. 황학정에서는 제1회 전조선 궁술대회가 개최되었다. (1928.07.04) 때문에 현대의 황학정은 여러 가지 면에서 국궁계의 수사정 노릇을 하고 있다. 1960년대 대한궁도협회가 활성화될 때까지 국궁계를 주도했다.

서울 석호정

중구 장충동 2가 산14-21 (02-2273-2061)


석호정은 황학정과 함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정이다. 석호정은 민간사정으로서 그 수사정의 몫을 해왔다는 점이 특징이다. 석호정은 장충단 뒷편 산기슭에 옛날부터 활터가 있었고 오래 전부터 활량들이 모여서 활쏘기를 하였다. 그러던 중, 고종 광무 원년(1897)에 그곳에서 활쏘기를 하던 사람들이 정을 새로이 창건하고 무과 폐지와 함께 유명무실해졌던 化龍亭, 舞鶴亭, 南德亭을 하나로 합쳐 석호정이라고 하였다. 한국전쟁 중에 정 건물은 물론 정에 관한 모든 서류까지 타 버려 활터는 폐허로 변하였다. 그래서 석호정에서 활을 내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 그 근처에 시인 묵객들이 오르던 白雲樓라는 정자를 고쳐서 정 건물로 쓰다가 射員이 늘어나자 다시 건물을 짓고 몇 차례 옮기다가 현재의 자리에 정착했다. 석호정이 민간사정을 대표하는 것은 해방 후에 서울에 있던 서호정, 청룡정, 숭무정, 일가정 같은 활터가 없어지면서 이 한량들이 석호정으로 모였다가 활쏘기 인구가 늘어나는 1970년대 들어 서울 곳곳에 사정이 다시 생기면서 석호정의 사원들이 각 사정으로 분가해 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호정은 서울 지역 민간 사정들의 모태가 된 활터라고 할 수 있다.

인천 무덕정

인천 남구 숭의4동 산8 (032-875-3921)


인천의 무덕정은 현존하는 몇 없는 古 사정 중 하나이다. 인천은 예부터 활쏘기 풍속이 성행했던 지역으로 그 전통을 이어 요즘에도 편사가 매년 열린다. 이곳 편사의 특징은 단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이 면면히 이어져왔다는 점이다. 때문에 문화사나 풍속사에서 조명을 해야 할 가치가 있는 부분이다. 무덕정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몇 안 되는 활터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무덕정에는 대를 이어 활을 쏘는 분들이 많다. 대개는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배우라고 해서 이어서 배우는 것이다. 옛날에는 지역의 유지들이 많이 쏘았기 때문에 대부분 그런 계통을 잇고 있다.

인천 연무정

인천 계양구 계산2동 산11(032-543-2630)


연무정은 인천시 계양구에 있는 활터이다. 인천에서는 무덕정 다음으로 오래된 활터이다. 원래 '연무'라는 말은 관청에서 군대나 한량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운 건물에 붙는 이름이다.인천의 연무정 역시 여기서 기원한 말이다. 이 지역은 조선 태종 때 부평도호부로 승격되면서 그 예하에 연무청을 설치하면서 연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해방 전에 인천 지역에 활터 정건물이 있는 곳은 무덕정 하나였다. 나머지는 동네별로 모여서 亭건물 없이 들판에서 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뚜렷한 구심점 노릇을 하기 어려웠다. 해방이 되면서 작전동에 있던 합일정과 부평 지역에 있던 연무정이 합치면서 전쟁 직후인 1953년에 정 건물을 짓고 연무정이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 연무정에서는 1995년에 "연무궁도"라는 책을 냈다.

수원 연무정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3-32 (031-255-8910)


수원 연무정도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오는 몇 안되는 사정 중에 하나이다. 연무정의 위치는 수원의 화성 안에 있다. '연무'라는 말은 무예를 연마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무라는 말은 관청이나 군대에서 직접 운영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연무대, 연무당,연무정 같은 말들은 조선 시대에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군사 시설이었다. 활터에 '연무'가 들어간 것은 군사 시설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경우이다. 수원의 연무정 역시 이러한 것과 관련이 있다. 실제로 정조 때 화성이 설립되면서 이곳에 인구가 적어서 인구를 늘릴 계획으로 이곳 지역의 백성들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무과를 실시하기도 했다. 무과에서 활쏘기가 폐지되고 조선이 망하면서 활터가 유명무실해지다가 민간사정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연무정은 등과정과 연계되는 사정이기도 하다. 고종실록에는 “파주 목사 柳晥에 대해서는 ‘성향곡을 정갈하게 받아들이니 백성들이 대부분 은혜를 칭송하였고, 연무정을 중건함에 고을의 모양이 달라졌다.

득중정

수원 화성


정조 13년에 활쏘는 정자로서 처음 지어졌고, 이듬해 정조가 이곳에서 활을 쏘아 4발을 모두 적중시켜 득중정이라는 편액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다 득중정은 정조 18년 가을에 노래당 뒤쪽으로 옮겨짓고 임금의 편액도 내어 걸었다.
정조실록에는 “수원의 동헌을 壯南軒이라 이름짓고, 내사를 福內堂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사정은 득중정이라고 이름지었는데, 모두 임금의 글씨로 현판을 썼다.”

-원천자료로는 得中亭御射圖가 남아 있다.

부천 성무정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동 산7(032-662-7755)


부천 성무정의 연혁은 정확한 년대의 기록은 없으나 구한말때부터 이곳 부천군 소사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활을 쏘았다고 전해오고 있다. 1941년 素鶴亭 이라는 亭 이름으로 30여명의 사원으로 정을 구성 발족시켰으며 장소는 현재 시립도서관(심곡본동) 자리에서 동쪽으로 貫을 놓고 활쏘기를 하였다고 한다. 6.25사변으로 한때 중단되었으나 1958년 다시 素鶴亭을 桂武亭으로 개칭 하였고 1962년 다시 龍虎亭으로 개칭되었다. 1966년 정을 소성정으로 개칭하였으나 다소 부진을 면치 못하였으며 1967년 현재의 성무정이라고 칭했다. 성무정은 전국의유일한 중요무형문화재제47호 궁장의 공방이 공존하고 있는 사정이기도 하다.

강원도

원주 학봉정

원주시 명륜동 205 (033-764-4096)


원주 학봉정은 1955년 원주 궁도장 창립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회장 정창주) 1957년 6월 원주시 봉산동에 創亭하였다. 이후 1983년 현재의 위치인 원주시 명륜동으로 이전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학봉정은 강원지역의 대표되는 사정으로 각종 궁도대회에서 그 입지를 굳건히 하고 있다.

충청남도

강경 덕유정

충남 논산시 강경읍 동흥리47 (041-745-4337)


강경 덕유정은 역사가 200년이 넘는다. 덕유정에는 활터의 역사와 풍속을 잘 보여주는 기록이 있는데, 사계 좌목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사계는 활터를 운영하기 위하여 만든 계를 말하는데, 좌목은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계의 운영 원칙을 밝힌 자료를 말한다. 그 기록에 따르면 덕유정 사계는 순조 28년(1828)에 결성되었고, 이어 1846년 1870년 1884년, 그리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져왔다. 그러나 육로가 발달하고 강의 기능이 현저히 줄어드는 해방 후에는 강경이 소읍으로 전락하고 그에 따라 덕유정도 쇠퇴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그 역사는 면면히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옛날 방식대로 활터를 운영하여 활쏘기의 역사와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곳이다. 덕유정의 임원 체제는 옛날 그대로이다. 그래서 사두라고 하지 않고 사백이라고 하며 부사두라고 하지 않고 접장이라고 한다. 총무 역시 권무라고 한다. 덕유정은 또한 선생안이 있어서 매년 백중날(7. 15)에는 제례를 지낸다. 그 때는 활을 쏘는 사람은 물론 옛날 덕유정에서 활을 쏘던 분들의 자제들까지 모두 모여서 제사를 지낸다. 이 역시 다른 정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전통이다.

아산 충무정

충남 아산시 방축동 산24-4 (041-542-3550)


아산 충무정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있는 곳으로 충무공 이순신이 활을 쏘던 자리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활터를 둘러싼 방화산의 능선은 충무공께서 말을 타시던 곳으로 馳馬場이라 불린다. 과녁판은 활터에서 남방으로 145m떨어진 곳에 있으며 충무공이 연습하던 당시에는 200m의 거리였다고 한다. 충무공은 임금님이 북쪽에 계시기 때문에 항상 남쪽을 향해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금산 흥관정

충남 금산군 금산읍 하옥리13-1 (041-754-2767)


흥관정은 금산 읍내의 남산에 있다. 금산은 옛부터 인삼이 유명한 고장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언제부터 활을 쏘았는지는 알 수 없다. 활터에 사정 건물이 처음 생긴 것은 1928년으로, 금산읍 중도리 불목골에 여섯 칸짜리 건물이었다. 이것은 논산에서 대대로 활을 쏘던 박병일이 금산으로 오면서 원래 금산에서 활을 쏘던 활량들과 힘을 합쳐서 만든 것이다. 그러다가 1952년에 활터를 옮기면서 건물도 해체해서 남산의 문화원 자리로 옮겼다. 1966년에는 바로 윗쪽의 지금 자리로 옮겼는데, 1980년대 초반에 시멘트 건물을 지으면서 한옥은 헐었다. 박경규의 증언에 따르면 그 건물의 기둥은 한 아름이나 되었다고 한다.

홍성 홍무정

충남 홍성군 홍성읍 소향리 산7번지(041-632-2333)


홍성 홍무정은 충남 홍성군 용봉산에는 최영장군이 활쏘기를 했다는 활터가 남아있다. 이지역에는 홍무정이라는 궁도장이 있다. 이곳에서 최영장군을 추모하는 궁도대회가 열리고 있으며, 최영장군 활터와 연계한 사정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대전 대덕정

서구 내동 산220-8-월평공원 내 (042-527-3876)


대전의 해방전 활쏘기 상황은 알 수 없다. 대전 대덕정은 대전 시내를 관통하는 대전천이 목척교 옆에서 1946년 경에 출범하였다. 강경 덕유정에서 집궁한 백남진이 대전으로 오면서 전주에서 집궁한 김용순과 함께 개천 가에서 솔포를 세우고 활을 쏜 것이 대전 대덕정의 출범이다. 이후에 여러 군데를 전전하다가 월평공원 내의 체육단지가 조성이 되면서 현재의 자리로 이사했다.

충청북도

청주 우암정

충북 청주시 상당구 수동 산4-56 (043-21-1500)


우암정은 충북의 首射亭으로 청주 우암산 삼일공원 위쪽으로 활 한 바탙 거리 되는숲속에 있다. 해방 전의 청주지역 활쏘기는 자료가 없어서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1950년대에 청주에서 활을 즐기던 몇몇 지인들이 모여서 청주를 가로지르는 무심천 가에 과녁을 놓고 쏘면서 활터 이름을 淸心亭이라고 하였다가 1957년 정식 사정으로 발기인 모임을 하면서 관덕정이라고 이름을 정하였다. 그 뒤 1967년에 청주의 진산인 우암산의 이름을 따서 우암정으로 고치고 1980년대 들어서 전국체전을 유치하면서 현재의 우암산 기슭에 사정을 짓고 그곳으로 옮겼다. 충북에는 해방 전에 곳곳에 활터가 있었다. 괴산의 사호정과 중심정, 증평의 상덕정, 진천의 행은정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일제 말과 해방이 되면서 사라졌다. 그러다가 청주 지방을 중심으로 다시 활쏘기가 시작되어 도내 전 지역으로 퍼졌다. 1970년대에는 보은에 학소정이, 단양에 삼봉정이 잠시 생겼다가 사라졌다.

단양 대성정

충북 단양군 단양읍 별곡리 29번지 (043-423-3633)


단양 대성정은 1990년대 들어 생긴 신생 정이다. 단양에는 1970년대 초에 삼봉정이라는 활터가 매포 지역에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 들어 충북도민체전에 국궁이 정식 종목이 채택되면서 거기에 출전시킬 선수들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활쏘기가 다시 부활하였다가 1990년대 초에 정식 출범한 것이다. 대성정이 주목을 받은 것은 그곳에서 시도된 일련의 이론화 작업 때문이다. 기록에는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국궁계에 가장 먼저 여러 가지 책을 내서 전국의 활터에 보급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평양감영의 활쏘기 비법"이다. 이것은 대성정에서 <사법비전연구회>라는 산하 단체를 조직해서 6개월에 걸쳐서 각고의 노력을 한 끝에 나온 결실이다.

전라북도

정읍 필야정

전북 정읍시 수성동 434-22 (063-535-4370)


정읍 필야정은 필야정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다. 병신년(1886)에 시기리 노휴재에서 초대사장인 박민모가 사정을 함께 지어 楚南亭이라고 했다가 기미년(1919) 11월에 수성리에서 당시 사장인 김상태의 제창으로 한옥을 새로 짓고 필야정이라고 하였다. 1960년에 다시 당시 사장 장길수의 제창으로 양옥 2층건물을 지었다. 전주 천양정과 함께 호남의 사장을 이끌어 나가는 중심 사장이다.

단양 대성정

충북 단양군 단양읍 별곡리 29번지 (043-423-3633)


단양 대성정은 1990년대 들어 생긴 신생 정이다. 단양에는 1970년대 초에 삼봉정이라는 활터가 매포 지역에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 들어 충북도민체전에 국궁이 정식 종목이 채택되면서 거기에 출전시킬 선수들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활쏘기가 다시 부활하였다가 1990년대 초에 정식 출범한 것이다. 대성정이 주목을 받은 것은 그곳에서 시도된 일련의 이론화 작업 때문이다. 기록에는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국궁계에 가장 먼저 여러 가지 책을 내서 전국의 활터에 보급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평양감영의 활쏘기 비법"이다. 이것은 대성정에서 <사법비전연구회>라는 산하 단체를 조직해서 6개월에 걸쳐서 각고의 노력을 한 끝에 나온 결실이다.

전라남도

구례 봉덕정

전남 구례군 구례읍 봉남리 산1 (061-782-2405)


구례 봉덕정은 규장각에 소장된 구례현 지도를 보면 서쪽으로 봉성산이 있고 그 아래 정방형 읍성이 있다. 읍성의 북동쪽 바깥에 사정이 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고 무과도 폐지되면서 활터가 유명무실해졌다가 갑자년(1924)에 군민들이 봉성산 동쪽 기슭에다가 봉성루를 세우면서곁들이로 활터까지 붙여 지어서 습사를 했다. 그러던 중에 사원이 늘어서 활터가 좁아지자 주민들의 뜻을 모아서 병자년(1936)에 사직단 터 옆에다가 활터를 짓고 '봉덕정'이라고 하였다. 봉덕정이란 <봉성산>과 활쏘기를 뜻하는 <관덕> 두 말을 합쳐서 지은 이름이다. 그 뒤로도 계속 활쏘기가 이어져 해방이 되고 지금까지 오랜 전통을 이어 유래가 깊은 활터를 대표하는 사정으로 인식된다.

고흥 문무정

전남 고흥군 두원면 학곡리 29-1 (061-835-4547)


고흥 문무정은 해방 전부터 전해오는 활터이다. 이 활터는 동호인 몇몇이 모여서 만든 것이 아니라 지역의 주민들 450여명이 기금을 추렴을 해서 지었고 처음에 정 이름을 '석호정'이라고 했다. 해방 전에 지은 이 건물은 여순 사건 때 타 버렸고 지금의 활터는 해방 뒤 다시 장소를 옮겨 지은 것인데 이름도 문무정으로 바꾸었다. 문무란, 고흥이 양반고을인데, 이곳 에 활터가 서는 것은 문을 하는 양반골에서 무를 겸하는 것이 되므로 그런 뜻을 살리고자 이름을 '문무정'으로 바꾼 것이다. 특이한 것 한 가지는 이곳에서는 신사를 가르치는 사람을 敎頭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장과 같은 말인데, 사범이라는 일본말을 쓰지 않고 옛날에 쓰던 우리말을 그대로 쓰는 것이 아주 특이하고 대견하다.

광주 송무정

광산구 소촌동 산 12-7 (062-941-0098)


광주의 활쏘기 역사는 당연히 해방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관덕이란 무과를 준비하기 위한 관설 사정의 성격이 강한 정에 붙는 것이기 때문에 광주의 관덕정은 그런 체제에서 기원한 것이 분명하다. 송무정은 광주 광산 지역인 현재의 송정공원이 있는 금봉산 밑 솔숲에서 1956년 문제술을 비롯한 세 사람이 청운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활을 쏜 데서 비롯한다. 그러다가 1964년에 김동근 초대 사수를 비롯한 5~6명이 고내상 논에 포관을 세우고 활을 쏘았다. 사수는 사두와 같은 말로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 당시만 해도 흔히 쓰이던 말이었다. 그 뒤 여러 가지 사정으로 흐지부지 되었다가 다시 활쏘기가 살아난 것은 1969년의 일이었다. 송정공원 금선사라는 절 앞의 솔숲에서 정사도 없이 송무정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다시 활을 쏘았다. 1972년 당시 읍장 남계량과 광산군수 양용택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의 협조로 소촌동에 정사를 짓고 제 자리를 잡으면서 정세가 살아났다. 1980년대에 이르러 다시 쇠퇴의 길을 걷다가 1989년에는 휴정하기까지 하였으나, 1997년부터 시작된 정사 건립 추진으로 활기가 돌면서 마침내 1998년에 정사 착공을 하고 2001년 봄에 현재의 정사를 완공하고 전국대회를 치루었다.

곡성 반구정

전남 곡성군 곡성읍 학정리 417 (061-363-2279)


곡성에는 옛날부터 활을 쏜 자취가 있으니, 읍의 동쪽에는 射亭洞이라는 마을이 있고, 그 남쪽에는 鄕射坪이라는 들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 활쏘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현재의 활쏘기가 알려진 것은 반구정이 설 무렵부터이다. 곡성 반구정의 역사는 해방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담한 세 칸 목조 건물의 대들보를 보면

龍 檀君紀元四千二百六十六年癸酉七月十二日己巳辰時定礎同月十五日癸酉午時竪柱同月十九日丁丑己時上樑 龜

으로 나와서, 서력기원으로 1933년에 지어진 것이다. 이 무렵에 활터를 짓는데 참여한 분으로는 반구정기에 양병조, 김재전, 양태기, 정규, 정래언 같은 분들의 이름이 보인다. 반구정기는 모두 셋인데, 문장이 유려하고 그윽하여 옛 선비들의 향취에 오래도록 취하게 만드는 명문장이다. 원래 활터는 곡성읍 죽동리에 있었지만, 그 지역으로 도로와 하천이 뚫리고 주민들에게도 위험하여 관계기관의 협조로 1988년에 학정리 417번지로 옮겼다. 이것이 현재의 자리이다.

순천 환선정

전남 순천시 조곡동 278-25-죽두공원 (061-744-3927)


순천의 환선정은 심통원이 승평 태수로 재임시 창정했다는 내용이 전하고 있다. 심통원은 자는 사용, 호는 욱재,1537년(중종 32년)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543년(중종38년) 승평 태수로 재임시 환선정 창건.

경상북도

경주 호림정

경북 경주시 황성동 416-황성공원내 (054-743-5933)


경주 호림정은 1956년 발기하여 경주지역의 사우들이 세운 사정이다. 이후 1971년 사장을 반월성 서역으로 이정하였고, 1976년에는 반월성 동역으로 이정하였다. 또한 1979년 사장부지를 매입해 1982년 황성공원으로 이정하였다. 현재 경북지역의 중심사장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울진 칠보정

경북 울진군 북면 부구리218-고수부지내(054-780-2356)


울진 칠보정은 1990년대 들어 생긴 신생정이다. 울진 원자력 발전소에서 활을 접한 이건호 접장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권하면서 장진찬 사두를 모시고 출범한 정이다. 이 신생 정이 국궁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그곳에서 행해진 일련의 국궁 디지털화 작업 때문이다. 국궁계 최초로 이건호 접장이 '사이버 궁도장'이라는 개인 국궁홈페이지를 개설했고, 그 뒤를 이어서 전국 각지에서 홈페이지가 꽃을 피웠다. 활터는 울진 원자력 발전소 옆의 하천가에 있다. 사대에 서면 과녁 뒷편으로 바다가 보인다. 행사로 제1회 멀리쏘기 대회가 열렸는데, 이는 해안 모래톱이 끝없이 펼쳐진 칠보정만의 특수한 조건 때문이다. 멀리 쏘기 대회는 1970년대까지만 시행되고 그 뒤로 사라졌으니, 실로 30년만이 부활한 것이다.

경상남도

진주 창림정

경남 진주시 일반성면 창촌리 652-2 (055-754-7728)


진주 창림정 궁도의 역사는 1937년(丁丑年)경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일반성면 선인들은 창촌리 저수지 북쪽 편에서 남향으로 과녘을 세우고 활을 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때 인근정과 교류를 시작했으며 친선경기도 가졌다. 이렇게 볼 때 일반성면의 궁도역사는 무려 70년가까이 된다. 1941년에는 창촌리 신기마을 불매고개에 과녘을 세우고 활을 쏘기도 했고, 1945년에는 창촌리 시정마을 서편에서 현 고등학교쪽에 과녘을 세우고 궁술을 연마해 사두들의 궁도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해방을 지나 6.25사변이 발발하자 일반성면 선인들은 초토화된 폐허를 딛고 일반성궁도의 명맥을 이어 나갔다. 활과 화살을 면장을 역임한 김판수 사랑방에 보관하고,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활을 쏘았고, 이로써 그 맥을 이어 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사우들은 다시 남향으로 과녘을 옮겨 습사를 했는데, 북한군의 공습으로 주변가옥들이 파손되자 주민들이 과녘을 뜯어 집 수리하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수차례 과녘을 옮겨 다니며 습사를 했던 선인들의 궁도에 대한 애정은 마침내 창림정의 탄생을 가져왔다.

무려 20여년의 세월이 지난 1969년 6월 20일 림정이 창정되었다. 창림정이 세워지게 된 경위는 이렇다. 1968년 7월 10일 정삼출 사우가 서울 황학정에 입사해 궁술을 연마하다 고향에 내려와 보니 선후배 몇분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습사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궁도장 건립에 뜻을 같이한 사우들과 정사건립을 추진했다. 드디어 1969년 6월 20일, 정삼출 사우외 14명이 창립총회를 개최, 초대사두에 정삼출사우를 추대하고 회칙작성 및 초대임원을 선출한 뒤 亭名을 창림정으로 명명했다.

1969년 10월 7일에는 일반성면 개암리 田 200여평을 매입해 과녘 1개소를 이전하고, 나머지 1개소는 하종옥 사우가 제작기증했다. 그리고 射臺는 경로당내에 설치하였다. 이로써 어엿한 정사가 만들어 지고 사우들은 매일매일 습사를 하며 심신단련은 물론 사우간의 단합을 도모해 창림정을 대내외에 알리기 시작했다.

진주 람덕정

경남 진주시 옥봉남동 산 13-1 (055-741-3095)


진주 람덕정과 충절의 고장 진주가 활과 인연을 맺은 것은 1879년(己卯年) 고종 16년의 일이다. 진주 최초의 사정이자, 12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람덕정에 대한 기록가운데 1879년부터 1940년까지의 역사는 애석하게도 6.25사변으로 인해 멸실돼 자세히 알 수 없다. 단지 1886년에 조각된 비문과 1916년 제작된 현판으로 그 역사를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1879년 이전에는 촉석루 아래에서 남강을 사이에 두고 습사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후 1879년(己卯年)에 이르러서야 대안리(현 대안동)에 살고 있던 김문회씨의 처 이씨가 田 1,000평을 희사해 남강변 동쪽 방수림 첩석환수하에 亭을 세우고 南射亭이라 이름지었다. 이것이 람덕정의 효시이다.

남사정에서 습사를 하던 사우들은 1916년(丙辰年) 비봉산 의곡사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亭名을 바꾸었는데, 覽德亭이라 했다. 이렇게 해서 시대가 온 것이다.

비봉산 자락으로 정사를 옮긴 람덕정은 이후 24년동안 자리를 지켜오다가 인근지역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또 한번 정사를 옮겨야 했다. 사정부근에 인구가 밀집하면서 사우들의 습사가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람덕정은 옥봉동 선학산 말티고개에 한옥 3칸을 신축해 사용했다. 이때 람덕정은 정사 이전신축기념으로 全國弓道大會를 개최하는 등 진주궁도의 큰 물줄기를 형성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8.15광복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진주의 궁도는 수난기를 맞이하게 된다. 6.25전쟁 때 인민군 폭격기가 진주시내를 폭격, 시내가 폐허가 되면서 진주궁도는 쇠퇴기로 접어 들게 된다. 시가지 전역이 초토화되면서 사우들의 습사가 전면 중단된 것이다. 이후 3년 여 동안 진주에서 활을 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어 졌다.

수난기와 쇠퇴기를 이겨내고 진주궁도의 맥을 다시 잇기 시작한 것은 1953년도의 일이다.

1955년 8월에는 람덕정 잔류 사우들이 남강교 동편 150m지점 부지 90평과 과녘터 200평을 마련하고 람덕정을 다시 재건했다. 이때부터 진주궁도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정사를 새로 마련한 사우들은 이때부터 각종 전국대회에 참가했으며, 그해 10월에는 전국남녀궁도대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1963년 진주시의 하천직강공사로 람덕정 옆으로 흐르는 하천부지가 택지지구로 고시되고, 1970년부터는 장대지구 택지조성사업이 시행됨에 따라 람덕정 정사가 신안동 강변으로 다시 이전을 했다. 이후 람덕정은 1972년 4월26일 장대지구 택지조성사업으로 옥봉남동 산16-1번지에 정사를 신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원 강무정

경남 창원시 대원동 182-창원전문대 앞 (055-261-3890)


창원 강무정은 왜정 때인 1908년에 생긴 정으로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당시 권태규를 중심으로 동정동에 30평짜리 목조건물로 정사를 짓고 출범했다. 1926년 5월에 창원궁술회를 조직했는데, 당시에 전국에 걸쳐서 이와 같은 조직이 생기고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해방이 되면서 창원궁도회로 개칭하고 1978년에 이르러 창원궁도협회로 고쳤다. 강무정 건물은 처음엔 창원시 동정동 298-1에 활터 건물을 지었는데 몇 차례 장소를 옮기다가 1997년에 현재의 위치인 대원동182번지로 옮겼다. 도시계획에 따라 공설운동장을 지으면서 그 위쪽으로 넓은 공터가 생겼는데, 강무정은 그곳에 터를 잡았다.

통영 열무정

경남 통영시 동호동 230-1-남망산공원 내 (055-645-3555)


통영 열무정은 1594년 선조27년 무과인 한효순을 파견하여 수군진영인 한산도에서 武科를 실시한 것이 통영궁도의 기원이며 열무정의 기원도 이와 함께 한다. 1753년 제112대 수군통제사로 부임한 具善行이 현 남만산령에 "南松亭"을 건립하여 궁도의 도장으로 이어졌으나 350여년의 찬란했던 역사는 국운과 함께 무너지고 일시 중단되었다가 이후 계속적인 개축, 중수등을 거듭하여 궁도의 명맥을 이어왔다.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궁도가 다시 활기를 찾게되어 통영시 정량동 산 중턱에 "六一亭"을 건립하였고 도천동에 海雲亭 한산도 閑山亭, 남낭산령 남송정 등을 보수하여 궁도장으로 이용해오다가 1962년 4월 26일 당시 통영시 용남면 사무소 건물을 인수철거하여 그 목재를 이용하여 사우들의 협찬과 지방유지들의 도움으로 현 열무정을 건립 준공식을 갖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천 관덕정

경남 사천시 사천읍 구암리 1277 (055-852-2356)


사천 관덕정은 우리 나라에 활터 이름으로는 흔한 이름이다. 조선시대에 무과에서 활쏘기를 관덕이라는 호칭으로 부여한 뒤에 관에서 주관하는 활터는 거의 이 이름을 썼다. 사천 관덕정은 1918년에 사천과 진주의 유지들이 찬조금을 내어 관덕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출범하였다. 이때부터 사천수양사우회가 발족하여 그 대표인 천형원 사두가 활터를 이끌었는데, 6.25전쟁 때 폐허가 되어 3년간 활을 쏘지 못하다가 사천역사 부근에서 활을 다시 쏘았다. 1965년부터 선인리 부지를 사들이고 활터를 가꾸었는데, 이때부터 정동주 사두가 많은 사재를 들여서 활터를 가꾸는데 공을 들였다. 1986년에 3칸짜리 관덕정을 4칸으로 증설하였고 1975년에 수양사우회관을 지었다. 2001년에는 활터를 아예 구암리로 옮겼다. 원래 있던 활터는 산성공원 지역이어서 과녁과 무겁 사이에 분수가 있고 사람들의 통행로가 있는 까닭에 민원이 아주 잦았다. 그래서 관청의 협조로 구암리로 옮기고 새로 단장을 하였다. 옛 관덕정 건물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관덕정은 해방 전부터 꾸준히 이어온 오랜 역사를 지닌 몇 안 되는 활터 중 하나이다. 활터를 구암리로 옮기기 직전인 8월에 청사에 길이 남을 향촌할매의 납궁례를 관덕정에서 행하였다.

거창 아림정

경남 거창군 거창읍 양평리 1239-63 (055-942-8610)


거창에는 1945년 광복직후 거창읍 제1교 瀯湖江변 고수부지에 과녁을 세우고 활을 쏘기 시작하였다. 1971년 홍수로 인하여 과녁이 流失되어 3년간 중단되었다가 1974년 유성오, 정충석, 조상호 사우 중심으로 아림정이라 정명을 칭하고 기반을 구축하였다. 1980년 ~ 1983년까지는 과녁을 고수부지에서 제2교밑 고수부지로 다시 합수위편 공터 고수부지로 옮겨가면서 習射했다. 이후 1984년 현 공설운동장 테니스장 옆으로 과녁을 옮겼고, 1985년 현 위치로 과녁을 옮겨 거창궁도의 터전을 잡았다.

함양 호연정

경남 함양군 함양읍 백연리 산18 (055-963-8188)


함양 호연정은 역사가 아주 오래 되었다. 해방 전에 함양에서 명망 있는 지역 유지들이 활을 쏘았다. 해방 뒤로도 활쏘기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오다가 호연정이 크게 활성화된 것은 1990년대이다. 그때 들어 많은 사원들이부쩍 늘어나면서 정이 활성화되어 전국대회에서 우승도 몇 차례 할 정도로 주목받는 정이되었다. 호연정은 공설운동장 옆에 붙어있다. 사대에서 과녁을 바라보면 높은 산줄기들이 멀리 서있고, 그 한 가운데 봉우리가 가장 높이 솟아있다. 지리산 천황봉이다. 그리고 무겁에서 사대쪽을 바라보면 그 뒤로 높은 봉우리가 보이는데 백운산 천황봉이다. 앞뒤로 유명한 산봉우리를 두고 활을 쏜다.

제주도

제주 관덕정

제주 관아


제주 관덕정은 옛날 제주 관아에서 직영하던 활터로 현재는 그 건물만 남아있다. 나라가 망하면서 관아 건물이 모두 무너지고 시가지로 변하였는데, 유일하게 이 관덕정 건물만 제주 시내 한 가운데에 우뚝 서있다. 구한말에 외국인 선교사가 찍은 사진 속에 그 모습이 잡혔다. 관리하지 않아서 퇴락한 모습이 을씨년스러운데 그나마 제주의 활쏘기 역사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제주시는 제주 관아 건물을 복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제주는 제주목사가 관리하던 도읍으로 이 관덕정에서 활쏘기를 즐기고 무과 같은 공식행사를 치루었다. 그 장면이 "탐라순력도"라는 제주의 풍물을 그린 화첩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탐라순력도는 제주목사로 부임한 병와 이형상이 제주 화공 김남길한테 그리게 한 화첩이다. 활쏘기와 관련된 그림이 스무 편이 넘게 나온다. 그 그림을 통해서 지금은 이미 사라진 활쏘기의 다양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 그림 속에는 유엽전의 과녁이 두 개 그려져 있고, 관 위에 한자로 一과 二를 써 놓아서, 지금의 과녁 위에 들어간 일자가 여기서 유래한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서귀포 천지정

서귀포시 강정동 1475-강창학공원내 (064-739-5444)


서귀포 천지정은 제주의 한라정 만큼이나 오래 되었다. 1969년에 서귀포에 살던 동호인들이 천지연 하류 쪽에 과녁을 놓고 활을 쏘면서 德心亭이라고 이름 한 것이 서귀포 활터의 시작이다. 그 뒤 1998년 강정동에 활터를 세우기까지 많은 곳을 전전하며 활쏘기의 명맥을 이어왔다. 1975년에는 삼매봉 남쪽으로 정을 옮겨서 天地鍊武亭이라고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 여기서 보듯이 원래는 천지연을 본 따서 천지정이라고 했는데, 천지의 한자가 池에서 地로 바뀌었지만 그 과정이 분명하지 않다. 현재의 건물은 1998년에 전국체전을 유치하면서 시장과 도지사, 국회의원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도움을 준 덕에 세운 것이다. 서귀포 시에서는 고금산 기슭에 신시가지를 조성했는데, 활터는 그 시가지 꼭대기에 있다.

한라정

제주시 화북1동 4504-2 (064-755-4404)


해방이후 완전히 끊인 제주의 활쏘기가 다시 부활한 것은 어지러운 정국이 어느 정도 수습되고 안정기에 접어드는 1960년대의 일이었다. 1964년에 김창호, 서문택, 양봉렬, 전렬 같은 분들이 제주시 삼도동에 임시과녁을 놓고 활쏘기를 하다가 그 이듬해에 정식으로 "한라정"이라는 이름으로 출범하면서 제주도궁도협회를 발족하고 양치종을 초대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나아가 제주도 지사 정우식이 집궁하면서 1968년 서라봉 남쪽에 16평짜리 활터 건물을 지었다가 1983년에는 현재의 별도봉 기슭으로 옮겼고, 몇 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정착하였다.

1. 등과정_현 황확정터 1. 등과정_현 황확정터
2. 옛날태극기_이극돈의 봉사도 2. 옛날태극기_이극돈의 봉사도
3. 한산정 3. 한산정
4. 현폭사후_탐라순력도제주시 4. 현폭사후_탐라순력도제주시
5. 황확정 무겁터_황확정백년사 5. 황확정 무겁터_황확정백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