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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유배문화광해군의 유배생활과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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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유배생활과 최후

광해군은 폐위 후 폐비 유씨, 그리고 폐 세자와 폐 세자빈과 함께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고 울타리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 후 폐 세자와 세자빈은 자살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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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폐위 후 폐비 유씨, 그리고 폐 세자와 폐 세자빈과 함께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고 울타리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 후 폐 세자와 세자빈은 자살하고 만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폐 세자와 세자빈은 울타리가 쳐진 담 밑으로 빠져나가려다 잡혔는데 그의 손에서는 은덩이와 쌀밥 그리고 황해 감사에게로 가는 편지가 발견되었다.

이는 즉시 광해군이 추종 세력들과 모의해서 반정 세력들을 다시 축출하려는 음모로 간주되었고 이에 죽음이 닥쳐옴을 느끼고 폐 세자 부부 스스로가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이렇게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1년 반쯤 뒤에 광해군은 부인 유씨와도 사별을 하게 되는데, 그녀의 죽음은 유배생활에서 얻은 화병이 원인이었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아내를 차례로 잃은 광해군 자유신도 18년의 유배생활 중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광해군으로 인해 아들을 잃고 서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가 끝까지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인조의 추종 세력 역시 항상 왕권에의 위협을 이유로 광해군을 죽이려는 시도를 그치지 않았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광해군의 재 등극을 우려해 그를 태안으로 옮겼다가 다시 강화도로 데려왔고 1636년 청이 침공해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했을 때는 그를 죽이라는 밀지까지 내렸지만 경기 수사가 이 말에 따르지 않음으로써 죽음에서 풀려났으며, 조선이 완전히 청에 복속된 이후에는 멀리 제주도로 보내졌다.

이러한 가운데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이 오히려 기이하다고 할 정도이지만 광해군의 제주도 유배생활은 더없이 초연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신을 감시하며 끌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자신은 아랫방에 거처케 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의연한 자세를 유지했고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호칭하며 멸시를 해도 전혀 이에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그 굴욕을 참고 지냈다고 한다.

광해군은 폐위된 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결국 1641년 7월 1일 제주도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부음을 듣고 제주목사 이시방이 들어갔을 때는 계집종이 혼자 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광해군-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한명기, 역사비평사, 2000.
정인홍과 광해군, 조여항, 동녘, 2001.
광해군 일기, 민족문화 추진회, 민족문화추진화, 1993.
성공한 왕-실패한 왕, 신봉승, 동방미디어, 2002.
조선왕조사, 이성무, 동방미디어, 1998.
조선의 왕, 신명호, 가람기획, 1998.

출처 : 원광대학교 사학과 (http://mahan.wonkw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