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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백제의 관계

백제는 13대 근초고왕이 369년경에 마한과 대방을 병합하고, 371년 고구려군을 대동강에서 무찌르고 평양성을 점령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의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임으로써 지금의 경기도·충청도·전라도와 강원도·황해도의 일부를 차지하는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백제의 성장은 자연히 인접 국가였던 신라에 위협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당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실제적으로 군사적인 충돌이 있었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이후 백제와 신라간의 관계는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 천도(427)를 계기로 괄목할 만한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고구려의 천도는 적극적인 남진정책과 직결되고, 이것은 고구려와 지속적인 적대관계에 있었던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군사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신라 모두에게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서 양국은 433년에 나·제동맹을 체결하였는데, 이는 군사적 공수동맹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백제와 신라의 동맹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계속되었고, 그 결과 475년에 백제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개로왕이 전사하고 수도 한성도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문주왕은 신라군의 도움을 받아 웅진으로 천도해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다.
538년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백제의 성왕은 내정개혁과 관제정비를 통해 중흥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성왕은 한강 유역의 회복을 꾀하였다. 결국 551년에 동맹군에 가야까지 끌어들여 삼국연합군을 형성하여 고구려 공격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로써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하였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신라가 553년에 군사를 일으켜 백제의 수복지인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하고 거기에 신주(新州)를 설치함으로써 120여년에 걸친 동맹관계는 깨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양국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는데, 554년에 성왕이 신라의 관산성을 친정했다가 신주 군주(軍主)였던 김무력에 의하여 크게 패하고 성왕과 4명의 좌평(佐平), 그리고 3만에 가까운 군사가 전사함으로써, 이후 백제 멸망 때까지 양국은 적대관계로 완전히 들어서게 되었다.
진평왕대는 진흥왕의 정복활동 결과로 점점 세력을 팽창해나가는 신라와, 무왕의 즉위로 성왕 이후에 불안했던 왕권이 다시 안정된 백제의 경쟁이 첨예화되는 시기였다. 602년 8월에 백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아막성을 공격하였는데, 진평왕이 정예 기병 수천을 보내어 반격하여 결국 백제군이 패하였다. 신라가 소타·외석·천산·옹잠의 네 성을 쌓고 백제 국경을 침범하였는데 이에 무왕이 좌평 해수에게 보기병 4만 명을 주어 이를 치게 하였다. 신라에서는 장군 파진찬 건품·무리굴·이리벌, 급간 무은·비리야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는데, 귀산과 추항도 함께 소감직으로 참가하였다. 결국 백제가 패하여 후퇴하였는데, 이를 치기 위해 신라군이 추격하였다가 천산에서 매복하여 기다린 백제군과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귀산과 추항 등의 분투로 백제군은 해수만 돌아가고 전멸하였다.
611년 10월에 백제가 또한 신라의 가잠성을 100일 동안 포위하였다. 이에 진평왕이 찬덕을 선발하여 가잠성 현령으로 삼고 여러 장군들에게 명령하여, 상주·하주·신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케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백제군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원군의 도움을 받지 못한 찬덕이 오랜 기간 동안 성을 지켰지만 결국 백제군에게 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618년에는 한산주 도독인 변품이 군사를 일으켜 가잠성을 공격하였는데, 백제에서 반격하였다. 신라는 가잠성을 다시 회복하였지만, 찬덕의 아들인 해론이 전사하였다.
624년에 다시 백제의 내침이 있었다. 이때 백제는 속함·앵잠·기잠·봉잠·기현·용책 등 6성을 포위 공격하였는데, 진평왕이 상주·하주와 귀당·법당·서당 5군을 명하여 구원하게 하였다. 하지만 백제의 기세가 상당하여 장수들이 이기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거기에서 성을 쌓는 것만 하고 후퇴하였다. 백제가 그 성들을 지속적으로 침공하여 결국 속함·기잠·용책의 3성이 항복하였다. 눌최가 분전하였지만, 원군의 도움이 없어 결국 모두 백제에게 함락되었다. 633년 2월 백제가 다시 가잠성을 공격하였지만, 진평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가 승리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신라는 계속되는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으로 국가 존망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신라는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621년을 시작으로 하여 당과 외교적인 관계를 맺고 수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고 조공과 숙위를 하게 되었다.
641년 의자왕이 즉위한 이후에 백제의 군사적 압박은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642년 7월에 의자왕은 신라의 서쪽 40여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이어서 8월에는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성주는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이었는데, 검일이 백제군과 내응하여 결국 성이 함락되고 죽죽과 용석 등이 모두 전사하였다. 이는 신라에 큰 위협이 되었다. 이에 김춘추는 자청하여 고구려에 들어가 백제를 치기 위한 군사를 꾀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의 보장왕이 예전 고구려 영토였던 죽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였고, 자연히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감금되었다가 김유신이 결사대 1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 접경지역으로 출전함에 따라 겨우 풀려나게 되었다.
한편, 백제는 643년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의 조공로를 막으려는 등 신라를 적극적으로 견제하였다. 백제는 전지왕이 왜국에 있다가 아버지인 아신왕이 죽은 후에 귀국하여 왕위에 오를 때에 왜군의 도움을 받는 등 예로부터 왜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러한 대외관계가 바탕이 되어 당시 동북아시아는 고구려-백제-왜의 연대와 당-신라의 연대가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643년에 신라는 당에 사신을 보내 재차 고구려와 백제 공격을 위한 청병을 요청했다. 이에 이듬해에 당에서는 사농승 상리현장을 고구려와 백제에 보내어 신라와의 전쟁을 정지하고 화평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의자왕은 당에 글을 보내 사과하였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화평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백제와 신라 사이에는 지속적으로 국지적인 전투가 일어났다.
647년에 신라에서는 비담(毗曇)의 난이 일어났는데, 반란 중에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하였다. 진덕여왕은 648년에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왕(文王)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다시 청병하였다. 이때 김춘추는 예복 등 당나라의 제도를 따를 것을 청하고, 그의 아들을 숙위(宿衛)케 하는 것 등으로 당 태종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청병 또한 성공하게 되었다.
의자왕의 적극적인 대외활동은 만년에 이르러 태장궁과 망해정의 건설 등 사치와 방종, 귀족들의 내부 분열로 위기 상황에 접어들게 된다. 더구나 궁중 안에서는 군대부인이 권세를 장악하면서 국가의 통치 질서는 급격히 붕괴되고 말았다. 지속적이고 빈번한 신라공격은 또한 국력을 피폐시키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당은 몇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원정했으나, 무위에 그쳤다. 이에 따라서 신라와 협공을 통하여 고구려를 정복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고, 그 우선으로 백제를 정벌하게 되었다. 660년 신라와 당연합군은 백제 공격을 개시하였다. 소정방(蘇定方)이 거느린 당군은 바다를 건너 백강으로 백제를 쳐들어가고,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는 계백이 거느린 5천명의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막았으나 수차례의 전투 끝에 결국 백제가 패배하여 계백이 전사하였다. 금강하구에서 당군을 막던 군사도 패배하였다. 그 결과, 수도 사비성은 나·당연합군에게 포위되었다. 사세가 다급해지자 왕은 사비성을 버리고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했다가 사비성이 함락되자 마침내 당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결국, 백제는 개국한 지 678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백제 멸망 이후 영토 내에 웅진도독부를 두어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복신 · 흑치상지 · 도침을 중심으로 661년 1월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을 왕으로 옹립하고, 백제부흥운동을 꾀하였다. 662년 5월 왕자 풍과 함께 170척의 병력과 무기·군량 등을 실은 일본 구원군이 도착하면서 부흥운동은 활기를 보였다. 하지만 복신이 도침과 의견이 엇갈려 도침을 살해하면서 부흥운동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일본 구원군 또한 백강에서 크게 패했으며, 흑치상지가 당군에게 끌려가면서 4년여에 걸친 백제부흥운동은 끝이 났다.
진평왕과 선덕여왕 시기의 신라와 백제와의 관계는 지속적인 적대관계로 볼 수 있다. 진흥왕의 활발한 정복활동 이후에 직접적으로 백제 및 고구려와 영토를 접경하게 된 신라는 자연히 그들과 첨예한 대립을 하는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백제 또한 성왕 시기의 중흥이 관산성전투로 인해 무참히 끝이 난 이후 무왕과 의자왕 시기에 다시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내부의 불만을 무마하고 국력을 발휘하기 위해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이면서 신라와의 갈등은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두 나라의 대결은 결국 당과 고구려라는 직접적인 외교 대상으로까지 이어졌고, 그것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여 끝이 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