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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공사관

분류 : 외교건축
건축년도 : 1883년 5월 개설
소재지 : 정동 10번지

미국영사관의 통역관 생활

아래는 <조광(朝光)> 1937년 7월호에 수록된 일기자(一記者)의 각국 영사관 탐방기 "외국영사관 통역생활 사십년" (181~184쪽)의 일부이다. 이 가운데 미국영사관 통역관 신봉휴(申鳳休)씨와의인터뷰 내용은 이러하다.

미국영사관생활 삼십년(米國領事館生活 三十年)
경성미국총영사관(京城米國總領事館) 신봉휴(申鳳休)씨
눈같은 목련(木蓮)꽃이 높은 향기(香氣)를 뿜고 있는 뜰 앞을 지나 영사관응접실(領事館應接室)에서 몇분간 기다리니 나이는 늙어뵈이시나 아직도 파란 조선저고리를 입은 파리파리한 노인(老人)이 반가이 맞아준다. 기자(記者)는 내의(來意)를 말하고
"이 영사관에 몇해나 계셨읍니까" 하고 말문을 열었더니
"네 30년이나 되었읍니다. 이렇게 여기서 반생(半生)을 보냈구려.'"
씨(氏)는 눈에 웃음을 담고 말씀하시나 감개(感慨)가 깊으신 듯하다.
"그러면 여기 오시기 전에는 어데 계셨읍니까"
"네ㅡ 한국시대(韓國時代) 교육부 번역과장(敎育部 飜譯課長)으로 있었고 또는 무관학교(武官學校) 교관노릇을 하였읍니다."
"그러면 그때 포병과(砲兵科)나 혹(惑) 기마과(騎馬科) 같은 것을 담임(擔任)하셨던가요"
기자(記者)는 씨(氏)의 얼굴을 잠간(暫間) 바라보고 그 날의 무인(武人)을 상상(想像)하였다.
"아니오, 나는 무인은 아니었고 영어(英語)와 역사(歷史)를 가르쳤읍니다" 하고 변명하신다. 사실 씨의 얼굴에는 귀족적 기풍(貴族的 氣風)이 넘쳐흘르고 또는 매우 점잖고 청초(淸楚)한 빛이 가득하시다.
"그러면 입관(入館)하신 동기(動機)는요"
"그러니가 그때 한국군대(韓國軍隊)를 해산(解産)하자 자연히 영어(英語)를 아는 관계상(關係上) 이곳으로 취직(就職)이 되었지요."
"그래 30년 동안 지내는 동안에 감회(感懷)가 많았겠습니다 그려."
"네 그저 여기서 늙은 셈이지요."
"영사관 생활로 가장 유쾌(愉快)한 일은 무엇입니까"
"뭐, 유쾌할 것이 있읍니까 있다면 월급(月給)받는 날이라고나 할까요."
"그 반면(反面)에 괴로운 일은요"
"없읍니다."
이렇게 잡담(雜談)을 늘어놓았으나 씨(氏)는 상냥하고 자미(滋味)있게 슬슬 받아넘기신다.
이때 창(窓)밖을 내다보니 몇십년이나 된듯한 큰 목수국(木水菊)이 눈처럼 희게 피어서 씨의 책상(冊床)을 비치고 있다.
"저곷이 벌써 몇십년을 두고 피었을 텐데 봄이되어 저꽃이 필 때마다 특별한 감회는 없읍니까"
"글쎄요. 밤낮 이렇게 지내니 감회조차 잊어버렸읍니다."
"그러면 30년 동안에 몇분 영사(領事)를 뫼셨읍니까"
"여덟분을 뫼셨지요."
"그 중에 지금까지 생각나시는 영사는 누구이십니까"
"글쎄요 밀라총영사(總領事)가 생각난다고 할까요 그이는 조선(朝鮮)에 오래도 있었거니와 수완(手脘)도 상당(相當)하였고 미국(米國)가서는 국무성 극동과장(國務省 極東課長)으로 있다가 연전(年前)에 작고하였읍니다."
"그러면 30년 동안 계시는 동안에 가장 중대(重大)한 사건(事件)은 무엇이었읍니까"
기자는 잠간 씨의 얼굴을 바라봤더니 씨는 갑자기 긴장(緊張)하여지며
"큰일납니다. 그런 말은 규칙상(規則上) 도무지 못합니다. 영사(領事)도 그런 정치(政治)문제를 말하면 야단이 나는데요."
당장(當場)에 목이나 달아날 듯이 상냥하시던 얼굴이 엄숙(嚴肅)해지신다.
"그러면 그 이야기는 그만두고 무삼 자미(滋味)있는 일화(逸話)는 없읍니까"
"네ㅡㅡ."
씨는 얼굴이 다시 춘풍(春風)같이 부드러워지며
"1908년이었읍니다. 옛날 루스벨트 대통령(大統領)때에 부통령(副統領)으로 있던 페아뺑스(페어뱅스)부처(夫妻)가 경성총영사(京城總領事)에 오셨는데 영사관 인력거(領事館 人力車)꾼이 부인(夫人)을 태워가지고 남대문 방면(南大門 方面)으로 가다가 그만 전차궤도(電車軌道)에 잘못되어 그 인력거(人力車)를 엎어놓았구려. 그래서 부인(夫人)이 조금 상(傷)하였지요. 이런 면목(面目) 없는 일이 어디있읍니까 영사관 일동(領事館 一同)은 매우 황송(惶悚)하여 그 인력거꾼을 벌(罰)하려 하였더니 대통령부인(大統領夫人) 말씀이 그 인력거부(人力車夫)는 차(車)를 아니 넘어치려고 나보다 애를 더 썼으니 벌(罰)할 필요(必要)가 없다고 말씀하고 되려 그 인력거꾼에게 돈 십원을 주셨읍니다. 그래서 영사관원 일동(領事館員 一同)은 매우 감격(感激)한 일이 있읍니다."
"참 좋은 말씀인데요. 또 그런 일화(逸話)는 없읍니까"
"네ㅡㅡ 나는 영사관 생활 30년 동안에 한번도 양복(洋服)을 입어본 일이 없읍니다. 남들은 완고하니 고루하니 하지만은 나는 조선복(朝鮮服)이 첫째 편리(便利)하고 둘째로 조선정조(朝鮮情調)가 좋고 셋째로 조선전통(朝鮮傳統)이 좋아서 조선복(朝鮮服)을 입읍니다. 영사관(領事館)에서도 별명(別名)이 있지오. 그리고 집에 가면 관(冠)쓰고 장죽(長竹) 물고 완고 행세(行世)를 합니다. 내 아들은 의학박사(醫學博士)로 신성우(申聖雨)라는 사람이지오. 그러나 아침저녁으로 아들과 손자(孫子)들에게 절을 받고 예날 풍속(風俗)을 버리지 않습니다."
기자(記者)는 "아 그렇습니까" 하고 씨(氏)의 높은 지조(志操)와 취미(趣味)에 경의(敬意)를 표(表)하고
"그 원인(原因)은"하고 다시 일문(一問)을 드렸더니
"요새 사람은 50년전으로 먼저 나가니까 나는 우정 50년후로 물러가서 거기서 중용(中庸)을 취하여 일반(一般)의 부박(浮薄)을 조화(調和)코저 함이지오. 그리고 나의 조선취미(朝鮮趣味)도 있고 하여 ......"
씨의 말씀은 극(極)히 높으신 교훈(敎訓)의 말씀이다. 조선정조(朝鮮情調)를 아니 버리고 조선전통(朝鮮傳統)을 아니 버리고저 이러한 영사관생활(領事館生活)에서도 양복(洋服)을 한번도 입은 일이 없다고 하니 요시 '얼추라 모던뽀이'들도 생각해볼 일이다. 기자(記者)는 마음 끝 경탄(驚嘆)하고
"그려면 영사관생활(領事館生活)에서 특히 배우신 인생관(人生觀)은 없읍니까"
"없읍니다. 그러나 얼마전 공휴일(公休日)을 택(擇)하여 소요산(逍遙山)에 갔다가 이런 시(詩) 한절을 지었읍니다." 하고 조히(종이)에 적어서 기자에게 뵈여주시는데 바라보니
步上逍遙百尺高 愛游別境不知勞
詠歌隨意歸須晩 月透雲間向我曺
라고 적혀 있다. 이것이 씨(氏)의 심경(心境)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끊치고 영사관 정전(領事館 庭前)에서 씨(氏)의 사진(寫眞)을 박는데 미국영사(米國領事)가 따라나와 웃으시며
"여보 갓을 쓰고 박으시오."
"마침 갓이 없구려."
이렇게 농담을 하시는 것을 보아 씨(氏)의 취미(趣味)를 알기에 넉넉하였다.

상세설명

근대개항기 이후 대한제국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와 통상조약을 체결한 나라는 일본(1876년), 미국(1882년), 영국(1883년), 독일(1883년), 이탈리아(1884년), 러시아(1884년), 프랑스(1886년), 오스트리아(1892년), 청국(1899년), 벨기에(1901년), 덴마크(1902년) 등 11개국에 이른다. 이 가운데 공사관 또는 영사관을 개설한 나라는 모두 아홉 나라이며,별도로 공관을 개설하지 않았던 나라는 오스트리아와 덴마크 등 두 나라였다.
여기에서 보듯이서양 각국을 통틀어그 선두에 선 나라는 단연 미국이다. 정동이라는 공간과 관련하여 '미국'이라는 존재는 두 가지 측면에서 특히 주목된다. 우선 그 하나는 근대시기 이후 정동을 '공사관구역(Legation Quarter)' 또는 '유럽인 정착지(European Settlement)'로 변모하게 만든 출발점이 바로 미국공사관의 개설과 맞물려 있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120년을 훌쩍 넘긴 오늘에 있어서도 미국공사관은 매우 드물게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나라와 미국 사이에 통상조약의 체결이 이뤄진 것은1882년 5월 22일의 일이며, 그 장소는 제물포(濟物浦)의 임시막사였다. 이날우리 측에서는 전권대관 신헌(全權大官 申櫶, 1810~1888)과 전권부관 김홍집(全權副官 金弘集, 1842~1896)이 대표로 나섰으며, 미국 측에서는 특파전권대신 수사총병 슈펠트(Robert Wilson Shufeldt, 薛裴爾; 1821~1895)가 파견되었다. 미국대표 슈펠트는 1866년에 벌어진 이양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 사건과 관련하여 그 이듬해인 1867년 1월에 군함 워튜셑호(Wachusett)를 이끌고 와서 서해안 일대와 거문도에서 탐문항해를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조선의 개항에 대해 줄곧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던인물이었다.
그는 1871년에 있었던신미양요(辛未洋撓)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조선개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1880년 5월에 이르러부산을 방문하여 교섭을 시도한 적도 있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러한 그가 다시 돌파구를 찾은 것은 조선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었는데, 이를 위해 북양대신 직예총독 이홍장(北洋大臣 直隸總督 李鴻章, 1823~1901)에게 중재를 요청했던 것이 주효했다.
그 결과 슈펠트는 마침내 조선과의 조약체결에 구체적인 성과를 얻기에 이르렀으며, 그가 조약교섭을 위해 1882년 4월 6일에 제물포항으로 들어올 당시 청나라 사신 정여창(丁汝昌, 1836~1895) 제독과 마건충(馬建忠, 1845~1899)이 동행한 것도 그러한 연유였다. 다만, 이 당시 종주권 인정 문제와 관련하여 조선이 중국의 속방(屬邦)이라는 사실을 명문화할 것을 요구하는 이홍장의 입장과 조선이 엄연한 독립국이므로 이러한 구절을 삽입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부한 슈펠트의 입장이 크게 충돌한 바 있었으나,결국 조약문 본문에서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정리된 사실은 주목된다.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직후인 1882년 7월 8일에교린(交隣) 때에 국서(國書) 사용할 '대조선국(大朝鮮國)' 및 '대군주(大君主)' 인장을 만들도록 하명한 것은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취해진 조치로 풀이된다.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정리된 조약문은 그 후 서구열강과의 조약체결 때마다 하나의 모델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미국과의 통상교섭은 그 자체로 여타 나라들과의 연쇄교섭을 가능하게 만든 조건이 되었다. 비록 조약비준에는 실패했지만, 제물포에서 영국대표조지 윌스(George O. Willes, 韋力士) 및 독일대표브란트(Max von Brandt, 巴蘭德)가 상판(商辦)을 벌려 각각 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본 것은 미국과의조약체결을 이룬 지 불과 보름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처럼 미국이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이다른 나라도 이 대열에 가담하도록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는데,각국 공사관의 개설과정 역시 이와 비슷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초대 미국공사로 임명되어 우리 나라에 부임한 사람은 푸트(Lucius Harwood Foote, 福德, 福特; 1826~1913)였다.그런데 그는 1871년 신미양요 때 참전한 장교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태우고 온 전함 역시 강화도 전투에 동원된 모노카시호(Monocacy)였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사실이다. 애당초 조약의 성립에 막대한 기여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독립국 인정에도 상당한 공헌을 했던 슈펠트는 조약 성사 직후에 발병하여 본국으로 귀임함과 동시에 퇴역까지 하는 처지가 되었으므로, 그에게는 이렇다 할 외교적 찬사와 영예가 주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아무튼 푸트가특명전권공사의 신분으로 제물포에 당도한 것은 1883년 5월 12일이었으며,곧이어 그해 5월 19일에는조약에 대한 비준서를 교환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는 정식으로 외교관계의 수립이 완결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 푸트를 수행하여 우리 나라에 들어온 미국공관원 일행은 박동(洞)에 있던 독일인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ellendorf,穆麟德; 1847~1901)의 집에 잠시 거처하였다가 이내 정동(貞洞)에 있는 민씨 일가의 집을 사들였는데, 이것이 곧 미국공사관의 시초이자 정동이 서양인촌(西洋人村)으로 변모하는 출발점이었다. 이로써정동지역에 정착한 최초의 서양인은 바로 푸트 공사 일행의 몫이 되었다.
<한성부거래안(漢城府去來案)> (奎17984)에는 이 당시 미국공사 푸트가 사들인 가옥과 토지는 "유학민영교(幼學 閔泳敎)의 와가(瓦家) 141칸과 공대(空垈) 250칸, 한림 민계호(翰林 閔啓鎬)의 와가(瓦家) 120칸과 공대(空垈) 300칸, 김감역(金監役)의 와가(瓦家) 9칸과 초가(草家) 6칸 및 공대(空垈)"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호암문일평(湖岩 文一平)이 <조광> 1938년 4월호에 기고한 "금석(今昔)을 말하는 외국영사관(外國領事館)의 기지 유래(基地 由來)"라는 글에 따르면, 미국공사관의연혁은 이렇게 정리된다.
"정동(貞洞)에 있는 미영소(美英蘇)의 삼총영사관중(三總領事館中)에 미국총영사관(美國總領事館)은 본래 민치상(閔致庠)의 구기(舊基)이니 그는 철종말(哲宗末)에 도승지(都承旨)로서 당시(當時) 영의정 김좌근(領議政 金左根)과 함께 운현궁(雲峴宮)에 나가 고종(高宗)을 영립(迎立)한 분이다. 이 분의 집을 미국공사(美國公使) '푸트'가 오천량(五千兩)에 구입(購入)하야 사관(使館)을 만든 것인데 기다(幾多)의 변천(變遷)을 지낸 금일(今日)에도 의연(依然)히 옛날 조선양식(朝鮮樣式)을 잃지 않고 있음을 보겠다."
여기에 나오는 민치상(閔致庠, 1825~1888)은민계호(閔啓鎬, 1859~)의 아버지였으므로, 미국공사관 터가 그의 집이었다는 구절은 틀린 표현이 아니다.
이렇게 미국공사관이 정동에 터를 잡게 되자, 곧이어 영국영사관(1884년 4월 개설)과 러시아공사관(1885년 10월 개설)이 그 뒤를 이었고, 그들의 첫 외교공관을 다른 지역에 잡았던 프랑스공사관(1889년 10월 이전)과 독일영사관(1890년 8월 이전)도 뒤늦게나마 이곳으로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느지막히 외교관계를 수립한 벨기에영사관(1901년 10월 개설)도 그들의 첫 공관을 정동에다 두었으며, 이탈리아영사관(1902년경 이전)의 경우에도 정동에서 가까운 서소문길에다 자국의 공관을 설치하였으므로, 정동 일대는 자연스레 각국외교의 중심가로 자리매김되었던 것이다. 일찍이 정동길을 일컬어 '공사관 거리(Legation Street)'로 명명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까닭이었다.
그런데 미국공사관은 여러 차례 공사관 또는 영사관위치를 옮겨다녔던 여타국가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오롯이 한 곳에만 머물렀던 사례에 속한다.푸트 초대 공사이래 정식으로 임명된 파커(William Harwar Parker, 巴巨; 1826~1896), 딘스모어(Hugh Anderson Dinsmore, 丹時謨, 丹士謨; 1850~1930), 허드(Augustine Heard, 何德, 許斗; 1827~1905), 시일(John Mahelm Berry Sill, 施逸; 1831~1901), 알렌(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8~1932), 모건(Edwin Vernon Morgan, 毛艮, 謨幹; 1865~1934)등 7명의 공사를 거치는 동안 미국은 이곳에서 때로는 어색하리만치 선린우호적인 입장으로, 때로는 지독할 만큼 수수방관하는 자세로 근대사의 전개에 있어서 우리 나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오랜 재임기간을 가졌으며 또한 우리 나라와 가장 깊은 인연을 맺은 사람은 단연 호레이스 알렌이다. 그는 1884년 9월 22일미국공사관에 소속된 의사이자 선교사의 신분으로 우리 나라에 건너와서는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濟衆院)을 설립하는 한편,1890년 7월부터는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재직하다가 1897년 7월에는 마침내 주한미국변리공사 겸 총영사로 승진하였고, 다시 1901년 6월 이후 특명전권공사로 지위가 격상되는 등 근대개화기에 걸쳐 우리 나라를 둘러싸고 진행된 서구열강의 각축장에서 나름으로 주역이 되어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그러한 그가 우리나라에서 체험한 일들을 엮어 저술한 책이 바로 <조선에 관한 이모저모(Things Korean)> (1908)인데, 여기에는 그가 겪은 미국공사관 생활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새 건물을 짓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는 식으로 표현한 알렌의 마지막 구절은 못내 거슬리지만, 그것도 냉혹한 국제외교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하는 것 외에는 별 도리가 없어 보인다.
"다른 열강들은 각기 이 나라에서 자기들의 대표자가 머물 거처로 미국공사관에 비해 훨씬 더 허세를 부린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들은 한때 조선 고관의 집이었던 진기한 모양의 아름다운 방갈로를 계속하여 사용하였다. 이 건물은 여러 공사관들과 새 궁전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역에 놓여 있었다. 여기에는 광활한 잔디밭이 갖춰지고 나무가 우거진 널찍한 부지가 있어서 안락하고 예술적인 거주지를 만들어주었지만, 공사관 건물은 다른 나라가 세운 거대한 구조물에 비한다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초라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외교적 대표권의 행사가 종지부를 찍고, 그 겉멋을 부린 공사관 건물들 가운데 최소한 하나가 공사의 철수와 동시에 매각되고 보니 우리가 새 건물을 짓지 않은 것은 잘 한 일로 간주될 만 했다."
여느 나라들과는 달리 미국공사관이 서구식 건물을 짓지 않고 원래의 '초라한' 한옥건물을 계속 사용한 데에 대한 불만은1901년 6월에 우리 나라를 찾은 독일인 기자 지그프리트 겐테(Siegfried Genthe; 1870~1904)의 책 <신선한 나라 조선> (1905)에도 일부 드러나 있는 사항이다.
"유럽각국의 수도에 있는 미합중국의 대사관과 공사관은 언제나 다른 외교관들의 조롱거리이자, 막강하고 부유한 정부에게는 영원한 비난대상이 되었다. 부유한 열강인 미 정부가 대사들에게 터무니없이 부족한 임금을 주는데다, 대개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한 공관에서 지내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의 작은 관저에서 자신들이 돋보일 수 있는 이웃 유럽관저들과 가까이 있다면, 미국공사들은 위로가 될 것이다. 독일제국의 외교관 역시 소박한 관저에서 고요하고 겸손하게 은닉하고 있다. 마치 백합과 장미가 하늘을 향해 자랑스럽게 머리를 쳐들고 있는데, 옆으로 남몰래 꽃을 피우고 검허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비꽃처럼 말이다. 독일 정부가 굳이 조선의 독일외교관들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놓고 자부심 강한 위대한 조국의 위신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영사까지 종종 아주 곤혹스럽게 하는 이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지그프리트 겐테, 권영경, <독일인 겐테가 본 신선한 나라 조선, 1901> (책과함께, 2007), 201쪽)
이에 비해궁내부 찬의관(宮內府 贊議官) 겸 외부 고문(外部 顧問) 윌리엄프랭클린 샌즈(William Franklin Sands, 山島; 1874~1946)는 한옥 구조의 미국공사관에 대해 상당한 호평을 내리고 있어 주목된다. 그는 1898년 1월 10일 미국공사관 서기관의 신분으로 한국 땅에 부임하였고, 그 후 1899년 11월 15일부터는 미국공사관 서기관직을 사임하고 그 무렵 세상을 떠난 르젠트르(李善得, 궁내부고문)의 후임으로 궁내부 찬의관이 되었으며, 다시 이듬해인 1900년2월 24일에는 외부 고문관으로도 임명되어 1904년까지 줄곧 활동하였다.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흘러 그가 남긴 회고록이 <비외교적 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 (1930)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수록되어 있다.
"미국공사관은 서울에서 가장 편안한 곳 중의 하나에 든다. 러시아, 프랑스, 일본공사관과 영국총영사관 건물들은 일본인과 중국인 청부업자들이 유럽건축물을 모방하여 지은 것들로 칙칙하고 음울한 느낌을 주었다. 그 외의 다른 공관들은 한옥을 개수한 것이었으며 한옥은 개수하기에 매우 편리한 구조들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잘 다음어진 화강암 기초 위에 튼튼하게 세워 올린 건물이었다. 벽은 진흑이나 벽돌로 되어 있어 기후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으며, 육중한 참나무나 밤나무 대들보로 받쳐진 지붕은 수 톤의 흙으로 채워서 높이 농리고 그 위에 기와를 씌워 놓아 여름의 무더위와 겨울의 강추위가 침범하지 못했다.

우리 공사관의 대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탑처럼 지붕이 솟아 육중한 성의 대문을 연상시킨다. 이곳을 나서면 바로 선교사들의 정구장이 나타나고 곧이어 영국인 구역과 황제의 새 궁전이 보였다. 대문의 양편에는 과거 전통복장을 입은 보초병들이 지키는 초소가 있으며, 가마꾼과 인력거군과 더불어 밤낮으로 교대근무를 하는 듯했다. 대문으로 들어가서 바로 오른편으로 안뜰을 반 가까이 차지한 단층의 창고가 있으며 이것은 때때로 아시아 함대에서 파견된 해병대원들이 묵을 막사로 쓰였지만, 나는 실제로 해병대가 활동할 필요가 있었던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 안뜰을 둘러싼 공간에는 넓은 잔디밭과 큰 집이 산만하게 늘어져 있는데, 공사와 그 가족들이 이곳을 사용하였다." [윌리엄 F. 샌즈, 김훈, <(고문관 샌즈의 기록) 조선의 마지막 날> (미완, 1986)]
미국공사관의 연혁과 관련하여 한 가지 특기할 만한 항목은 해방 직후에 진행된미국대사관저 영역의 급속한 팽창과정이다.정동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대사관저가 오늘날과 같은 광활한 면적을 차지하게 된 것은 모두 이때의 일이며, 여기에는미군정시대(美軍政時代)라는 용어 자체가 표출하듯이 현실적인 힘의 논리가 작용했음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옛 미국공사관을 둘러싸고 있던 정동 일대의 토지가 상당수 미국 측으로 넘겨진 것은 1948년 정부수립 직후의 일이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서울신문> 1948년 9월 19일자에는 '한미행정이양협정에 의해 미국이 취득한 토지와 건물의 명세'가 다음과 같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 (앞부분 생략)
1. 미군 철퇴시까지 무료로 사용하는 토지건물은 여좌(如左)하다. 그리고 그 유지비는 한국정부가 부담하며 그 비용은 매월 약 953만 8,391원이다.(가) 김포부락 제2건설부대
(나) 제6보병단
(다) 서울야영대
(라) 조선 기타 사령부 제7보병부 용지 (이상 토지 5억 4,288만 8,340평방, 건물 27만 5,011평방)2. 원조용 또는 고문단이 무료로 사용할 토지와 건물(가) 신당동 일대의 가옥 51동과 그 부지
(나) 기타 분산된 가옥 8동과 부지 (미지정)(다) 미츠이(三井)빌딩과 그 부지
(라) 민간정보소와 그 부지
(마) 특별용지(원 일본헌병사령부)(바) 체신회관
(사) 제7관구間의 가옥과 부지(용산)
(아) 국제, 수도, 내자 3호텔과 프라자호텔(전 일인 YMCA)3. 한미협정에서 제1차로 관심을 가지고 있어 선택한 반도호텔, 미국영사관 부근 일대의 토지 등 재산은 제9조 (가)항 규정에 의하여 2,500만 불 차관 중의 초년도(1949년 7월 1일) 변제액인 20분지 1, 약 170여만 불(연초의 이자가산)로 상쇄하게 되었는데 이를 한국원(불[弗]을 4백 원으로 환산)으로 환산하면 6억 8천여만 원에 해당한 것이다. 이미 선택 결정한 재산목록은 여좌(如左)하다.(가) 미군가족 주택 제20호 급 대지(138평) 정동 1의 39
(나) 러시아인 가옥 제1호(720평) 정동 1의 39
(다) 현재 미국영사관 서편 공지(1,414평) 정동 1의 9
(라) 현재 미국영사관 남편 공지, 서울구락부에 이르기까지 현재 미국영사관 곁으로 통한 도로의 일부(53,540평) 정동 8의 1, 8의 3, 8의 4, 8의 5, 8의 6, 8의 7, 8의 8, 8의 9, 8의 10 及 8의 17(마) 미군가족 주택 제10호 급 러시아인 가옥 제1호 정동편에 있는 삼각지형 대지 급 기타 지상에 있는 창고 1동, 가옥 3동 급 기타 건물(1,675평) 정동 1의 39(바) 전 군정청 제2지구 전부 급 기타 지상에 있는 약 43동의 가옥 급 기타 건물. 차는 차 지역에 있는 식산은행 소유재산 전체를 포함한 정동 9의 1 전부, 사간동 96, 97의 2, 98, 99, 102, 103의 1, 104의 1, 급 104의 2 급 그 대지상의 기타 건물 약 9,915평(사) 반도호텔 급 그 동편에 연접한 주차장 1,944평 을지로 18의 2"
한편,푸트 공사 이래로 줄곧 사용해왔던 한옥구조의 미국공사관건물은 그 후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에도 용케도 철거되지 않고 오늘날에도 현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미국대사관은 정동 지역에 두지 않고 따로 장소를 정하였으므로, 원래의 미국공사관(즉, 일제시대의 미국영사관)은 미국대사관저로 전환하여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76년 5월에는 전통한옥양식에 따라 새로운 미국대사관저를 신축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세상에'하비브 하우스(Habib House)'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건물이다. 이로 인하여 예전의 미국공사관 건물은'게스트 하우스'로 용도가 바뀌었으며, 나아가 이 건물에 대해 2001년 4월 6일자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보존하는 결정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하지만2003년 10월부터 2004년 5월까지 이곳에 대해 대대적인 수리보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예전의 자태를 거의 상실하고 말았음은 못내 아쉬운 대목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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