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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공사관

분류 : 외교건축
건축년도 : 1884년 4월 개설, 1890년 5월 착공, 1891년 5월 준공, 1898년 공사관 승격
소재지 : 정동 4번지

정릉 옛터의 원위치

정동(貞洞)이라는 명칭이 태조계비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에서 유래한 것은명백하지만, 그럼에도 정작 그 정릉 옛터의 원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의 영국대사관 자리가바로 거기라는 얘기도 있고, 그렇지 않다라는 얘기도 심심치않게 들리곤 한다.
가령, 조선 순조(純祖) 때의 사람 유본예(柳本藝)가 저술한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정동' 항목에서 "개국 초기에 태조비 정릉의 옛터가 있었으므로 지금껏 정릉동이라 한다. 지금 서학재 바른쪽 언덕 인가 후원에 돌로 쌓은 단 있는 곳(今 西學峴 右岡 人家 後園 有石壇處)이 옛날 능터라 한다"고 채록하고 있다.
한편, 이 문제는 일제강점기 이후의 여러 자료를 통해 줄곧지적된 사항이기도 하다.이런 자료들의 주요 논점을 추출하여 정리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중화(李重華), <경성기략(京城記略)> (신문관, 1918) ;
(권2, 32~33쪽)
"태조 6년 춘정월(春正月) 서력기원 1397년에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를 서부 황화방 북원(西部 皇華坊 北原, 貞洞) 정릉(貞陵)에 장(葬)하다.정릉(貞陵)은 금(今)에 영국총영사관(英國總領事館)이 기적(其跡)이라 운(云)하며 흥천사(興天寺)를 절릉동(貞陵洞)에 건(建)하니 명복(冥福)을 추(追)함이라. 역(役)이 성(成)하매 권근(權近)이 기(記)를 작(作)하고 태종(太宗) 9년(年)에 정릉(貞陵)을 양주 남사아리(楊州 南沙阿里)에 이안(移安)하였으되 사즉잉구(寺則仍舊)하니라."

(2) 후지이 카메와카(藤井龜若), <경성의 광화(京城の 光華)> (조선사정조사회, 1926) ;
(108~109쪽)
"[흥천사지(興天寺趾)]는 태조대왕 계비(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정릉(貞陵)을 수호하는 사찰로서 교종(敎宗)의 총본산이었다. 처음에는 지금의 영미로(英米露) 각총영사 일대의 지역에 있었으나, 제11세 중종대왕의 시대에 유교의 발발로 불에 타 사라졌는데, 그 당시의 기록을 보면 "절안에 있던 성내 유일의 목조오중탑(木造五重塔)이 불타 성안이 낮과 같이 훤해졌다"고 적혀 있다.
[정릉지(貞陵趾)] 서대문소학교 부근(西大門小學校 附近)에 있었다. 전기(前記) 태조대왕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으로 태조대왕의 말년에 축조되어진 것이나, 제3세 태종대왕(태조대왕 전비 신의왕후 한씨의 출생) 즉위의 9년(516년전)에 이 릉을 파괴되어 341년전에 동소문외(東小門外)의 사하리(沙河里)로 옮겼는데, 장소는 어느 때인가 소재불명이 되어 있었다가 제18세 현종대왕 10년(256년전)에 분별이 있는 학자 사이의 설(說)에 의하여 다시 부흥되어진 것이다."

(3) 가가승(假家僧), "벽해상전(碧海桑田) 같이 격변(激變)한 서울의 옛날집과 지금(只今) 집", <별건곤(別乾坤)> 제23호 (1929년 9월) ;
(96~97쪽)
"[영국총영사관(英國總領事館)과 흥천사(興天寺)]지금(只今) 정동(貞洞)에 있는 영국총영사관(英國總領事館)은 옛날 흥천사(興天寺)란 절터이다. 원래(元來)에 정동(貞洞)은 태조(太祖) 6년 정축(丁丑) 정월(正月)에 그의 계비(繼妃)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를 황화방 북원(皇華坊 北原)에 장(葬)하고 정릉(貞陵)이라 한 고(故)로 수(遂)히 정릉동(貞陵洞)이 되고 그 뒤에 또 약(略)하야 정동(貞洞)이 되었스며 그 능(陵)의 수호차(守護次)로 흥천사(興天寺, 禪敎宗總本山)를 건(建)하였었는데 방석 방번(芳碩 芳蕃, 康氏 所生)의 난(亂) 후에 태종(太宗, 初妃 韓氏生)이 감정상(感情上) 능(陵)을 국도내(國都內)에 두는 것이 불가(不可)하다 하고 양주 사하리(楊州 沙河里)로 이장(移葬)하고 흥천사(興天寺)만 유존(遺存)하야 세조(世祖) 7년에 또 대종(大鐘)까지 주(鑄)하야 현(懸)하였더니(今 博物館鐘) 중종(中宗) 5년 4월에 중학유생(中學儒生)들이 척불(斥佛)의 감정(感情)으로 차(此)를 소화(燒火)하고 [당시(當時) 대건물(大建物)인 목조오중탑(木造五重塔)도 소실(燒失)함] 이래(爾來) 누백년간(屢百年間) 국유지(國有地)로 있다가 이태왕(李太王) 21년 갑신(甲申) 4월 28일에 영영관(英領館)이 되었다."

(4)경성부(京城府), <경성부사(京城府史)> 제1권 (1934) ;
(211쪽, 222쪽)
"[정릉(貞陵)의 위치(位置)] 정릉의 위치는 지금의 정동이다. 정동(貞洞)이라는 명칭은 정릉동(貞陵洞) 또는 대정릉동(大貞陵洞)에서 변하여 부른 것이라는 것은 명료한데, 고지도에 따라 보더라도 능의 소재지였던 황화방(皇華坊)은 지금의 정동 땅에 해당한다. 능의 정확한 위치는 명확하지 않으나 생각컨대 정동일대의 고지(高地)에있었을 것이며, 흥천사(興天寺)가 능의 동우(東隅)에 있었다는 것에 비추어 보면, 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 경성공립제일고등여학교(京城公立第一高等女學校) 부근인 듯하다.
[정릉(貞陵)의 말로(末路)] ...... 게다가 조수삼(趙秀三, 秋齊)의 <풍요삼선(風謠三選)> 권2의 흥천사고종가(興天寺古鐘) 중 1절에 '聖朝由來尙儒術 梵宇斥爲今學宮'이라고 한 것을 보면, 서학현(西學峴) 본부관사(本府官舍, 총독부관사)인 서학지(西學址, 현 태평통 2정목 61, 62번지)도 흥천사의 역내(域內)로, 해사역(該寺域)의 일부로써 서학(西學)이 이뤄진 것으로 추론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릉지(貞陵址)] 태조계비 강씨의 능을 정릉이라고 부른다. 정릉은 현 방송국(放送局), 경성제일고등여학교(京城第一高等女學校) 부근에 있었으나, 정도전(鄭道傳)의 난(亂)에 기인하여 성밖으로 옮겨졌다."

(5)경성부(京城府), <경성부사(京城府史)> 제3권 (1941) ;
(812쪽)
"[흥천사(興天寺)] 태조는 전조(前朝, 고려)로부터의 예를 따라, 정릉능역의 동우(東隅)에 절 하나를 창건하여 원당사(願堂寺, 齋社)로 삼았다. 이를 흥천사(興天寺)라고 부른다. 세상에는 이들 원당사를 조포사(造泡寺)라고 부른다. 조포사라는 것은 절에서 두부(豆腐)를 제조하여 제찬(祭饌)으로 삼아 능에 공진(供進)한다는 호칭이다.
[흥천사(興天寺)의 위치(位置)] 흥천사의 위치가 능의 동역(東域)이라고 한다면, 현 정동정 방송국 이동(現 貞洞町 放送局 以東)의 부민관 부근(府民館 附近)에 이르는 것인 듯하다. 조수삼(趙秀三)이 지은<풍요삼선(風謠三選)> 권2의 흥천사고종가(興天寺古鐘) 중 1절에 따라 그 위치를 추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경성부사 제1권 211항 참조)"

(6)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 ""정동지역과 미국대사관저의 역사(A Histiry of the Chong Dong Area and the American Embassy Residence Compound)", <로열 아시아틱 소사이어티 한국지부 회지(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제35권 (1959) ;
(9~10쪽)
"황화방(皇華坊) 지역내에서 왕비의 원래 왕릉으로 선택되어진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명확하다. 왕릉이란 것은 거개가 항상 높은 언덕위에 두는 것이므로, 선택된 구역은 황화방의 북쪽 구역이란 것을 알 수 있고, 그렇다면 이 자리는 현재 영국대사관이 위치한 언덕이거나 아니면 러시아공사관이 자리했던 언덕이거나, 또한 이 둘 사이에 있는 어느 높은 지점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왕릉이란 것은보통 남쪽을 바라보며, 그 뒤로는 언덕이나 산으로 둘러싸여있고, 거기에서 양쪽으로 뻗어내리는 산줄기를 갖추고 있는 동시에 전면에는 물줄기가 흘러내리거나 때로는 연못이 놓여 있다는 것도우리는 알고 있다. 숱한 한숙사람들은 그 장소가 영국공사관 언덕에 있었던 것으로 믿고 있다.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사실을 더 파악하고 있다. 강비(康妃, 신덕왕후)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강비의 능을 축조하는 데에 있어, 태조는 이전 고려왕조의 관습을 따랐고, 그녀의 영혼을 안식을 위한 사찰을 능 옆에다 만들기로 결정하였다.그는 따라서 고려 때 사찰이 있던 터 옆에다 능지(陵地)로 선정하였으며, 이곳을 확장하고 재건하여 자신의 왕비를 위해 흥천사(興天寺)라고 부르는 절을 봉헌하였다. 태고(太古)와 보우(普愚)로도 알려져있고 공민왕대의 왕사였던 고승 원증국사(圓證國師)의 문도이기도 한 상총(尙聰)이라는 이름의 유명한 선승(禪僧)이 이 사찰의 주지승이 되었다.특히 태조는 그 당시로서는 서울에서 가장 고층건물이었던 오층짜리 목조법당을 지은 다음, 통도사(通度寺)로부터 석가의 사리 일부를 가져와서 이곳에다 안치하였다. 경전과 보물도 또한 이 안에다 가져다 두었다. 불과 70년전만 하더라도 서울 안에 1층 높이를 넘어가는 건축물들이 드물었던 점에 비추어, 우리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듯이,이 법당은 서울장안을 압도하였다. 우리는이 사찰이 왕릉지역의 동쪽 모퉁이에 존재했던 것으로 이해하며, 적어도 현재의 방송국에서 경기여고에 이르는 지역에 포진했을 거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증거가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영국공사관 언덕은 사찰이 이 언덕의 북쪽과 북서쪽에 자리한 것이 되어왕릉의 옛터로서 그 가능성은 제외되어야 할 것이며,원위치에 관한 한 추정의 화살표는 러시아공사관 언덕을 가리키거나, 산줄기의 배치가 더욱 방어적이라는 점에서 혹여 현재 미국대사관 관저 5호관과 6호관이 건립되어 있는 작은 언덕까지 가리킬 수 있다.하지만 흥천사는 규모가 큰 사찰이며, 모름지기 조선일보사옥에서 출발하여 현재의 극장지구를 거치고 경기여자고등학교에 이르는 상당히 광활한 지역을 차지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데, 그렇다면 왕릉이 사찰의 중요 전각의 동쪽편에 해당하는 영국공사관 언덕일자라도 이곳에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불가능하지 않다.어떤한 경우라고 할지라도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상세설명

근개화기에 우리 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한서구열강을 통틀어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롯이 한 장소에만 자국의 외교공관을 유지했던 나라는 오직 영국뿐이다. 미국의 경우도 첫 공사관자리를 그대로 차지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나, 지금은 그저 이곳을 대사관저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유형에 완전히 부합된다고 보기는어렵다.
때로영길리(英吉利), 대불렬전(大不列顚, 그레이트 브리튼)으로도 표기되는 영국(英國)과 우리 나라 사이에외교관계가 정식으로 수립한 것은 1883년의 일이다. 이때 우연찮게도 영국과 독일은 한날 한시, 즉 1883년 11월 26일에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당시 영국은 북경주재 영국공사인 해리 파크스(Sir Harry Smith Parkes, 巴夏禮; 1828~1885)를 특파하였고, 우리 측에서는교섭통상사무아문독판(交涉通商事務衙門督辦) 민영목(閔泳穆)을 전권대신으로 삼았다.이 조약을 체결한 민영목은 이듬해인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당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영국과의 외교교섭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에 앞서 1882년 6월 6일에는 영국해군제독 조지 윌스(George O. Willes, 韋力士; 1823~1901)가 나가사키주재 영국영사 애스톤(William George Aston, 阿須頓, 亞斯頓; 1841~1911)을 대동하여 제물포로 와서 우리 측의 경리사(經理事) 조영하(趙寧夏)와 김홍집(金弘集)을 상대로 상판(商辦)을 벌인 결과 조약의 체결까지 성사를 보았으나,그후 이 조약은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과 내용이 다르며 영국의 무역과 영국민의 지위보장에 불리하다"는 내용을 앞세운 영국정부의 비준거부로 완전한 결실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1883년 11월에 체결한 조영수호통상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은 6개월여가 지난 1884년 4월 28일자로 이내 비준이 이루어짐으로써 우리 나라와 영국은 정식으로 완전한 외교관계의 수립을 보았다. 이때에 영국 측에서는 조약체결의 당사자였던 파크스를 다시 파견하였으며, 그는 이후 1885년 3월 23일까지 중국 천진에 상주하면서 '겸임'의 신분으로 특파전권공사로 재임하였다. 앞서 그를 수행했던 애스톤 역시 이번에도 동행하였는데, <고종실록>에는조약비준서를 교환하는 현장에서 애스톤은"우리 나라 말을 좀 알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공사에게 전언(傳言)하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걸로 봐서 통역에 버금가는 한국어 실력을 갖추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영국공관의 개설은 비준교환과 더불어 즉시 이뤄어졌으며, 미국공사관에 이어 두번째로 정동(貞洞)에다 그 터전을 잡기에이른다. 이때 개설된 영국공관은 영국공사가 직접 서울에 머물지 않고 그 대신에 애스톤을 임시총영사로 삼아 상주하게 하였으므로, 엄밀하게 말하여 최초의 공관은 영국공사관이 아닌 영국총영사관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영국총영사관이 영국공사관으로 승격한 때는 조던(John N. Jordan, 朱邇典; 1852~1925)이 총영사로 재임하던 시절인 1898년 2월 22일이었으니, 이로부터 무려 14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다.
그렇다면 영국총영사관은 어떤 과정을 거쳐 정동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던 것일까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영국영사관이 들어선 자리는 '정동'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정릉(貞陵)이 있었던 터라고도 알려지고 있다.
영국정부가 정동에다 영국공관의 위치를 정하고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한 것은 1883년 3월부터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이 당시에 기지선정(基地選定)에 관한 교섭은 쉽게 해결을 보지 못하였고, 다시 해를 넘겨 1884년 4월 16일에 한성부(漢城府)가중재에 나선 뒤에야 겨우 타결을 보기에 이르렀다. 영국대사관 측이 확보하고 있는 당시의 '토지처분문서'에는 이 땅의 소유주가 '신보국(申輔國)'이라고 하여 벼슬이름으로만 표시되어 있으나, 그의 실제이름은 신석희(申奭熙)로 확인된다.
신석희는 훈련대장과 병조판서 등을 지낸 신헌(申櫶, 1810~1884)의 아들로대한제국 시기에 내부협판의 신분으로 내부대신서리를 여러 차례 지냈으며, 1898년에는 경무사(警務使)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우연찮게도강화도조약(1876년)과 조미수호통상조약(1882년)을 체결한 당사자가 바로 신헌이었다. 영국영사관이 들어선 자리가 신헌부자(父子)가 살던 집이라는 사실은 <조선중앙일보> 1932년 12월 30일자에 수록된 "대경성시중의 건물 로맨스 [12]정동영국영사관 기지유래(貞洞英國領事館 基址由來)"라는 글에 잘 요약되어 있으므로 이를 참고할 만하다.
그리고 약간 후대의 목격담이긴 하지만, 관립법어학교(官立法語學校)의 교사와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프랑스인 에밀 마르텔(Emile Martel, 馬太乙; 1874~1949)이 남긴<조선외교비화> (1934)라는 회고록에는 영국공사관 일대의 옛 풍경을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듣고 보니 이 내용은 상당한 악평에 가깝다.
"(181~182쪽)임금께서는 영국공사관(英國公使館)과 독일공사관(獨逸公使館) 사이의 장소를 친히 선정하시어 이 토지야말로 신왕궁을 건립하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하시자 이곳에 새로운 왕궁을 조영(造營)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주변은 경성에서도 제일 지저분한 장소여서 이른바 슬럼지대의 모습이었다. 고옥근(藁屋根, 초가지붕)의 누옥(陋屋)만이 연이어 있고, 영국공사관으로 통하는 가느다란 한줄기의 도로에는 야채의 부스러기랑 먼지쓰레기가 퇴적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궁이 세워진다고 말이 있자 별안간에 지가(地價)가 치솟아 올라 이를 매수하는데는 막대한 경비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토지의 매수에 일주간(一週間) 정도를 들여 마침내 왕궁의 조영공사가 시작되었던 것인데, 당시 토지와 가옥의 브로커를 하여 아주 돈벌이를 한 자도 있었다고 하는 것을 전해듣고 있다."
영국 측에서정동 4번지 일대를 구입할 당시에는 3,144평이나 되는 너른 터전에다 여섯 개의 별채로 구성된 한옥이 남아 있었으므로 초기에는 이를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형편이었다. 하지만 이내 이러한 주거상황은 영사관직원들에게 일상생활을 하기에 매우 비참하고 불편하며위생적으로도 부적절한 곳이라는 인식을 가져다주었는데, 이로 인하여 서양식의 새로운 건물을 건립해야 한다는 요구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기존의 기와집을 대체하는 새 영사관 건물의 건립은 대부분 월터 힐리어(Walter C. Hillier, 禧在明; 1849~1927) 총영사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거문도점령사건(巨文島占領事件, 1885.4.15~1887.2.27)을 겪은 지 얼마되지 않은 1889년 5월 6일에 부임하여 아관파천 직후인 1896년 10월 27일까지 7년 가량 우리 나라에 머물렀던 인물이다. 그의 이력과 행적에 대해서는 <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 1896년 10월호 (416쪽)에 간략히 정리된 사항이 남아 있으므로 이를 참고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그가 완벽한 중국어학자였던 탓에 한자(漢字)로 작성된영국과의 조약원문은 통상적인 조력자의 도움없이도 그가 스스로 작성하였을 정도였으며, 이것은 이후 다른 조약들의 기초자료로서 활용되었다"고 서술한 대목은 눈길을 끈다.
서울 정동에 들어설 영국영사관의 설계는 1889년 1월 18일에 상해건설국(上海建設局)의 책임건축가인 마샬(F. J. Marshall)이 예비설계도를 작성하여 영국외무성으로 보내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벽돌과 석재를 포함한 건축자재를 모으는 일에 상당한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었으며, 그 사이에 1890년 5월에는 공사준비가 완료되어 예전의 '한옥' 영사관 건물은 5월 15일에 철거되었다. 그리고이내 부지정리작업을 수행하여 콘크리트 기초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는데, 마침내 기초공사의 마무리와 더불어 정초석(定礎石)을 놓은 것은 1890년 7월 19일이었다. 이 정초석은 지금도 원래의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여기에는 힐리어 총영사의 부인에 의해 놓여졌다는 사실과 날짜등이 또렷이 기록되어 있다.
그 시절로서는 매우 드물게도 기초부분과 지붕구조에 콘크리트 재료가 사용되었다는 부분 역시 건축사적으로 보더라도 매우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더구나 이 당시에 지어진 대부분의 각국공사관 건축물들이 파괴되었거나 사라져버린 것과는 달리 제1호관과 제2호관 모두 그 외관과 구조가 오늘날까지 잘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는 더욱 크다.
작업을 시작한 지 1년여만에 벽돌로 지은 제1호관의 완공을 보았는데, 이곳은 총영사를 위한 공간으로 1층(124평)에는 접견실과 영사의 사무실, 서재, 식당, 응접실이 들어섰고 2층(121평)에는 각각 목욕탕이 딸린 4개의 침실이 배치되었다. 여기에다 부엌과 하인실의 용도로 건립된 별도의 부속건물(43평)이 설치되어 있었다. 1891년 여름에 우리 나라를 찾은 영국국 대위 카벤디쉬(Captain A.E.J. Cavendish)는<조선과 신성한 백두산(Korea and the Sacred White Mountain)> (1894)을 통해 때마침 목격한'완공 무렵' 영국영사관 일대의 상황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심하게 악취가 나는 길을 따라 '형제 존스(Brother Jones)'의 친절한 안내로 구드 아담스(Goold-Adams)와 나는 새 총영사관이 지어지는 동안 총영사인 힐리어씨가 임시로 거처하는 곳의 대문까지 당도하였고, 오전 8시 30분에우리는 고맙게도 안락한 휴식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힐리어씨는 교회에 있었으나, 아침식사에는 때를 맞춰 나타났고 우리를 진심으로 환대해 주었다. ...... 월요일 (1891년 8월 31일) 아침, 우리는 극동지역의 영국식 관공서건물에서 보여지는 통상적인 취향에 따라 설계되어진 새 총영사관을 방문했다. 총영사관 건물은 약간 도드라진 언덕 위에 서 있으며, 방들의 규모와 배치에 관한 한 내부는 흡족한 정도이다.사무공간들은 이곳과는 테라스와 테니스 잔디구장를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경사면에서 조금 더 내려간 곳에 자리하였다. 열정적인 식물학자이기도 한 힐리어씨는 작은 온실에다 숱한 수목과 화초를 키우고 있으며, 상당한 취향과 정성으로 정원을 꾸며놓았다. 그의 과일나무들은 풍성함을 기약하고 있으며, 지난 계절에는 상당량의 딸기수확을 맛보기도 했다. 한옥의 군집으로 이루어진 원래의 영사관 건물들은 새 건물의 완공과 더불어 철거되었으며, 지금은 이곳이 정원으로 변모하였다. 영사관구역 바로 곁에는 소나무숲으로 이뤄진 널찍한 정원이 차지하고 있는데, 이곳은 왕비의 재산이었으나 아무 것도 그녀로하여금 이곳을 영국정부에 내놓도록 하지는 못하였다."
제1호관의 완공과 더불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다시 제2호관의 건립에 착공하였는데,이 건물은 해를 넘겨 1892년 5월 12일에 최종완공을 보았다. 역시 벽돌건물인 제2호관은 정문과 제1호관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1층(101평)에는 사무실을 두는한편 2층(84평)에는세 개의 침실을 두어 숙박시설의 용도로 주로 사용하였다.
지금의 시각으로야 그다지 높다거나 웅장한 건물로는 보일 까닭이 없지만, 그 시절에는 고작 2층 높이의 벽돌건물만으로도 꽤나 훌륭한 외관을 보여주었던 모양이었다. 저명한 지리학자이며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1897)의 저자로 우리에게 친숙한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여사는 1894년 겨울에 찾은서울의 첫인상을 이렇게 남겼다. 여기에는 당연히 자기 나라 영사관의 존재가그려져 있다.
"길폭이 차차 넓어지면서 우리는 서울의 성벽에 도착했다. 굴곡이 깊은 이중 지붕을 가진 성문(남대문을 말함)이 있는 매우 높은 성벽을 통과하여 10여분더 추저분한 길을 걸으니 산들바람 부는 언덕이 나타났다. 그 언덕 위에 눈에 확 띄는 영국공사관과 영사관의 붉은 벽돌건물이 있었다. 다른 높은 언덕은 러시아공사관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 높은 탑과 화려한 정문은 이 도시에서 매우 이채로운 물건이 되고 있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이인화 옮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살림, 1994), 48쪽)
이와는 달리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訖法;1863~1949)는 그의 저서 <대한제국의 쇠망(The Passing of Korea)> (1906)을 통해영국공사관을 비롯한 서구열강의 공사관 건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대감을 드러냈다.
"공공건축물의 측면에서 보자면 서울은 이렇다 할 진전을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조금 심하기는 하지만 아름답고 고전적인 로마 가톨릭성당의 선은 건축이라는 견지에서 보자면 이 도시를 압도하고 있다. 프랑스, 영국, 러시아공사관의 모습은 눈길을 끌기는 하나 괄목할 정도는 아니다. 한국정부의 관공서는 거의 대부분 여전히 순수한 한국식 건물이다."
헐버트가 이러한 감정을 드러낸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적어도 이들 나라는 대한제국이 을사조약을 통해 이른바 '보호국'으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이를 수수방관하였거나 일본의 동조세력이 되었던 것이 그 까닭이며, 이 점에 있어서는영국의 경우가 특히 그러했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러시아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일본과의 동맹을 외교의 기본노선으로 설정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대한제국기에 반일언론인으로 유명했던 대한매일신보 사장 어네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裵說; 1872~1909)에 대한 재판이 진행된 곳 역시 서울의 영국총영사관이었다. 이 당시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통감부 서기관 미우라 야고로(三浦彌五郞)를 대리케하여 재판을 청구하였으니 이때가 1908년 6월이었다. 이로 인하여 베델은 이곳에 설치된 고등법원을 통해유죄여부를 추궁받았는데, 이에 앞서 1906년 7월 이후 일본정부는 여러 차례 영국총영사에게 공문을 보내 베델에 대한 처벌과 추방을 요구한 적도 있었다.
6월 15일부터 3일동안 열린 재판의 결과 유죄판결이 내려진 베델에게 주어진 형벌은 3주간의 금고형과 해외추방, 6개월간의 근신처분이었다. 여기에는 "1908년 4월 17일자 스티븐스 암살사건에서 베델은 전명운, 장인환 등 하수인들을 애국지사, 의사 등으로 찬양함으로서 일본의 보호권을 묵살하였으며, 기타 기사를 통해 한국인들을 선동하여 일본인 반대운동을 했다는 것이며, 이같은 신문기사는 결국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 적대감정만 조장하게 된다"는 것이 그 판결이유로 내세워졌다. 이 때문에 베델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서 3주간의 금고형을 겪은 후에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왔으나, 이미 큰 병을 얻음에 따라1909년 5월 1일에 서대문밖 애스터 하우스 호텔(Astor House Hotel)에서 37세의 나이로 홀연히 목숨을 다하고 말았다. 이렇듯자국의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일본과의 동맹에 방해가 된다 하여되려 그를죽음으로 몰고간 것이 바로 영국정부였던 셈이다.
정동 4번지에 정착한 영국총영사관(1898년에는 공사관으로 승격)과 관련하여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은 바로 성공회대성당(聖公會大聖堂)이 들어선 정동 3번지구역이다.
영국영사관과 이웃하는 이 자리는 1889년 11월에 조선선교의 책임을 지고 초대주교로 승품이 된 코프(Charles John Corfe, 고요한; 1843~1921)에 의해 선교기지로 마련되어 1890년 12월 21일 이후 기존의 건물을 장림성당(將臨聖堂, The Church of Advent)이라고 이름을 고쳐 붙인 데서 그 역사는 시작된다. 1892년 11월 27일에는 이곳에다 한옥건물로 '교회다운 모습과 크기'로 성당을 신축하고, 다시 이를 장림성당이라고 명명하였다고 전한다.
이 당시 선교활동의 중심은 대개제물포였지만, 만주지역까지 코프 주교의 관할구역에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서울 성공회성당은 자연스레 그중심지로 부각되기에 이른다. 더구나 이해 가을에는 성베드로수녀회에서 파견된 수녀들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근처의 고가옥을 구입하여 교회대지를 확대하였으며, 1896년에는 또 다시 너른 대지의 집을 매입하여 영역확장을 지속하였던 것이다. 그 사이에 1893년에는 이곳에다 고아원을 개설하여 정동에서 첫 사회사업을 개시하였는데, 이 일은 1913년까지 계속되었다. 1900년에 와서는 정동대지의 일부를 영국공사관의 필요에 따라 그쪽으로 일부 넘기도 하였으나, 1909년에는 성공회 주교와 사제들의 공관을 건립할 목적으로 근처에 상당히 큰 대지를 구입하여 교회의 부지를 다시 확장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순종실록부록> 1912년 3월 18일자 기사에는 "조선총독부의 요청으로 옛 수학원(修學院)의 토지와 건물을 영국교회에 5년기한으로 빌려주기로 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곳 역시 결국에는 상당한 구역이 영국성공회 측으로 완전히넘겨진 것으로 드러난다.정동 1-5번지 및 1-16번지일대에 자리했던 수학원은 황태자(영친왕)와 황족·귀족의 자제를 위한 황실교육기관으로 1906년 10월에 설치되었다가 1910년 8월까지 존재하였다.이 구역 안에 있던수학원 건물 양이재(養怡齋)는 그대로 잔존하였다가, 2006년 9월 19일자로 문화재청에 의해 등록문화재 제267호로 등록고시된 바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아는 성공회 서울대성당(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호)은1911년 5월 제3대 주교로 임명된트롤로프(Mark N. Trollope, 조마가; 1862~1930)에 의해 건립이 주도된 것으로 아더 딕슨(Arthur Dixson; 1856~1929)의 설계에 따라1922년에 착공되고, 1926년 5월 2일에 1단계 준공을 보았던 건물이다. 당초의 설계도와 계획에 비해서는 많은 부분이 미완성상태로 남겨지긴 하였으나, 때마침 태평로 일대의 확장과 더불어 성공회성당은 오래도록 서울 중심부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되어 왔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영국총영사관으로 시작되어 영국공사관으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을사조약'의 여파로영국영사관으로 격하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다시 해방 이후에 영국대사관이 설치되는시절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외교공관은 오롯이 한 장소에만 머물렀는데, 이는 우리 나라 외교사를 아무리 뒤져봐도 그 유례를 찾을 수가없다. 더구나 영국공사관 바로 옆에는 영국성공회의 선교기지까지 들어선 상태로 무려 120년가까운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 일대는 마치 불가침의 영역으로 확고하게 굳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래도록 지속된양국간의 외교사만큼이나 선린우호(善隣友好)의 관계가 지속되어왔던 것인지는 의문이다. 대영제국은 오히려 때마다 일본제국에 편을 들어 우리에게 고난과 핍박을 주었던 일이 무수히 많았던 까닭이다.
지금은 거의 잊혀진 사실이지만, 원래 영국공사관 앞으로 진입하는 길은 덕수궁의 북쪽 궁장을 거쳐 미국공사관이 있는 지역까지 관통하여 죽 이어진 통행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해방 직후에 발행된 지도자료에도 이 도로의 흔적은 그대로 확인되지만, 지금은 영국대사관 정문 쪽에서 완전히 막혀진 길로 변모되고 말았다.
오래 전<조선중앙일보> 1933년 12월 15일자에는 '석조전(石造殿) 위에서 내부가 보인다고, 영국영사관에서 항의'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여기에는 "덕수궁이 개방된 두에 석조전으로부터 영국영사관 내부가 보이므로 동영사관에서는 외사과(外事課)에 항의를 하여서 외사관에서는 곧 이왕직(李王職)에 이를 이첩하여 석조전 주위에 수목을 심어 보이지 않게 하기로 되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반드시 이 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늘날 덕수궁과 영국대사관 사이에는 숲이 무성하여 더 이상 영국대사관 쪽의 모습을 잘 구경하기가 어렵다.
혹여 영국공사관은 개화와 개방의 시대에 스스로 '폐쇄'와 '고립'의 공간으로 거듭나고자 했던 것은아닌지 모를 일이다.

[영국공사관관련 참고자료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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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중앙일보> 1933.12.15일자, "석조전 위에서 내부가 보인다고 영국영사관에서 항의"
- <조선일보> 1935.5.15일자, "경성고적소순례 (6) 방송국과 조선호텔"
- <동아일보> 1936.1.1일자, "신춘각국영사관순방기 (1) 영국영사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