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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정동선교부

분류 : 선교건축
소재지 : 정동 1-9번지, 1-11번지, 1-45번지, 13-1번지일대

상세설명

근대개항기 이후 정동지역에 처음 진입한 서양인들은 미국공사관 소속의 외교관들이었지만, 실제로 정동이 '서양인촌(西洋人村)'으로 변모한 출발점은 민간인 신분의 선교사들이 대거파견되어잇달아이곳에 거처를 정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선두에 선 사람은 바로 호레이스 알렌(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8~1932)이었다. 그는 당초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였으나 이내 조선으로 건너와서 미국공사관에 소속된 의사가 되었으며, 갑신정변 때 당시의 실권자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濟衆院)을 설립하였고, 다시 1890년 7월부터는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재직하다가 1897년 7월에는 마침내 주한미국공사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다.
그러한 그가 처음 우리 나라로 건너온 것은 1884년 9월 22일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당시 미국공사 푸트(Lucius Harwood Foote, 福德, 福特; 1826~1913)의 주선으로 미국공사관에 인접한 집 한 채를 매입할 수 있었다. 지금의 정동 1-11번지 중명전 일대를 가리키는이 가옥은 당초 1884년 6월에 방한한일본주재 감리교 소속 선교사맥레이(Robert S. MacLay, 1824~1907)가 장차 선교활동의 근거지로 삼으려고물색하던 끝에 푸트 공사에게 부탁하여 매입을 일단락 짓고 돌아간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 땅은 공사관 측의 편의에 따라 이들보다 먼저 서울에 당도한 알렌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정동에 터를 잡은알렌은 다시 자신의 동료를 위해 이웃하는 땅과 가옥(정동 1-9번지, 정동 1-45번지, 정동 13-1번지일대)을매입하였으니, 이 집은 곧 해를 넘겨 1885년에 서울에 들어온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元杜尤; 1859~1916)의 몫으로 돌아갔다. 언더우드는 이듬해인 1886년 2월에 고아원을 개설하기 위해 바로 길 건너편의 대지(지금의 정동 31번지 이화여고 심슨홀 일대)와 그 안에 들어있던 크고 작은 기와집 다섯 채도 사들였는데, 이것은나중에 경신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언더우드에 이어 1885년 6월에 들어온 의료선교사 헤론(John W. Heron, 蕙論; 1856~1890)은 언더우드 저택의 북동쪽(정동 1-9번지, 환벽정 구역)에 자리하였으며, 1890년에 그가 병으로 죽자 이곳은 1891년 4월 이후 그의 후임으로 제중원을 맡았던 빈튼(Charles C. Vinton,賓頓;1856~1936)의 집이 되었다. 이보다 뒤늦은 1890년 1월에 서울에 들어온 모펫(Samuel A. Moffett, 馬布三悅; 1864~1939)은 이곳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공사관 구역에 맞닿은 북서쪽 모서리(정동 1-9번지, 예원여중 본관 자리)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이에 앞서 1886년 7월 4일에는 여의사 엘러스(Annie J. Ellers, 1860~1938; 벙커 부인)가 알렌이 살던 집에 들어왔으며, 이것을 계기로이곳은 호톤(Lillias S.Horton, 1851~1921; 언더우드 부인), 헤이든(Mary Hayden, 1857~1900; 기포드 부인), 도티(Susan A. Doty, 1861~1930; 밀러부인) 등 독신여선교사들의 거처로 변모하였다. 1888년 10월에 우리 나라에 들어온 기포드(Daniel L. Gifford, 奇普; 1861~1900)의 경우에도 길 건너편의 대지(정동 29번지)를 사들여 자신의 집으로 삼았는데, 이곳은1896년 이후프랑스 태생의 독일인이었던 앙트와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 孫澤, 孫鐸, 宋多奇; 1854~1925)이자신의 호텔을 꾸려나갔던 공간이기도 하다.
이 일대가'미국 장로교선교회의 거주단지(American Presbyterian Mission Compounds)'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처럼 미국공사관(정동 10번지)의 서쪽 인접지가한꺼번에미국 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차지가 되었던 까닭이었다.이 당시 이곳의 배치현황에 대해서는 다니엘 기포드가 거칠게 그려놓은"서울 정동의 장로교회와그 부속건물(외인거주)의 약도"가 남아 있어 그 내역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 자료를 재구성한'장로교 선교기지 일대의 개략지도'는1966년에 발행된 <경신80년약사>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새문안85년사> (1973),<정신 100년사> (1989)에도 거듭 인용되어 널리 소개된 바 있다.
이들에 의해 선교활동의 본거지로 변한 만큼 이 지역에 다수의 교회와 교육기관이 창설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1887년 2월 7일에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 헤론 등이 조직한 '성서번역위원회'(대한성서공회의 모체)은 물론이고 1890년 6월 25일에 헤론의 주창으로 오늘날 '대한기독교서회'의 출발점이 된'조선성교서회(朝鮮聖敎書會)'가 창설된 곳은 언더우드의 사택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더우드의 사랑방은 장로교파의 최초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창설된 곳으로 기억되는 공간이다.
1887년 9월 27일밤 언더우드 목사, 로스 목사, 그리고 14명의 조선인 신자들이모여서 시작된 이 교회는처음 '정동교회(Chong Dong Church)'라고 하였다가, 1895년에 경희궁 맞은 편에 있는 네 칸짜리 한옥을 구입하여 그곳으로 옮겨가면서 '정동교회' 말고도 '서대문교회'(West Gate Church) 혹은 '새문안교회'(Saemoonan Church)'란 명칭으로 혼용되어 불리면서점차 새문안교회(新門內敎會)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새문안교회가 지금의 자리(신문로 1가 43번지)에 새터전을 마련한 것은 1907년이며, 여기에 건물을 신축하여그곳으로 옮겨간 것은 1910년의 일로 확인된다.
그런데 언더우드의 저택은 새문안교회의 출발점이었을 뿐만 아니라경신학교(儆新學校)의 발상지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 학교는1886년 5월 11일에 정동의 큰 길쪽으로 붙어 있던 언더우드의 또 다른 사랑채에서 1명의 고아로서 고아원(The Home and School for Orphan Boys)을 개설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무렵 언더우드는 조선정부에 고아원의 설립허가를 신청하여 1885년 2월에 이에 대한 내락까지 받아둔 상태였으며, 이에 고아원을 확장하기 위해 바로 길 건너편의대지(지금의 정동 31번지)와 그 안에 들어있던 크고 작은 기와집 다섯 채도 사들였음은 앞서 얘기한 바와 같다.
이 고아원은 1889년 1월부터 기포드가 전담하여 맡아보면서 점차 학교의 헝태로 변모하기 시작하였으며, 정식학교인가를 받아내지는 못하였다. 다시 1890년 1월에는 모펫이 우리 나라에 들어오면서 이 고아원을 맡게 되었는데, 그 역시 정식학교로 개편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이 당시 학교의 이름을 예수교학당(Jesus Doctrine School)로 바꾼 것도 그러한 노력의 흔적이었다. 결국 밀러(Miller, Frederick Scheiblim, 閔老雅; 1866~1937)가 1893년 4월에 이곳을 맡은 때로부터 비로소 학교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그러나 학당장의 이름을 따서 '민로아학당(閔老雅學堂)'이라고도 불렀던 이 학교는 1897년에 이르러 선교회의 결의에 따라 폐쇄되고 말았다.
다시 해를 걸러 1901년에 연지동 1번지로 자리를 옮겨 이 학교는 '중학교'라는 이름으로 부활되었으며, 다시 1902년에는 '예수교중학교'로 이름이 고쳐졌고, 마침내 1905년에는 "세계사조를 외면한 구태에서 벗어나게 하고 청소년으로하여금 새로운 배움을 통해 진리를 깨우쳐 간증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아 '경신(儆新)'이라고 정하였다. 이리하여 정동의 한 구석에서 단1명의 고아로서뜻을 세운언더우드학당은 마침내 그렇게 커다란결실을 맺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와 아울러 언더우드의 집과바로 이웃하던 알렌의주택은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의 발상지로 자리매김했다.
이 학교의 출발은 바로 언더우드가 운영했던 고아원과 관련이 있었다. 1887년 6월 초순경에 새로 데려온 몇 명의 고아들 가운데에는 '정네'라는 이름의 다섯 살 난 여자아이 하나가 끼어 있었는데, 언더우드는 남녀부동석의 나라에서 남녀공학을 시킬 수 없다하여 제중원의 여의사로 활동하던 엘러스에게 이 아이를 부탁하였던 것이 그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에 엘러스는 자신이 거처하던 정동 사택에 여학당을 개설하였으니 이것이 곧정신여학교의 모체가 되는 '정동여학당(貞洞女學堂)'이었다. 여기에서는 첫 5년 동안에 52명의 학생을 가르쳤다고 알려진다. 곧이어 엘러스가 선교사 벙커와 결혼하면서 1888년 9월 이후 기포드의 부인이 되는 헤이든에 의해 이 학당이 운영되었으며,다시 1890년부터 1904년까지는 수잔 도티가 제3대 교장으로 이 학교를 맡아 이끌어 나갔다. 정동여학당은그 후 1895년에 연지동으로 이전하면서 '사립연동학교(私立蓮洞學校)'라고 하였다가 1909년에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로 교명을 변경하여 사립학교로 정식인가를 받는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이러한 장로교선교회의 거주단지는 새문안교회, 대한성서공회, 대한기독교서회, 경신학교, 정신여학교의 발상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 어느 것도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존속했던 사례는 찾으래야찾아내기가 어렵다. 이것은 비슷한 시기에 바로 길 건너편에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施蘭敦; 1856~1922)과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亞扁薛羅; 1858~1902) 등에 의해 구축된감리교선교회 거주단지의 사례를 보면, 이 안에뿌리를 내렸던 배재학당, 이화학당, 정동제일교회 등이 지금도 건재한 것과는 무척 대비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상황이 이렇게 변한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른 지역으로 교세 확장을 염두에 두고 있던 장로교 측에서 자진하여 정동의 재산 일부를 처분한 전례가 없지는 않으나,이것보다는 좀 다른 측면에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애당초 장로교 선교기지의 경우 미국공사관과 이웃한 공간이었다는 지리적 이점에다 미국 자체의 위세가 거주단지의 확장를 위한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면,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이러한 입지조건이 오히려 이러한 집단거주단지의 해체를 가속화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풀이할수 있을 듯하다. 말하자면 1897년 이후 경운궁을 중심으로 궁궐영역의 확대가 계속 추진되고 있는 상태에서궁궐과 인접한 장로교선교기지가 그 편입대상에 가장 먼저 지목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미국공사관과 장로교선교회의 거절과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끝내 대한제국 정부의 요구와 압박을 피해나갈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이일대는 별다른 흔적조차 남기지 못할 정도로완전한 구역재편이 이루어졌던 반면, 이와는 대조적으로'공사관거리'의 길 건너편의배재학당과이화학당 일대는 궁궐편입대상에서벗어나 있던 탓에 지금껏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 삼아, 정동 장로교선교회 거주단지 내에 포함되었던 주요 공간의 지번별 변천내역을요약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정동1-9번지 :
이 구역은 원래 2,817평 규모의 너른 대지였으나 해방 이후 한미행정이양협정에 따라 이 가운데 1,381평만 따로 떼어 1949년 8월 13일자로 미국대사관저 구내로 편입되고, 잔여면적 1,443평은 정동 1-45번지로 분할생성되는 동시에 국유로 편입되었다가 1953년 6월 15일 재단법인 유하학원으로 무상양도되었다. 미국대사관 측으로 편입된 구역은 원래 1885년 이래헤론의 사택으로 취득되었고, 1891년에는 빈튼 가옥이 되었다가 1902년경 경운궁 환벽정(環碧亭) 구역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일제 때는 이왕직 소유로 되었다가 해방 직후 미국대사관으로 편입된 사실을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2) 정동 1-11번지 :
원래 감리교선교사 맥레이가 취득하였다가 1884년에 알렌에게 넘겨진 구역으로 미국공사관과 바로 이웃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곳에는 1886년 이래 여의사 엘러스가 들어와 '정동여학당'을 개설하였으며, 이후 이 학교는 1895년까지 같은 자리에서 유지되었다. 아관파천 직후 이곳은 왕실도서관으로 변하였고, 그 이름도 수옥헌(嗽玉軒)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899년에 도서관 용도의 벽돌건물(단층)이 신축되었으나1901년 11월에 발생한화재로 전소되었고, 1902년 5월에 건물의 재건에 착수하여 새로운2층집이 완공되었다. 1906년에는 수옥헌의 이름을 중명전(重明殿)으로 개칭하였고, 1912년 이후 서울구락부에 임대되어 사용된 바 있다. 해방 이후 몇 차례 소유권의 변동이 있었으나, 최근 2006년 9월 21일자로 문화재청으로 소유권 이전과 더불어 지난 2007년 2월 7일 이후 사적 제124호 덕수궁에 추가되어 사적으로 편입된 상태이다. 지금은 지번이 달라졌으나, 정동11번지, 정동 12-1번지 등도 원래의 정동여학당 구역에 해당한다.
(3) 정동 1-45번지 :
원래 정동 1-9번지였으나 1949년 8월 13일에 1,443평이 따로 떼어져 지번분할이 이루어진 공간이다. 1890년 이후 모펫의 거처가 되었다가 아관파천 직후 경운궁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일제 때는 이왕직의 소유지로 남아 이곳을 황화사(皇華舍)로 불렀으며, 이화학당에서 이곳을 기숙사로 임차하여 사용한 적도 있었다.해방 이후 국유로 전환되었으며,1953년 6월 15일 재단법인 유하학원으로 무상양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예원학교 본관이 들어선위치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4) 정동 13-1번지 :
1885년 이래 언더우드의 사택이 되었던 공간으로 1887년부터 '새문안교회'의 전신인 '정동교회'가 이곳에 자리했다. 그리고 정동 1-28번지와 정동 1-9번지 일부도 원래의 언더우드 사택에 포함되어 있던 구역이었다.1886년 5월에 개설되어 '경신학교'의 모체로 성장하는 고아원(언더우드학당)의 첫 위치도 바로 여기였다.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1899년 이곳을 새로운 궁궐로 편입하겠다는 대한제국정부의 요청이 있었고, 이에 따라1901년 3월에 매매허락이 이루어진 바 있었다. 하지만 교환대상이 되는 부지의 확보문제로 논란이 제기되다가 결국 1902년에 궁내부 소유로 넘겨진 듯하나, 그 이후 이 지역이 궁궐용도로 사용되었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다. 1912년 이후미국인과 일본인의 민간소유로 넘어갔다가, 1925년에 재단법인 미감리교회 조선부인선교부 유지재단에서 매입하여 이곳에 3층 벽돌건물을 건립하였다. 이것은 여선교사 기숙사로 사용된 '그레이 하우스(Gray House)'이며, 지금은 이곳이 예원여중 운동장으로 변모하였다.

[참고자료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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