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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와 천문관측

기후관측연혁
01. 옛날의 관측

"조선 시대에 들어와 과학적인 강우량의 관측이 시작된 것은 세계 기상관측사상 가장 획기적인 일이다. 측우기(測雨器)는 1441년(세종 23) 처음 만들어지고, 다음해인 1442년에 개정되어 측우기라 명명되었다. 이와 같은 세종대의 우량 및 수위 관측은 유럽보다는 200년, 일본보다는 280년은 앞서는 것으로 세계 기상관측사상 최초의 일이다."

우리 나라의 기상·기후의 관측은 한민족이 한반도에 정착 생활을 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그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로 알려진 첨성대는 647년(선덕왕 16)에 건립되었는데, 춘분·추분·하지·동지를 비롯한 24절기의 정확한 측정을 위한 천문대의 기능과 동시에 관상대의 구실을 하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현대와 같은 근대적인 기상관측기구가 없어도 면밀하게 기상을 관측하며 생활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본기(本紀)에 수록된 기록을 정리해 보면 삼국시대의 기후를 대관(大觀)할 수 있는데, 그 내용 속에는 현대의 기후·기상학에서 다루는 모든 기후요소들이 관측, 기록되어 있다.
고려 시대에 천문·역수(曆數)·측후·각루의 일을 맡아보았던 관청은 서운관(書雲觀)이다.
1308년(충렬왕 34)에 서운관으로, 그 뒤 다시 분리, 병합을 거듭하여 1372년(공민왕 21)에 다시 서운관으로 개칭되었다. 이와 같이 분리·통합될 때마다 직제나 인원도 바뀌었다. 경주의 신라 첨성대와 같이 개성에 있는 고려 첨성대도 고려 시대의 천문·기상관측의 중추가 되었다.

≪고려사≫ 천문지(天文志)에는 천체관측에 관한 귀중한 기록이, 오행지(五行志)에는 기상·기후에 관한 기록들이 있어 그 당시 관측의 세밀함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의 서운관을 계승하여 관상감(觀象監)을 두었다. 관상감은 조선 왕조의 주요 기구의 하나로써 천문·기상·지리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것은 행정관청임과 동시에 연구 기관이었고 관측소였으며, 또한 교육 기관이기도 했다. 관상감의 관측 제도는 ≪서운관지 書雲觀志≫ 측후(測候)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과학적인 강우량의 관측이 시작된 것은 세계 기상관측사상 가장 획기적인 일이다. 측우기(測雨器)는 1441년(세종 23) 처음 만들어지고, 다음해인 1442년에 개정되어 측우기라 명명되었다. 또, 측우기와 함께 1441년 8월 수표(水標)를 만들어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에 세워 개천과 한강 수위를 관측하였다.

이와 같은 세종대의 우량 및 수위 관측은 유럽보다는 200년, 일본보다는 280년은 앞서는 것으로 세계 기상관측사상 최초의 일이다.
강우량과 수위의 관측뿐 아니라 풍기죽(風旗竹)을 사용하여 풍향의 관측도 하였다.

그 밖의 사료에 나타난 기상현상에 대한 기록은 우박·천둥·번개·안개·서리·눈·기온 등 상당수에 달하고 있다. 이러한 기상관측과 그 제도는 15세기까지는 대체로 완성되었다.

또, 비록 원시적인 방법이나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의 색과 구름의 모양 및 움직임 등을 관측하여 날씨를 예측하고, 경험에 의해 기후에 대처하는 관천망기법(觀天望氣法)이나, 비를 예측하여 농사에 성공할 수 있도록 농서(農書)에 기술되어 전해내려 온 농가점후(農家占候)가 민간에 널리 있었다.

02. 현대의 관측

"1953년 중앙관상대가 서울로 복귀해오면서 새로운 기계가 도입되고 1956년에는 세계기상기구(WMO)에 정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1981년 중앙관상대를 중앙기상대로 개칭하였으며, 1990년에는 기상청으로 되었다."

현대 관측기기를 사용한 근대적 관측은 1884년 해양 기상을 관측하기 위해 부산진에 간이기재(簡易器材)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다.

1904년 인천·부산·목포·신의주·원산 등 5개소에 관측소가 설립되었고, 그 뒤 점차 늘어나 1934년에는 15개소의 관측소와 200여 개소에 달하는 간이 관측소 및 우량 관측소가 정비되어 전국에 관측망을 가지게 되었다.

광복 때까지 전국에 24개 측후소가 있었는데, 남한에는 14개 측후소가 있었다. 6·25로 관측 사업은 일시 중단되었으나, 1953년 중앙관상대가 서울로 복귀 해오면서 새로운 기계가 도입되고 1956년에는 세계기상기구(WMO)에 정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1981년 중앙관상대를 중앙기상대로 개칭하였으며, 1990년에는 기상청으로 되었다.현대 관측기기를 사용한 근대적 관측은 1884년 해양 기상을 관측하기 위해 부산진에 간이기재(簡易器材)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다. 1904년 인천·부산·목포·신의주·원산 등 5개소에 관측소가 설립되었고, 그 뒤 점차 늘어나 1934년에는 15개소의 관측소와 200여 개소에 달하는 간이 관측소 및 우량 관측소가 정비되어 전국에 관측망을 가지게 되었다.
1985년에는 남한 주요지에 30개소의 측후소와 38개의 관측소를 두게 되었다. 특수 시설로는 서울 관악산에 레이더 관측소와 포항에 고층 기상 관측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1971년부터 자동송화장치(APT)를 설치하여 기상 위성으로부터 수신하고 있다.

또, 1977년 일본이 궤도에 진입시킨 정지기상위성(GMS)의 자료 수신소를 설치하여 1980년부터 노아(NOAA)자료와 함께 정지기상위성 자료를 수신하고 있다. 이들 자료는 우리 생활과 밀접한 기상예보 기후 자료로 제공되고 있으며 선진대열에 뒤지지 않는 관측 활동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참고문헌
韓國의 氣候(金光植 外, 一志社, 1973), 韓國의 禁忌語·吉兆語(金聖培, 正音社, 1975), 韓國科學技術史(全相運, 科學世界社, 1976), 生活氣象과 日氣俗談(金光植, 鄕文社, 1979), 韓國地誌總論(建設部國立地理院, 1980), 韓國住宅建築(朱南哲, 一志社, 1980), 俗談辭典(李基文, 一潮閣, 1982), 韓國食生活風俗(姜仁姬·李慶馥, 三英社, 1984), 被服衛生學(申仁秀, 耕春社, 1984), 韓國歲時風俗硏究(任東權, 集文堂, 1985), 한국기후편람(중앙기상대, 1985), 한국의 기후와 문화(金蓮玉, 梨花女子大學校出版部, 1994), 氣候學槪論(金蓮玉, 正益社, 1995), 韓國文化史大系 Ⅲ-科學·技術史-(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68), 韓國文化史大系 Ⅳ-韓國服飾史-(金東旭, 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70), 朝鮮民俗大觀 2-織造-(金聲遠, 高麗大學校民俗文化硏究所, 1980), 한국기상학의 어제와 오늘(최희승, 韓國氣象學會創立20周年紀念特輯號, 1983).

기후 관측 기관
01. 서운관

"서운관에서는 원시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일식과 월식을 예보하고, 태양 흑점과 1264년(원종 5)과 1374년에는 2개의 보기 드문 큰 혜성을 관측하였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기상관측 등을 관장하던 관서이다. 천변지이(天變地異)를 관측, 기록하고, 역서를 편찬하며, 절기와 날씨를 측정하고, 시간을 관장하던 곳이다. 고려시대는 태복감(太卜監)·사천대(司天臺)·사천감(司天監)·관후서(觀候署) 등의 명칭으로 바뀌어오다가 1308년(충렬왕 34) 서운관으로 개칭되었다.

당시의 관원은 정3품에 해당하는 제점(提點) 1인의 책임 아래 20인에 이르는 직원으로 구성되었다. 고려시대의 서운관은 천문대로서 개성에 첨성대를 가지고 일식과 월식, 5행성의 운행, 혜성과 유성의 출현 등을 관찰하였다고 ≪고려사≫ 천문지(天文志)에 기록되어 있다.

서운관에서는 원시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일식과 월식을 예보하고, 태양 흑점과 1264년(원종 5)과 1374년에는 2개의 보기 드문 큰 혜성을 관측하였다. 조선 건국 후 서운관의 기능은 그대로 계승되어 1395년(태조 4) 권근(權近) 등이 돌에 새긴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天象列次分野之圖〉를 제작하였다.

세종 때는 영의정의 책임하에 60인에 달한 관원들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장영실(蔣英實) 등으로 하여금 물시계, 천체관측용 기기인 간의(簡儀), 사계절과 일월5성의 운행을 알아볼 수 있는 혼천의(渾天儀), 해의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하는 앙부일구(仰釜日晷) 등의 많은 측정기기들을 제작하게 하였고, 천문대로서 경복궁과 북부 광화방(北部廣化坊)의 두 곳에 각각 간의대(簡儀臺) 또는 관천대(觀天臺)를 건립하였다.

특히, 비의 양을 재는 측우기(測雨器)와 하천의 깊이를 알아볼 수 있는 수표(水標)를 제작, 설치한 것은 세계적으로 처음 있은 일이었다. 세종 이후 몇 차례 개편되다가 세조 때에 이르러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世宗實錄, 書雲觀志(成周悳), 韓國科學史(全炳機, 二友出版社, 1982), 韓國科學古典叢書 Ⅰ-書雲觀志·國朝曆象考-(韓國科學史學會編, 誠信女子大學校 出版部, 1984), 朝鮮科學史(洪以燮, 正音社, 1949). 羅逸星

02. 관상감

"조선시대에는 1425년(세종 7)에 이를 관상감이라 개칭해 예조에 속하게 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사력서(司曆署)로 개칭했다가 중종 때에 다시 관상감으로 환원하였다."

조선시대 천문·지리·역수(曆數)·점산(占算)·측후(測候)·각루(刻漏)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서. 신라에서는 첨성대를 만들어 측후에 대비하기도 했으며, 고려시대에는 건국 초에 천문관서로서 태복감(太卜監)·태화국(太火局)을 두었다가 뒤에 사천대(司天臺)·사천감(司天監)·관후서(觀候署)·서운관(書雲觀) 등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조선시대에는 1425년(세종 7)에 이를 관상감이라 개칭해 예조에 속하게 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사력서(司曆署)로 개칭했다가 중종 때에 다시 관상감으로 환원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관원은 다음과 같다. 영사(領事)는 영의정이 겸임하고, 제조(提調) 2인, 정(正, 정3품) 1인, 부정(副正, 종3품) 1인, 첨정(僉正, 종4품) 1인, 판관(判官, 종5품) 2인, 주부(主簿, 종6품) 2인, 천문학·지리학 교수(종6품) 각 1인, 직장(直長, 종7품) 2인, 봉사(奉事, 종8품) 2인, 부봉사(副奉事, 정9품) 3인, 천문학·지리학 훈도(訓導, 정9품) 각 1인, 명과학(命課學) 훈도(정9품) 2인, 참봉(종9품) 3인을 두었다. 이 밖에 산원(散員)이라 하여 천문학·지리학·명과학 분야로 나누고 임시직 인원을 다수 채용하였다.

세종 때 경회루 북쪽에 천문 관측 기구인 간의대(簡儀臺)를 만들었고, 선조 때 흠경각(欽敬閣)을 지었다. 또 영조 때 다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석각(石刻)의 천문도(天文圖)를 설치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관상감은 폐지되고 관상소(觀象所)가 설치되었는데, 기구가 축소되어 소장·기사·기수·서기 등 약간 명만 두어졌다. 관상감은 지금의 기상청과 천문대에 해당한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전 휘문중고등학교 교정)에 그 유적인 일영대(日影臺)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書雲觀志, 六典條例, 經國大典, 大典會通, 增補文獻備考.

03. 관상소

예조에 소속되었던 관상감(觀象監)이 1894년에 학무아문(學務衙門) 소속의 관상국(觀象局)으로 바뀌고, 다시 1895년에 학무아문이 학부로 바뀌면서 관상소로 되었다.

조선 말기 학부(學部)에 소속되어 천문·기상을 관측하는 관상(觀象)·측후(測候)·역서조제(曆書調製)등의 사무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예조에 소속되었던 관상감(觀象監)이 1894년에 학무아문(學務衙門) 소속의 관상국(觀象局)으로 바뀌고, 다시 1895년에 학무아문이 학부로 바뀌면서 관상소로 되었다. 소속관원으로는 주임관(奏任官)인 소장 1인과 기사 1인, 판임관(判任官)인 기수(技手) 2인과 서기 2인이 있었는데, 1897년에는 기사 2인을 증원하였다. 관상소는 학부대신의 관리에 속하였다. 그리고 관상소장은 학부대신의 지휘를 받아서 소관사무를 관장하여 처리하고 부하직원을 감독하였으며, 초대관상소장은 이돈수(李敦修)였다. 또한, 기사·기수는 상관의 명을 받아서 기술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는데, 초대기사는 유한봉(劉漢鳳)이고, 기수는 전태선(全泰善)·김택주(金宅周)였다. 관상소는 1907년에 측후소로 이름을 고쳤는데, 실질적인 운영은 일본인이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04. 측후소

측후소의 업무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기상관측업무로, 대기층(大氣層)에서 일어나는 물·먼지·빛·전기 현상, 지진 또는 화산과 관련되는 여러 현상을 관측, 탐지하는 일이다. 둘째는 기상예보업무로, 관할지역에 대한 국지예보를 발표한다. 셋째는 통계업무로, 기상에 관한 자료를 수집, 기후 자료를 생산하는 일이다.

관할지역의 기상관측 및 예보를 담당하는 기관. 1904년 부산·목포·인천·원산 및 용암포에 측후소가 설치되어 현대적 의미의 기상관측이 시작되면서 그 수도 점차 늘어나 광복 직후에는 26개소(남한 14, 북한 12)가 되었으며, 현재는 기상청 산하기관으로 24개소가 있다.

측후소의 업무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기상관측업무로, 대기층(大氣層)에서 일어나는 물현상·먼지현상·빛현상·전기현상, 지진 또는 화산과 관련되는 여러 현상을 관측, 탐지하는 일이다.
기상관측은 지상·고층·해상·항공·농업·위성·레이더·특수 기상관측 및 지진관측으로 분류된다. 관측시각은 지정 시각에 행하는 정시관측과 필요에 따라 행하는 임시관측으로 구분되며, 지상 기상관측의 경우는 정시관측은 0시부터 3시간 간격으로 1일 8회 실시하고, 태풍과 같은 악기상(惡氣象)일 때는 매시 또는 수시로 관측한다. 관측요소는 측후소에 따라 다르나 기본적으로 일기·습도·풍향·풍속·기압·운형·운량·기압 변화량·운저고도·시정·강수량·기온 등을 관측하며, 특히 농업 기상에 관한 관측은 수원측후소가, 고층 기상관측은 포항측후소, 항공 기상관측은 김포공항측후소가 담당하고 있다. 측후소에서 관측된 자료는 컴퓨터 단말기를 통하여 기상청으로 보내진 뒤 국내외로 방송되어 기상예보의 기초자료가 된다.
둘째는 기상예보업무로, 관할지역에 대한 국지예보를 발표한다. 그 지역의 기상 특성을 고려하여 정확하고 신속하게 기상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셋째는 통계업무로, 기상에 관한 자료를 수집, 기후 자료를 생산하는 일이다. 특히, 그 지방의 특성을 조사, 분석함으로써 각종 산업 분야의 기초자료로 제공된다. 또한, 측후소에서 관측된 모든 기상 자료는 그 지방의 기후특성 자료로 영구 보존되며, 여러 분야에서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다.

천문관측 시설
01. 천문대 역사적 변천

"전문적인 천문대로서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은 647년에 건립된 경주의 첨성대(국보 제31호)이다. 신라는 이 천문대를 사용함으로써 선덕여왕 이전의 704년간보다 오히려 그 이후의 288년간 더 많은 관측기록을 남겼다."

〔옛 천문대〕 우리 나라에서 행해진 천문관측은 단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塹星壇, 사적 제136호)에서 이 때부터 별에 제사지낸 일이 있다. 이 참성단은 단군시대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일식·월식과 북극 고도를 관측하기 위하여 관상감의 관원들이 자주 사용하던 천문대였다. 지금은 국내 체육대회에 사용하는 성화를 태양으로부터 취하는 의식을 이곳에서 하고 있으므로 천문대로서의 기능은 부분적으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전문적인 천문대로서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은 647년에 건립된 경주의 첨성대(국보 제31호)이다. 신라는 이 천문대를 사용함으로써 선덕여왕 이전의 704년간보다 오히려 그 이후의 288년간 더 많은 관측기록을 남겼다.
통일신라를 계승한 고려왕조는 삼국시대보다 천문학을 더욱 발전시켰고, 천문관측을 위한 첨성대를 개성에 있는 만월대 서쪽에 건립하였다. 6·25전쟁 중에 전화를 입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이전까지의 모습은 높이 10척인 다섯 개의 돌기둥이 가로·세로 각 10척인 지붕을 받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의 지붕이 아니고 네 귀퉁이에 지름이 15㎝ 되는 구멍이 패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 또 다른 기둥을 박아서 그 위에 한층 더 올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마지막 왕조인 조선에는 적어도 네 개의 천문대가 건설되었으나 현재는 두 개만 남아 있다. 먼저 없어진 두 개의 천문대 중 하나는 1434년(세종 16)에 준공된 대간의대(大簡儀臺)로 당시에 제작된 관측기기들을 전부 설치했던 큰 천문대였다.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있던 이 천문대는 불행하게도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없어졌다. 두번째는 1702년(숙종 28)에 경희궁 개양문 밖에 세워졌던 관청대인데, 조선총독부가 일본인을 위해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를 세우려고 헐어 버렸다.
한편, 현재 남아 있는 두 천문대 중 하나는 보물 제851호로 지정된 창경궁의 소간의대이다. 이것은 1688년에 금호문 밖에 세웠던 것인데, 그 뒤 두세 번 옮겨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 옮길 때마다 새 돌을 갈아 끼웠기 때문에 새로 본떠서 만든 것같이 되어 버렸다.

마지막 천문대는 서울특별시 사적 제296호로 지정된 북부 광화방(北部廣化坊)의 관천대이다. 이것도 1688년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관천대 위에는서남북을 가리키는 십자선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관측 석대(石臺)까지 잘 보존되어 있으며, 사방의 난간을 제외하고는 전부 본래의 석재가 그대로 남아 있다. 가히 조선시대의 천문대를 대표하는 훌륭한 유물이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망원경이 설치된 천문대가 두 곳에 생겼으나 변변하지는 못한 것들이었다. 1927년경에 연희전문학교에 구경 15㎝ 굴절망원경이 본관 옥상에 설치되어 주로 교육에 사용되었고, 또 하나는 총독부 기상대(인천시 송월동 소재)에 작은 굴절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두 망원경은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각각 분실 또는 파괴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길이 없다.

〔현재의 천문대〕 8·15광복을 맞았으나, 연구용 망원경을 갖춘 천문대가 생기게 된 것은 1974년에 발족한 국립천문대가 그 시작이었다. 이 천문대는 1975년 소백산에 60-㎝급 망원경을 설치하였는데, 1986년에 모든 업무와 기능이 전자통신연구소 부설 천문우주과학연구소로 이관되었다. 이 시기에 천문우주과학연구소는 대덕전파천문대에 밀리미터파 전파를 수신할 수 있는 지름 14m 전파망원경을 도입하였고, 소백산관측소를 소백산천문대로 개칭하였다. 그 뒤 1991년에 표준과학연구원 부설 천문대로 다시 직제가 개편되었다. 국내 천문학의 지속적인 발전으로 중대형 광학망원경에 대한 국내 수요가 급증하게 되자 천문대(구 국립천문대)는 1995년 경상북도 영천시 보현산에 1.8m 광학망원경과 태양활동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기 위하여 태양플레어 망원경을 그
이듬해에 설치하여 보현산천문대를 설립하였다. 한편 지상에서의 관측과 더불어 우주에서의 천문관측을 위하여 2002년경 발사 예정인 과학위성 1호에 우주관측장비를 이용한 관측연구를 위하여 인공위성연구센터, 서울대학교, 버클리대학교 등과 공동 연구로 자외선 천문관측 탑재체 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국가 유일의 천문기관인 천문대는 이 외에도 해마다 역서를 발간하는 등의 민원업무를 수행할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과학문화 발전을 위해 천문지식 보급에도 힘쓰고 있다.

한편 대학의 경우, 1980년에 연세대학교천문대가 경기도 고양군 일산읍에 60-cm급 망원경을 설치한 뒤부터 많은 대학교에서 40-cm급에서 75-cm급의 망원경을 설치하여 교육 및 연구목적의 천문대를 운영하여 왔다. 또한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여러 천문현상들과 관련하여 일반인들의 천문학에 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민간 주도의 사설 천문대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20-cm급의 굴절망원경과 40-cm급 이상의 반사망원경을 보유하고 있는 천문대는 다음과 같다.
① 20-㎝ 굴절망원경:천문대(대덕연구단지)·부산학생과학관(관내). ② 40-㎝ 반사망원경:경북대학교(교내)·공주대학(교내)·부산대학교(교내)·서울대학교(교내)·연세대학교(교내)·한국교원대학교(교내 설치중)·이화여자대학교(교내)·충남대학교(교내)·충북대학교(교내). ③ 60-㎝ 반사망원경:천문대(소백산천문대)·연세대학교천문대(일산관측소)·서울대학교(교내)·세종천문대(여주, 사설천문대). ④ 75㎝ 반사망원경:경희대학교(교내)·세종대학교(대양천문대) ⑤ 1-m 반사망원경:연세대학교(충청북도 진천군, 설치중)·충북대학교(충청북도 청주시, 설치중) ⑥ 1.8m 반사망원경:천문대(보현산천문대) 등이다.

≪참고문헌≫
增補文獻備考 象緯考, 韓國科學技術史(全相運, 正音社, 1979), 연세대학교100年史(연세대학교 출판부, 1979), 觀象監 觀天臺에 대하여(全相運·羅逸星, 東方學志 40), 曆書(中央觀象臺·國立天文臺·天文宇宙科學硏究所, 1985), Korea Astronomy(Rufus,W.C., Korea Branch of Royal Asiatic Society Transactions, 1975). 羅逸星

02. 첨성대

"별을 보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하여 별이 나타내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역법(曆法)을 만들거나 그 오차를 줄이기 위하여 별이나 일월오성(日月五星)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다."

〔개 설〕 현존하는 첨성대 중 대표적인 것은 신라시대 경주에 있었던 것이다. 별을 보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하여 별이 나타내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역법(曆法)을 만들거나 그 오차를 줄이기 위하여 별이나 일월오성(日月五星:해와 달 그리고 지구에서 가까운 금성·목성·수성·화성·토성의 다섯 행성)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다.

전자는 미신적인 점성학이고, 후자는 과학적인 천문학 또는 역학(曆學)이다. 이 두 가지 관측의 비중은 시대가 지날수록 후자 쪽이 강하게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다. 우리 나라의 첨성대도 점성학적인 비중이 컸던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변천과정〕

(1) 고구려 : 고구려의 첨성대에 대하여는 ≪세종실록≫지리지에 “평양성 안에 9묘(廟)와 9지(池)가 있는데…… 그 못가에 첨성대가 있다.”는 기록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평양의 첨성대 옛터가 평양부 남쪽 3리(里)에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고구려의 첨성대를 말하는 것인데 현재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2) 신 라 : 신라의 첨성대는 경주에 실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삼국유사≫·≪고려사≫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증보문헌비고≫ 등에 기재되어 있다. 선덕여왕 때에 축조된 것으로 상방하원(上方下圓: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근 모양)이며, 높이는 19척5촌, 위의 원둘레가 21척6촌, 아래의 원둘레가 35척7촌이며, 중간 이상이 위로 뚫려서 사람이 그 속으로 오르내리며 별을 관측하였다는 기록이 현존 실물과 일치한다.

이 첨성대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점성대(占星臺)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는데, 얼마 뒤에 일본에서 점성대를 쌓았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이 사실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 경주의 첨성대는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3) 백 제 : 백제의 첨성대에 대해서는 문헌의 기록도 없고 건축물이 있었던 터도 없다. 그러나 백제가 일본과 천문역법을 교류한 역사적 사실로 보아서 ≪일본서기≫에 나타난 첨성대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4) 고 려 : 고려의 첨성대에 대한 기록도 별로 없다. 그러나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정상의 참성단(塹星壇)의 기록과 터, 그리고 개성 만월대(滿月臺) 서쪽에 첨성대라고 구전(口傳)되는 석조물이 전해오고 있다.

여러 지리지에 따르면, 참성단은 돌을 쌓아서 만든 것으로 높이가 10척 상방하원이며, 위의 사면(四面)이 각각 6척6촌, 아래의 원 너비(지름)가 각각 15척이다. 세간에 전하기를,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를 올린 곳으로 산기슭에 재궁(齋宮)이 있어서 매년 봄·가을에 대언(代言:承旨)을 보내어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점성과 제천(祭天)의 관계, 참성단과 경주 첨성대의 상방하원의 형태상의 비슷함과 명칭이 소리가 서로 비슷한 것, 그리고 그 뒤 조선시대에 마니산 산정에서 천문관측을 하였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고려가 몽고의 침공을 받았던 강화도에 도읍이 있었던 때의 첨성단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심이 가는 곳이다.

만월대의 첨성대는 높이 3m 가량의 다섯 개의 돌기둥으로 받친 석대(石臺)로서 위의 평면넓이가 대략 3m×3m로 9㎡이다. ≪고려사≫에는 충렬왕 7년(1281) 원나라에서 수시력(授時曆:원나라 곽수경이 만든 달력)이 들어 왔는데, 왕은 태사원(太史院)에 명하여 영대(靈臺:임금이 기상을 보는 대)와 천문기기(天文器機:觀象)를 만들어서 일월(日月)을 관측하여 도수(度數:각도나 광도 등의 크기)가 맞는가를 자세하게 참고하고 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이때부터 그 영대 위에 측기(測器)를 놓고 천문관측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만월대의 첨성대가 설령 이 밖의 기록은 없다 해도 위의 기록과 같은 관측에 사용되었던 관천대(觀天臺)일 가능성은 매우 크다.

(5) 조 선 :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개국 초부터 고려의 서운관(太卜監과 太史局을 합친 것)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는데, 1420년(세종 2)에는 첨성대를 세우고, 그 뒤에 다시 경복궁 안의 서운관을 확충하여 간의(簡儀:장영실과 이천 등이 만든 관측기)를 비롯한 천문기기를 10여 종이나 만들어서 설치하고 관측하였다. 그 중 간의를 올려놓은 간의대(簡儀臺)는 돌로 쌓은 것으로 높이가 31척, 길이가 47척, 너비가 32척이었다.

이 관상감(서운관의 바뀐 명칭)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더불어 불타 없어지자, 1688년(숙종 14) 남구만(南九萬)이 북부 광화방(廣化坊)에 터를 잡아 관상감을 재건하였다. 이것이 곧 창덕궁 금호문(金虎門:지금의 현대건설 자리) 밖에 있는 높이 3.5m, 넓이 2.4m×2.5m인 관천대(觀天臺)로서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대 위에는 높이 1m의 네모진 돌이 있는데 관측할 때에 소간의를 설치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 대를 일명 소간의대(小簡儀臺)라 하고 속명(俗名)으로는 첨성대라고 한다고 ≪서운관지 書雲觀志≫에 적혀 있다. 이 관천대와 비슷한 것이 현재 창경궁 안에도 남아 있는데 높이 3m, 넓이 2.9m×2.3m이며, 역시 그 위에 높이 1m 정도의 네모진 돌이 놓여 있다. 그러나 제작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715년(숙종 41) 또 하나의 관상감을 경희궁 개양문(開陽門) 밖에 만들었는데, 거기도 관천대가 있었다고는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다만 〈도성도 都城圖〉에만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이상에서 우리 나라 첨성대의 변천에 관하여 대략 살펴보았다. 첨성대는 처음에는 점성대라고도 불려서 다분히 점성적이었던 것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 영대라고도 하였다가 다시 관천대, 즉 더 정확하게는 간의대·소간의대라고 하는 과학적인 명칭으로 변하여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로부터의 습성에 따라 후세에까지 여전히 첨성대라고 불렸던 것이 사실인 듯하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增補文獻備考, 燃藜室記述, 書雲觀志, 國朝曆象考, 宮關志, 漢京識略, 東國輿地備考, 韓國科學技術史(全相運, 正音社, 1976), 日本書紀, Korean Astronomy(Rufus,W.C., Royal Asiatic Society, 1936), 動産文化財指定報告書(文化財管理局, 1989), 朝鮮古代觀測記錄調査報告(和田雄次, 朝鮮總督府觀測所, 1917)

03. 관상감관천대

"관천대의 측정된 방위와 경위도를 알아보면, 십자선이 그어져 있는 관측용 대석의 남북선 방위각은 353°로서 진북(眞北)방향에서 서쪽으로 7° 기울어져 있으며, 자북(磁北)방향과 거의 일치한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에 있는 조선 전기의 관천대(사적 제296호)이다. 조선 초기의 관상감은 경복궁 영추문 안과 북부 광화방(廣化坊)의 두 곳에 있었는데, 이 중 북부 광화방의 관상감이 바로 지금 현대건설주식회사가 자리잡은 터에 있었던 것으로, 이 관상감이 세워질 때 관천대도 함께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그 연대는 15세기 전반일 것으로 판단된다.

이 관천대는 옛 휘문중고등학교 안에 있었다가, 1984년 가을에 현위치에 복원되었다. 휘문중고등학교에 있을 때 측정된 방위와 경위도를 알아보면, 십자선이 그어져 있는 관측용 대석의 남북선 방위각은 353°로서 진북(眞北)방향에서 서쪽으로 7° 기울어져 있으며, 자북(磁北)방향과 거의 일치한다.

관천대 축조물의 방위각은 6°로서 진북방향에서 동쪽으로 6° 기울어져 있으며, 북위 37°35′0″, 동경 126°57′2″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시내에는 이 외에도 창경궁 안에 또 하나의 관천대가 있으며, 그 축조연대는 ≪서운관지 書雲觀志≫에 1688년(숙종 14)으로 밝혀져 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書雲觀志, 서울六百年史-文化史蹟篇-(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 1987)

04. 관천대

서울특별시 중구 와룡동 창경궁 안에 있는 조선 후기의 천문관측시설(보물 제 851호)이다. 이 천문관측소는 ≪서운관지 書雲觀志≫에 의하면 1688년(숙종 14)에 축조된 것으로 높이가 2.2m, 크기는 가로 2.4m, 세로 2.3m 정도의 화강석 축조물로 그 위에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하고 천문을 관측했다.

따라서, 당대에는 ‘소간의대’ 또는 별을 관측하는 대라 하여 ‘첨성대’라고도 알려졌다. 지금은 소간의는 없어진 채 돌대만 남아 있다. 창경궁의 관천대에는 위에 돌난간이 둘려 있고, 돌계단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대의 한가운데에는 다시 돌대가 놓여있어 그 위에 소간의를 설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書雲觀志

05. 관상감 측우대

서울특별시 중구 와룡동 창경궁 안에 있는 조선 후기의 천문관측시설(보물 제 851호)이다. 이 천문관측소는 ≪서운관지 書雲觀志≫에 의하면 1688년(숙종 14)에 축조된 것으로 높이가 2.2m, 크기는 가로 2.4m, 세로 2.3m 정도의 화강석 축조물로 그 위에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하고 천문을 관측했다.

06. 측우대

"1910년경에 확인된 측우대는 모두 9기(基)가 있었다. 측우기명의 완전 해독은 ≪한경지략≫의 기록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다만 기록 중 측우기가 1442년(세종 24)에 발명된 것같이 적혀 있는 것은 결정판에 따른 결과이고 1441년에 발명된 것은 확실하다. "

측우기를 안정(安定)하게 올려놓고 우량 측정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만든 대석(臺石). 화강석(花崗石)·대리석·일반 석재 등으로 만들었으나 그 모양과 크기는 일정하지 않다. 1910년경에 확인된 측우대는 모두 9기(基)가 있었다.

즉, 관상감 측우대·대리석 측우대·선화당 측우대·통영 측우대·평양 측우대·함흥 측우대·함평 측우대·강릉 측우대·경성 측우대이다. 그리고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것이 2기(공주·춘천)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남한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측우대는 5기뿐이고, 1970년대 이후에 만든 모조품 측우대가 몇 기 더 있다.

관상감 측우대는 원래 경복궁 내의 관상감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고종 때 재건하면서 이 측우대는 궐 밖의 매동학교(지금의 매동국민학교) 교정 한구석에 옮겨 놓았다. 이것을 다시 1972년 11월 8일 국립 중앙기상대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매동국민학교에는 선화당 측우대를 본뜬 모조품 측우대를 설치해 놓았다. 관상감 측우대는 높이 61㎝, 길이 92㎝, 너비 58㎝로 화강석제이고 윗면에 지름 16.5㎝, 깊이 4.7㎝의 구멍이 있어 여기에 측우기를 올려놓았다.

글자가 전혀 새겨져 있지 않으나 세종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리석 측우대는 1782년(정조 6)에 제작되어 창덕궁 이문원(厘文院) 앞마당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그 네 측면에는 측우기의 내력을 설명한 명문〔測雨器銘〕 총 365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1910년경에는 이미 대리석 표면이 비바람에 깎여 글자를 읽을 수가 없었다. ≪한경지략 漢京識略≫에 측우기명의 전문이 실려 있음을 전상운(全相運)에 의하여 알게 되었다. ≪한경지략≫은 1820년대의 저술이므로 이때에는 측우대 표면이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측우기명의 완전 해독은 ≪한경지략≫의 기록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다만 기록 중 측우기가 1442년(세종 24)에 발명된 것같이 적혀 있는 것은 결정판에 따른 결과이고 1441년에 발명된 것은 확실하다.

이 측우대의 높이는 30.3㎝, 넓이는 45.3×45.5㎝이고 윗면에는 지름 16.2㎝, 깊이 4.3㎝의 구멍이 있어 측우기를 올려 놓게 되어 있다. 1920년경에 이 측우대는 당시 경성박물관 앞 계단으로 옮겨 놓았다가 6·25전쟁 때에 다시 창경궁 명정전 뒤로 옮겨 전시하였다. 1960년대 말에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겼고, 또 1970년대 후반에 여주의 영릉진열관으로 옮겨서 보관하고 있다.

선화당 측우대는 1770년(영조 46)에 만든 것으로 높이 46㎝, 넓이 37×37㎝의 화강석이고 받침돌이 있다. 앞면에 ‘測雨臺(측우대)’라는 세 글자와 제작연대가 새겨져 있다. 원래 대구 감영의 선화당 앞마당에 설치되어 있던 것을 1910년경에 한국관측소(지금의 인천 측후소)로 옮겼고, 1950년 초에 다시 서울 측후소로 옮겼다. 현재는 기상청 안에 관상감 측우대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6·25전쟁 때의 총탄 자리가 몇 군데 남아 있다.

1954년부터 중국학자들이 청대(淸代)에 측우기를 한국으로 보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제작연대를 중국연호(즉 乾隆庚寅)로 새겨 놓았기 때문이겠지만 중국에서는 측우기를 만든 사실이 없으므로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현재 대구에는 중앙공원 안에 선화당이 복원되어 있고 그 앞마당에 모조품 측우대가 전시되어 있다. 통영 측우대는 1811년(순조 11)에 만든 것으로 그 높이는 44㎝ 넓이는 43.8×43.8㎝이고, 앞면에 ‘測雨臺’라는 세 글자와 제작연대 ‘辛未二月’이 새겨져 있고 원형의 받침돌이 있다. 원래 통영(統營)에 있었던 것을 1910년경에 인천측후소로 옮겼다. 1972년에 다시 국립중앙과학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연경당 측우기는 특이한 모양으로 팔각형 기둥모양인데 위쪽보다 아래쪽이 약간 굵은 기둥이고 아래에 사각형(31×31㎝)의 기반석이 있다. 측우대의 높이는 60.5㎝, 윗면 팔각형 지름은 28.5㎝이고 원형 구멍은 지름 16㎝, 깊이 2.5㎝이다. 1828년경에 화강석으로 제작하였고, 창덕궁 연경당(演慶堂)의 장락문(長樂門) 앞에 세워져 있다. 1981년 7월 한국과학문화재 조사활동중에 새로 발견된 것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英祖實錄, 漢京識略(柳本藝, 1820年代;서울 史料叢書 二, 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 影印本, 1956), 朝鮮科學技術史(全相運, 正音社, 1976), 한국의 과학문화재 조사보고(전상운 외, 한국과학사학회지 6-1, 1984). 金聖三

07. 수표교

"1760년(영조 36)에 수리되었는데, 이때 다리 앞쪽 하천 바닥에 눈금을 새긴 돌기둥을 세웠다. 이 기둥에는 10척(尺)까지 눈금을 그어 불어나는 물의 양을 측정하게 하였다고 한다."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장충단공원 입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다리이며 길이 27m, 너비 7m.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이다. 원래는 현재의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았다. 이때 다리의 서쪽에 있었던 수표석(水標石)은 영릉의 세종대왕기념관에 옮겨졌다.

1441년(세종 23) 수표(水標)를 만들어 마전교(馬廛橋) 서쪽에 세워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여 홍수에 대비하였다. 수표가 세워지기 이전에 이곳에 우마시전(牛馬市廛)이 있어 마전교라 불리었는데, 그뒤 수표교라 바뀌었고 이 일대 동네를 수표동이라 하였다.

마전교는 1420년(세종 2)에 놓아졌는데 ≪동국여지승람≫ 교량조(橋梁條)에는 수표교로 되어 있다. 화강석을 깎아 만든 석재(石材)를 가구식(架構式)으로 짜맞추어 세운 돌다리이다. 기둥의 아래는 거칠게 다듬질 된 네모난 돌로, 위는 고르게 다듬은 네모난 돌로 만들어 2단으로 포개어 쌓았다. 이 가운데 위 4각주(四角柱)는 물의 흐름이 유연하도록 모서리를 물의 방향에 맞추어 배열하였다.

모두 9줄 5열로 배열한 돌기둥 위에는 양 끝을 반원형으로 다듬은 굵고 긴 석재를 세로로 걸쳐놓았고, 그 위에 바닥돌을 가로·세로로 짜맞추어 바닥면을 구성하였다. 바닥의 양쪽 언저리에 돌난간을 세웠는데, 한쪽마다 엄지기둥 11개를 세우고, 그 사이에 동자기둥 1개씩을 세워 6모로 된 난간석을 받쳤다. 난간을 구성하고 있는 부재는 연꽃봉오리·연잎 등을 모티프로 하여 설계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돌난간의 전형적인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1760년(영조 36)에 수리되었는데, 이때 다리 앞쪽 하천 바닥에 눈금을 새긴 돌기둥을 세웠다. 이 기둥에는 10척(尺)까지 눈금을 그어 불어나는 물의 양을 측정하게 하였다고 한다. 한편 교각(橋脚)에도 ‘庚辰地平(경진지평)’이라는 글씨를 새겨 수준(水準)으로 삼았다. 1406년(태종 6)에 인공으로 물길을 뚫어 만든 개천 위에는 돌다리 7개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수표교만이 남아 있다. 다리 곳곳에는 ‘丁亥改造(정해개조)’·‘戊子禁營改造(무자금영개조)’ 등의 글씨가 남아 있어서 500여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수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길을 건너는 통로로서뿐만 아니라 홍수의 조절을 위하여 수량(水量)을 재는 구실도 하였던 중요한 다리이다.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京城府史(京城府, 1934), 橋梁工學(黃鶴周, 東明社, 1982), 서울文化財大觀(서울特別市, 1987), 한양 도읍을 관류하는 청계천과 교량에 대한 고찰(朱潤, 鄕土서울 44, 1987). 黃鶴周

08. 현대의 천문대

천문현상을 관측하고 연구하는 기능과 역서 편찬을 비롯하여 민원업무까지 수행하는 기관.

〔내 용〕 그러나 전자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경우가 더 많다. 천문학 지식이 체계화되지 못했던 고대에는 천문현상에 대한 분명한 규정이 없었으므로, 성점(星占)과 측후(測候:기상 측정)까지 포함한 천문 이외의 일까지 관장한 일이 많았다.
이와 같은 경우를 보여주는 예는 기원전 바빌로니아의 천문대로부터 신라의 첨성대와 조선시대 관상감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현대과학이 확립되면서 성점은 미신적인 행위이므로 제거되고, 측후는 기상업무로 분리되었다.

〔종 류〕 현대 천문대는 그 관측하는 수단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한다.

(1) 광학천문대(光學天文臺) : 이 천문대는 가시광선(可視光線)을 이용한 육안관측·사진관측·광전관측(光電觀測) 등과 같은 측광(測光)을 비롯하여 가시광선을 파장별로 분산시켜 얻은 스펙트럼을 측정하는 분광관측(分光觀測)을 한다. 관측대상은 지상에서 받을 수 있는 가시광선을 방출하는 모든 천체를 망라한다. 이 천문대가 하고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일은 천체들의 위치를 정확히 관측하는 것인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육안관측과 사진관측이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광학천문대로서 현재 좋은 업적을 올리고 있는 곳은 전세계에서 약 360개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 천문대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망원경으로는 소련의 6m구경과 미국의 5m구경의 반사망원경이 있는데, 일본이 미국의 마우나케아섬에 더 큰 망원경을 설치하려고 추진하고 있다.

(2) 전파천문대(電波天文臺) : 태양을 비롯하여 태양계의 여러 천체들과 어떤 전화단계에 와 있는 별들, 그리고 외부 은하들로부터는 가시광선만이 아니라 전파도 발생된다. 대부분의 파장대(波長帶)에 있는 전파는 지구의 전리층(電離層)에 흡수되어 지상에 도달하지 못하나, 이 전리층을 뚫고 들어오는 파장의 전파도 있다.
거대한 면적을 가진 접시형의 수신판(受信板)을 가지고 전파를 받아서 증폭시켜 보면 그 전파를 내보내고 있는 천체의 물리적 상태를 연구할 수 있다. 이러한 장치를 전파망원경이라 하고, 이러한 일을 하는 천문대를 전파천문대라고 한다. 큰 전파망원경을 가지고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는 천문대는 전세계에 60여 개에 달하고 있으며, 가장 큰 망원경은 아레시보 전파천문대에있는 지름 305m의 고정식 망원경이다.

(3) 공간천문대(空間天文臺) : 지구의 대기는 전파만이 아니라, 적외선·자외선·X선 등의 전자파(電磁波)를 전부 흡수해 버림으로써 이러한 전자파는 지상에 전혀 도달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전자파를 방출하는 천체를 관측하는 것은 지상에 설치된 어떤 장치로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기권 밖에 있는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에 관측장비를 탑재한다.
인공위성과 우주선은 우주공간에서 관측활동을 하므로 공간천문대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것은 태양관측천문대(Orbital Solar Observatory), 궤도천문대(Orbital Astronomical Observatory), 국제자외선탐사선 International Ultraviolet Explorer) 등이다.

천문관측 도구
01. 측우기

측우기로 측정한 우량관측 기록은 초기의 것은 거의 없어졌지만 1770년 이후의 서울의 관측기록은 조선시대의 약 140년분이 남아 있어서 현대의 관측치까지 합하면 210년 이상의 연속 관측이 되므로 서울 우량은 세계 최장 관측기록으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비의 양을 측정하는 기구. 1441년(세종 23)에 발명하여 조선시대의 관상감(觀象監)과 각 도의 감영(監營) 등에서 우량측정용으로 쓰인 관측장비로서 현대의 우량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갈릴레오(Galileo,G.)의 온도계 발명(1592)이나 토리첼리(Torricelli,E.)의 수은기압계 발명(1643)보다 훨씬 앞선 세계 최초의 기상관 측장비였다. 따라서, 측우기는 세계 기상학사에서 관천망기시대(觀天望氣時代)에 뒤따르는 측기시대(測器時代)를 약 150년 앞당겨 놓은 것이다.

측우기로 측정한 우량관측 기록은 초기의 것은 거의 없어졌지만 1770년 이후의 서울의 관측기록은 조선시대의 약 140년분이 남아 있어서 현대의 관측치까지 합하면 210년 이상의 연속 관측이 되므로 서울 우량은 세계 최장 관측기록으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삼국사기≫ 이후의 역대사료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우리 나라는 옛날부터 많은 홍수 피해를 입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1400년부터 1859년까지 서울에 난 홍수가 172회나 되므로 서울지방에서는 평균 5년마다 2회의 큰 홍수소동을 겪어야 했다. 역대의 왕이 풍조우순(風調雨順:때맞게 비가 오고 바람이 고르게 분다)을 기원하였지만 세종대왕은 기원에만 그치지 않고 측정에 의한 현상 파악을 시도한 것이다.

처음(1423년경)에는 비가 온 뒤에 빗물이 땅속으로 얼마나 스며들어 갔는지, 흙의 젖은 깊이, 즉 우택(雨澤)을 재어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비가 오기 전 토지의 상태가 건조했었는지 또는 습했었는지에 따라 같은 정도의 비가 왔는데도 우택은 같지 않았고, 또 그것을 실제로 측정하는 일이 어려웠기 때문에 18년 가량 실시한 뒤에 우택의 제도는 폐지하고 측우기를 발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1441년 최초로 만든 측우기는 주철제(鑄鐵製)로 원통형이고 깊이 약 41㎝, 지름 약 16㎝(長二尺徑八寸)이었다. 돌로 만든 대(臺, 측우대) 위에 올려놓고 비 온 뒤에 그 속에 고인 빗물에 주척(周尺:자의 한 가지)을 꽂아 세우고 물의 깊이를 읽거나 또는 주척을 연직(鉛直:다른 직선이나 평면에 대해 수직인 상태)으로 꽂았다가 뽑아내어 물에 젖어 있는 부분의 눈금을 푼(分, 약 2㎜) 단위까지 재어 보고하도록 하였다.

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에 설치한 측우기는 모두 주철로 만든 것이고 주척 역시 주철제였다. 그러나 도 이하의 군(郡) 같은 관서에는 자기(磁器) 또는 와기(瓦器)의 측우기를 만들게 하였고, 주척도 대(竹) 또는 나무로 만들어 쓰도록 하였다.

측우기의 규격은 관상감 것을 따르도록 하였고 치수는 안지름과 깊이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442년에 측우기의 규격을 약간 줄여서 깊이 약 31㎝, 지름 약 14㎝(長一尺五寸徑七寸)로 하였다.

그 까닭은 실제로 사용해보니까 깊이 약 41㎝(二尺)에 빗물이 많이 차는 일은 거의 없으며 자를 꽂아 빗물의 깊이를 재기에는 너무 깊어서 불편하였다. 또 측정한 뒤에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측우대에 안치하여야 하므로 이때에 너무 무거워서 취급상 불편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규격을 개량한 것이다.

1770년(영조 46)에 영조가 측우제도를 부흥시킬 때에 세종 24년의 제도를 본떠서 측우기를 만들 때도 이 개량된 규격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영조 이후에는 철 대신 구리〔黃銅〕로 측우기를 만들었다.

관측법은 성주덕(成周悳)의 ≪서운관지≫에 천문·기상·지진 등에 관한 현상의 정의, 관측규정, 보고법 등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우량에 관해서는 시간, 비의 종류, 빗물의 깊이를 몇치 몇푼으로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某時某更, 灑雨, 下雨, 測雨器水深某寸, 或某分).

주척을 측우기의 빗물 속에 꽂았을 때 수면이 약간 상승하여 관측오차가 생길 것을 생각할 수 있지만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에 사용하던 주척의 단면적이 4.6×14.7㎜이므로 이 정도의 자를 사용하며 빗물의 깊이는 푼 단위로 재도록 하였으므로 오차 문제는 실용상 무시해도 전혀 지장이 없었다.

1440년대에 우리 나라 각지에 측우기를 설치하여 일정한 관측 규정에 의해 보고하게 하는 전국적인 우량관측망(雨量觀測網)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세계 최초의 관측망 설치이므로 특기하여야 할 일이다.

1910년경에 확인된 측우기는 4기(器)로 모두 황동제였다. 그 하나는 경복궁내의 관상감에서 쓰던 것으로 깊이 306㎜, 안지름 147㎜였고, 둘째는 대구의 선화당(宣化堂)에 있던 것으로 깊이 217㎜, 안지름 147㎜, 셋째는 함흥에 있던 것으로 깊이 293㎜, 안지름 145㎜이다.

넷째는 공주에 있던 금영측우기로 이것만은 특이하게 세 부분을 조립하여 사용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안지름은 140㎜, 조립할 때의 깊이는 315㎜이지만, 상·중·하단 각각의 깊이는 106㎜, 105㎜, 103㎜이고 조립할 때 겹쳐지는 부분이 3㎜이며, 전체의 무게는 6.2㎏이다. 이 밖에 측우대만 확인된 것이 지금까지 8기이므로 1800년대 말기에는 최소한 8기의 측우기가 더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관상감 측우기는 국권 상실 무렵에 없어졌고, 함흥 측우기와 선화당 측우기는 1910년경 인천 측후소(당시의 한국관측소)로 옮겨 놓았다. 1950년 초에 선화당 측우기는 다시 서울측후소로 옮겨 보관하고 있었으나, 6·25전쟁중에 모두 없어졌다.

금영 측우기와 주척은 1915년경 와다(和田雄治)가 일본으로 반출해갔다. 일본 기상청에 보관되어 있던 측우기는 1971년에 반환받았으나 주척은 돌려받지 못하였다. 금영측우기는 1837년(헌종 3)에 만든 것으로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어 현재 기상청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英祖實錄, 書雲觀志(成周悳, 1818, 韓國科學古典叢書 Ⅰ, 誠信女子大學校 出版部, 1982), 數書九章 卷二(秦九韶, 1247), 韓國科學技術史(全相運, 正音社, 1976), 中華氣象學史(劉昭民, 臺灣商務印書館, 臺北, 1980), 欽定四庫全書子部(臺灣商務印書館, 影印本, 1983), 측우기 발명의 異說에 대한 고찰(金聖三, 한국기상학회지 24-1, 1988), 朝鮮古代觀測記錄調査報告(和田雄治, 朝鮮總督府觀測所, 1917), 中國氣象學史硏究 下卷(田村專之助, 中國氣象學史刊行會, 日本三島市, 1976). 金聖三

02. 풍향계

풍기죽의 구조와 모양은 〈동궐도 東闕圖〉에 나타나 있다. 세종 때까지는 나무로 만든 풍기대(風旗臺)에 풍기를 꽂아놓고 관측하였는데, 비바람에 오래 견디지 못하였으므로 1732년(영조 8)에는 화강석을 다듬어 풍기대를 만들었다. 이것은 현재 경복궁과 창경궁에 보존되어 있다.

바람의 방향을 측정하는 기계.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바람을 관측하기 위하여 기다란 세모꼴 깃발을 긴 대나무 끝에 달아 깃발이 날리는 방향을 보고 풍향을 알았다. 즉, 깃발이 동쪽으로 날리면 서풍, 남쪽으로 날리면 북풍이라는 방법이었다. 또, 깃발이 나부끼는 정도나 깃대가 바람 때문에 휘는 정도를 보고 풍속(風速)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풍기죽(風旗竹) 또는 풍기라 불렀다. 풍기죽의 구조와 모양은 〈동궐도 東闕圖〉에 나타나 있다. 세종 때까지는 나무로 만든 풍기대(風旗臺)에 풍기를 꽂아놓고 관측하였는데, 비바람에 오래 견디지 못하였으므로 1732년(영조 8)에는 화강석을 다듬어 풍기대를 만들었다. 이것은 현재 경복궁과 창경궁에 보존되어 있다.



오늘날의 풍향계는 기상청과 측후소에 설치되어 있는데, 지상의 장애물 높이 10배 이상 떨어진 평탄한 곳에서 지상 10m 높이에 설치하는 것이 표준이다. 복엽풍향계(複葉風向計)와 비행기의 수직꼬리날개와 흡사한 풍속계를 겸하고 있는 셀신(selsyn)형 풍향계가 있다. 이 셀신형은 셀신모터를 이용하여 원격조정 및 기록이 가능하다.

03. 신법지평일구

이 해시계에 절후선을 긋지 않고 시각선에 해당되는 위치에 점을 찍어 놓거나 짧은 직선으로 나타내도 좋다. 덕수궁 정원에 있는 것이 바로 그 경우이다. 신법지평일구는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2기가 있는데, 그것들은 전에 창덕궁에 있던 것을 옮겨놓은 것이다.

시반(時盤)이 수평으로 놓인 평면으로 된 해시계(보물 제840호)이다.
〔내용 및 특징〕 1636년(인조 14)에 전해진 것인데, 명나라 이천경(李天徑)이 제작한 것이다. 시반 위에 시각선(時刻線)이 방사선 모양으로, 절후선(節候線)이 쌍곡선군 모양으로 그어졌는데, 서양식 각도 수에 따랐다는 뜻에서 신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물론 이 해시계에 절후선을 긋지 않고 시각선에 해당되는 위치에 점을 찍어 놓거나 짧은 직선으로 나타내도 좋다. 덕수궁 정원에 있는 것이 바로 그 경우이다. 신법지평일구는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2기가 있는데, 그것들은 전에 창덕궁에 있던 것을 옮겨놓은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오석(烏石)으로 된 것으로, 가로 55.0㎝, 세로 38.5㎝, 두께 16.5㎝의 비교적 작은 돌 위에 금을 새겼으며, 한양(漢陽)의 위도를 37도39분이라고 써놓았는데, 이는 1713년(숙종 39) 청나라 사신 목극등(穆克登) 일행이 측정한 값 37°39′15″를 줄여서 쓴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리석으로 되었는데, 가로 57.5㎝, 세로 120.3㎝, 두께 16.5㎝의 큼직한 것으로서, 1636년에 제조된 것이다.

이들 해시계의 시반에는 영침(影針)을 수직으로 세워 놓아서 그 그림자를 볼 수 있게 하였다. 영침 대신 삼각동표(三角銅表)를 쓰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에는 그 빗변이 천구 북극을 향하게 하고, 그 면이 자오면에 일치하도록 세운다. 그리하면 영침 또는 동표 끝점의 그림자가 절후선에 따라 움직인다.

절후선 중, 춘추분선은 동서로 길게 뻗은 직선을 이루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이 직선을 등으로 하는 쌍곡선군이 된다. 그러나 이 절후선은 시각의 측정에는 관계가 없고, 시각선의 방향에만 관계된다. 삼각동표를 썼을 때, 그 빗변의 기울기(φ)는 그 지방의 위도이다. 빗변의 그림자의 정북에 대한 방위각을 α라고 하였을 때, 태양의 시간각을 t°라고 하면 다음 식이 성립된다.

tanα=sinφtant


원래 시간각은 몇 시(h) 몇 분(m)이라고 주는 것이지만, 시간각의 1시는 15°에 해당되는 각이므로 각도를 써도 좋다. 서울의 위도(φ)를 목극등의 측정치 37°39′15″라 하고, 위 식에 시간각 t를 넣어서 동표의 빗변의 그림자의 방위α를 구하면 tanα는 tant에 비례함을 알 수 있다.

이 관계는 1년 중 어느 시기에서든 항상 성립되므로 빗변 그림자의 연직선에 대한 각이 같으면 항상 같은 시각을 알려 준다. 물론 이것은 평균태양시가 아니고 진태양시를 알려준다.

≪참고문헌≫ 해시계의 歷史와 그 原理(李殷晟, 東方學志 33, 1982). 李殷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