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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

기본정보

중국 동북방의 종족 이름

일반정보

중국 동북방에 위치한 종족 이름으로서 종종 중국사서에서 호시(楛矢)를 바쳤다고 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발해말갈조에서는 후위서를 인용하여 말갈을 물길이라 하고 소동파의 「역대지리지장도」를 인용하여 읍루와 물길은 모두 숙신이라 하였다. 이것은 곧 「역대지리지장도」의 고금화이구역총요도(古今華夷區域総要圖)의 동북쪽에 “읍루・물길은 모두 숙신 땅이다.(挹婁勿吉 皆肅愼地)”라 한 것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다.

숙신의 위치는 『산해경』에서 “숙신은 백민의 북쪽에 있다. … 대황의 가운데 산이 있으니 이름은 불함이다. 이곳에 숙신국이 있다.(肅愼在白民北 … 大荒之中有山名曰不咸 有肅愼之國)”라 하였고 진(晋)의 곽박(郭璞)은 이에 대해 주(註)를 달아 “지금의 숙신국은 요동에서 3천여 리 떨어져 있다.(今肅愼國去遼東三千餘里)”고 하였다. 『신당서』에서는 숙신의 고지에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를 두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기록들을 고찰하면 숙신의 위치를 모란강(牡丹江) 중류지역에 비정할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孫進己, 1987)

숙신의 정체성에 관하여, 기존의 연구에서는 대부분 숙신(肅愼)・읍루(挹婁)・물길(勿吉)・말갈(靺鞨)・여진(女眞)・만족(滿族)은 하나의 민족이며 일맥상승(一脈相承) 했다고 파악한 연구가 있다.(池內宏, 1951)

한편 숙신(肅愼)・읍루(挹婁)・물길(勿吉)은 단지 동종이족(同種異族)이라 주장한 연구도 있다. 중국 문헌에서는 이 세 종족을 하나로 통칭하여 같은 종족인 것처럼 기술하였으나 , 실제로는 중국사서에서 숙신・읍루・물길을 병렬적으로 기술하며 그 구체적인 위치는 각각 다름을 볼 때 숙신・읍루・물길은 다른 부락이라는 것이다. 『삼국지』에서 숙신이 호시(楛矢)를 바쳤다는 기사가 나온 뒤 『후한서』에서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라고 하여 마치 당시에 숙신은 존재하지 않고 읍루만이 있는 것처럼 기록하였다. 그러나 『진서』 권97 열전67 사이(四夷) 숙신조에는 오히려 숙신씨는 일명 읍루라 한다는 내용이 나오므로 당시에도 숙신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외 『진서』 문제기의 경원 3년(262)과 무제기 함녕 5년(279)에도 모두 숙신이 고시를 헌납했다고 하여 숙신이 등장한다. 곧 숙신(肅愼)・읍루(挹婁)・물길(勿吉)은 같은 족으로 일맥상승(一脈相承)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孫進己, 1987)

또한 일제강점기에 조선(朝鮮)・숙신(肅愼)・식신(息愼)・직신(稷愼)・여진(女眞) 등의 음이 비슷하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조선과 숙신이 동일하다고 견해들이 전한다. 그러나 숙신과 조선의 음이 유사하다는 것만으로 동일종족이라 보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숙신이 흑룡강 유역에 거주했다는 고아시아족(古Asia族)일 가능성을 제기한 연구가 있었다.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30 읍루(挹婁)조와 『진서』 권97 열전67 사이(四夷) 숙신조의 기사를 분석하여 숙신의 위치를 흑룡강 유역과 일부 연해주가 포함된 곳으로 보았는데, 흑룡강 유역 주민들의 언어와 민속 연구에 의하면, 기원전후까지 고아시아인들은 동부 시베리아와 흑룡강 분지에 살고 있었으므로 만주인들이 이곳에 머물 수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선진(先秦) 시기부터 중국 사서에서 언급되는 숙신은 고아시아족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김정배, 1973)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祖國社.
김정배, 1973, 『韓國民族文化의 起源』, 고려대학교출판부.
孫進己, 1987, 『東北民族源流』, 黑龍江人民出版社.
옥저
<항목>
편명-기이1 / 국가-일반
<표제어>
한글-옥저 / 한자-沃沮
함남의 함흥부근부터 함북 해안지역 및 그 이북의 중국 동북지역과 연해주 남주지역에 걸쳐서 존재한 남옥저(혹은 동옥저)‧북옥저의 총칭
현재 함경남도 함흥부근부터 함경북도의 해안지역 및 그 이북의 중국 동북지역과 연해주 남주지역에 걸쳐서 존재한 남옥저(혹은 동옥저)・북옥저를 합하여 일컫는 명칭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발해말갈조에서는 동명제 즉위 10년(기원전 28)에 북옥저를 멸하고 온조왕 42년(24)에 남옥저의 20여가가 신라로 투항하였다 하고 또 혁거세 52년(기원전 6)에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하니 또 동옥저도 있었다고 하여 북옥저・남옥저・동옥저가 각각 존재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신라본기의 북옥저‧동옥저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유사하다. 그러나 발해말갈조의 온조왕 42년의 기록은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1 시조 온조왕 43년(25)조에 “겨울 10월에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가 부양(斧壤)에 귀순하니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漢山) 서쪽에 안치하였다.(冬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는 기록의 착오로 보인다. 『삼국유사』에서는 온조왕 42년을 43년으로 오기했을 뿐 아니라 백제도 신라의 착오로 보이기 때문이다.(新羅史硏究會, 1997)

옥저(沃沮)는 함남의 함흥부근부터 함북 해안지역 및 그 이북의 중국 동북지역과 연해주 남주지역에 걸쳐서 존재한 남옥저(혹은 동옥저)‧북옥저를 합하여 일컫는 명칭이다. 남옥저(혹은 동옥저)의 입지는 함경북도 남부 및 함경남도 해안지방, 특히 함흥평야 지방에 비정하고, 북옥저의 입지는 두만강 연안 및 연변지방 그리고 연해주 남부지역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박경철, 1994)
남옥저의 중심지였던 함흥지역의 정치집단은 임둔(臨屯)의 주요세력 중 하나였다. 임둔지역의 정치집단들은 기원전 2세기경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다가 기원전 108년 한의 군현으로 편제되었다. 이때 함흥지역에는 부조현(夫租縣)이 두어졌으며 옥저의 이름은 부조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부조현은 기원전 82년 임둔군의 폐지로 현도군에 소속되었다가 기원전 75년 현도군이 만주 흥경(興京) 노성(老城)방면으로 이동한 뒤 낙랑군 동부도위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30년 동부도위가 폐지된 이후 일시 한(漢)의 후국(侯國)으로 봉해졌으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기원후 56년 고구려 태조왕의 동해안 진출로 옥저성은 고구려에 복속되었다.(이현혜, 1997)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30 동옥저조를 살펴보면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있어 오곡에 알맞다고 하여 당시 옥저인들이 전작 중심의 농업을 생산기반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옥저의 장례 풍습은 길이가 10여 장에 달하는 큰 나무곽을 만들어 한쪽에 문을 만들어 두었다가 사람이 죽으면 가매장을 하고 후에 뼈만 추려내어 장사를 지내는 것이다. 혼인 풍속은 신랑의 집에서 혼인을 약속한 여자를 데려다가 기른 후 며느리로 삼는 민며느리제(預婦制)였다.
한편 「부조예군(夫租穢君)」명문이 세겨진 인장이 발견되었는데, 부조(夫租, 즉 沃沮)가 일찍이 예인으로 불렸음을 알려주는 것이다.(岡崎敬, 1967) 따라서 옥저는 본래 예족의 한 지파였다가 춘추전국의 교체기에 비로소 예족에서 분화하여 옥저로 불린 것으로 추정한 견해도 나왔다.(孫進己, 1987) 그리고 중국에서는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단결문화(團結文化)가 바로 옥저문화의 기원임을 주장하기도 한다. 단결문화, 즉 크로우노프카문화(克羅烏諾夫卡文化)는 상한선이 춘추전국의 교체기에 이르고 하한선은 최소한 동한시기까지 진입되는 고고문화로, 그 분포지역은 두만강(圖門江)유역을 포함한 수분하(綏芬河)유역, 목릉하(穆稜河) 상류 및 이 일대 해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林澐, 1985)
(『삼국유사』권1 기이1 말갈발해)
靺鞨[一作勿吉]渤海
通典云 渤海本<粟><末>靺鞨 至其酋<祚>榮立國 自號震旦 先天中[玄宗<壬>子]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開元七年[己未] <祚>榮死 諡爲高王 世子襲<位> 明皇賜典冊襲王 私改年號 遂爲海東盛國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後唐天成初 契丹攻破之 其後爲丹所制 [三國史云 儀鳳三年 高宗戊寅 高麗殘孽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渤海 開元二十年間 明皇遣將討之 又聖德王三十二年 玄宗甲戌 渤海靺鞨 越海侵唐之登州 玄宗討之 又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按上諸文 渤海乃靺鞨之別種 但開合不同而已 按指掌圖 渤海在長城東北角外] 賈耽郡國志云 渤海國之鴨淥南海扶餘橻城四府 並是高麗舊地也 自新羅泉井郡[地理志 朔州領縣 有泉井郡 今湧州] 至橻城府 三十九驛 又三國史云 百濟末年 渤海靺鞨新羅分百濟地 [據此 則鞨海又分爲二國也] 羅人云 北有靺鞨 南有倭人 西有百濟 是國之害也 又靺鞨地接阿瑟羅州 又東明記云 卒本城地連靺鞨[或云 今東眞] 羅第六祗麻王十四年[乙丑] 靺鞨兵大入北境 襲大嶺柵 過泥河 後魏書 靺鞨作勿吉 指掌圖云 挹屢與勿吉 皆肅愼也 黑水沃沮 按東坡指掌圖 辰韓之北 有南北黑水 按東明帝立十年 滅北沃沮 溫<祚>王四十二年 南沃沮二十餘家 來投新羅 又赫居世五十二年 東沃沮來獻良馬 則又有東沃沮矣 指掌圖 黑水在長城北 沃沮在長城南
말갈[또는 물길]발해
『통전』에 이르길,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추장 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단으로 불렀고, 선천(先天) 연간[현종 임자(壬子)]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직 발해로만 불렀다. 개원(開元) 7년[기미(己未)]에 조영이 죽으니 시호를 고왕이라고 하였고, 세자가 왕위를 이어 받자 명황은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는데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마침내 해동성국이 되었다. 그 땅에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 후당의 천성(天成)초에 거란이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니 그 후에는 거란에 의해 지배되었다.[『삼국사』에 이르길, 의봉(儀鳳) 3년 고종 무인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고, 개원 20년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甲戌)에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략하니 현종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신라고기』에 이르길, 고구려의 구장(舊將) 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남은 병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 위의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말갈의 별종으로 다만 시작과 끝이 다를 뿐이다. 『지장도』를 살펴보면, 발해는 장성의 동북쪽 모서리 밖에 있다] 가탐의 『군국지』에는 발해국의 압록․남해․부여․추성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며 신라의 천정군[「지리지」에는 삭주의 영현으로 천정군이 있었으니 지금의 용주다] 으로부터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39개 역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에는 백제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었다고 하였다.[이에 의하면 말갈과 발해가 또 나뉘어 두 나라가 된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이르길,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의 해다. 또 말갈 땅은 아슬라주에 접해있다고 하였다. 또 「동명기」에는 졸본성의 지계가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이라 함]에 접하였다하고, 신라 제6대 지마왕 14년[을축]에 말갈병이 크게 북경에 들어와 대령책을 엄습하고 니하를 지나갔다고 하였다. 『후위서』에는 말갈을 물길이라 하였고, 「지장도」에는 읍루․물길은 모두 숙신이라고 하였다. 흑수․옥저는 동파의 「지장도」를 보면 진한 북쪽에 남북의 흑수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하건대, 동명제 즉위 10년에 북옥저를 멸하고, 온조왕 42년에 남옥저의 20여가가 신라로 투항하였다고 하였고 또 혁거세 52년에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하니, 또한 동옥저도 있었던 것이다. 「지장도」에서 흑수는 장성 북쪽에 있고 옥저는 장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林澐, 1985, 「論團結文化」『北方文物』1985-1.
孫進己, 1987, 『東北民族源流』, 黑龍江人民出版社.
박경철, 1994, 「부여사의 전개와 지배구조」『한국사』2-원시사회에서 고대사회로2, 한길사.
新羅史硏究會, 1997, 「『三國遺事』譯註(四)」『朝鮮文化硏究』4.
이현혜, 1997, 「옥저의 사회와 문화」『한국사』4-초기국가 고조선․부여․삼한, 국사편찬위원회.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말갈발해)
靺鞨[一作勿吉]渤海
通典云 渤海本<粟><末>靺鞨 至其酋<祚>榮立國 自號震旦 先天中[玄宗<壬>子]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開元七年[己未] <祚>榮死 諡爲高王 世子襲<位> 明皇賜典冊襲王 私改年號 遂爲海東盛國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後唐天成初 契丹攻破之 其後爲丹所制 [三國史云 儀鳳三年 高宗戊寅 高麗殘孽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渤海 開元二十年間 明皇遣將討之 又聖德王三十二年 玄宗甲戌 渤海靺鞨 越海侵唐之登州 玄宗討之 又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按上諸文 渤海乃靺鞨之別種 但開合不同而已 按指掌圖 渤海在長城東北角外] 賈耽郡國志云 渤海國之鴨淥南海扶餘橻城四府 並是高麗舊地也 自新羅泉井郡[地理志 朔州領縣 有泉井郡 今湧州] 至橻城府 三十九驛 又三國史云 百濟末年 渤海靺鞨新羅分百濟地 [據此 則鞨海又分爲二國也] 羅人云 北有靺鞨 南有倭人 西有百濟 是國之害也 又靺鞨地接阿瑟羅州 又東明記云 卒本城地連靺鞨[或云 今東眞] 羅第六祗麻王十四年[乙丑] 靺鞨兵大入北境 襲大嶺柵 過泥河 後魏書 靺鞨作勿吉 指掌圖云 挹屢與勿吉 皆肅愼也 黑水沃沮 按東坡指掌圖 辰韓之北 有南北黑水 按東明帝立十年 滅北沃沮 溫<祚>王四十二年 南沃沮二十餘家 來投新羅 又赫居世五十二年 東沃沮來獻良馬 則又有東沃沮矣 指掌圖 黑水在長城北 沃沮在長城南
말갈[또는 물길]발해
『통전』에 이르길,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추장 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단으로 불렀고, 선천(先天) 연간[현종 임자(壬子)]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직 발해로만 불렀다. 개원(開元) 7년[기미(己未)]에 조영이 죽으니 시호를 고왕이라고 하였고, 세자가 왕위를 이어 받자 명황은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는데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마침내 해동성국이 되었다. 그 땅에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 후당의 천성(天成)초에 거란이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니 그 후에는 거란에 의해 지배되었다.[『삼국사』에 이르길, 의봉(儀鳳) 3년 고종 무인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고, 개원 20년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甲戌)에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략하니 현종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신라고기』에 이르길, 고구려의 구장(舊將) 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남은 병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 위의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말갈의 별종으로 다만 시작과 끝이 다를 뿐이다. 『지장도』를 살펴보면, 발해는 장성의 동북쪽 모서리 밖에 있다] 가탐의 『군국지』에는 발해국의 압록․남해․부여․추성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며 신라의 천정군[「지리지」에는 삭주의 영현으로 천정군이 있었으니 지금의 용주다] 으로부터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39개 역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에는 백제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었다고 하였다.[이에 의하면 말갈과 발해가 또 나뉘어 두 나라가 된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이르길,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의 해다. 또 말갈 땅은 아슬라주에 접해있다고 하였다. 또 「동명기」에는 졸본성의 지계가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이라 함]에 접하였다하고, 신라 제6대 지마왕 14년[을축]에 말갈병이 크게 북경에 들어와 대령책을 엄습하고 니하를 지나갔다고 하였다. 『후위서』에는 말갈을 물길이라 하였고, 「지장도」에는 읍루․물길은 모두 숙신이라고 하였다. 흑수․옥저는 동파의 「지장도」를 보면 진한 북쪽에 남북의 흑수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하건대, 동명제 즉위 10년에 북옥저를 멸하고, 온조왕 42년에 남옥저의 20여가가 신라로 투항하였다고 하였고 또 혁거세 52년에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하니, 또한 동옥저도 있었던 것이다. 「지장도」에서 흑수는 장성 북쪽에 있고 옥저는 장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