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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대본

#1.김유정역 역사의 봄, 여름, 가을 , 겨울을 상징하는 그림들
- 벚꽃 휘날리는/ 초록 우거진/ 낙엽 떨어지는/ 흰 눈 날리는

nar]일본이 우리를 점령한 시기, 알지?
그때 한 글쓰는 남자가 있었어. 참 잘 생겼어. 여자들이 줄을 섰다고 하지.
당시 배웠다는 인텔리들이 모여드는 문화공간이 어디였는줄 알어?
단성사야. 특히 판소리공연은 많은이들의 마음을 울렸다고 해. 연희전문대를 다니던 그 작가 역시 단성사를 제집 드나들듯이 드나들었지.
그리곤 거기서 운명적인 사랑을 경험해.
한 젊은 기생의 판소리를 듣고 필이 꽂히고 만거야.
글이야 워낙 잘 쓰니 자신감이 있었어.
연애편지 몇장이면 기생이 제 품으로 와락 안길거라고 말야.
하지만 오산이었지.
기생은 거부하고 말았어.
'나는 기생이오. 당신은 공부하는 학생이고....'
'기생하고 학생하고 사랑하지 말란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끝내 기생은 거부했어. 정말 그 기생은 그 잘생긴 작가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일까.



#2 김유정역 역사 앞

눈이 사라지면 다시 환한 햇살이 내리쬔다.
김유정역이라는 역 간판을 올려다보는 미리

친구 1 off] 근데 김유정이 누구야? 여기 국회의원인가?

피식 웃는 미리, 친구 1과 마주본다

미리] 너 대학생 맞어? 봄봄, 동백꽃 몰라? 우리 고등학교때도 배웠는데.
친구 1] 아, 그 웃기는 소설가 김유정....... 풍자와 해학, 뭐 그런 상징적인 소설가 아니었나?
미리] 흡..... 잘난 척은? (감탄) 근데 김유정역, 근사하지 않어?
친구 1] 여자이름치곤 뭐 좀 흔하지 않어.
미리] 무식이 탄로나요.. 김유정은 남자야. 너 같은 무식쟁이가 어떻게 대학에 왔는지 이해가 안간다. (돌아서며) 난 화장실 좀 다녀올란다.
친구 1] 피이... 빨리와 . 기차 떠난다.



#3 김유정역 내부
- 미리, 김유정역 안으로 들어간다.
- 한적한 실내
- 김유정의 흉상이 있다.
- 김유정의 흉상을 가만히 만져보는 미리...
- 순간 멈칫 어디선가 판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off] 판소리 한 대목(춘향가)
- 미리, 뭔가 한줄기 섬뜩한 것이 스치고 지나간 듯해 고개를 흔든다
- 벽면에 걸린 김유정의 친필원고와 사진들,
윗입술 위 수염이 난 김유정의 사진이 보인다.
그 사진을 바라보는 미리



#4 벽돌담 (이미지 컷)
담을 헤집는 손길 하나, 여성의 손길 하나가 담에 놓인 벽돌 틈새를 뒤진다.
그러나 잡히는 것이 없다.



#5. 김유정 역사

미리, 손으로 뭔가를 움켜쥐는 듯.

그러나 손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off] 기차 떠나는 소리

순간 역사 밖을 쳐다보는 미리





#6. 기차 떠나는





#7. 기차 안

-차창 밖으로 김유정역이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친구 1, 친구 2의 옆에 앉는다

친구1] (무심코) 미리는?

친구2] 몰라, 어디 있겠지.

친구1] 안왔어? 아까 화장실 간다구 하더니... 놓쳤다. 놓쳤어.

친구2] 우리는 들으면 하품만 나오는 창을 하질 않나.

뭐랬더라. 그래 춘향이의 사랑가...

진짜 미쳤어~~ 미쳤어~~

친구1] 야~~ 지금 그런 말이 나오냐.. (주머니에 핸드폰을 꺼내며)

핸드폰도 놓고 갔는데.. 큰일이네.

다음 역에서 돌아가야겠어.

친구2] 진짜.. 미쳤어, 미쳤어..

- 친구1, 친구 2를 이그~ 징그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8. 김유정역사

미리, 사방을 둘러본다.

햇빛은 사라지고, 그늘이 져 적막감이 감돈다. 을씨년스럽다.

누군가 놓고 간 빈 검은 봉지가 바람에 하늘거린다.

미리, 오한이 이는지 몸을 움츠린다.



(off) 저... 학생.... 열차는 갔는데...

미리, 뒤를 돌아보면 김판곤역장이다.

김판곤] 열차 갔다구. 왜 이렇게 얼이 빠져 있어. (가만히 미리를 본다)

근데..... 내가 학생 어디서 봤더라. 나 알아요?

미리] (고개를 젓는다)

김판곤,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선다.

미리] 저... 아저씨! 아마 친구들이 돌아올 거에요.

다음 역에서 여기까지 돌아오면 얼마 걸려요?

김판곤] 글쎄 다음 역이 워낙 외진 곳이라... 삼십여분 걸릴려나...

근데, 나 학생 봤는데...

김판곤의 째진 눈이 날카로워진다. 순간 두려움이 이는 미리





#9. 김유정역사 밖, 조용하다





#10. 역사 안

벤치에 앉아 있는 미리,

깜박깜박 졸음이 온다.

이윽고 잠에 빠져드는지 벽에 얼굴을 기댄다.

저만치서 그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김판곤...





#11. 간이역(지금의 김유정역이지만 김유정관련 자료는 없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한 여성, 고개를 숙인 채다.
그 여성이 편지를 본다.
편지글: (한 남자의 육성)"나는 기생이오, 당신은 공부하는 학생이라뇨?

기생하고 학생하고 사랑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녹주, 제발 내 사랑을 받아주시오.

난 뜻을 세운 사람이 아니오.

그저 녹주의 사랑에 목마른 한 남자일뿐이오.

녹주."



여성이 고개를 든다.

녹주(미리)다. 편지를 곱게 접어 속옷춤에 넣는 녹주,

아련한 표정이다.



(OFF) 기차 기적소리



녹주, 보따리를 들고 일어난다.





#12. 박녹주의 고향집



초가집 한 채, 녹주는 젖은 긴 머리를 빗고 있다.

시선은 멍하니 밖을 향한 채다. 그리곤 벌떡 일어나는 녹주, 뭔가 결심한 눈치다.

녹주: (방 안을 향해) 엄마, 나 한양 갈라요.

그이 폐렴까지 걸렸다오,

그이 죽으면 나 못살아요.





#13. 김유정의 집 앞



번듯한 기와집이다.

녹주, 그 앞을 서성거리면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나온다. 판곤이다.

대학생 옷차림을 한 판곤,



판곤] (냉랭한) 오셨군요. 유정이가 당신 때문에 이렇게까지 되었습니다.

녹주, 고개를 숙인다

판곤] 지금 유정이 처가 옆에 있어요. 지금 들어가면 상황이 난감합니다.

유정이는 지금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녹주씰 못 알아볼 겁니다.

내일 제가 기별을 할테니 그때 오시지요.

녹주] 생사가 오가는 처지라면 지금 보고 싶소.

내 탓이라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판곤] (차가운) 참.... 애원하며 달려들 때 내팽개칠 땐 언제고.

당신 때문에 유정이가 죽을 수도 있다고 내 말하지 않았소.

아무튼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녹주] 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녹주, 치마폭을 찢는다.

그리곤 치마폭을 바닥에 놓더니, 손가락을 깨물어 글을 쓴다.

깜짝 놀라는 판곤

판곤] 녹주씨....

녹주] 잠시 눈이라도 뜨면 전해주시오.





'녹줍니다. 나는 기생이오, 당신은 학생이오. 하지만 난 당신을 그립니다.'



녹주, 천을 후후 불어, 전한다.



녹주] 꼭 전해주시오



녹주, 몸을 돌려 골목을 빠져나간다.

이 모습을 보는 판곤, 얼굴이 일그러진다.





#14 인서트컷

단성사, 녹주의 공연을 보고 있는 유정과 판곤,
유정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판곤 역시 그러하다. 손을 움켜쥐며 감정을 억제하는 판곤.

기생집 앞에서 몰래 녹주를 훔쳐보는 판곤.
그녀를 바라보는 모습이 애처롭다.



#15. 김유정의 집 앞

녹주가 남기고 간 천을 응시하는 판곤,
비장하다.
천을 벽면에 펼쳐본다.
아직 마르지 않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글자도 있다.
그 천을 마구잡이로 접는 판곤,
천을 접어 담벼락 벽 틈에 꽂아버린다.
하얀 솔기가 나와 있다.



#16. 김유정의 집 앞 -밤

조등이 걸려 있다.
(off) 박녹주의 판소리가 들려 온다.



#17. #12와 동일

마루에 누운 박녹주,
천 일부 뜯어져 있는 치마를 입고 있다.
눈을 감은 박녹주......
그 옆엔 약봉지가 놓여 있다.



#18. 김유정역사

벽에 기대 잠든 미리,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리곤 이윽고 눈을 뜨는 미리.

친구1] 미리야...
미리] ....

미리 앞에 친구들이 서 있다.
친구1] 바보, 우리가 없어졌다고 우냐?
(장난기) 왜 꿈 속에서 누가 잡아가든? 누가 죽었든?
미리] ....
친구1] 가자...

벽면에 있는 김유정 사진을 우연히 보는 친구 2

친구 2] 근데 이 남자 참 잘생겼다. 누군지 연애 한 사람은 좋겠다.
친구 1] 야, 이 남자가 뭐야? 소설가 김유정, 좀 공부 좀 해라
친구 2] 아, 동백꽃.... 김유정

미리도 고개를 들어 사진을 본다.
친구들과 미리가 몸을 돌려 역사를 빠져나가려 한다.
이때 휙 바람이 불어오고, 벽에 붙어 있던 김유정의 사진이 팔랑인다.
사진 뒤 벽면에 흰 솔기가 보인다.
다시 솔기를 남에게 보여주기라도 싫다는 듯 사진은 벽에 붙는다.

미리, 뭔가 아쉬운 듯 뒤를 본다.
역사 안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김판곤역장

미리] (미소지으며) 아저씨... 저 가요...

신문을 읽고 있는 김판곤, 신문 옆으로 살짝 미리를 본다.



#19. 김유정 역사 밖

세워둔 택시에 타는 미리와 친구들,
미리 다시 김유정역사를 본다.



#20. 김유정역사 안

김판곤의 얼굴이 신문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신문은 1937년 독립신문이다.
헤드라인 기사 [김유정, 폐결핵으로 사망]
신문을 접는 김판곤, 50대로 보이던 아까 그 얼굴은 간대 없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다. 눈빛만이 형형하다.



#21 김유정역사 밖

흩날리는 벚꽃들,
그 앞으로 한복을 입은 남정네와 여자들이 지나간다.
일본경찰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 사이로,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김유정과 판곤, 녹주가 환하게 웃으며 지나간다.
녹주를 눈부시다는 듯 바라보는 김유정과 판곤....
그들에게로 벚꽃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