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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여덟에 어사가 되어 황해도로 (1)

1696년(숙종22) 황해도 암행어사 박만정(朴萬鼎)



<해서암행일기>의 저자 어사 박만정의 황해도 암행일기 시리즈 1탄. 황해도 암행어사로 임명된 박만정은 집에도 들르지 못하고 간단한 행장을 꾸린 채 그 날로 암행길에 오른다.





1696년 5월 12일 정묘(丁卯) 아침 한양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어느 촌사(村舍).
박만정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의 방 한 구석에는 어제까지만 해도 그가 쓰고 입었던 찌그러진 갓과 누더기 도포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박만정은 감회 어린 표정으로 그것들을 만져보았다. 그리고는 단정히 개켜 봇짐 속에 집어넣었다. 대신 그 안에서 그동안 고이 보관해온 관복 한 벌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
어제의 걸인이 하루아침에 벼슬아치로 변신하여 방문을 열었다. 밖에는 단비가 소리없이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이번 암행길은 비로 시작해서 비로 끝나는구나. 두 달 전, 암행어사로 임명된 줄도 모르고 입궐했던 그 날 아침에도 이렇게 비가 왔었지, 아마?..."
박만정은 내리는 비를 보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잊지못할 지난 두 달간의 일들을.

1696년 3월 6일 임술(壬戌).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하던 보슬비가 저녁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박만정은 오늘도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비가 오는데도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만정은 3년째 아무런 직함도 없이 지내는 중이다.
재작년(숙종 20년, 1694년) 8월에 보덕(輔德 : 이조 때, 세자 시강원에서 경사와 도의를 가르치던 관직임. 정원은 1명으로 종삼품의 품계를 가진 관직이었으나 인조 이후에 정삼품으로 승격시켰음.) 벼슬로 있을 때 상소한 일 때문인데 그 당시는 인현왕후가 6년 만에 복위되고 희빈 장씨가 다시 후궁으로 떨어져있을 때였다. 그런데 박만정은 세자의 친모이고 6년 동안 국모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인 만큼 장희빈을 여느 후궁과는 다르게 특별예우 해줄 것을 상소했다. 이로 인해 박만정은 임금의 눈밖에 나고 벼슬도 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오늘도 그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울적해 있는데 박만정에게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승정원(承政院 : 이조 때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청. 관원으로 정삼품 당상관인 승지 6명을 두었는데 이 6명은 6방의 사무를 분담하였음.) 승지 박창한이 이제 막 퇴근해 귀가하다가 길에서 박만정을 보고는 불러세우더니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좀 전에 임금께서 이르셨소이다. 박만정, 군자감정(軍資監正 : 이조 초에 설치되어 군수품의 저장과 출납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정은 1명으로 정삼품 당하관) 이의창, 이조정랑(吏曹正郞 : 이조의 정오품관으로 특히 인사를 담당하는 중요관직.) 이정겸을 내일 함께 불러들이라고 말이지요. 내일 아침 일찍 승정원에서 연락이 갈 터이니 그리 알고 계십시오."

다음날 아침 그의 말대로 승정원의 하인 하나가 명패(命牌 : 상단에 "命"자를 쓰고 붉은 칠을 한 나무패. 임금의 명으로 삼품 이상의 벼슬아치를 부를 때 이 패에 성명을 써서 돌렸다. 이 패를 받고 올 뜻이 있으면 '進' 올 뜻이 없으면 '不進'이라고 써서 도로 바쳤음.)를 갖고 박만정의 집으로 왔다. 박만정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패초(牌招)를 받들었다. 그런데 패초를 자세히 보니 그동안 받았던 것들과 모양이 좀 달랐다. 목패의 앞 표면에는 '명(命고)'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임명되는 관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은 다를 바 없었으나, 장방형의 외형에 붉은 색이 칠해져 있고 윗부분에도 장식이 새겨져 있는 것이 훨씬 우아하고 위엄있어 보였다.
박만정이 명패를 받들고 궁궐에 다다르니 과연 이의창, 이정겸 등이 이미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임금께서 상피단자(相避單子 : 친족 또는 기타의 관계로 같은 곳에서 벼슬하는 일 도는 청중, 시관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써 넣은 종이.)를 써 들이라고 하셨다. 박만정은 자신의 모든 사촌과 사돈 및 동서를 따져보고 사실대로 적었다.

그런데 박만정이 현재 아무런 직함도 없는 고로 병조(兵曹 : 이조 때 육조의 하나. 무선, 군무, 의위, 우역, 병갑, 기장, 문호 관약 등의 일을 맡아보았음.)로부터 구두로 군직에 붙인다는 전언을 받아 부사직(副詞職 : 이조 때 오위에 속해 있던 종오품 관직으로 미보직의 문, 무, 음, 갑직 중에서 임명하였으나 실무는 보지 않았음.)의 직함으로 입계(入啓 계장을 왕에게 올림)하였다.
상피단자를 올리고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박만정은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갈 듯 했다.
암행어사.
박만정과 함께 기다리고 있는 두 이씨도 같은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아니나다를까. 어전에 드니 임금이 사알(司謁 : 이조 때 액정서의 정육품의 관직의 하나.)을 시켜 손수 갈약( 藥, 구급약. 섣달에 내의원에서 만든 소합원, 안신원, 청심원 같은 것.) 5종을 하사하셨다. 암행어사가 아니라면 갈약 같은 것을 내리실 일이 있겠는가.
임금은 또 각자에게 봉서 하나씩을 하사했다. 봉서에는 '계(啓)'자가 눌려 찍혀 있고 봉서 앞면에 직함과 성명이 기재돼 있었다. 박만정이 받은 봉서에는 군직은 없고 '전 보덕 박만정(前輔德 朴萬鼎)'이라고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봉서 뒷면에는 단지 '도동대문외개탁(到東大門外開坼)'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봉서 안의 내용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어전에서 나오니 호조(戶曹 : 이조 때 육조의 하나. 호구, 공부, 전곡 등의 일을 맡아 보았음.) 정목(正木, 상질의 광목) 4필과 백미와 태(太, 콩) 각각 5말, 건민어(乾民魚, 암치) 세 마리, 건석어(乾石魚, 굴비) 세 두름을 여비로 보내 왔다. 이는 암행어사를 파견할 때 전례에 따라 지급하는 것이었다. 그 밖에 호조판서 이세화도 돈 닷냥을 보내 왔다.
돈과 물품들을 받아든 박만정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것으로 암행의 여비를 충당하기란 불가능했다. 혼자 다녀도 한달이면 바닥날 것을 어떻게 수행원들과 함께 석달여를 버틸 수 있겠는가. 결국 부족한 여비는 거렁뱅이 노릇을 해서라도 스스로 재주껏 조달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암행어사 신분을 노출해서는 절대 안되고 추생(抽 ) 고을에서는 일체의 양식과 노자를 얻어 쓸 수 없었다. 이래저래 암행어사는 여간 고달픈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그것들을 지급받는 대로 박만정은 두 이씨와 함께 궁궐을 나와 동대문 밖 관왕묘(關王廟 :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장수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로 향했다. 봉서는 반드시 성문 밖 지정된 장소에서 뜯어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세 사람은 비로소 봉서를 뜯었다.
봉서는 모두 4장이었다. 하나는 민간을 염탐할 조목 17건이고 또 하나는 전결(田結, 논밭의 구실)에 관한 사항, 또 하나는 암행어사로서 지켜야할 규칙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 하나는 암행어사로서 감찰해야 할 추생 고을이 적혀 있었는데 이의창은 함경도요, 이정겸은 충청도였다.
박만정의 추생지는 열 두 고을로 모두 황해도에 있었다.
그러나 각자의 암행지에 대해 감상을 나누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암행어사는 임명과 동시에 출발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것을 지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액정서(掖庭署 : 고려의 액정국을 계승한 이조 때의 관청으로 왕명의 전달, 임금이 사용하는 필연, 대궐의 열쇠, 대궐 뜰의 설비 등의 일을 맡아보던 잡직 기관.) 하인들이 따라 다니고 있었다.
집에 들러 가족들 얼굴도 보고 작별인사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박만정은 애써 떨쳐버렸다. 다른 안락한 직책도 많건만 하필이면 암행어사라니 서운함과 실망스러운 감정을 감출 수 없었지만 이 역시 애써 떨쳐버렸다.
박만정은 두 이씨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돌아섰다.
황해도 암행어사의 신분으로 첫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의 나이 마흔여덟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