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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아프고 눈은 괴롭고 (2)

어사 박만정의 황해도 암행일기 2탄. 박만정은 암행길에 오르자마자 백성들이 방을 내주지 않는데다 기근으로 참담하게 살고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고통스러워 한다.





1696년 3월 7일.
아침 일찍 입궐하여 황해도 암행어사로 임명받은 박만정은 집에도 들르지 못한 채 그대로 길을 떠나 남산 바깥 벌아치에 다다랐다. 여기서 박만정은 짐을 실을 말들과 양식 등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박만정은 마패를 두 개 받았는데 그 중 말 세 필을 새긴 삼마패는 자신이 갖고 말 한 필을 새긴 단마패는 서리(書吏 : 아전의 하나. 매 3년마다 각 고을의 교생으로 장년이고 재지가 있는 자 중에서 해서와 행서 등을 시험하여 채용함. 종칠품 또는 종팔품에서 거관함.)를 주었다.
홍문관(弘文館 : 이조 때 삼사의 하나. 궁중의 경서 및 사적을 관리하며 문서를 처리하고 또한 왕의 자문에 응하였음.) 서리 김성익은 이제부터 박만정을 수행하기로 된 인물로, 나이는 사십이 가까워 좀 많은 편이지만 능력은 최고였다. 몇 년 전에도 암행어사의 수행원으로 나간 바 있었는데 편안한 인상과 뛰어난 입담으로 정보수집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것이다. 박만정은 신분을 속이기 위해 김성익과 평교간처럼 지내며 그를 김봉사라 부르기로 했다. 그 밖에도 청파 역졸 선망, 팔명, 갑용과 왕십리 역졸 선종 및 가노 계봉 등 6명이 박만정을 수행했다.

그런데 박만정의 암행길은 첫날부터 순탄치가 않았다.
우선 물건이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날이 저물 무렵에야 비로소 행장을 다 꾸리고 떠날 수가 있었다. 게다가 타고 가는 역마가 너무 늙고 말라서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연서역(延曙驛 : 경기도 오도찰방의 하나인 영서도찰방이 있던 곳. 처음에는 영서역이던 것이 연서역으로 변했음. 이곳에서 고양이 벽제 파주의 마산, 장단의 동파, 개성의 청교 후예 풍덕의 중련 등 각역을 관장했음.)에 도착하는 대로 말을 바꿔 탔는데도 그 말이 그 말이었다. 창릉교(昌陵橋, 이조 8대 예종의 능인 창릉으로 가는 길목의 다리)를 지나니 사위가 어느새 칠흑같이 어두워져 길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여석치(礪石峙, 숫돌 고개)라는 곳의 촌락에 이르러 잠자리를 구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곳 마을 사람들이 어찌나 방색(防塞, 틀어막거나 가려서 막음)이 심한지 가는 집마다 문을 닫아걸고 받아주지를 않았다. 박만정은 하는 수 없이 어느 집 문을 그냥 밀치고 들어가 이렇게 말했다.
"여보시오. 나는 호서(湖西) 사람으로 지금 평안도로 가는 길인데 부득이 이 곳을 지나게 되었소이다. 오늘은 벌써 칠흑같이 어두워 달리 딴 곳을 찾을 길도 없으니 바라건대 주인께서는 마루라도 빌려 주시면 하룻밤을 지새고 가겠습니다."
그러자 주인집 노파가 박만정 일행을 살펴보며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날이 저물었는데 길손을 어찌 차마 쫓아낼 수야 있겠소. 안으로 드시오."
이렇게 해서 겨우 잠자리를 마련하게 된 박만정은 그제서야 비로소 저녁밥을 지어먹을 수 있었다. 이경(二更, 오후 10시 전후)이 가깝도록 저녁밥도 못 먹고 다닌 것이다. 박만정은 몸도 피곤하고 짜증도 나서 밥을 먹자마자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인집 노파의 구박에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박만정이 감기 때문에 기침을 자주 했던 것인데 주인집 노파가 나그네가 자신의 집 벽을 더럽히고 있다며 계속 듣기 거북한 말을 해대는 것이었다.
박만정은 못들은 척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의 집에서 안락하게 잠잤는데 오늘 이렇게 구차한 신세가 됐다는 것이 놀랍고 또 서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든 사이 박만정은 어느덧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박만정은 새벽부터 출발해 파주까지 내처 달려왔다.
이 곳의 목사(牧使 : 이조 때의 지방 관직. 전국 8도에 두었던 정삼품의 관원으로 관찰사 바로 밑에 으뜸 벼슬. 경기도에 3명, 경상도에 3명, 충청도에 4명, 전라도에 4명, 황해도에 2명, 강원도에 1명, 함경도에 1명, 평안도에 2명으로 모두 20명이 있었다. )

이식은 일찍이 황해감사(黃海監司 : 관찰사. 이조 때 지방관직으로 종이품 벼슬. 각 도에서 으뜸 벼슬이며 민정, 군정, 재정, 형정 등을 통할하며 관하의 수령을 지휘 감독함.)를 지낸 인물이었다. 박만정은 황해도에 대해서는 구월산 외에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풍속은 어떠한지 특산물은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는 상태인지라 이식을 만나 물정도 알아보고 식량도 얻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도 박만정의 일진이 좋지 않은 것일까.
박만정은 목사 얼굴도 보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관아에 넌지시 사람을 넣어 면담을 요청했으나 문지기에게 쫓겨 되돌아온 것이다. 물론 정식으로 신분을 밝히면 극진히 맞아주고 원하는 것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벌써부터 행색이 노출되면 암행어사를 파견한 의미가 무색해질 염려가 있었다. 하여 박만정은 기왕의 뜻을 굽히고 조반이나 먹고 뜰 생각에 주막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박만정은 가슴이 미어져 차마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걸식하는 무리들이 우르르 몰려와 일행을 에워싸고 먹다 남은 밥이라도 얻고자 참담하게 울부짖는 것이었다. 박만정이 차마 밥을 다 먹지 못하고 남겨서 주니 서로 한 술이라도 더 먹겠다고 형제고 부부고 가릴 것 없이 달려들어 싸웠다. 인간으로서의 염치, 인륜 같은 것은 이들에게 사치에 불과했다.
주민들에게 들으니 심지어 어떤 거지는 구걸을 청했다 거절당하면 도리어 그를 원망하고 혐오하여 그 집에 불을 지른다고 했다. 이런 일이 예사로 일어나고 마소를 훔치는 무리들도 수없이 많아서 한 곳에 정착해 사는 토민들은 어려움이 많은 것 같았다. 비록 집을 가진 토민이라 할 지라도 얼굴에는 다들 부기(浮氣)가 올라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해 초에는 기록적인 대기근이 덮쳐 팔도에서 굶어죽는 백성이 수만 명에 달했다. 특히 해서(海西)·영남(嶺南)에서 불이 나고, 관동(關東)에서 물이 넘쳐, 물과 불 때문에 죽은 자가 하루에도 수십 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박만정은 지금 그 참담한 실태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주를 벗어나 위로 가면 갈수록 길가에서 마주치는 거지들은 더욱 많아졌다. 늙은이는 부축하고 어린이는 등에 업고 남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무리를 지어 거리에 나섰는데 그 대오가 끝을 알 수 없을만큼 길었다. 개중에는 어미와 자식이 서로를 잃고 둘 가운데서 울부짖는가 하면 어떤 노파는 이미 사경에 이르러 귀신같은 몰골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촌락은 마치 난을 당한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산이며 들로 다니며 나물을 뜯는 것이었다.

한번은 박만정이 일견 부유해 보이는 촌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밥 때가 되어도 굴뚝에 연기가 나는 집이 하나도 없었다. 그 중 한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들 너댓 뿐으로 막 둘러앉아 밥을 먹으려는 중이었다. 그런데 먹을 것이라고는 쌀겨에 소채 뿐이었다.
"어른들은 다 어디 가셨고?"
박만정이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한 아이가 방안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머니는 나물 뜯으러 산에 가셨고 아버지는 지금 방에서 누워 계세요."
그 소리를 들었는지 주인양반이 방문을 열고 얼굴을 내비쳤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해골 같았다.
"얼굴이 많이 안좋구려. 어디가 아프시오?"
그러자 아이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우리 아버지 아픈 거 아니예요. 배고파서 누워계시는데요."
박만정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도망치듯 그 집에서 나오고 말았다.

그 날 밤 박만정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별안간 두통과 오심증이 일어나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았고 숨이 가빠왔기 때문이다. 갑자기 찬바람에 시달린 것이며 지난밤 불편했던 잠자리, 오늘낮에 목도한 충격적인 장면들,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그런 것 같았다.
박만정은 임금께서 하사한 갈약 중에서 평위산 한 첩을 꺼내 가노 계봉에게 달이도록 했다.
박만정은 그 날 몸도 아팠지만 눈은 더욱 아팠다.
평위산으로도 눈으로 느꼈던 그 고통은 치유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