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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해주(海州)여자 (3)

어사 박만정의 황해도 암행일기 3탄. 박만정은 해주의 멋진 풍광과 해주 여자들의 재치와 미색을 보고들으며 오랜만에 활력을 찾는다.





1696년 3월도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직도 신환이 깊으신데 어떻게 이처럼 새벽길을 떠나시렵니까? 하룻밤 더 묵으며 몸조리를 하시고 떠나시지요?"
박만정이 다 떨어진 갓을 쓰고 나오자 집주인이 황급히 달려와 말렸다.
"말씀은 고마우나 갈 길이 하도 멀어 촌각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신병이 중하기는 하나 가다 보면 또 낫는 수도 있겠지요."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집주인을 뒤로 하고 박만정은 새벽부터 길을 떠났다.
갑자기 환경이 바뀌어서일까, 아니면 액땜이라도 하는 것일까?
박만정은 요 며칠 크게 앓았었다. 예고없이 낯설고 물선 곳으로 떠나게 되면서 전에 앓던 두통과 오심증이 재발한 것이다. 게다가 엊그제에는 곽란증( 亂症, 음식을 체하여 별안간 토하고 설사가 심한 급성 위장병) 증세까지 보이며 말 위에서 구토를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박만정은 저녁이면 암행어사로 임명되면서 받은 갈약들을 꺼내 달여 먹고 아침이면 길을 떠났다. 며칠 푹 쉬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한 곳에서 며칠씩 지체하다가는 괜한 의심만 사고 어사의 신분이 탄로나기 쉬워 바로바로 길을 떠났던 것이다.
박만정 일행은 어제 평산에 도착하였지만 밀물 때문에 발이 묶여있었다. 평산은 연안(延安)과 해주(海州) 두 고을 사이에 끼인 곳으로, 바로 앞에 있는 포구 걸이포(乞伊浦)를 건너면 해주 땅이었다.
새벽이 되어 썰물로 바뀌면서 박만정은 비로소 걸이포를 건너 해주에 도착했다.

박만정은 해주 읍내를 지나 해주 서쪽으로 십리를 달렸다. 그 때 그의 눈에 정자 하나가 들어왔다. 해주의 명소 허정(許亭)이었다.
허정에 오른 박만정은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허정의 뒤로는 산을 둥지고 앞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는데 지형이 말쑥하고 깨끗하며 시계가 광활한 것이 매우 아름다웠다.
"해서에 들어와 일도를 두루 돌아보니 산천은 유려하나 정작 볼 만한 것은 없었는데 오직 해주의 허정만은 한번 올라와 볼 만하구나."
박만정은 문득 강한 식욕을 느꼈다. 그동안 밥은 거의 입에도 못대고 흰죽이나 겨우 한 끼 정도 먹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시원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음미하고 있자니 기분이 상쾌해지고 식욕이 절로 당기는 것이었다.
둘러보니 허정 근처에는 한 노파가 정자를 지키고 있었다.
박만정은 그 정자지기에게 수작을 걸었다.
"나는 너의 상전과는 자못 돈독한 사이니라. 이 곳에 올 일이 있으면 이 정자에서 쉬어 말 먹이나 먹이고 가도록 하라, 하고 허락을 받았었다. 헌데 내가 아직 조반을 들지 못했으니 네가 밥을 지어 주지 않겠느냐?"
사실은 정자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하는 말이었다. 박만정은 노파가 핑계를 대지 못하도록 사전에 막고 어서 밥을 지어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렇게 말을 지어낸 것이다.
그러자 노파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상전이라면 큰 상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괴이한 일이외다. 우리 큰 상전께서는 별세하신 지 벌써 3년이 지났소. 그런데 어떻게 오는 손님을 접대하라 이르셨단 말이오? 어느 양반님이신지는 모르겠으나 괴이한 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려.""
박만정은 노파의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 없는 일. 내친 김에 한술 더 떴다.
"우리가 서로 만나본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이제 네 말을 듣고 보니 놀랍고 슬픈 마음 그지 없구나. 아무튼 너의 상전과는 본시 막연한 사이로 약간의 착오가 있었을 뿐이니 너는 어서 조반이나 속히 짓도록 하여라."
박만정은 노파의 말문을 막기 위해 서둘러 쌀을 내밀었다.
노파는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지으며 쌀을 받아 씻기 시작했다.

허정에서 조반을 마치고 나니 벌써 아침 해가 서너 발 가량 높이 올라 있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한 박만정은 몸이 한결 개운해지고 기력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앓았던 병이 말끔히 나은 듯 했다.
"아무래도 해주 땅에 좋은 기운이 솟는 것 같구나. 앞으로 여기 자주 들러야겠는걸."
박만정이 만족해하며 말했다.
그 때였다.

"길을 비켜라! 길을 비켜라!"
큰길 쪽에서 수령의 행차가 지나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수령의 뒤를 따르는 무리가 십수명이나 되었다. 시절이 좋을 때도 서리배들을 많이 데리고 움직이는 것은 해당 역참이나 백성들에게 적잖은 민폐가 된다. 하물며 요즘같은 흉년에 위급하거나 막중한 일이 아니고서는 저렇게 십수명이나 데리고 다닐 리가 없었다.
박만정은 노파를 불러 어찌된 연유인지 알아보게 했다.
노파는 행렬을 한번 일별하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소강(所江) 첨사1)께서 또 납시네요. 기생 매향이 얼굴 보러 가는 길이겠지요."
"뭣이라? 단지 기생을 만나기 위해 온단 말이냐? 저렇게 많은 인원을 데리고?"
박만정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노파의 말인즉슨 소강 첨사 이용이 작년부터 해주 감영에 있는 기생 매향이에게 푹 빠져 한달에 수 차례씩 갖은 구실을 대며 들락거린다는 것이었다. 그 때마다 그가 지나는 각 읍의 역참에서는 말과 사람을 내어주느라 폐단이 적지 않았고, 해주에서는 그들이 촌간에 상주하다 보니 일반 백성들의 불만도 높았다.
황해도 소강(所江)은 한 가닥의 산줄기가 갈라져 좌우로 바다를 끼고 내려오다가 하나의 경내(境內)를 이루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육지와 연결되고 조수가 들어오면 바다가 되어버리는 곳이다. 앞에는 서해 바다를 임하여 곧바로 중국의 등주(登州)와 내주(萊州)로 통하고 있기 때문에 황당선(荒唐船)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처럼 중요한 곳의 첨사가 기생에 빠져 수시로 근무지를 비우고 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휘하 수군들의 기강은 어떠할 것인지 짐작되고도 남는 일이다.
"그래, 첨사가 그토록 오매불망할 만큼 매향이라는 기생이 그렇게 매혹적이란 말이더냐?"
박만정은 그렇게 묻자 노파가 말했다.
"인물 좋기로 치자면 어디 매향이뿐이겠습니까? 한양에서는 평양 기생이 최고인 줄 알지만 모르는 소리지요. 해주 여자치고 어디 가서 인물 빠진다는 얘기 들어본 적 없답니다. 생전에 저희 상전과 막연한 사이였다면서 그래, 해주 기생 얘기도 못들으셨단 말입니까?"
박만정은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노파는 아까 박만정이 한 말이 거짓임을 진작에 알고 있는 눈치였다. 마치 박만정의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노파는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고보니 해주 땅에 와서 기력을 보충하기는 나으리나 소강 첨사 어른이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런데 나으리! 다음에 여기 또 지나가실 일 있거들랑 다른 말 하지말고 쌀부터 주십시오. 해주 여자라면 지나가는 나그네를 위해 따뜻한 밥 한 끼쯤은 언제든 지어줄테니까요."
그러면서 노파는 공손히 인사를 하며 물러났다.
보기 좋게, 그러나 기분 나쁘지 않게 한 방 먹은 박만정,
덕분에 길 떠난 뒤 처음으로 크게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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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첨사(僉使); 첨절제사. 이조 때 각 진영에 속했던 무관직. 절도사의 아래로 병영에는 병마 첨절제사, 수영에는 수군 첨절제사가 있었다. 병마 첨절제사는 1409년에 설치했으며 수군 첨절제사는 1466년에 도만호를 개칭한 것인데 목, 부의 소재지에는 수령이 겸임하였음. 종3품이 원칙이었으나 경상도 다대포와 평안도 만포진에는 정삼품, 당상관으로 임명하였음. 특히 육군으로서 평안, 함경도의 독진과 그 진관, 수군으로는 중요한 해안지방의 독진과 그 진관에는 수령이 겸하지 않고 전문적인 무관으로서 첨절제사를 두었는데 이 경우에 한하여 첨사라고 약칭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