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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9단 對 능청 9단 (5)

어사 박만정의 황해도 암행일기 5탄. 박만정은 어사의 신분을 속이고 다니지만 눈치 빠른 백성들은 그를 의심하고 이에 박만정도 점점 능청맞게 위기를 넘기게 된다.






1696년 암행길에 오른지 며칠 안됐을 때였다.
"백성들의 속내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은근히 접근해야 하는데 이렇게 우르르 다녀서는 곤란합니다. 괜한 의심을 사기도 쉽구요. 그러니 저는 따로 움직이는 게 나을 듯 싶습니다."
일전에도 암행어사의 수행원으로 다녀온 바 있는 백전노장 김성익 서리의 말이었다. 이에 따라 박만정은 일찌감치 김성익의 말에 양식과 찬거리를 나누어 싣게 하고 두 패로 갈라져 서로 앞서거나 뒤서거니 하면서 가고 있었다.
또한 서리 김성익의 조언을 참고하여 신분도 그럴 듯하게 위장했다.
"'나는 호서(湖西, 충청도) 사람으로 집안 사람이 지금 관서지방에서 수령 벼슬을 하고 있는데 그를 찾아 밥술이라도 얻어먹을까 하고 의지하러 가는 길입니다.' 이렇게 말할까 하는데 어떠냐? 그럴 듯해 보이느냐?"
"네. 그러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박만정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나름대로 치밀하게 준비를 했다. 그 덕분인지 지금까지는 별로 의심을 사는 일도 없었고 행색이 노출될 뻔한 위험도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박만정이 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주인이 박만정의 행색을 유심히 바라보며 자못 의심하는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것이었다.
"손님께서는 어느 곳에서 사십니까? 또 무엇을 하시는 분으로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이같은 흉년에도 행차에 딸린 말이 두 필, 인원이 4명이나 되며, 또 양곡과 찬물 등은 어떻게 마련 하셨습니까? 선비입니까? 아니면 무인입니까?"
집주인은 방을 내어주면서도 여전히 의심하며 캐물었다.
"나는 젊어서부터 글을 못하였고 기골이 약하여 무예도 익히지 못했습니다. 이 같은 몸으로 어떻게 벼슬을 했겠습니까? 이제 흉년을 당하여 제 한 몸 가눌 계책도 없으니 부득이 이렇게 먼 길을 나선 것입니다. 집안 사람이 지금 관서지방에서 수령 벼슬을 하고 있는데 그를 찾아 밥술이라도 얻어먹을까 의지하러 가는 길입니다."
박만정이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차분하게 설명했다. 집주인은 계속해서 물었다.
"관서지방으로 가신다구요? 그러면 더욱 이상하지 않소이까. 왜 길을 멀리 돌아가십니까?"
"이 길이 먼 길이라는 것을 내 모르는 바 아니오. 허나 행량이 떨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소. 친분이 있는 관원이나 면식이 있는 고향 사람을 찾아다니느라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지요."
"친분이 있는 관리라면 어느 고을 어느 원이며, 알만한 고양 사람이라면 어느 곳에 어느 사람입니까? 그리고 그 관서의 수령이라는 사람은 어느 사람입니까?"
박만정은 속으로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받아넘겼다.
"에.. 친분이 있는 관리란 금천과 봉산, 장여, 풍천 등지에 있는 자들인데 금천의 이생원, 해주의 최생원, 장연의 김생원 등은 모두 제 친구들입니다. 그 밖에 관서의 수령이란 안주에 있는 내 친척이며 평양과 용강에도 절친한 사람들이 있지요."
"이생원, 최생원, 김생원이라... 그런 성씨를 가진 생원이 어디 한둘이라야지."
집주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갔다. 그제서야 박만정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집주인이 다시 들어오더니 박만정에게 물었다.
"아랫마을에 사는 제 사촌 집에도 한양에서 오신 한 손님이 좋은 말을 타고 와서 유숙하고 있습니다. 혹시 그 손님과 같은 용무로 오신 것은 아닙니까?"
한양에서 오신 손님이란 바로 서리 김성익을 말하는 것이었다. 박만정은 아까보다 더 뜨끔했다. 행색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김서리와 간격을 두고 따로 다닌 것인데 그래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하지만 박만정은 일체 그런 내색은 하지않고 시치미를 뗐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께서는 뭘 보고 그런 말을 하십니까?"
"그 손님의 하인이 어둠을 타고 이곳에 와서 이쪽 하인과 서로 수작하는 것을 봤단 말입니다. 수상하지 않습니까?"
"난 또 뭐라고.. 상것들은 길거리에서 담배 한 대 나눠 피워도 서로 수작하는 처지 아니오. 나로서는 알 바 아닙니다."
박만정이 그렇게 둘러대자 주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주인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고 그 일은 그렇게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암행길에 오른지 보름쯤 됐을 때 박만정은 또 다시 위기를 맞았다.
날이 저물어서야 인가가 있는 마을에 도착했는데 하룻밤 유숙하기를 청하자 마을 사람들이 어찌나 심히 길손을 거절하는지 몇 집을 돌아서야 했다. 어느 집에 들어가니 주인이 공손히 맞아주기는 하나 마침 집에 마마를 앓는 아이가 두 사람이나 있다며 곤란해했다.
그러다 어느 촌사로 무작정 들어가니 그 집엔 단지 여자 몇 명만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일행을 보더니 방문을 닫아걸고 안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했다. 마침 비도 오고 하여 박만정은 다시 나가지 못하고 마루 아래 앉아 비를 피했다. 날은 저물어 어두워지는데 비는 점점 더 억수처럼 퍼붓는다. 진퇴유곡이었다.
그 때 마침 의관을 정제한 자칭 양반이란 사람이 들어왔다.
"이곳은 부녀자들만 있는 집이니 어떻게 바깥손님을 맞을 수 있겠습니까? 보아하니 나그네 같으신데 저희 집에 오셔서 쉬십시오."
이렇게 해서 박만정은 신달현이라는 자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좀전에 손님들께서 든 집은 작고하신 제 형님댁으로 다만 과수씨만이 살고 계시기 때문에 이곳으로 오시라 청한 것입니다."
"그랬군요. 저는 주인장이 안계시는 줄 몰랐습니다."
박만정은 신달현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 때 어떤 사람이 방으로 들어왔다. 신달현은 얼른 일어나 그를 공손히 맞았다.
"임생원 아니십니까? 어인 일로 여긴 오셨습니까?"
그러자 임생원이라는 자가 박만정을 훑어보며 말했다.
"사람들의 말을 듣자니 어떤 행차가 자네 집으로 들어갔다기에 혹 서울 손님이 아닌가 싶어 찾아 왔네."
그러고는 박만정에게 지금까지 어디서 살았으며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었다.
"저는 충청도 사람으로 이제까지는 그럭저럭 지냈습니다만 흉년을 당해 관서지방으로 양식이나 빌릴까 하고 갑니다."
박만정은 그 때까지 해오던 식으로 그렇게 둘러댔다.
그런데 임생원이라는 자가 박만정을 뚫어지게 보더니 물었다.
"그렇습니까? 저는 임우라고 하며 관향은 풍천입니다. 한양 사는 판서 임상원이나 전 서흥 군수 임윤원은 모두 저의 일가 권속들입죠. 혹 어른께서도 이들 두 사람을 아시지 않습니까?"
박만정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판서 임상원이라면 서로의 집에 여러 차례 왕래했을 정도로 가까운 이웃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임우라는 자의 얼굴이 어디서 많이 본 듯도 했다. 박만정은 내심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를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받아 넘겼다.
"나는 본시 시골 사람으로 한양에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한양에 임판서라고 하는 분이 산다는 말은 어디서 들은 것도 같으나 그 분의 면목은 저도 아는 바가 없소이다."
그런데 임우는 자못 불쾌한 표정을 짓더니 의심하는 투로 말했다.
"나는 벌써 성명을 밝혔는데 어른은 어찌하여 성명을 감추고 밝히지 않습니까?"
"아아! 다른 말을 하다 보니 답례할 겨를이 없었구려. 내 이름은 박중이라고 합니다."
박만정이 이렇게 얼버무리며 얼른 화제를 바꾸어 다른 일을 물었다. 하지만 임우는 집요한 데가 있었다. 임우는 의구심을 풀지 않고 박만정이 묻는 말에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이렇게 물었다.
"내가 지난 해 칠월에 임윤원 집에 갔었답니다. 그때 임판서께서 와 계셨는데 어떤 사람과 장기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암만 봐도 어른의 얼굴이 그 사람의 얼굴과 아주 많이 닮았습니다. 혹 그때 그 분이 아니십니까?"
박만정은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박만정도 임우를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다 했는데 임우의 말을 들으니 그 기억이 생생하게 나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과 마주치다니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다가는 자칫 신분이 탄로날 위기였다.
그러나 박만정은 속마음은 일체 드러내지 않고 사람좋은 웃음으로 가장했다.
"내 평생에 임판서나 임서홍을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그 집에 가서 장기를 둘 수 있겠습니까? 잘못 안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무튼 나와 그렇게 닮은 사람이 있다니 한번 만나보고 싶구려. 허허.."
박만정이 천연덕스럽게 능청을 떠니 임우도 더 이상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로도 임우는 말을 하면서 연신 박만중을 곁눈질을 했다. 밤이 깊어서야 자기 집으로 돌아가며 임우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날이 새기 전까지는 좀처럼 비가 멎을 것 같지 않으니 생원께서는 조반을 드시고 난 후 떠나십시오. 내일 아침 일찍 또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자 주인 신달현도 임우를 거들며 행차를 만류했다. 박만정은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주인께서 이렇듯 간청하니 내일 형세를 보아서 떠나도록 하지요."

다음날 새벽. 첫닭이 울도록 비가 그치지 않았다.
아직 하늘은 희끄무레한데 박만정은 벌써부터 행장을 차리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박만정은 어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날이 개이지 않더라도 새벽부터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자 주인 신달현이 눈치를 채고 안에서 뛰어나와 박만정의 말을 붙잡았다.
"아직 비도 개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 비를 무릅쓰고 행차하려 하십니까? 흰죽을 준비하고 있으니 한 술이라도 뜨고 가십시오."
신달현의 말은 진심인 듯 했다. 하지만 박만정은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아무래도 임우가 자신의 행색을 눈치챈 것 같아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주인의 두터운 정의는 감사하나 비록 비가 계속 오더라도 떠나야 합니다. 갈 길이 바쁘니 부디 가는 길을 막지 말아 주십시오."
박만정은 몇 번이나 붙잡는 신달현을 간신히 떼어놓고 길을 재촉했다.
한참을 간 뒤에야 박만정은 비로소 쉬면서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모처럼 눈치9단을 만나 난관에 봉착했지만 박만정은 이 위기를 잘 극복했다.
이 모든 것이 암행어사를 다니면서부터 일취월장하는 임기웅변 실력 덕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