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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진에서 만난 백발노인 (6)

1696년(숙종22) 황해도 암행어사 박만정(朴萬鼎)

어사 박만정의 황해도 암행일기 6탄. 어느 산골에 혼자 사는 노인의 집에 묵게 된 박만정은 노인이 그의 관상을 보며 마치 꿰뚫어보듯 풀이하는 것을 보고 짐짓 놀란다.





1696년 3월 24일.
박만정은 재령(載寧)에서 신분이 노출될 것이 염려되어 비가 오는데도 길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더욱 세차게 쏟아져 몸이 흠뻑 젖고 말았다.
박만정은 비를 피해 잠시 쉬었다 갈 생각으로 길가의 어느 촌사에 들어갔다. 집에는 백발의 노인이 홀로 있었다.
"비를 맞은 뒤라 자뭇 한기가 심하오니 청컨대 방 하나를 빌려 주시면 잠시 휴식을 취하고 돌아갈까 합니다."
박만정이 그렇게 부탁하자 백발 노인은 공손한 자세로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내 집엔 방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누추하기 짝이 없어 귀하신 손님이 쉴 곳이 못됩니다. 그래도 쓰시겠다면 어찌 거절이야 할 수 있겠습니까?"
박만정은 노인을 따라 들어섰다. 방은 손바닥만한 창이 하나 있을 뿐으로 참말이지 한 말[斗]만 하였다.
그 곳에서 쉬면서 박만정은 노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박만정은 먼저 산산진 수령의 비리와 산산진 일대의 폐단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산산에 진(鎭)이 설치된 뒤로 형편은 좀 나아졌습니까?"
"왠걸요. 사역만 더 늘었지 좋은 일은 하나도 없더이다.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 그런가보다 하고 있지만 사실 이런 궁벽한 곳에다 진을 설치해서 뭣에 쓴답니까?"
박만정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황해도에는 진(鎭)이 많아 관심을 갖고 유심히 관찰했었다. 그런데 진들이 한결같이 깊은 산골에 위치해 있어 국경을 방비한다는 임무에 걸맞지 않아 보였다. 그 중에서도 산산은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 있으니 아무리 봐도 진을 설치할 곳이 못된다 싶었다.
진이라고 있어봤자 무예도 닦지 않으니 소용도 없었다. 소위 변장배란 자들은 오직 백성들 침학하는 일에만 골몰하고 군졸들은 너무 시달려서 도망칠 마음만 품고 있었다. 진장(鎭將)1)이 있는 읍에서는 폐단이 더욱 심했다.
"지난번에 진곡을 나눠준다고 해서 받았더니 껍데기가 태반이었습니다. 그래놓고도 자기는 책임을 다했다고 하겠지요. 그 첨사 나으리가 조만간 임기가 끝난답니다. 그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긴 한데 그렇다고 굶주려 있는 토졸들한테 쇄마가(刷馬價 : 지방(地方)에 배치(配置)하였던 관용(官用)의 말 값.)를 내라고 독촉하니 참으로 독하지 뭡니까요?"
산산 첨사 송영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지난해 가을 진곡을 보충한다는 명목으로 산산진 내의 다소 부유하다는 사람을 가려내어 곡식 한 섬씩을 강제로 걷어들였다. 그러자 살림이 넉넉한 사람은 담당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빠져나갔고 개중에는 고향을 버리고 떠난 자도 생겼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이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 외에도 송영기는 평소 침학이 심하여 비방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노인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다른 데 있는 듯 싶었다.
노인은 아까부터 박만정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보아하니 존객께서는 필연코 벼슬하시는 높은 분 같습니다."
"거 무슨 망령된 말씀입니까? 나는 어려서 글을 못 배운데다 기력이 약하여 무예도 닦지 못했습니다. 이런 신분으로 어찌 벼슬을 하겠습니까?"
박만정이 짐짓 웃음을 띠며 눙쳤다. 그러자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나는 못 속이십니다. 바른 말로 이르십시오. 존객께선 정말 벼슬을 안하셨습니까?"
"내가 만일 벼슬을 한 몸이라면 무엇 때문에 주인장을 속이겠습니까?"
노인이 자못 꿰뚫어 볼 듯이 보니 박만정도 낯빛을 고치고는 바로 앉았다.
"참말로 그러시다면 이것도 팔자 소관인가 봅니다. 손님의 얼굴을 보니 반드시 벼슬할 상이기에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주인장께서는 사람의 관상을 볼 줄 아시오?"

"네. 다소 볼 줄 알지요. 명나라 사신이던 백등용이라는 사람한테 배웠습니다. 그때 그 분이 나에게 가르치시기를 사람의 이목구비가 이러이러하면 반드시 귀히 되고 이러이러하면 반드시 비천하다 하면서 비술을 적은 글 몇 장을 주었습니다. 제 관상을 보고는 수는 팔십을 넘길 것이요, 가계는 가히 부유할 것이라 했습니다. 내 젊어서는 열심히 농사에 힘써, 신곡이 구곡이 될 정도로 양식이 풍족했었답니다. 헌데 몸이 노쇠하면서 차츰 가세가 기울어 일흔 아홉이 된 지금 아무래도 수명이 다 한 듯 싶습니다. 그러니 그 말이 전혀 효험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나는 어떻겠습니까? 수는 어떻습니까? 제 명에 죽겠습니까?"
박만정이 호기심 반 장난 반으로 이렇게 물었다. 노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박만정의 뒤통수를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말했다.
"수는 장수하겠습니다."
"그럼 자식은 있겠습니까?"
"내가 어찌 그런 일까지 갖추어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노인은 혼자 한참을 중얼거렸다. 박만정이 관상에는 반드시 벼슬할 귀인인데 그러한 일이 없다하니 정말 팔자가 좋지 않은가 보다며 자못 강개한 낯빛을 띄우는 것이었다.
박만정은 못들은 체하고 되려 능청을 떨었다.
"지난 일이야 그렇다 하고 혹 장래에는 벼슬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런 상을 가지고도 아직 벼슬을 하지 못했다는데 어떻게 필히 벼슬을 하리라고 기약할 수 있겠습니까? 존객께서 그런 상을 갖고서도 아직 명성을 얻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노인이 그렇게까지 말하며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니 박만정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촌로(村老)라 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일. 박만정은 훗날을 기약하고자 했다
"대체 노인은 어떤 분이십니까?"
" 내 이름은 백수남이라고 합니다. 가까운 친척들은 모두 좌수를 지내며 선친도 무오년에 과거에 등제하여 벼슬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원래 서파(庶派, 서자의 자손)라 벼슬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 또한 저의 운명이겠지요."
노인은 그 말을 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로부터 열흘이 채 못되어 박만정은 다시 산산진에 출몰했다.
이번에는 정식으로 신분을 밝히고 출도를 하기 위해서였다.
"암행어사 출도요!"
역졸이 관아 문을 마패로 두드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뒤이어 박만정이 들어와 보니 첨사 송영기는 여러 관졸들과 쌍륙놀음(雙陸, 주사위 두 개를 갖고 노는 숫자놀이) 놀음을 하고 있다가 어사 출도 소리를 듣고 혼비백산하여 막 도망치고 있었다. 그 서슬에 다른 하인들도 도망쳐 순식간에 관아가 텅 비어 버렸다.
박만정은 역졸을 시켜 모두들 들라 엄명하고는 진휼관계 문서를 조사했다.

그 날 밤 박만정은 관아를 떠나기 전에 백수남 노인의 집을 다시 찾았다.
하지만 노인의 집은 불이 꺼진 채 휑하니 적적하기만 했다.
알고보니 박만정이 떠난 다음날 급체하여 숨을 거뒀다는 것이다.
결국 노인은 박만정의 진실을 모르는 채 떠나고 말았다.
이 또한 그의 운명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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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장(鎭將); 각 도의 지방군대를 관할하기 위해 설치한 진영(鎭營)의 장관(將官). 정3품 관직으로, 중앙의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 ·진무영(鎭撫營) 등에 속한 것과 각 도의 감영(監營) ·병영(兵營)에 속한 것의 두 계통이 있다. 모두가 겸직이었으며, 중앙 소속은 판관(判官) ·중군 및 인근 주 ·목(州牧)의 부사(府使) ·목사(牧使)가 겸임하고, 각 도 소속은 주 ·군을 적당한 관할구역으로 나누어 진영을 설치하고 그 지방의 부윤(府尹) ·부사 ·목사 ·현감(縣監) 등이 겸하였다. 첨사(僉使) ·만호(萬戶) 등도 포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