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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 손은 약손 (7)

어사 박만정의 황해도 암행일기 7탄. 박만정은 감기로 고생하는 수행원과 무식해서 병에 걸린 아이를 방치하는 부모에게 평소 갖고있던 약재 지식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1696년 3월 하순. 황해도의 명물 구월산 자락을 타고서 안악을 지나 신천에 당도한 어느 날이었다. 박만정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서리 김성익이 낑낑 앓고 있었다. 이마를 만져보니 열이 펄펄 끓었다. 며칠 전 개펄에 빠져 몸이 흠뻑 젖은 적이 있었는데 제 때 몸을 녹이지 못해 감기에 걸리고 만 것이다.
박만정 일행은 어제 저녁 신천군 중령방 풍지곶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맞아주지를 않았다. 불문 곡직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주인의 태도가 몹시 불공한 것이 접대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웬 사람이 밖에서 들어와 일행의 행색을 살피기에 박만정이 따지듯이 물었다.
"이 지방 인심이 왜 이 모양입니까? 비록 흉년이라고는 하지만 양식을 준비해 갖고 다니는데도 푸대접이 이토록 심하니 어디 이래서야 사람 사는 곳이라 할 수 있겠소?"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다.
"흉년 인심을 보통 때와 비교할 수야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지방은 사면이 들판인지라 땔감이 지극히 귀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마을 사람들이 손님 맞기를 꺼렸던 것입니다."
상황이 그러하니 박만정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그대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기어이 오늘 아침 사단이 나고 만 것이다. 따뜻한 방안에서 푹 쉬어야 할 환자가 냉골에서 잠을 잤으니 감기에 걸려도 단단히 걸린 게 분명했다. 김서리는 오한을 느끼는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박만정은 봇짐 속에서 비상으로 남겨두었던 무명을 꺼내 가노 계봉에게 일렀다.
"이것을 팔아서 참소음(參蘇飮)1) 한 첩을 사갖고 오너라."
잠시 후 계봉이 약재를 가져왔다. 박만정은 그것을 달여 김서리에게 먹였다. 그리고는 김서리를 강제로 일으켜 다시 길을 떠났다. 좀 야박한 일이겠지만 한 곳에서 이틀씩이나 지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서리는 열에 들뜬 몸으로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후가 되면서부터 김서리가 서서히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김서리는 코를 훌쩍이며 신기한 듯 말했다.
"거 신기하네! 나으리가 주신 약을 먹고 나니까 열이 뚝 떨어졌습니다. 콧물도 아까보다 훨씬 덜 나구요. 도대체 무슨 약을 쓰신 겁니까요?"
"나았다니 다행이구나. 참소음 한 첩 썼을 뿐이니라."
"참소음이요? 그게 감기에 좋은 건 줄 어찌 아셨습니까? 이제 보니 나으리 의원하셔도 되겠습니다요."
박만정이 웃으며 농담삼아 말했다.
"그으래? 아예 이 참에 의원이나 열어볼까?"

그 날 저녁 신천 북쪽 천곡방 원산촌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 곳 사람들의 방색은 더욱 심했다. 날은 이미 칠흑같이 어두워지고 인적도 끊겼는데 가는 곳마다 낭패였다. 염치불구하고 어느 집 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얼마 뒤 주인이 나왔다.
"내 집에 중병을 앓는 아이가 있어 손님을 받기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날이 이토록 저문데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내쫓을 수도 없군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리하여 박만정 일행은 주인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과연 방 한 켠에는 사내 아이가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누워있었다.
"올해 여덟살된 아들놈인데 벌써 육개월째 누워있습니다. 하룻밤에도 여러 차례 변을 보니 한 방에서 같이 자기가 매우 곤란할 것이외다."
"병든 아이가 방변하는 것은 으레 있는 일이지요. 괜찮습니다."
박만정은 주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사 본연의 임무에 들어갔다.




"금년처럼 기황이 극심한 때일수록 백성들의 고락이 수령에 달려있는 법인데 신천군수는 어떠하오? 구휼을 잘 하고 있소?"
"아유, 그만하면 잘하는 편이지요. 해마다 의례적으로 바치는 곡물을 올해는 흉년이라고 특별히 감봉해주셨으니까요. 올해는 전세(田稅)도 절반밖에 안 받았답니다. 나머지는 관에서 스스로 마련해 보충했지요. 원체 사람됨이 자상하고 정치를 잘하는 분이시거든요. 다만..."
"다만 무엇이오?"
"다만 지난 가을에 크게 원성을 산 적은 있지요. 관원들이 입을 털옷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군관들에게 각각 오십냥씩 걷었거든요. 사실 열냥이면 충분하답니다. 실제로 관원들에게 내려진 것도 열냥짜리 양피 옷이었지요."
"그럼 처음부터 열냥씩 걷으면 될 것을 왜 사십냥씩이나 더 걷는단 말이오?"
"예전부터 관원들이 입을 털옷 비용은 황광피가(黃 皮價 : 족제비 가죽 값)로 쳐서 징수하는 예규가 있어서 그렇답니다. 황광피가로 치면 50냥이지요. 그래서 그런 것인데 이같은 흉년에 밥도 제대로 못먹는 군관들이 오십냥 만들어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요?"
전부터 내려오는 예규라 할지라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면 마땅히 혁파해야 할 것이다. 박만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주인과 더불어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워있던 아이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자 주인이 얼른 몸을 돌려 아이를 보며 말했다.
"잠시만! 이 아이가 또 변을 보았나보오."
그러면서 주인은 아이가 덮고 있던 이불을 들춰보았다. 그 순간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인은 창문을 열더니 개를 불렀다. 그러자 개 두 마리가 쏜살같이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개들은 요 위의 변을 서로 다투듯이 핥아먹었다. 형언할 수 없는 고약한 냄새가 방안에 진동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이가 병이 들어 자주 방변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막상 코앞에서 벌어지니 박만정은 당황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애초에 이 집 주인이 길손을 받지 않으려 하기에 처음에는 아이의 병을 핑계삼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충분히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박만정은 부채로 악취를 날리며 물었다.
"이 아이가 하루 저녁에 몇 번이나 방변을 합니까?"
"일정하지는 않습니다. 한두 번 하는 때도 있고, 다섯번 하는 때도 있습니다. 복통 때문에 설사를 자주 하는데 저희도 달리 손을 못쓰고 있습니다."
"복통이라? 저 증세가 지금 몇 달이나 되었습니까?"
"육개월은 되었습니다. 아직 먹는 것은 전폐하지는 않았습니다만 하룻밤 사이에 변을 적어도 대여섯 번 보니 아무래도 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쑥은 먹여보셨습니까? 그래도 계속 그럽니까?"
박만정이 물었다. 침울해 하던 주인이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쑥이요? 쑥이 효험이 있습니까?"
"있다마다요. 쑥을 달여먹이면 웬만한 복통은 싹 낫습니다."
"그것을 달여 먹이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가르쳐주십시오."
"방법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묵은 쑥 한 줌과 큰 생강 한 덩이를 진하게 달여 더울 때 마시게 하십시오. 또는 생즙을 내서 마셔도 신통하게 잘 듣습니다."
박만정이 자세히 방법을 일러주자 주인이 반색을 하며 말했다.
"나는 다만 귀신의 동티로만 알았지 쑥으로 고치는 병인 줄은 몰랐습니다. 진작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내일 당장 달여먹이겠습니다."
주인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박만정에게 감사해하고는 물었다.
"혹시 의원 아니십니까?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지..?"
박만정이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의원은 무슨... 아니오. 나는 그저.."
그러자 서리 김성익이 아침 때와 달리 화색이 도는 얼굴로 끼어들며 이렇게 거들었다.
"언제 한양에 올 일 있으면 꼭 한번 찾아오십시오. 박만정 의원입니다!"
"예끼, 이 사람아."
박만정이 웃었다.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1) 참소음(參蘇飮) : 原主에는 '일종의 한약재'라고만 되어 있다. 아마도 참소엽(차조기)을 말하는 것 같다. 차조기는 토종 약초 가운데 하나로 입맛을 돋우고 혈액순환을 좋게 하고, 땀을 잘 나게 하며, 염증을 없애고, 기침을 멈추며, 소화를 잘 되게 하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등의 효능이 있다. 특히 감기에 유용하게 쓰이는데 오한으로 온몸이 쑤시고 콧물이 나오며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마를 때 차조기 잎을 40~50g 달여 마시고 땀을 푹 내고 나면 개운해진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