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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년의 암행 길은 참으로 슬픈 여정이구나 (12)

어사 박만정이 배천에서 겪은 이야기. 갖가지 방법으로 백성을 수탈하는 군수 이동형을 치죄하고 가난에 찌든 눈먼 할멈을 돕는다.





배천군수(白川郡守) 이동형(李東亨)의 해괴한 세금 계산법

배천(白川 : 표기는 白川으로 하지만 배천이라 발음한다.), 평야가 많아 황해도 지방에서도 손꼽히는 곡창 지대이다. 하지만 그것도 풍년일 때 이야기, 요즘은 누구나 끼니 걱정에 혀를 차는 실정이다.
1695년 가을, 배천군 관아의 대청에서 유례없는 큰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귀한 쇠고기를 비롯한 진미의 안주와 술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는데 상의 수만도 무려 열둘을 헤아렸다. 게다가 관아의 앞마당에는 군내(郡內) 16방의 부민 3백여 명이 손님으로 와 앉으니 잔치도 보통 잔치가 아니다. 초대받은 이들은 대청 위에 차려진 이 화려한 주안상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데 지체 높은 수령이 손수 술병을 들고 자리를 오가며 술잔까지 채워주니 황송하기 짝이 없다.
"자자, 사양 말고 쭉 드시게."
이렇게 자상하게 고을 주민들을 접대하는 수령은 배천 군수 이동형(李東亨)으로 시종일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참으로 좋은 시절이 도래했는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비록 대청 위에 올라가 상 앞에 앉지는 않았지만 내객들은 이미 황홀경에 빠져있었다.
이렇게 잔이 몇 순배 돌았을까, 군수 이동형이 한가운데로 나아가더니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아, 지금부터 여러분 앞으로 종이를 한 장씩 내드릴 것이오. 거기다 자기 이름 석자를 적은 뒤 이번에 납부할 곡물의 수량을 써넣도록 하시오."
이 해괴한 발언으로 인해 흥 오르던 잔치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은 물론이려니와 몇몇 객들은 아차, 싶은 마음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군수의 말은 계속되었다.
"자, 그리고 저 대청 위에 차려진 음식은 누구나 먹을 수 있으니 올라가서 드시오. 내 기꺼이 대좌해드리겠소."
잠시 침묵이 돌았다.
내객 중 상황 판단이 빠른 몇몇은 이미 어쩔 수 없는 사정인 것을 알았는지 주섬주섬 대청 위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또 몇몇은 붓을 들어 자기 이름과 납세량을 적어 넣기도 했다. 군수는 대청 위로 올라온 사람들과 마주 앉아 마치 평교 간처럼 권커니 자커니 대작을 했다. 특정 관문을 통과한 자들에게만 혜택을 내려주는 치졸한 유희였다.
결국 내객들은 하나둘 씩 종이에 일정액을 써넣고 대청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친히 군수의 잔을 받을 수 있는 강요된 영광을 누렸다.
이렇게 해서 거둬들인 종이쪽지, 다시 말해 '예정된 상납미'는 다시 한번 군수의 1차 검토 과정을 거쳤다. 기재된 곡식의 양이 저마다 다를 것이니 기준이 될 평균량을 잡아야 했다. 여기서 군수는 또 한번 기발한 계산법을 도입한다.
"가장 많은 기재량을 기준으로 하여 그에 못 미치는 액수는 아예 받지도 말라."
하며 '퇴짜'를 놓은 것이다.
거기서 그쳤을까? 그렇지 않다. 군수는 한발 더 나아가 기재량의 배액을 상납하도록 명령했으니 이 전무후무한 세금 계산법으로 인해 배천 군의 부민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럭저럭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이들에게 이 정도였으니 그보다 못한 이들에게는 오죽했으랴. 앞서 쇠고기를 잡아 상다리 부러지게 차렸다고 밝힌 바 있듯이 군수 자신은 이렇듯 흥청거리며 육식을 일삼으면서, 한편으로는 우금(牛禁;소 도살 금지)의 법령을 들먹이며 각 방의 백정들을 싸그리 잡아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준엄하게 외치기를,
"법을 어기고 소를 도살한 죄, 면키 어려울 것이다!"
하며 옥에 갇히고 싶지 않으면 속전 10량씩을 바치라니 백정들로서는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었다.
황해도 배천.
암행어사 박만정이 파견되기 전부터 이곳에서는 이런 일들이 예사롭게 벌어지고 있었다.



눈먼 노파와 분노한 백정

1696년 4월 14일 이른 새벽, 어사 박만정 일행은 배천군의 산 마을인 화산(花山) 촌락에 도착했다. 허름하나마 집 몇 채는 있었지만 인적이 사라져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모두가 유리걸식으로 흩어진 것이다.
"조반 지어먹기는 틀렸구나."
박만정이 중얼거렸다.
"저기 누가 있나 봅니다."
서리 김성익이 다 쓰러져 가는 초가 한 채를 가리켰다.
과연 허리가 기역(ㄱ)자로 굽은 노파 하나가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보아하니 눈먼 노파였다.
"할멈, 우리는 배천으로 가는 과객이올시다. 어디 조반이나 한끼 지어먹을 만한 곳이 없겠소?"
박만정이 다가가 물었다.
"바, 밥? 그런 게 아직 있소? 나도 좀 구경이나 해봅시다."
노파가 되물었다. 그 한 마디로 사정을 모두 짐작할 수 있었다.
"쌀은 우리에게 있으니 그저 짓기만 하면 됩니다. 할멈도 함께 드십시다."
박만정이 말했다.
그 말에 노파는 감긴 눈으로도 활짝 반색을 했다.
폐가나 다름없는 노파의 집에서 어설프게나마 조반을 먹으면서도 박만정은 예의 탐문자로서의 본업에 충실했다.
"이토록 황폐한 곳에 할멈 혼자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이오. 식구는 아무도 없소?"
"나는 남편도 자식도 없는 몸이요. 호적도 없어 기민장에도 못 올랐소. 아무리 애원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소.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풀뿌리를 뜯어먹고 삽니다. 빨리 죽기만 바랄 뿐이오."
노파가 말한 기민장이란 구호대상자 명단을 뜻했다. 하긴 이 버려진 산골에 버려진 노파까지 챙겨줄 만한 아량을 배천 군수 이동형에게 기대한다는 것이 무리였다.
박만정은 씹던 밥이 모래처럼 느껴졌다.
이때 다른 폐가 한 곳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거구의 사내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박만정 일행은 깜짝 놀랐다. 별안간 나타난 것에도 놀랐지만 그 행색에 다시 놀란 것이다. 사내는 봉두난발(蓬頭亂髮)에다가 온몸에도 털이 북실북실하여 마치 인간의 꼴을 한 짐승과도 같았다. 찢어진 천으로 대충 가린 옷도 가관이었다.
"댁들은 어디서 온 누구요?"
사내가 거칠게 물었다. 목소리에 귀기(鬼氣)와 살기(殺氣)마저 서려 있었다.
"네 이놈! 보아하니 천하의 상놈 같은데 어디라고 감히!"
서리 김성익이 짐짓 위엄을 챙겨 꾸짖었다.
그러나 사내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샘터로 다가갔다. 그리고 물 한 사발을 들이키더니 다시 이쪽을 보며,
"픽픽 다 죽어나가는 판국에 뭔 놈의 양반, 상놈이요? 어차피 뒈질 목숨, 나는 산 도적이 되기로 했수다."
그리곤 주먹을 쥐고 우두둑 소리를 내보였다.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박만정과 김성익, 그리고 옆에는 역졸 둘이 있어 아까부터 몽둥이를 꺼내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판사판, 죽을 기세로 달려드는 거한과 맞붙는다면 누구 하나쯤 병신이 되고도 남을 터이다. 박만정이 나섰다.
"아무리 무식한 상놈이라도 이게 뭔지는 알렷다."
하며 슬그머니 마패를 보였다.
그러자 기세 좋던 사내가 고목 나무처럼 앞으로 엎어지더니 난데없이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소인 죽을 죄를 졌습니다"
"일어나거라. 그리고 이리 가까이 오너라."
박만정이 사내를 불렀다.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사내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앉았다.
"네 사연을 읊어보거라."
그러자 사내는 눈물 반, 한숨 반으로 하소연을 시작했다.
"소인은 최돌이라고 하는 백정으로 이곳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백정으로서의 살이가 어떠한 지는 박만정 역시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헌데 배천 군수의 행패가 신분의 최하층인 백정에게까지 미쳤으니 최돌이도 그 희생자 중 하나였다. 그는 우금법을 어긴 대가로 그나마 갖고 있던 재산을 다 빼앗기고 형제 부모까지 굶거나 병들어 죽는 바람에 반 실성을 한 것이었다. 게다가 백정에게 소를 못 잡게 하니 할 수 있는 일이 결국 산 도적밖에 없었다. 사지육신 멀쩡하니 걸식도 마땅찮았던 것이다.
"내 배천 군수의 일을 이미 소상히 들은 바 있지만 듣고 보니 참으로 극심하구나."


박만정은 눈먼 노파와 통곡하는 백정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최돌이는 듣거라. 흉년과 학정을 맞아 신음하는 이가 오직 너 하나 뿐은 아니겠으나 오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너에게 약간의 곡식을 주겠다."
최돌이는 엎어져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저 울기만 했다.
"한 가지 너에게 일러둘 말이 있다. 여기 이 할멈은 보다시피 눈이 멀어 혼자 몸으로는 며칠을 못 버틸 것이다. 그러니 그저 네 부모인양 모시며 살아보거라. 비록 사람이 사람다운 꼴로 살아가기 힘든 때이지만 너를 이렇게까지 살려둔 것도 어찌 보면 하늘의 뜻이니 부디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지는 말거라."
박만정이 곡식 꾸러미를 최돌이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최돌이는 연신 절을 했다.
최돌이와 노파를 뒤로 하고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났다. 최돌이는 여전히 절을 하고 있었다. 길을 걸으며 일행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저 지경이 된 자에게 인간의 도리를 운운하다니 내 혀가 부끄럽다.'
박만정이 혼자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안개 속, 노승(老僧)과의 만남

화산 촌락을 떠나올 때부터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산길에 접어들어서는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박만정은 지금, 홀로 안개 짙은 산길을 가고 있다. 심한 안개로 인해 김성익을 잃어버린 것이다. 남아있던 하인을 시켜 서리를 찾아오라 보낸 뒤 박만정은 내처 길을 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점점 짙어오는 안개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말에서 내려 길가에 앉아있노라니 안개를 헤치며 늙은 중 하나가 나타났다. 노승은 박만정을 향해 조용히 절을 했다.
"대사(大師)께서는 어느 절에 계시기에 이토록 궂은 날에 행차를 하십니까?"
박만정이 물었다.
"소승, 수양산 암자에서 불도를 닦는 중인데 양식이 떨어져 이렇게 동냥 길에 올랐습니다."
"연로하신데 몸소 나서다니요. 그 절에는 아무도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허나 난리처럼 흉년이 닥치니 모두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노승의 말하는 품이 정갈하고 친근하여 박만정은 웃으며 농을 던져보았다.
"도를 닦는 스님들은 뜻이 깊고 덕이 높아 굳이 낟알을 씹지 않아도 살 수 있다 들었습니다만……."
"소승은 그럴 만한 위인이 못 되지요. 배고프면 먹고, 추우면 입고, 더우면 벗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는 게 다 사람의 이치 아니겠습니까. 항간에 중들이 이슬과 생식만으로 살 수 있다는 낭설은 믿을 바가 못 됩니다."
박만정은 노승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공부가 깊은 불자(佛者)라는 느낌이 온 것이다. 그는 자세를 바꾸어 합장을 하며 말했다.
"산아래 사바의 땅에서는 아마 보시를 받을 수 없을 겁니다. 지나오면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비참한 광경만 겪었습니다. 참으로 사람이 살고 죽는 일의 무상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불가에서 말하는 허무적멸(虛無寂滅)이 바로 이것인지요."
"소승 역시 그 깊은 뜻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말할 자격도 없습니다. 다만 중생을 구하는 일은 하늘, 땅, 사람, 이 삼계(三界)의 큰 일이고, 특히 인간 세계의 일은 대인 군자들께서 하시는 사업이니 원컨대 생원께서는 그 일을 위해 노력해 주십시오. 부디 소승뿐만 아니라 구걸로 연명하는 가엾은 중생들로 하여금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신다면 천번 만번 감사하겠습니다."
노승은 다시 합장을 하며 이만 물러갈 뜻을 비추었다.
박만정이 마주 합장을 한 뒤 노승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니 문득 꿈이 아닌가 착각이 들었다. 어느새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박만정이 그 곳에 시선을 던져두고 한참 앉아있으려니 다시 안개가 걷히며 서리 김성익과 하인이 나타났다.
"오던 중에 노승 한 분을 만나지 않았나?"
박만정이 말에 오르며 김성익에게 물었다.
"오는 동안 길에서 만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김성익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허어……."
박만정은 말을 몰며 허공을 쳐다보았다.

슬픈 여정

"암행어사 출도야!"
점심 무렵이 되어 배천 관아로 들이닥친 박만정은 쌀벌레처럼 흩어지는 아전들 사이를 지나 곧장 동헌으로 직행, 문서를 파헤쳤다. 아울러 모든 창고와 형옥을 이 잡듯이 뒤지고 수령과 그의 비리에 관련된 이속, 향리들을 죄다 끌어내어 문초했다.
이미 알려진 사실 이외에 또 다른 불법과 비리의 증거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파종할 종자를 내 주지 않아 논밭을 황무지로 만들어버린 죄, 과도한 납세로 부민을 침탈한 죄, 마땅히 구호대상자에 올라야 할 기민들을 제외시키고 오히려 양반들의 이름만 올린 죄, 선정비를 세운다고 돈을 거둬들인 죄…….
마치 비리의 만물상과도 같았다.
늘 하던 대로 박만정은 인신과 병부를 거두어 겸관에게 보내고 창고를 봉한 후 관아를 나섰다. 그에게 즉결심판의 권한만 있었어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을 터, 박만정은 차라리 관아를 일찍 나서고 싶었다.
"창고에 남아있는 환곡미를 말에 실을 수 있는 대로 실어라."
관아를 나서며 박만정이 역졸에게 일렀다.
다음 목적지는 연안(延安)이었다. 박만정은 역졸에게 다시 명령했다.
"그 쌀을 가지고 화산 촌락으로 가거라. 그 노파와 최돌이에게 쌀을 주되 흩어진 촌민들을 모두 불러모아 함께 지어먹도록 일러라. 그리고 여기 따로 챙겨둔 쌀은 그곳 수양산의 암자에 갖다주어라. 거기 노쇠한 중이 하나 있을 것이다."
역졸들이 바람처럼 말을 몰았다.
박만정과 김성익은 서둘러 배천 고을을 벗어났다.
'인간 세계의 일은 대인 군자들께서 하시는 사업이니 원컨대 생원께서는 그 일을 위해 노력해 주십시오.'
박만정의 귓가에 노승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그토록 멀고 어려운 일을 내 한 몸으로 어찌 한단 말이오.'
박만정은 가슴이 답답했다.
눈에 띄는 것이 비참한 풍경이요, 부패한 탐관들이었다.
한성을 떠나온 지 보름밖에 안 지났지만, 그는 마치 오래 전에 전혀 다른 세상으로 넘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최돌이 같은 자들은 몇 줌의 쌀로 허기나마 잠시 속일 수는 있겠으나 박만정의 가슴에 스며든 이름 모를 슬픔은 속일 수가 없었다.
흉년의 암행 길은 참으로 슬픈 여정이구나.
박만정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