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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도 그 후 (13)

어사 박만정이 황해도 서흥에서 겪은 이야기. 여러 고을에서 출도한 뒤, 암행어사에 대한 소문이 자자해지자 암행하기가 몹시 어려워진다.





1696년 4월. 바야흐로 완연한 봄이었다. 앞다투어 빨갛고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는 봄꽃들로 인해 겨우내 빈곤하던 들녘에도 점점 화색이 돌고 있었다. 특히 황해도 일대에서는 꽃소식과 더불어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또 하나의 소식이 있었으니 바로 암행어사 출도 소식이었다. 암행어사에 대한 소문은 꽃소식보다 더 빠르게 퍼져갔다.
"자네 암행어사가 떴다는 소문 들었는가?"
"산산진에서는 첨사가 관졸들이랑 쌍육회를 하다가 어사 출도 소식에 혼비백산했다지, 아마?"
"신계 사람들 말로는 암행어사가 서른도 안된 새파란 청년이라던데?"
"무슨 소리! 곡산에서 방금 온 장돌뱅이가 직접 봤다는데 수염이 허연 노익장이라네."
이처럼 박만정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사람들은 암행어사에 대한 갖가지 추측과 과장을 보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한번은 박만정이 수안에서 출도한 뒤 서흥으로 가는 길이었다. 박만정이 말죽을 먹이기 위해 한 촌사에 잠시 머물렀는데 그 주인이 물었다.
"들리는 말로는 암행어사가 신계, 곡산 등지에 출몰한다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혹시 만나보시지는 않았는지요?"
어사를 앞에 두고 어사를 보았냐고 물으니 웃음이 절로 날 일이었다. 그러나 박만정은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능청을 떨었다.
"그런 말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평소에 어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비록 길거리에서 만났다 하더라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수안에서 듣기로는 암행어사가 벌써 토산, 금천을 거쳐 한양으로 돌아갔다더군요. 자세히 들었으니 틀림없을 것입니다."
"나도 그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암행어사가 지나간 게 틀림없나 봅니다."
주인은 못내 미심쩍어 하는 눈치였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런데 암행어사가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박만정은 갈수록 행동하기가 어려워졌다. 박만정을 암행어사일지도 모른다는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늘어난 까닭이다.
박만정이 어느 한 집에 들어 쉬어가기를 청했을 때였다. 주인이 처음엔 거절하더니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태도를 바꾸는 것이었다.
"지금 저희집에는 팔십이 된 아버님이 병환으로 누워 계셔 곤란합니다. 하지만 댁의 말을 듣고 보니 피차에 사세가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내 비록 가내에 환후가 있으나 어찌 허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박만정 일행이 방으로 드니 잠시 후 상을 내오는데 그 대접이 자못 후했다. 주인의 수작이 못내 수상했지만 날이 저물어 하는 수 없이 그 날 밤은 그 집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길을 떠나려는데 주인이 전날 저녁 같은 상차림에 영계 백숙까지 얹어 왔다. 박만정은 주인의 그 태도가 어찌나 은근한지 속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박만정은 닭을 사양하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박만정을 평범한 행려자라고 생각했다면 주인이 닭까지 삶아 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출도한 뒤 불거진 애로점은 그 뿐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암행어사가 자기 고을에 출도해 폐단을 해결해주고 부정한 수령을 혼내줄 것을 바랬지만 반면에 달가워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박만정이 수안 남쪽 고지암이라는 마을에서 묵고 있을 때였다.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이웃에 사는 사람이 찾아와 주인에게 물었다.
"그래, 궤어(일명 쏘가리)는 잡으셨소?"
"궤어라니? 뚱딴지같이 무슨 소리요? 지금 궤어를 어떻게 잡는다고?"
"어제 관가에서 보낸 관패자(官牌字, 관보를 알리는 글)를 못 보셨소? 금명간 어사의 행차가 이곳에 이를 것이니 큰 궤어를 속히 잡아들이라는 것이오."
이웃 사람이 가버리자 박만정이 주인에게 물었다.
"이런 골짜기 마을에서도 궤어를 잡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셨을 때 못 보셨소? 여기로 오려면 반드시 개울을 하나 건너야만 된답니다. 전에는 그 개울이 자못 깊어서 고기를 잡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습죠. 그런데 금년에는 한발이 너무 심해서 고기는커녕 개울물까지 바싹 말라버린 실정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고기를 잡으라는 것인지 정말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주인은 암행어사의 행차로 인해 괜한 공역을 치르게 생겼다며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박만정이 주인에게 넌즈시 물었다.
"만약 그러한 공역을 없앤다면 사람들이 다행스럽게 생각할까요?"
"다행스럽게 생각하다 마다요. 그런 일을 어찌 다 이루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다음날 박만정은 수안 관아에 들어가 그 공역을 즉시 거두도록 명령했다. 백성들의 무리한 공역을 덜어주어야 할 어사가 도리어 공역을 부과하는 인물이 되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암행어사는 출도한 뒤에도 이렇듯 남모르는 고충을 겪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