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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를 기다리는 사람들 (14)

어사 박만정이 풍천 등지에서 겪은 이야기. 방문을 써서 돌리거나 직접 어사를 찾아다니는 무리들로 인해 임무 수행에 곤란을 겪는다.






1696년 4월도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어사 출도로 황해도 일대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동안 크고 작은 부정과 폐단에 시달렸던 백성들은 어사 덕분에 살 맛 나는 세상을 만나게 됐지만, 관직에서 내쳐진 수령 이하 지방관들은 어사 때문에 그동안 누려왔던 부와 명예를 반납해야 했으니 세상 살 맛을 잃을 만도 했다.
그런데 어사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서도 또 다른 유형의 희비가 엇갈렸다. 암행어사가 아무리 열심히 정탐하고 문서를 조사한다 해도 관내 모든 폐단을 알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물며 추생지가 아닌 고을은 암행어사의 능력과 관심 밖에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해도 해결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없었다. 이 때문에 암행어사가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가 도리어 허탈감에 빠져 원망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박만정이 풍천에서 겪은 일도 그런 경우였다.
박만정이 풍천에 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4월 25일 새벽에 송화현에서 출도한 박만정은 그 날로 임무를 마치고 은율로 향했다. 그런데 도중에 날도 저물고 날씨도 좋지 않아 쉬었다 가려고 풍천에 들른 것이었다.
박만정은 이경(二更 : 밤 10시를 전후한 두 시간, 곧 하오 9시부터 11시까지의 동안. 을야(乙夜).)이 다 되어서야 풍천 성문에 다다랐다. 공복에 40여리를 달려왔더니 짙은 안개에 의관이 모두 젖고 온몸이 몹시 노곤한 상태였다. 이에 곧바로 객사로 드니 구들에 불을 지피지 않아 몸을 녹일 수가 없었다. 하인을 불렀으나 어사라는 말만 듣고 놀라 다들 몸을 숨겨 한 놈도 보이지 않았다.
박만정이 괘씸한 생각이 들어 역졸을 보내 아무나 잡아오게 했다. 잠시 후 서리 한 녀석이 잡혀왔고 그제야 통인과 사령과 아전배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박만정은 그들에게 잠시 쉬었다 가는 것 뿐이라며 따뜻한 온돌방으로 안내하도록 일렀다. 그 소리를 듣고 그들은 비로소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박만정은 다음날에도 풍천 관아에 그대로 머물렀다. 아침부터 안개가 걷히지 않고 종일토록 비가 와서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풍천부사 이세강이 공장(公狀 : 수령 찰방이 감사, 병사, 수사 들에게 공식으로 만날 때에 관직명을 적어서 내는 편지.)을 들여와 잠시 만났으나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풍천은 추생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전에 들러 염탐한 정보도 없었고 문제가 있다 한들 함부로 관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풍천 관아를 출발해 10여리를 갔는데 길가에 익명의 글로 웬 방문(榜文)이 붙어있었다. 이런 것들은 도처에서 많이 본 것으로 모두가 언문으로 씌여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 것은 해서체(楷書體 : 자형이 가장 똑바른 한자서체의 한가지)의 한문으로 또박또박 쓴 데다 문장도 꽤 조리가 있었다. 필시 서리배들의 짓이 틀림없었는데 그 내용은 풍천 부사의 죄상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박만정은 소변을 보며 주변을 살펴봤다. 어떤 사람이 앞산 허리 바위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어 단지 사람의 형체만 보일 뿐 얼굴 모습은 식별할 수가 없었다.
박만정이 쳐다보자 그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사가 관아에서 나온다는 말을 듣고 여기서 어사를 뵙고자 하니 모름지기 그 뜻을 방해하지 마시오."
그의 어투로 보아 어사의 행차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지 않았다. 다만 어사로 하여금 그 방문을 자세히 읽도록 유도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박만정은 역졸들을 불러 지시했다.
"저 자가 서 있는 봉우리 뒤쪽은 발붙일 곳이 없는 것 같다. 너희들 넷이 추적한다면 저놈을 능히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빨리 좇아라."
그리고는 큰 소리로 그 자를 향해 소리쳤다.
"자세히 물어볼 말이 있으니 이 아래로 내려와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소?"
이러는 사이에 역졸들은 일시에 빠른 걸음으로 산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금새 정황을 눈치채고 몸을 날려 사라지고 말았다. 역졸들은 끝내 그를 붙잡지 못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그런가 하면 방문(榜文)의 형식을 빌지 않고 어사를 직접 찾아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5월 2일 박만정이 황주 성문 밖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떤 아낙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박만정 일행이 나타나자마자 말 머리를 가로막고 섰다. 박만정이 놀란 말을 진정시키고 아낙에게 사연을 물었다. 박만정이 어사인 줄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낙은 슬피 울며 호소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며칠째 어사또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어사또 나으리, 부디 제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소인의 지아비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지가 벌써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원컨대 어사또께서는 이 억울한 정상을 살피시어 제 지아비를 풀어주십시오. 제 소원입니다. 제발..."
이에 박만정은 황주 관아의 형리를 불러 그 상세한 곡절을 물었다.
사연인즉 아낙의 남편이 살인의 누명을 쓰고 여러 차례 형을 받았으나 지금은 그 혐의가 풀려 장차 석방하려고 하는데 이미 상감께 상주한 중죄인인 까닭에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순영(巡營)에 그런 사실을 보고하였고 이제 감사가 중앙에 장계(狀啓 : 왕명으로 파견된 관원이 왕에게 서면으로 보고하는 계본)를 올릴 계획이니 그리 되면 그 때는 석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만정은 형리의 말을 아낙에게 자세히 풀어주었다. 그제야 비로소 아낙의 표정이 밝아지며 연신 고맙다고 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옆에 있는 봇짐에서 무슨 꾸러미를 꺼내 박만정에게 건네 주었다.
"변변치 못한 것이지만... 어사또 나으리 오면 드리려고 아껴둔 것이니 꼭 드세요."
수줍은 표정으로 꾸러미를 건네주고 아낙은 황급히 달아났다. 그것은 큼지막한 배 두 알이었다.

이처럼 어사가 지나갈 길목에 방문(榜文)을 붙이거나 무한정 어사를 찾아 나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후에 박만정은 이런 일들을 기억나는 대로 별단에 적어 올렸다.
그것은 암행어사가 추생지 외의 지역에서 출도하는 것은 월권으로 여겨지던 그 당시에 박만정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선조(先祖)인 현종 때부터 암행어사는 원칙적으로 추생지에서만 염찰할 수 있고 출도를 외칠 수 있었다. 수령의 잘못이 파직에 해당한다 해도 현지에서 봉고, 파직할 수 있는 지역은 추생지에 한했던 것이다. 따라서 염찰 도중에 통과하는 지역이나 투서, 민원 등이 있어 다른 지역 수령의 잘못이 현저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도 추생지가 아니면 봉고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사실을 별단으로 보고할 수만 있었다. 이러한 원칙은 50년 뒤인 영조17년(1741) 때까지 지켜졌던 것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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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왕조실록과 임병준의 <암행어사 이야기>(하권 69p)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