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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기록고난과 시련의 예술가 어사 김정희(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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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시련의 예술가 어사 김정희(1편)

1826(순조 26) 충청도 암행어사 김정희(1786-1856)



'추사체'라는 독특한 글씨체를 완성한 조선시대 최고의 서예가이자, 뛰어난 학자로 잘 알려진 김정희의 어릴적 일화와 과거 급제 후 암행어사를 제수 받고 암행어사로 활약한 이야기.






정조 임금 시절인 1791년, 입춘을 하루 앞둔 날이었습니다. 골짜기마다 겨우내 쌓인 눈이 녹아 내리고, 햇볕도 따사로워졌지만 아직 솜옷을 벗어 던지기엔 쌀쌀한 날씨였습니다. 이날 점심 무렵, 사십대 초반의 두 선비가 충청도 예산 용궁리 마을에 들어섰습니다.
"저 집인가?"
한 선비가 고래등같은 기와집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야산 중턱에 올라앉은 그 집은 주변의 너른 들녘을 위엄 있게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네. 저 집이 바로 월성위 김한신 대감댁이라네."
"웅장한 풍모가 과연 월성위 대감의 고택답구먼!"
감탄하듯 고래를 끄덕이는 이 선비는 바로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실학자 박제가였습니다. 그는 며칠 전 충청도 예산에 사는 친구의 집에 왔다가, 월성위 대감의 아들이자 형조판서를 지낸 김이주가 아들 김노경과 함께 예산집에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차 방문하는 길이었습니다. 박제가의 친구는 김이주 대감과 먼 친척 뻘 되는 이로, 평소에도 이 집에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김이주의 아버지 김한신은 영조 임금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임금의 사위가 된 인물이었습니다. 화순옹주를 유난히 사랑했던 영조는 사위인 김한신을 위해 서울 장동에 별도의 궁을 마련해 주었고, 충남 예산 용궁리 일대의 넓은 땅까지 하사하였습니다. 박제가의 눈앞에 우뚝 솟은 이 집은 바로 김한신이 그 땅에 지은 집이었습니다.
친구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가던 박제가는 대문 앞에 써 붙인 글씨를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가만! 저것 좀 보게나."
박제가는 솟을대문에 써 붙인 '입춘대길'이라는 글씨를 가리켰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해마다 봄이 오면 그 해의 모든 일이 뜻대로 잘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글씨에 담아 대문에 붙여놓곤 했습니다.
"왜? 저건 흔히 보는 '입춘첩'(입춘 때 문지방이나 대문에 써 붙이는 종이) 아닌가?"
"글씨에 힘이 넘치고 활달하긴 하지만, 좀 이상하지 않은가? 김이주 대감의 아들 김노경이 글씨와 문장에 능하다고 들었는데, 저 글씨를 보니 그만한 칭송을 들을 수준은 아직 아닌 것 같네."
박제가는 자못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습니다. 그런데 글씨를 자세히 들여다보던 친구가 무언가 깨달은 듯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글씨가 코흘리개 어린아이의 것이라 해도 그렇게 실망하겠는가?"
"에이, 이 사람아! 농담 말게. 신동이 아닌 이상, 붓을 쥐기에도 어린 나이에 어떻게 저런 글씨를 쓰겠는가?"
"따라오게. 저 글씨의 주인을 소개하겠네."
친구는 미소 띤 얼굴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오셨습니까?"
마당가에 앉아 지붕에서 녹은 눈이 똑, 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던 한 아이가 손님들을 보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대여섯 살쯤 된 영리하게 생긴 사내아이였습니다.
"아저씨, 오셨습니까?"
"오, 그래! 할아버님께서 내려오셨다고?"
"예, 지금 사랑에 계십니다."
"알았다. 그런데 너 혹시 대문에 붙인 입춘첩 누가 썼는지 아느냐?"
"제가 쓴 것입니다. 아버님께서 한 번 써보라고 하시기에……."
친구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박제가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음 지었습니다.
"어떤가? 저 아이가 세 살 때 붓을 잡고 글씨 쓰는 흉내를 내서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아이라네."
"흐음……."
박제가는 안채로 들어가는 어린 정희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저 아이는 내가 가르쳐야겠네."



그와 같은 인연으로 대학자인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 그 아이의 이름은 김정희. 훗날 '추사체'라는 독특한 글씨체를 완성한 조선시대 최고의 서예가이자, 뛰어난 학자로 잘 알려진 바로 그 김정희였습니다. 그의 본가는 서울 장동에 있는 월성위궁이었지만, 그가 태어날 무렵 천연두가 유행하자 그의 어머니는 부랴부랴 예산 집에 내려와 김정희를 낳았다고 합니다. 1786년 6월의 일이었습니다.
예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정희는 본격적으로 박제가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당시 조선의 학자들은 '오랑캐'인 청나라를 정벌하여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청나라에서 새롭게 일기 시작한 선진 문물을 외면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박제가는 이것을 케케묵은 생각이라 비판하고, 나라의 장래를 위해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배우자는 매우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주장을 펼쳤습니다.
박제가는 사랑하는 제자 김정희에게 늘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청나라의 학자들은 선진적인 학문으로 이미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데, 조선의 학자들은 아직도 낡은 생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답답한 일이다! 정희야! 진정한 학문의 길은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다. 넓게 세상을 보고, 조선 성리학의 한계를 뛰어넘겠다는 큰 뜻을 품어라."
김정희는 그러한 스승의 생각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책만을 달달 외우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거 급제에 연연하지 않고 고증학과 경학 등 중국의 새로운 학문에 대한 다양한 책을 두루 읽어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웠습니다.
훌륭한 선비를 많이 배출한 집안의 후손답게 그는 똑똑하고 자존심이 강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책을 읽는 틈틈이 먹을 갈아 붓글씨에 몰두하였는데, 한번 붓을 잡으면 스스로 만족할 만한 글씨가 나올 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 평생 여덟 개 벼루에 구멍을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몽당 붓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실로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따라가기 어려운 엄청난 집념이었습니다.
김정희가 과거에 장원급제한 것은 24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김정희는 좀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외교사절단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를 여행하였습니다. 이 여행에서 그는 청나라의 뛰어난 학자와 예술가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의 수준 높은 문화와 새로운 사상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 역시 조선에서 온 이 젊은 학자의 탁월한 실력과 예술적 재능에 놀라 '해동 제일의 문장'(해동은 조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이라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이 여행은 이후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금석학(돌이나 쇠에 새겨진 금석 문자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추사체'라는 자기만의 독창적인 글씨체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34세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 정치 무대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습니다. 나라를 일으킬 인재를 찾고 있던 조정에서는 김정희를 불러들여 세자시강원, 예문관, 규장각의 중요한 벼슬을 맡겼습니다.
정조 임금이 갑작스레 세상을 뜬 후 어린 순조를 앞세워 정권을 장악한 안동 김씨의 이십 년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쫓겨났고, 하나부터 열까지 안동 김씨들의 눈치를 보아야 작은 벼슬자리라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정희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양심껏 일을 했습니다.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