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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만민공동회(1898 4월 25일 ~ 10월 12일)

제 2차 만민공동회는 정부개혁을 둘러싸고 수구파 정부와 독립협회, 수구파 정부와 만민공동회 사이에서 전개된 상소와 이에 대한 답변 등의 다양한 논의와 협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한 만민공동회는 10월 1일부터 12일까지 종로에서 장작불을 피워가며 12일간 철야를 하는 등 근대적 법제도의 실시와 간세배들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근대적인 정치조직인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서울 인민들은 이 기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궁궐(지금의 덕수궁) 앞에서 황제에게 상소를 올리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철야시위를 벌였다(1898년 10월 10일 잡보). 이 과정에서 나무꾼들이 나무를 기부하여 장작불을 피우며 철야를 할 수 있었다.
고종 황제는 점점 늘어나는 시위 군중과 영향력에 눌려 10월 12일 마침내 독립협회가 신임하는 박정양을 정부수반으로 삼고, 군부대신 민영환, 탁지부대신 조병호, 법부대신 서정순, 궁내부 대신 윤용구를 임명하여 개혁파 정부를 탄생시켰다.

의회설립운동(I)

제 2차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가 조직한 민회의 성격을 띠었다. 독립협회는 1898년 4월 3일 제25회 토론회(통상회)에서 ‘의회를 설립함이 정치상 제일 긴요함’이라는 논제로 토론회를 개최한 이후, 이를 백성들에게 적극적으로 계몽하기 시작했다. 독립신문은 이와 관련한 장문의 논설을 게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계의 개화 각국이 정부를 조직하였는데, 각색 일을 생각하여 의사와 경영과 방책을 생각하여 내는 관원들이 있고, 그 생각을 시행하여 세상에 드러나게 하는 관원들이 있는지라. 생각하고 방책 내는 마을을 외국서는 말하되 의회원이라 하며, 의회원에서 작성한 방책과 의사를 시행하는 마을을 내각이라 하였다. (독립신문, 1898. 4. 30.자 사설)
이후 1898년 7월 3일 만민공동회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리는 형식으로, 중추원 개편을 통한 의회설립을 제안하였다. 독립신문에는 이 상소문 원문이 게재되었다. 또한 이에 대한 황제의 비답(7월 3일)이 있었으며, 이 비답과 관련된 내용이 게재되었다. 7월 12일 재상소가 있었으며 이에 대한 황제의 또 한 차례 비답이 있었다.
이후 독립협회는 수구파 정부를 몰아내는 것으로 운동의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러나 의회설립이 수구파 관료와 고종 황제의 반대에 부딪치자,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의회설립이 시기상조라고 판단하고 노선을 수정하였다. 독립협회는 우선 중추원을 개편하여 상원을 설립하는 전략을 채택하였다(독립신문, 1998. 7. 27.).

연좌법 · 노륙법 반대운동(1898년 10월 1일 ~ 10월 12일)

친러 수구파 정권의 퇴진과 개혁파 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는 운동은 김홍륙 독차 사건, 고종암살미수사건으로 인해 가속화되었다. 이 사건의 수사과정에서 피의자들이 고문을 당하는 등 인권침해를 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문금지와 연좌제 폐지를 둘러싼 인권 논쟁이 전개되었다. 독립협회는 임금을 독살하려 한 범인들이라 할지라도 법률에 의해서만 처벌되어야 하며, 고문이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수구파 정부는 물론 성균관 유생들조차 임금의 독살 사건이란 현실 앞에 연좌법의 부활을 지지하고 나섰다. 당시 이와 관련하여 수많은 논쟁이 야기되었다.
정부는 김홍륙 독차사건에 연루된 가족들도 사형을 내리거나, 중형을 내리기 위한 법률개정을 시도하였다. 독립협회는 이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여기에서 논란이 된 연좌법과 노륙법(연좌제의 일종으로 죄인의 아들에게 사형을 내리는 제도)은 갑오경장 때 폐지된 법률이었다. 이는 제 2차 만민공동회 당시 개혁파와 수구파의 인식의 차이를 나타내는 정치적 쟁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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