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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민공동회(1898년 10월 13일 ~ 11월 4일)

제 2차 만민공동회와 제 3차 만민공동회 사이에는 관민공동회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독립협회는 개혁파 정부가 출범하자, 그때까지 여러 차례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추진하고자 했던 의회설립운동을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본격화하려고 하였다. 이 운동은 고종 황제와 수구파 관료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관민공동회는 1898년 10월 27일 서울 시민 4000여 명이 참가하여 개최되었다. 이를 필두로 10월 29일에는 10,000명이 넘는 서울 시민과 황제의 허락을 받은 정부 대신이 함께 참여하였다, 독립협회뿐만 아니라 황국중앙총상회, 찬양회(순성회), 협성회, 광무협회, 진신회, 친목회, 국민협회, 진명회, 일진회, 보신사 등의 제단체가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여기에서 독립협회가 주장해 온 중추원을 입헌군주제 유형의 상원으로 개설하기로 합의하였다. 국정과 관련하여 정부와 민간단체가 직접 협상을 시도하여 합의에 도달한 것은 한국 역사상 유례가 없던 사건이었다.

의회설립운동(II)과 철야시위(10월 13일 ~ 10월 27일)

새 정부가 구성된 이튿날인 1898년 10월 13일, 독립협회는 정부에 공한을 보내 의회 설립을 위한 협의를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독립협회는 15일 조규 2안을 정하고, 정부 측과 협상하였다. 정부 측에서는 박정양(의정부 의정, 행정수반), 민영환(군부대신), 박제순(외부대신), 민병석(농상공부 대신)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독립협회에서는 총대위원들이 참석하였다. 회의의 핵심의제는 중추원을 서양의 의회규칙에 따라 개편하여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한편, 황국협회 회원들은 이에 대해 거세게 저항했다. 10월 16일 황국협회 회원들은 영의정 박정양의 집에 몰려가 “독립협회와 황국협회가 다 같은 민회인데, 어째서 독립협회만 상대하여 의논하는가”라며 의회설립 움직임에 강하게 항의하였다. 그리고 수구파들은 황제에게 “의회의 설립이 법국민변(프랑스대혁명)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간언했다.
결국 황제는 수구파를 재기용하여 10월 17일 의정부 찬정에 조병식, 10월 20일 의정부 의정에 윤용선을 임명하였다. 이에 독립협회는 수구파와 황제의 반격에 대응하여, 1898년 10월 20일 경무청 앞에서 철야시위를 하였다. 만민공동회 시위대는 집회의 자유를 금지하려는 황제의 조칙에 항의하고, 수구파 관료들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를 위해 10월 22일에도 해산하지 않고 의회설립을 쟁취할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고종 황제는 연일 계속되는 철야시위에 위축되었다. 또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고종 황제는 의정부 찬정 박정양을 참정으로 승진·발령하고, 중추원 의장에 한규설, 부의장에 윤치호를 임명하여, 독립협회 회원을 정부에 입각시켰다.
개혁파와 수구파는 중추원관제개정안에 대해 큰 차이를 보였다. 때문에 이를 둘러싼 지리한 공방전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10월 24일에는 윤치호 의장 명의로 중추원관제개정에 관한 독립협회안을 작성하여 정부에 제출하였다. 그렇지만 황국협회의 불참으로 독립협회안은 유일한 대안으로 채택되었다.

최초의 의회 설립에 관한 합의(10월 28일 ~ 11월 4일)

1898년 10월 27일 독립협회는 중추원관제개정안 결의를 위한 집회를 모든 국민이 바라보는데 열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각계각층·단체들에게 초청장을 발송하였다. 종래의 관행으로 국정을 의논하는 자리에 승려, 부인, 백정까지 참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10월 28일 오후 1시에 개최된 종로 관민공동회에는 독립협회 회원들과 더불어 시민 4,000여 명이 참가하였다. 10월 29일에는 황제의 허락을 받은 대신들도 참석하여, 그 수는 1만 명이 넘었다. 이날 개회식에는 백정 출신 박성춘이 개회사를 하였다. 이 관민공동회에서 독립협회는 ‘11개조의 국정개혁 대강령’을 제안하였다. 이 중 6개조를 공개 결의하여 즉시 황제에게 제출하였다. 이 헌의 6조에 대해 고종은 소칙(紹勅) 5조로 화답하였다. 이를 통해 관민공동회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였다. 또한 관민공동회는 중추원신관제(中樞院新官制)를 만들어 황제에게 제출하고, 11월 3일 황제의 재가를 얻었다. 이로써 만민공동회는 충군애국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모두가 하나 되는 축제의 자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