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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만민공동회(1898년 11월 5일 ~ 12월 26일)

제3차 만민공동회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단계, 11월 5일부터 11월 26일까지로 황제의 칙어를 받아내는 과정이다.
두 번째 단계, 황제의 칙어 이후 개혁실행을 황제에게 촉구하는 과정이다.
세 번째 단계, 만민공동회가 불법단체로 규정되고 강제 해산되는 과정이다.
이처럼 만민공동회는 12월 23일 보부상의 습격을 받을 때까지 18일간 계속되었다.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됨으로써 대한제국은 수구파와 황국협회 일색의 수구파·보부상 정부로 변질되었다. 만민공동회가 막을 내림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개혁을 위한 마지막 시도는 좌절되었다.

장작불 집회와 황제의 개혁 조치 수용(1898년 11월 5일 ~ 1898년 11월 26일)

1898년 11월 5일 중추원을 개편한 새로운 의회가 50명의 위원을 선출할 즈음에 당시 집권세력인 친러수구파는 ‘익명서(匿名書) 조작사건’을 일으켰다. 이는 일종의 허위 쿠데타이다. 이 사건은 고종으로 하여금 독립협회를 해산하게 만들었다. 또한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는 등의 실제적인 계엄 상태를 가져왔다.
이에 조선 인민들은 만민공동회를 열고 11월 5일부터 23일까지 연속 19일, 전후 42일 동안 철야로 투쟁하였다. 투쟁을 통해 지도자 석방과 의회설립운동을 요구하였다. 11월 21일에는 보부상 다네와 황국협회의 습격을 받아 일시적으로 세가 약해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황국협회의 습격 소식을 접한 시민들이 더욱 더 많이 참여하여 만민공동회를 살려나갔다. 그러나 보부상의 습격으로 11월 22일 마포나루에서 신기료장수이자, 독립협회 회원이었던 김덕구가 사망하였다.
이 기간은 만민공동회의 꽃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수구파의 탄압책동을 뚫고 황제를 설득하여 11월 26일 국태민안 칙어를 받아내는 것으로 사건은 막을 내렸다. 바로 이때 종로에는 추워진 날씨 속에 매일 밤 장작불이 타올랐다. 물론 늦가을 찬비가 내려 장작불은 꺼지고 모인 사람들의 옷은 젖었다. 그렇지만 회중들은 찬비를 맞으면서도 동요하지 않았다. 특히 이 기간은 일반 농민, 나무꾼, 종로의 시전 상인들, 기생과 찬양회를 중심으로 한 여성, 심지어 걸인과 아이 조차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였다. 이는 만민공동회가 하나의 의사공동체를 만들어냈음을 의미한다.

황제의 계약파기와 보부상의 습격(1898년 11월 27일 ~ 1898년 12월 25일)

12월 1일 보부상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 김덕구의 장례식을 의사(義士)장으로 치른 만민공동회는 해산하여 황제의 개혁조치를 기다렸다. 그러나 황제와 수구파는 반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고종 황제는 칙어에서 약속한 대로 보부상들은 해산하지 않았다. 또한 민영기, 심상훈, 김명규, 박제순, 이윤용 등의 수구파가 다시 등용되었다. 이에 12월 6일 종로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만민공동회는 “관민공동회에서 결의된 ‘헌의 6조’의 실시, 5흉의 재판과 처벌, 보부상의 혁파” 등을 내용으로 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 황제는 길영수, 홍종우 등의 황국협회에 은밀히 지령을 내려 보부상을 다시 소집하였다. 또한 민영기에게 탁지부의 은으로 보부상의 경비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고종 황제는 시위대 대장에게 명하여 경운궁 전후, 좌우의 길과 방곡을 엄중히 경비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선교사 알렌과 아펜젤러에게 연락하여,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의 철수를 독려하였다. 그러나 만민공동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 완강하게 철야시위를 진행하였다. 12월 12일에는 대회장소를 종로에서 광화문의 각 부 문전으로 옮겨 정부에 보다 직접적인 압력을 가하였다.

만민공동회의 해산(12월 22일 ~ 12월 25일)

만민공동회 17일째인 12월 22일, 고종과 수구파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고종은 정동의 대궐 근처 네 곳에 대포를 설치하고 시민들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각 부와 고등재판소 문 앞에도 군인을 배치하여 시민의 접근을 막고 경비하였다. 이튿날, 제 2대대 군인들이 한 일(一)자 모양으로 총을 잡고 만민공동회를 포위하였다. 만민공동회는 군인들에게 쫒기며 종로로 이동하였다. 비무장의 시민들은 역부족을 느껴 철야시위를 중단하고 해산하기로 결정하였다. 12월 24일은 계엄 상태 하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다.
1898년 12월 25일 고종 황제는 칙어를 발표하였다. 고종은 만민공동회의 죄목을 11가지 열거하고 "처음에는 가로되 충군한다, 가로되 애국한다 한 것이 일찍이 불선한 것이 아니로되, 끝에 가서는 가로되 패(悖)라 하고, 가로되 난(亂)이라 해도 그 이름을 도피할 바가 없으니 의구지심(疑懼之心)이 이로 말미암아 난 바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로써 만민공동회는 해산되었고 대한제국의 개혁을 위한 마지막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 대한제국은 수구파·보부상파의 정부가 되었으며 외국과 이권을 거래하는 정상배의 정부로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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