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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백제 임금의 사냥 목적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군사훈련이었으며 또한 사냥을 통해 종묘와 산천제물에 쓸 제물을 얻었다. 그리고 사냥 방법이나 기구도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다. 활은 고구려 계통의 굽은활[彎弓]이었으며, 촉은 넓적촉과 뾰족촉 두 가지를 썼다.
『삼국사기』에 실린 백제의 사냥 관계 기사는 31건이며, 이에 관련된 동물과 그 빈도는 다음과 같다.

사슴(13), 호랑이(8), 매(5), 돼지(4), 개(4), 여우(3), 노루(1)

시조 온조왕은 5년(서기전 14) 10월에 북쪽 변방을 순시하고 군사들을 위무하기 위한 사냥을 벌였으며, ‘신비로운 사슴[神鹿]’도 잡았다. 고구려처럼 임금이 군사적 목적으로 사냥에 나섰던 것이다. 이 때 말갈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3년 전에 설치한 군사 시설을 점검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 무렵에는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온조왕 8년(서기전 11년)은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한 말갈 군사 3천 명을 대부현(大斧峴, 현재의 강원도 평강군 평강면)에서 격파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마수성(馬首城, 현재의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을 쌓고, 병산책(甁山柵, 앞 지역 부근)을 세웠다. 낙랑과의 화친이 깨진 것도 원인의 하나일 것이다. 온조왕은 10년(서기전 9) 9월에 사슴을 잡아서 마한에 선물하였다. 부여에서 고구려에 짐승을 보낸 것처럼, 당시에는 짐승을 외국에 선물하는 것이 관행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43년(25) 8월에 아산(牙山, 현재의 충남 아산시 영인면) 벌판에서 닷새 동안 사냥하였다. 이 때 군사 훈련을 한 덕분에, 이듬해 마한을 습격해서 병합시키는 결과를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루왕은 4년(31) 9월에 횡악(橫岳, 지금의 서울시 삼각산)에서 두 마리의 사슴을 연거푸 쏘아 잡았다. 진사왕도 이곳을 사냥터로 삼았다(7년(391) 8월). 그리고 아신왕(阿莘王)이 11년(402) 여름에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리자 비가 내렸다. 따라서 이곳을 성소(聖所)의 하나로 여긴 것을 알 수 있다. 기루왕(己屢王) 17년(93) 8월에는 큰 돌 다섯 개가 동시에 떨어지지는 일도 있었다. 앞의 두 임금은 삼각산 산신에게 올릴 제물을 얻기 위해 사냥을 벌였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또 400여 년 동안 백제 왕실이 이곳을 사냥터로 삼은 것은, 이곳이 고구려의 남침을 막기 좋은 군사 요충지이기도 하였던 까닭이다. 본디 이곳은 고구려의 영토였다. 무령왕도 7년(507), 한성을 노리는 고구려와 말갈의 군사를 물리쳤다. 횡악이 여섯 차례나 등장하는 까닭도 이러한 정황과 연관이 깊다.
고이왕은 뛰어난 사냥꾼임을 알 수 있는데, 3년(236) 10월 ‘서해의 큰 섬(강화도?)’에서 손수 사슴 40마리를 잡은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나타난 임금의 사냥 기사 가운데 가장 많은 수확물이다. 그리고 5년(236) 2월에는 부산(釜山,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서 무려 50일 동안이나 사냥을 벌였다. 7년(240) 7월에는 석천(石川,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한강 연안의 석촌?)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하던 중에, 날아가는 오리 두 마리를 모두 맞혔다. 왕의 사냥이 군사 훈련과 연관된 사실을 알려주는 좋은 보기이다. 실제로 그는 4월에 진충(眞忠)을 좌장(左將)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맡기는 등의 군사 체재를 개편하였으며, 같은 달에는 신라의 서쪽 변경도 습격하였다.
진사왕은 모두 세 차례의 사냥을 벌였다. 첫번째는 7년(391) 7월에 ‘서쪽의 큰 섬’에서 사슴을 잡았으며, 두번째는 같은 해 8월에 횡악 서쪽에서였다. 세번째는 8년(392) 10월에 벌인 구원(狗原,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풍양 또는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에서의 10일간의 사냥이었다. 『삼국사기』에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적힌 것으로 미루어, 특별한 목적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도락을 위한 사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사치를 즐겼다. 같은 해 1월 왕은 궁실(宮室)을 새로 고치고,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서 기이한 새와 특이한 화초를 가꾸었다.
그러나 그럴 만큼 나라가 태평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4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의 적현성(赤峴城,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북쪽 또는 강원도 이천군 주음동 방책?)을 쳐서 저들의 손아귀에 넣었고, 이듬해 7월에는 고구려왕 담덕(談德, 뒤의 광개토왕)이 군사 4만 명을 이끌고 와서 석현성(石峴城,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청석동 또는 황해도 곡산 서남 20리 지점) 등 10여 개의 성을 쳐부수었다. 그 여파로 한수(漢水) 북쪽의 많은 마을들이 고구려에 편입되는 일이 벌어졌다. 더구나 같은 달에 관미성(關彌城,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 또는 예성강 중류 남안)까지 잃었다. 이 같은 상황임에도 임금이 열흘 동안이나 사냥터에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결국 11월 사냥터의 행궁(行宮)에서 불의의 죽음을 맞았다. 백제 임금 가운데 매사냥을 크게 즐긴 이는 아신왕이다. 원년(392) 기사에 “말을 타고 달리기와 매사냥을 좋아하였다”고 적혀 있다.
한편, 앞에서 든 대로 고이왕은 236년에 ‘서해의 큰 섬’에서 40마리의 사슴을 잡았고, 진사왕도‘나라 서쪽의 큰 섬’에서 사슴을 잡았다(7년(391) 7월). 이들이 같은 곳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 섬은 지금의 강화도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도 150여 년 동안, 왕실의 전용 사냥터 구실을 해온 셈이다. 구원(狗原)도 70여 년 간 왕실의 사냥터로 이용되었다. 비류왕이 22년(325) 11월에 이곳 북쪽에서 사슴을 쏘아 잡았고, 진사왕도 열흘 동안 사냥을 벌였다.
문주왕은 4년(478) 9월 사냥터에서 해구(解仇)의 사주를 받은 도적에게 목숨을 잃었다고 하는데, 이는 국왕이 사냥터에서 죽은 두 번째 기록이다.
횡악이나 구원 외에 한산(漢山)도 오랫동안 임금을 비롯한 귀족의 전용 사냥터로 이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용 회수는 다섯 차례이다. 이곳에서 첫 사냥을 한 임금은 기루왕으로, 27년(103)에 ‘신비로운 사슴(神鹿)’을 잡았다고 하였고, 이어 131년 4월에는 개루왕이, 455년 3월에는 비유왕이 사냥하였다고 하는데, 그 기간은 350여 년에 이른다. 한산의 현재 위치는 백제의 첫 도읍지를 어디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최초의 도읍지를 하북(河北)의 위례성으로 가정하면, 북한산이 된다(정약용 · 이병도 설). 그러나 하남 위례성이라면 남한산으로 바뀐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 「주석편」에서 “뒤에 나오는 부아악(負兒岳)을 삼각산에 비정하는 것이 옳다면, 이때의 한산은 북한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북한산 일대를 백제왕실의 사냥터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삼각산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475년 전까지 횡악이라고도 불렸다. 그 기간은 다루왕에서 진사왕까지 450여년에 이른다(웅진 천도 이후의 위치는 알 수 없다).
활쏘기의 명인으로 알려진 동성왕(東城王)은 5년(483) 봄에 사냥을 나가서 한산성(漢山城,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에 이르러, 군사와 백성을 위로하고 열흘 만에 돌아왔다. 이는 전해 9월, 말갈족이 쳐들어와서 많은 백성을 사로잡아간 사건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동시에, 군민을 위로하기 위한 거둥이었을 것이다. 그는 4월에 웅진(熊津,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북쪽에서 ‘신비로운 사슴(神鹿)’을 잡았고, 14년(492) 10월에는 우명곡(牛鳴谷,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의 서운 또는 충청북도 옥천군 의소리?)에서도 손수 사슴을 쏘아 맞혔다.그러나 23년(501) 1월에는 남산(南山, 지금의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에서 싸우던 두 마리의 호랑이를 놓치고 말았다. 또 그는 23년(501) 1월과 10월, 그리고 11월에 사비(泗沘,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의 동쪽과 북쪽 그리고 서쪽에서 사냥하였다. 이곳을 새로운 사냥터로 삼았던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한 임금이 같은 곳에서 세 번씩 사냥한 첫 보기인 까닭이다.
사냥을 즐긴 다른 임금과 달리 법왕은 원년(599) 12월에 살생을 금지시키는 한편,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거두어 놓아주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물고기를 잡고, 짐승을 거두는 사냥구까지 태워 없애라는 명을 내렸다. 이로써 백제에서 서민들도 매사냥을 즐긴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무왕은 33년(632) 7월에 생초(生草,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의 벌판에서 사냥을 벌였다. 그 사이에 금령이 풀렸던 것이다.
온조왕과 기루왕이 27년(103) 한산에서 잡은 이른바 ‘신비로운 사슴’은 고구려의 경우처럼 흰 사슴이었을 것이다. 백제에서도 이를 길흉을 알리는 영물로 여겼다.
사냥 기간이 고구려에서는 주로 봄과 가을에 집중되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백제에서는 여름과 겨울에도 벌였다. 7월이 5회이고, 12월, 1월, 2월이 각 1회씩이다. 특히
백제에서 매사냥을 일본에 전한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다음은 『일본서기』 의 내용이다.

진토쿠[仁德] 천황 43년(355) 9월 1일, 의망둔창(依網屯倉)의 아이고(阿餌古)라는 사람이 이상한 새를 바치며, “제가 늘 그물로 새를 잡아왔지만, 이것은 일찍이 못 보았습니다. 매우 드문 새인 까닭에 바칩니다”고 하였다. 천황은 (백제의 왕족인) 주군(酒君)을 불러 “이것이 무슨 새인가?” 물었다. 그는 “이러한 새는 백제에 많습니다. 길을 들이면 사람을 잘 따르며, 빨리 날아가서 여러 새를 잡습니다. 백제에서는 구지(俱知)라고 부릅니다” 고 대답하였다. 천황은 새를 그에게 주며 “길을 잘 들이라”고 일렀다.
주군은 새를 훈련시킨 뒤, 다리에 가죽 끈을 매고 꼬리에 작은 방울을 달아맨 다음, 팔뚝에 얹어서 천황에게 바쳤다. 이 날 천황은 백설조야(百舌鳥野)로 가서 사냥을 하였다. 암꿩이 많이 나는 것을 보고 매를 놓았더니, 잠깐 동안에 수십 마리를 잡았다. 천황은 매우 기쁜 나머지 응감부(鷹甘部)를 두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부터 매를 기르고 사냥을 전담하는 부서를 응감읍(鷹甘邑)이라 불렀다.

매사냥을 우리가 일본에 전한 사실보다, 다리 사이에 가죽을 채우고 꼬리에 방울을 달았다는 내용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의 우리와 똑같기 때문이다. 이 방울은 매가 꿩을 챈 자리를 알려 주는 구실을 한다. 오사카에는 주군의 무덤과 묘비가 있으며, 그 부근에 그를 신으로 받드는 신사(鷹神社)도 있다.
한편, 『이가풍토기(伊賀風土記)』에도 “이가군(伊賀郡) 후지미다케(不盡見嶽)는 주군(酒君)의 장례를 치른 곳으로 그를 ‘매사냥의 신(鷹見之神)’으로 부른다”고 적혔다. 이가(伊賀)는 오늘날의 미에현(三重縣) 북서부의 쓰게(拓植) 강변을 이른다.
또 『섭진지(攝津志)』에 따르면, 응감부의 위치는 세쓰스미요시군(攝津住吉郡)의 응합촌(鷹合村)이며, 그곳에 ‘평무덤[平塚]’이라고 불리는 응감부의 묘가 있다고 전한다. 세쓰는 지금의 오사카부[大阪府] 북부에 있는 주택 및 공업도시이다. 그 뒤 백제에서는 매와 개까지 일본에 보내주었다.
다음은 사가(嵯峨)천황(810~823)의 명에 따라 편찬된 『양응기(養鷹記)』의 기사이다.
진토쿠[仁德]천황 46년(359), 백제의 사신이 매와 개를 우리나라에 가져왔다. (중략) 매를 먹이는 사람을 ‘미광(米光)’, 개를 먹이는 자를 ‘수광(袖光)’, 개를 흑반(黑斑)이라고 불렀다. (중략) (백제의 사절을 맞이하러 갔던) 정뢰미광(政賴米光)이 매사냥 법을 곧 익혀서, 매를 팔뚝에 얹고 개를 앞세워 궁궐로 돌아왔다. 이를 기뻐한 천황은 상을 내리고 채읍(采邑)까지 주었다. 오늘날에는 매사냥을 ‘지호(指呼)’라고 부르며, 이는 오로지 그(政賴)가 가르쳐준 것이다. 그의 후손의 대가 끊긴 것은 아쉬운 일이다.

매뿐만 아니라, 개까지 보내주고 사냥 법까지 일러주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한편, 『하리마풍토기(播磨風土記)』에는 이호군(揖保郡)의 스즈노미오카(鈴喫岡)의 유래에 대한 기사가 있다. 오닌[應仁]천황이 매사냥을 하던 중에 매의 꽁지에 달았던 방울을 잃었고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던 데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로써 당시에는 이 방울이 귀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백제에서 만들어서 가져왔을 것이다.
『일본서기』에 실린 왜국(倭國) 사신의 호랑이 사냥 이야기도 흥미롭다(긴메이(欽明)천황 5년(544) 11월). 기사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신(膳臣巴提便)은 처자와 함께 백제 사신으로 갔습니다. 그 나라의 해변에서 밤에 자다가 애가 없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그 날 밤에는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신은 아침 일찍 무장을 하고, 그 발자국을 따라 굴까지 갔습니다. (중략) 저는 호랑이에게 이렇게 일렀습니다.“너도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과 한 가지일 터이다. 나는 엊저녁에 아이를 잃고 뒤를 밟아 왔다. 반드시 원수를 갚고야말겠다”이 때 호랑이가 앞으로 나와서 입을 벌리고 신을 삼키려 들었습니다. 저는 재빨리 왼손을 뻗어 호랑이의 혀를 잡은 채, 오른손으로 찔러 죽이고 가죽을 벗겨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긴메이천황 5년은 백제 성왕 22년에 해당한다. 그가 사신으로 떠난 것은 3월이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앞의 무용담(?)은 과장이 지나치다.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었던 탓에, 그는 제멋대로 허풍을 떨었을 것이다. 백제에서도 다른 나라 사신의 아들이 물려 죽은 만큼, 군사들을 동원하는 등의 적극적인 대책을 세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로써 당시에 호랑이가 매우 흔했던 사실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