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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선-개요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사냥 관계 기사는 모두 2417건으로, 이 가운데 건수가 가장 많은 임금은 세종(474), 성종(348), 중종(267), 연산(264), 세조(260), 선조(164) 순으로 이어지며, 나머지 임금은 모두 50회 미만이다. 강무(講武)를 비롯해서, 임금이나 귀족들이 즐긴 매사냥이 대부분이다. 이밖에 종묘 등의 제례에 쓸 제물을 얻거나, 중국 사신 접대, 그리고 호랑이의 폐해를 줄이기 위한 사냥도 벌였다. 특히 종묘에는 제삿일이 아니더라도, 잡은 짐승을 사냥터에서 바로 바치는 일이 잦았다.

조선-강무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모두 1003회의 강무(講武)를 벌였다. 세종 때는 무려 333회에 이르렀으며, 성종(193), 태종(163), 세조(99), 중종(75), 연산(47) 순으로 이어진다.
강무에 대한 첫 기록은 『정종실록』에 보인다(2년(1399) 6월). 세자(뒤의 태종)가 “철원 이북에서부터 한양 이동(以東)에 빈 땅이 없어서 사냥 때는 반드시 농작물이 해를 입는다. 그러므로 평주(平州, 지금의 황해도 평산군) 남쪽의 노는 땅 백 여리를 사냥터로 잡고 (중략) 해마다 가을 겨울에 사냥을 하고 무예를 익히는 것이 좋겠다”고 한 내용이다.
강무의 의식과 절차는 태조 5년(1396)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건의에 따라 마련되었다. 『태종실록』 2년(1402) 6월 11일 예조에서 제정한 규정이다.

"(전략) 사냥을 벌이기 이레 전에, 병조에서 여러 사람을 모아서 사냥 법을 잘 일러주고, 승추부(承樞府)에서는 사냥터에 표지를 세운다. (중략) 이 날 새벽, 여러 장수들은 병졸을 이끌고 미리 세워놓은 기(旗) 아래로 모인다. (중략) 병조의 신호에 따라 좌우 양쪽의 장수와 군졸들이 빙 둘러서서 몰이를 시작한다. (중략) 대가(大駕)가 북을 치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중략) 여러 장수들도 북을 울리며 포위망을 좁혀서 임금이 말을 타고 향하는 남쪽으로 짐승을 몰아간다. (중략) 이들의 한 패(一驅)가 지나가면 유사(有司)가 활과 살을 정돈해서 앞으로 나가고, 두번째(二驅)가 지나가면 병조에서 활과 살을 받들어 올리고, 세번째(三驅)가 지나가면, 임금이 짐승의 왼쪽에서 살을 날린다. 각 패는 반드시 세 마리 이상의 짐승을 몰아야 한다. 임금에 이어 여러 군(君)과 장수들이 차례로 쏘고, 백성들은 맨 나중에 나선다. (하략)"

강무에는 군사 훈련을 겸한 사냥뿐 아니라, 활쏘기 대회와 정신 무장을 위한 강의도 포함되었다. 또 짐승이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면 해당 장수나 병졸은 큰 형벌을 받았다. 단종 2년(1454) 10월 2일, 경기도 청계산 사냥 때 좌상대장(左相大將) 성원위(星原尉) 이정녕(李正寧)과 위장(衛將) 봉석주(奉石柱) 등에게 참형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 좋은 보기이다. 그러나 이정녕은 부마(駙馬)이고, 봉석주는 정난공신(靖難功臣)인 덕분에 특별 사면되었다. 또 화살에 표를 붙여서, 누가 짐승을 얼마나 잡았는지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강무 때의 하루 이동 거리는 평균 30리이다.
세조는 “강무는 편안히 놀며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병법을 익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러 도에서 훈련되지 않은 군사를 모으고, 또 이들을 교련하는 장수가 모두 군율을 어겼다”고 개탄하였다. 그리고 강무에 불참하는 관리는 군법에 따라 엄중하게 다스리라는 명을 내렸다(7년(1461) 10월 13일).
서울에서는 강무를 네 계절 끝 무렵에, 지방에서는 봄 · 가을 두 차례 벌이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민폐 등을 고려해서 두 차례로 줄였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이 때 잡은 짐승 가운데 큰 것은 관에서, 작은 것은 백성이 차지하였다. 그리고 고기 가운데 좋은 부위는 종묘로 보내어 제물로 쓰고, 남은 것은 그 자리에서 요리를 해서 임금과 신하가 함께 먹었다.
강무장(講武場)으로는 강원도의 철원과 평강을 첫손에 꼽았으나, 때에 따라 여러 곳에 두었다. 1416년에는 충청도의 태안과 강원도의 횡성 및 평강 세 곳이었다. 1420년에는 경기도의 광주와 양근(양평), 강원도의 철원 · 안협 · 평강 · 이천 · 횡성 · 진보(춘천) 등 여덟 곳으로 늘어났다. 1428년에는 경기의 영평(파주) · 삭녕(연천군 삭녕면) · 양근 · 광주, 강원도의 철원 · 회양 · 평강 등 일곱 곳을 지정하였다.일반 백성들은 이곳에서 거주는 물론이고, 농사를 짓거나, 나무도 베지 못하였다.
태종은 6년(1406) 9월 12일, 경기도 포천과 철원 등지에서 강무를 벌이고 이 때 잡은 노루 세 마리를 덕수궁에 바쳤다. 비록 적은 규모이기는 하나, 첫번째의 강무이다. 6년 뒤(12년 2월)에는 강무장의 포위망 안으로 대소 잡인(雜人)과 수알치, 그리고 개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이로써 강무 때 매사냥도 벌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는 같은 해 9월 24일 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와 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에게 갑사(甲士) 5백 명을 거느리고 광주(廣州)에서 사냥하고 그 짐승을 종묘에 올리라고 일렀다.
본격적인 강무는 이듬해인 13년(1413) 9월 8일에 이루어졌다. 사냥터(전라북도 임실)에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각 1천 명을, 전라도에서 2천 명의 병사를 모아서 열흘 동안 벌인 것이다. 병사들은 식량을 제 각기 마련하였으며 이것은 관례가 되었다. 그리고 16년 3월 2일에는 8천여명을 동원하였다.
세종도 원년(1419) 3월 8일부터 열흘 동안 평강에서 벌인 강무에, 방패군 5백 명과 재인(才人) 및 화척(禾尺) 백 명을 동원하였다. 이때 군신들의 반대로 농민은 제외시켰다. 본격적인 강무는 같은 해 11월 3일 강원도에서 이루어졌다. 상호군(上護軍)· 대호군(大護軍) · 호군(護軍) · 사금(司禁) · 사엄(司嚴) 및 사사로이 부리는 인원을 빼고도 갑사 · 별패(別牌) · 시위패(侍衛牌) 등이 2천여 명이었고, 말이 만여 마리, 별군 방패(別軍防牌) 수천 명이 참가한 것이다.
단종 원년(1453)에는 20여 개소의 강무장에서 일반 백성들의 몰이사냥을 허락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짐승의 숫자가 지나치게 불어나서 농사에 해를 끼친 까닭이다.
세조는 2년(1456) 10월 4일부터 11일까지 몇 곳을 옮아 다니며 강무를 펼쳤다.
첫날, 삭녕(朔寧,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추두모(楸豆毛)에서 사슴과 노루 126마리와 호랑이 세 마리를 잡았다. 임금이 뒤따르는 무리들에게 새를 나누어줄 만큼, 날짐승도 적지 않게 거두었다. 6일에는 같은 곳의 효성산(曉星山)에서 130 마리의 사슴과 노루를, 7일에는 평강(平康)의 비지평(飛只平)에서 같은 짐승 170마리를, 9일에는 같은 곳의 재송(栽松)에서 사슴과 노루 50여 마리를, 11일에는 영평(永平)의 보장산(寶藏山)에서 사슴 60마리와 곰 한 마리를 잡았다. 곰을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겨울철의 강무에서 동상에 걸리거나, 짐승에게 부상을 입거나, 빗나간 화살에 목숨을 잃는 군사도 적지 않았다. 더러 구경꾼도 죽었다. 세조는 경기도 양주의 묘적산(妙積山) 강무 때 죽은 백성 둘에게 각기 쌀과 콩을 아울러 넉 섬씩 내렸다.
성종은 6년(1478) 9월 29일부터 벌인 16일 동안의 강무에, 군사 2만~3만 명을 동원하였다. 이때 호랑이 한 마리와 노루 · 사슴을 포함한 여러 짐승 44마리를 잡았다.
가장 많은 군사가 동원된 것은 연산 12년(1506) 2월에 벌인 경기도 광릉산(光陵山) 강무이다. 조준방에 딸린 군사 1만 명과 병조에서 뽑은 정예군사 3만 명, 그리고 승군(僧軍)까지 모두 4만여 명이 훨씬 넘었던 것이다, 또 그는 10년(1504) 10월에 무려 24일 동안이나 사냥을 벌였다.
중종 7년(1512) 1월 27일의 강무에서는 호랑이 두 마리, 곰 한 마리, 사슴 5 마리, 멧돼지 한 마리, 노루 30여 마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때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자 사수(射手)가 겁에 질려 쏘지 못하였고, 앞으로 나서는 군사도 없었다고 한다. 더구나 20년(1525) 11월에는 좌위(左衛) 부장(部將)의 실수로 포위망을 벗어난 호랑이가 내금위(內禁衛)의 장교를 물어서 상처를 입히기도 하였다.

조선-매사냥

『조성왕조실록』에 실린 매사냥 관계 기사는 모두 157건으로 조선시대 임금들도 매사냥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이를 가장 많이 즐긴 왕은 태종으로 59건에 이르며, 세종(42건), 세조(18건), 성종(13건), 중종(10건)으로 이어진다. 이들 가운데 세종은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 구경을 더 좋아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임금을 비롯한 상류층들은 말 위에서 매를 부렸다.
태조는 4년(1395) 3월에 응방을 두었으며, 4월, 5월에 적전(籍田)과 한강 가에서 매사냥을 구경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민간의 닭과 개가 해를 입는다며, 왕자와 제군의 매 사육을 막았다. 그리고 6년 2월 6일에는 강음(江陰)과 개성현(開城縣)에서 직접 매를 팔에 얹고 사냥하였다. 7년(1395)에는 한강 가에 응방을 두었다는 것으로 보아 앞의 금령은 눈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태종은 2년(1402) 9월, 갑사(甲士) 10여 명과 응군(鷹軍) 20여 명을 데리고 매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사사로운 매사냥을 막는 한편(3년 8월), 응군을 16명으로 줄였다(3년(1410)11월). 그는 매를 부려서 기러기도 잡았다.
매사냥을 효과적으로 단속하기 위해 조선 초기에는 응패(鷹牌) 제도를 만들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정종은 응패 없는 자를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또 태종은 응패를 반드시 잘 보이게 차야하며, 그렇지 않고 숨긴 자는 빼앗고 죄를 물으라고 하였다. 그는 왕실의 종친 · 부마 · 제군에게는 녹패(綠牌)를, 일반 백성에게는 흑패(黑牌)를, 응방에 딸린 사람에게는 주패(朱牌)를 주었다(7년 12월). 이로써 일반인들도 매사냥을 크게 즐겼고, 이를 위해 관의 허가를 얻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응패는 국상(國喪)이 나거나, 개인이 상을 당하거나, 관리가 지방으로 부임할 때는 반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세종 때의 응패 수는 100패였다.
태종이 10년(1410) 8월 29일에 “동교(東郊)에서 매를 놓고 말을 달렸다”는 대목은 매우 주목된다. 매로 하여금 여우 따위의 비교적 큰 짐승을 잡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몽골의 수알치들은 말을 타고 달리며 매사냥을 한다. 당시 몽고와의 관계로 보아 고려의 임금들도 이 같은 몽골식 사냥을 즐겼을 것이며, 이는 조선시대 임금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매사냥에 말을 부릴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중국에 보낼 금과 은이 모자라서 걱정하던 태종은, 신하에게 “말과 피륙으로 대신하는 것이 어떠한가?” 의견을 물었다. 이에 정역(鄭易)이 “매(鷹)로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태종이 웃으면서 “과연 그렇게 되겠느냐?” 반문하자, “황제가 반드시 허락할 것입니다. 장차 사신편에 주청하십시오”라고 자신 있는 대답을 내놓았다. 이때 우리 매의 성가(聲價)가 명나라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을 알 수 있다.
세종도 즉위년에 병조와 사헌부에 매사냥 단속을 엄중히 일렀다. 그러나 이듬해(1427)에는 응자채방별감(鷹子採訪別監)을 두고 매를 거두어들였다. 매를 바치라는 명나라의 요구가 날이 갈수록 심해졌기 때문이다. 9년(1427) 2월에는 도화원(圖畵院)에서 그린 매 그림과 그 특징을 적은 글을 각도에 보내서 매를 잡아 올리라고 일렀다. 다음은 매 이름이다.

1) 귀송골(貴松骨) (옥해청[玉海靑]이라고도 한다).
2) 거탈송골(노화해청[蘆花海靑]이라고도 한다)
3) 저간송골(這揀松骨) (노화해청[蘆花海靑]이라고도 한다)
4) 거거송골(居擧松骨) (청해청[靑海靑]이라고도 한다)
5) 퇴곤(堆昆) (흰매라고도 한다)
6) 다락진(多落進) (누른매[黃鷹]라고도 한다)
7) 고색다송골(孤色多松骨)
11월에는 매를 함경도와 평안도에서만 바치도록 하고, 특별히 해동청(海東靑)을 잡은 사람에게 상을 주라고 일렀다(10년 3월). 그 상이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벼슬이 없으면 첫 벼슬로 8품을 주고, 있으면 한 등급 올리며, 천인(賤人)은 쌀로는 40석, 피륙으로는 무명 50필은 준 것이다. 옥송골(玉松骨)은 이보다 더 하였다. 벼슬이 없으면 7품을 주고, 있으면 3등을 올렸으며, 천인에게 쌀은 백 석, 무명은 백 필을 내렸고, 양인(良人)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오로지 중국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11년(1429) 5월에는 중국 사신이 스스로 달라고 하였다. 12년에 수알치(鷹師)를 90명으로 늘려 세 패로 나누고, 15년에 응방을 사복시(司僕寺)에 소속시킨 것도 저쪽 요구가 더욱 거세진 탓이다. 심지어 저들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와서 잡아 가는 일도 잦았다. 예컨대 세종 14년 3월에는 관리가 무려 4백여 명의 군사를 끌고 왔을 뿐 아니라, 이들이 먹을 식량까지 대라는 횡포를 부렸다. 결국 중국의 요구를 견디다 못한 세종은 24년(1442) 4월에 송골매를 잡는 상벌 규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다음은 그 중요 내용이다.

1) 함길도에 400호, 평안도에 200호, 강원도와 황해도에 각 50호를 지정하고, 각 집마다 12 곳에 덫을 놓게 한다. 그 대신 전세(田稅)를 제외한 잡역과 축성(築城) 등의 모든 역사(役事)를 면제시킨다.
2) 편호(編戶)는 서너 집 또는 대여섯 집을 하나(一所)로 묶고, 가깝고 편리한 데에 덫을 놓게 한다.
3) 감고(監考)를 두어서 이들의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살핀다.
4) 잡은 사람은 정8품의 벼슬이나 면포 20필을 상으로 준다. 그리고 한 해에 두 쌍 이상 잡으면 서울의 벼슬(京職)을 준다.

명나라에 매를 바치는 일이 온 나라의 골치 덩어리로 떠오른 것이다.
한편, 세종 자신도 매를 좋아하였다. 창덕궁 서쪽에 있는 옛적의 이조 건물을 수리하고, 매(海靑)를 기르려고 한 것이 좋은 보기이다. 매가 더위를 타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이에 사간원의 김문기(金文起)가 들고 일어나서 차라리 놓아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아뢰자 “나는 매를 일찍부터 가지고 놀았지만, 실제로 팔뚝에 얹은 적이 없다. (중략) 신하 중에 매를 기르는 자가 많은데, 임금은 새 한 마리도 가지지 못하느냐?”며 거절하였다. “팔뚝에 매를 얹은 적이 없다”는 말은 스스로 매사냥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단종은 중국에서 요구한 일곱 마리에 두 마리가 모자라 애를 먹었다.
매의 진상을 막았던 성종도(16년[1485] 7월), 응방 폐지론에는 고개를 저었다. 이 탓인지 진상이 그치지 않았으며, 매를 서울로 가져올 때 백성의 닭과 개를 빼앗는 등의 폐해가 막심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이듬해에는 각 고을과 역에서 매 먹이를 기르라는 명을 내렸다. 처음과 달리 진상을 부채질한 셈이지만, 이것은 중국에 보낼 매를 확보하기 위한 조처였다.
성종은 늙은 신하에게 매를 주며, 어머니를 봉양하라고 이르는 자상함도 보였다. 다음은 『해동야언(海東野言)』의 내용이다.

영상(領相: 영의정) 성희안(成希顔, 1461~1513)은 상을 당하여 벼슬을 내놓았다. 복을 마친 그에게 다시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임금은 중관(中官)을 통해 매 한 마리를 주면서 "공사에서 물러가 틈이 나거든, 교외에서 사냥하여 어머니께 드리라" 하였다.중중도 이를 본받았음인지, 늙은 어버이를 모신 부원군(府院君)과 삼공(三公) 그리고 홍문관원(弘文館員)들에게 매를 나누어 주라는 명을 내렸다(12년(1517) 2월 25일).
가장 호화로운 매사냥을 즐긴 이는 연산군(1495~1506)이다. 응방을 좌우로 나누고 10년(1504)에 800명의 갑사와 정병을 딸려준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겸사복(兼司僕) 열 명과 내금위(內禁衛)의 군사 70명을 더 붙였다. 그리고 80명의 관원을 전국에 보내서 매를 거두었다. 그 결과 응방의 매와 개는 수만 마리에 이르렀고, 진귀한 새와 짐승까지 길렀다. 이들이 하루에 먹는 식량도 어마어마하여 백성의 원성이 하늘까지 치솟았다. 또 그는 10년(1504) 11월, 한성부와 경기에 사냥터를 새로 만들었다. 이에 쫓겨난 주민이 550여 명이고, 묵은 밭 570D여 결(結)이 들어갔다.
중종 12년(1517)에 응방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음에도, 내시부(內侍府)에 정5품관을 두고 대전응방(大殿鷹坊)의 책임을 맡겼다. 이언적(李彦迪)은 매를 잡는 사람이 비록 신역(身役)을 면제를 받기는 하지만, 잡지 못하면 집과 땅을 팔아 한 마리에 베 50~60필을 주고 사 바치는 폐단을 지적하였다(『중종실록』 23년〔1528〕 윤시월). 명종(1545~1567) 때도 폐해는 줄지 않았다. 이 뒤로도 응방을 없앴다가 다시 두는 일이 거듭되었다.
우리 매는 중국뿐 아니라, 일본인도 탐을 냈다. 임란 때 남원의 의병장이었던 조경남(趙慶男)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의 “함경감사 유영립의 온 가족이 사로잡혔다가 (중략) 영립만 도망 나오고, 어머니는 매를 주고 빼내왔다"는 내용(2 임진년 10월 18일)이 그것이다. 또 같은 책에 “부산 동래의 왜적이 우리와 더불어 함안에서 시장을 열었다. 저들은 우리에게서 빼앗은 소와 말을 내고, 우리는 표범 가죽과 매를 팔았다"(3 을미년 6월)는 내용도 보인다.
응방이 없어진 것은 선조 때이며, 현종 이후 매사냥 기록이 뚜렷하게 줄었다.

조선-호랑이사냥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호랑이 관련 기사는 모두 635건에 이른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사람이나 집짐승이 잡혀 먹힌 내용이다. 그만큼 호랑이의 폐해가 그칠 사이가 없었던 것이다. 민간에 호랑이가 먹고 남은 시신을 모아서 장례를 치르는 호식장(虎食葬)이 퍼졌고, 그 영혼을 위로하는 동시에 피해를 다시 입지 않기 위한 범굿이 생긴 것도 이러한 사정과 연관이 깊다. 앞의 635건 가운데 호랑이 사냥 관계 기사는 21건이며, 임금이 참가한 사냥에서 잡은 것은 모두 아홉 마리이다.
조선시대에는 호랑이 잡는 임무를 맡은 440명의 정규 군사인 착호갑사(捉虎甲士)를 따로 편성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들의 포상과 승진에 대한 규정도 두었다. 제일 먼저 활을 쏘거나 창으로 찔러서 다섯 마리 이상을 잡으면 두 계급 올려주고, 한 해 열 마리를 더 잡은 고을의 원은 품계를 돋구어준 것이다. 호랑이 사냥에 국가가 나섰던 셈이다.
태종 때는 호랑이가 경복궁 담을 넘어 들어와서 근정전 근처에서 어슬렁거렸고, 경상도에서는 서너 달 사이에 수백 명을 물었다. 세조 때는 궁궐 뒤의 백악산(오늘날의 북악산)에도 나타났다.
중종대에는 임금이 인왕산과 백악산의 호랑이 퇴치를 위해 직접 나서려고 할 정도로 수도의 호랑이 피해가 많았다(28년(1533) 4월). “호랑이 치고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는 없다”는 속담은 이에서 나왔다. 선조는 4년(1571) 8월에 경기도에 호랑이의 피해가 많으므로, 군사를 일으켜서 잡으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때 사졸들이 여염에 들어가서 끼친 민폐가 호랑이 보다 더 심했다고 전한다. 같은 해 10월 27일에도 경기도 고양 일대에 출몰해서 집짐승 4백 마리를 물어 죽였다. 이를 계기로 호랑이 사냥을 크게 벌여서 많이 잡았다. 인조 때는 호랑이떼가 평안북도 의주성에 榕楮暠?사람과 집짐승에게 해를 끼쳤다. 숙종 때도 6,7년 사이에 강원도 주민 3백여 명이 물려죽었으며, 이 때문에 파발(擺撥)이 끊기는 외에 사람의 통행마저 두절되었다. 영조도 12년(1736) 3월에 경기도 일대의 능에 숨어서 해코지를 일삼는 호랑이를 퇴치하라는 영을 내렸다. 정조는 20년(1796) 11월에 군영에서 응봉(鷹峰) 일대에 출몰하는 호랑이를 잡으려 하자 “호랑이는 제 살 곳이 없어 나타나는데다가, 지금은 엄동설한이므로 폐단이 클 것이니 나서지 말라”고 하였다. 헌종 9년(1843) 9월에도 경모궁(景慕宮) 뒤뜰에 호랑이가 들어와서 영문(營門)에 잡으라는 명을 내렸다. 고종 2년(1865) 10월 4일에는 남산에서 호랑이를 잡았으며, 세 해 뒤의 9월 20일에는 북악에서 세 마리와 수마동(水磨洞, 지금의 종로구 세검동?)에서 두 마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20년(1883) 1월 2일에 인왕산에서 표범 새끼를 잡았다.
호랑이가 인가 근처에서 산양 따위를 잡으면 먼저 내장을 꺼내 먹은 다음, 다시 먹으려고 덤불 속으로 끌고 가서 숨겨둔다. 그리고 먹이를 지키기 위해 멀리 가지 않는다. 이를 이용해서 사냥꾼은 발자국이나 핏자국을 따라가서 총으로 쏘아 잡았다.

조선-총포사냥

우리나라에서 총을 처음 제조한 것은 고려 말엽인 우왕 3년(1377)이다. 최무선(崔茂宣)의 건의에 따라 설치된 화통도감에서 중국의 것을 본떠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크게 개량한 총은 세종 29년(1447)에 선보였다.
화승총(火繩銃)은 15세기 말에 유럽에서 발명되어 일본을 거쳐 들어왔다. 당시의 것은 길이 1~1.5m에 구경은 20cm이며, 무게는 약 6kg이었다. 이것으로 약 70g의 납탄을 200~300보 떨어진 데에서 쏘았다. 1521년에는 60g의 탄환을 300보 박에서 쏠만큼 발전하였다.‘화승’이라는 이름은 총 머리에 붙인 귀불(耳火)이라 불리는 작은 구멍에 화약을 조금 놓은 다음, 노끈(화승)으로 불을 붙여서 탄환을 발사시키는 데에서 왔다. 따라서 사냥을 계속하려면 이 불을 꺼뜨리지 않아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끈 대신 부싯돌을 쓰는 총이 나왔지만, 습도가 높거나 비가 내리면 터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를 개량한 것이 뇌관(雷管)이다. 그러나 뇌관을 장착한 총도 처음에는 화약과 탄환을 총구에 대고 곶감 꿰듯이 꼬챙이로 밀어 넣었던 까닭에 이를 ‘곶감총’이라 불렀다.
우리의 첫 화승총(火繩銃)은 선조 27년(1594)에 첫선을 보였다. 그리고 이 총을 든 사냥꾼[砲手]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선조 28년(1595) 5월 1일이다. 임금이 단오에 명나라 사신을 위해, 근교에서 포수(砲手)와 사수(射手)에게 사냥을 시키라고 이른 것이다. 이 무렵부터 ‘사냥꾼’을 ‘포수’라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군대에 소속된 포수가 사냥에도 나섰으며, 이들은 주로 궁궐에서 필요한 짐승을 잡았다. 숙종 28년(1702) 10월에는 서울 서쪽 근교에 호랑이가 나타나서 사람이 많이 상하자, 임금은 이들에게 잡으라는 명을 내렸다.
민간의 포수는 군대에도 편입되었다. 다음은 인조 5년(1627) 3월 28일에 비국(備局)에서 임금에게 올린 내용이다.

"여러 도의 군병으로 강도(江都)에 머무는 자가 수군이 5천명, 육군이 5천6백 명 모두 1만여 명입니다. 이들의 주둔이 수개월이 지난 탓에 굶주림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농사철도 가까웠으므로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들 가운데 어영군(御營軍)과 하삼도(下三道)의 사냥 포수는 그대로 두어서 변란에 대비토록 하고, 나머지는 차례로 돌려보내소서."

짐승을 잡는 포수가 나라를 지키는 일에도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정조 7년(1783) 9월 5일에는 포수들이 강원도 원주와 횡성, 그리고 충청북도 제천과 영동 일대에서 해를 끼치는 곰을 잡아서 임금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곰이 피해를 주었다는 기사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포수들은 1866년에 터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군을 물리치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들 8백여 명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또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강화도의 광성진(廣城津)에서 벌어진 미군과의 전투에서 보인 불굴의 의지는 미군들을 탄복시켰다. 이 때 명성을 떨친 이들이 평안도 강계(江界) 지방의 포수들이었다.

조선-기타

멧돼지 사냥 기사는 모두 36건으로, 중종 때 여덟 마리, 세종 때 일곱 마리, 세조 때 다섯 마리 순이다. 표범에 관한 기사는 23회 나타난다. 곰 관련 기사는 아홉 건이며, 이 가운데는 공민왕 때(21년[1372] 6월), 이성계가 “큰 곰 서너 너더댓 마리를 화살 한 대로 쏘아 죽였다”는 내용도 있다. 이쯤 되면 ‘실록(實錄)’이 아니라, ‘허록(虛錄)’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곰 기사 가운데에는 연산군이 “금원(禁園)에 산 곰과 범을 풀어놓고 이들을 잡는 즐거움을 누렸다”는 것도 보인다.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곰 사냥은 매우 드물었던 것이다. 사슴 사냥은 125건이며, 노루는 143건, 기러기 사냥은 10건이다. 세조는 야인(野人) 우노합(尤奴合)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마침 바람이 높아서 기러기 떼가 날아온다. 명후일(明後日)에 반드시 너를 데리고 사냥 할 터이니, 떠날 마음을 먹지 말라”고 타일렀다(7년(1461) 8월 29일).
임금이 사냥을 한 터는 철원(74), 광주(63), 평강(57), 이천(44), 청계산(44), 진보(춘천, 28), 영평(파주 27), 포천(25), 양근(16), 회양(14), 안협(7), 삭녕(7), 태안(5)의 순이다. 사냥터가 서울에서 가까운 지역에 한정된 것은 무엇보다 이동의 편의에 무게를 둔 까닭이다. 예를 들면, 근교인 청계산(淸溪山)으로 떠나는 경우에도 한강에 다리를 놓는 문제 등으로 논란이 많았다. 특히 곰 사냥에 관한 기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적은데, 그것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심산유곡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