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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문화 - 유배란?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 유배형

유배살이 또는 귀양살이라고도 불렸던 유배형은 죄인을 특정 지역으로 보내 특별한 사면이 있을 때까지 그곳에서 강제적으로 살게 하는 형벌이다. 조선시대에 유배형은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었다.

왜냐하면 공동체를 생활의 기반으로 삼는 조선 사회에서, 유배형은 ‘종신토록 생활 공동체로부터의 배제’를 의미하는 형벌이었기 때문이다.

유배형은 조선시대 형률의 바탕이 된 <대명률>을 바탕으로 제정됐고, 신분의 관계없이 적용됐다. 유형의 집행은 국왕의 윤허(명령)을 받아 관직자일 경우에는 의금부, 관직이 없는 경우에는 형조에서 집행했다.

유배형의 운영방식

유배형은 법의 근본 의미와는 달리 다양한 운영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상 종신형임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유배죄인들은 정국의 변화나 특별한 사정에 의해 풀려나 다시 자신의 생활근거지로 돌아가기도 하고 또 중앙 정계에 복귀하기도 했다.

극명한 대비를 보인 유배길

사형 다음의 중형임에도 불구하고 유배형은 죄인에게 정신적, 육체적 괴로움만을 주는 형벌은 아니었다. 모든 유배인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권세와 경제력을 지니고 있는 죄인들은 유배지로 가는 도중 풍성한 음식에 기생까지 동원된 융숭한 접대를 받고 온갖 선물을 챙겨가며 유배지로 향했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서는 큰 불만 없이 편안히 한가롭게 지낼 수도 있었다. 유배형은 그런 의미에서 세상과 인연을 끊게 하는 추방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관리가 아니거나 경제적으로 빈궁한 처지에 있던 유배인은 사비로 유배길을 가야했고, 유배지에서도 힘들게 생활해야 했다.

세상과 단절된 유배형

유배형은 세상과 단절되었다는 점에서 중형에 속했다. 양반 관료였던 죄인은 바깥 사회와의 연락이 끊김은 물론 권력에서도 배제되어 우울하고 갑갑한 생활을 해야 했다. 김정희가 제주에 유배된 자신을 부평초(蘋花빈화)에 비유한 것이나, 김춘택이 자신을 세상에 고개를 내밀 수 없는 땅속 지렁이(蚯蚓구인)에 비유한 것은 그러한 심사를 표현한 것이었다.

특히 절도안치는 양반관료의 경우에도 육지와 연락이 두절된 채 평소의 열악한 생활환경 속에서 버텨내야 하는 중형이었다.

궁핍한 유배인의 생활

대부분의 유배 죄인들은 비바람을 피할 집을 마련하는 것에서부터 하루하루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일까지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고을에서는 유배 죄인을 먹여 살릴 책임이 있었느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그런 책임은 회피되기 일쑤였다.

유배죄인을 떠맡을 보수주인을 정하는 일도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또 보수주인이 정해져도 주인의 살림이 넉넉지 못한 경우에는 유배죄인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 했다. 의식주가 모두 풍족하지 않은 상황에서 하루하루 먹을 양식을 구하기 위해 장사를 하기도 하고, 날품팔이 일을 하기도 했다. 때로는 동냥을 하는 일도 있었다.

때로는 몇몇 유배죄인들이 유배지에서 호화롭게 살기도 하였으나 유배기간이 길어지면 그런 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다. 결국 유배지에서의 삶은 쓸쓸하고 고달픈 것이었으며, 권세 없고 빈한한 사람에게는 극도로 괴로운 삶이었다.

[참고문헌]
정연식, 2002 '조선시대의 유배생활-유배가사에 나타난 사례를 중심으로-' ‘인문논총’ 9, 서울여대 인문과학연구소
심재우, 2000 '조선전기 유배형과 유배생활' ‘국사관논총’ 92
한창덕, 1999 '귀양과 전통법문화' ‘전통과 현대’ 1999년 여름호
김경숙, 1998 '조선시대 유배형의 집행과 그 사례' ‘사학연구’ 55,56합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