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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문화 - 유배지의 규정

유배지 선정에 대한 법 규정

(1) 유배형의 세 가지 등급
유배형은 2000리, 2500리, 3000리 세 등급으로 나누어지며, 장 100도가 함께 부과된다. 이 조항은 중국 명나라의 법전인'대명률' 의 조항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2) 중국 법률 적용의 문제점
땅이 좁은 조선에서는 가장 먼 함경도 경흥까지도 2천리 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대명률의 세 등급을 그대로 적용할 수가 없었다. 중국 땅의 규모에 맞춘 유형의 거리를 조선 땅의 규모에 맞추기 어려웠던 것이다.

(3) 조선에 맞는 법률 적용
커다란 중국 땅에 맞는 거리 계산이 조선 땅에 적용도기 어려웠기 때문에 중국의 대명률의 조항들은 조선 실정에 맞게 점차적으로 고쳐서 형을 시행하였다. 각 등급에 따라 100리를 1식으로 환산하여 새롭게 정하였으며 유배지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제외한 전국의 각 고을에 고루 지정되었다.

유배지 선정과정의 위법성

법에 정한 유배지 조항은 후에도 여러 차례 원칙이 바뀌고, 실제 운영면에서도 원칙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19세기 후반의 '의금부노정기' 에 의하면 경기도와 충청도에도 유배되는 일이 많았다. 심지어는 불과 30리 밖에 있는 양천, 과천, 시흥에 유배되는 일도 있었다. 왕족들이 경기도의 강화에 유배되는 일도 잦았다.

조정에서의 양반 관료들에 대한 유배지 결정은 의금부의 의견보다 국왕의 의지에 의해 확정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같은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쉽게 확인된다. 특히 유배지 가운데 풍토가 척박하여 유배인이 생활하는데 많은 불편이 있었던 함경도의 극변 지역과 전라도, 경상도의 도서(島嶼) 지역이 유배지로서 꺼리는 곳이었으나 사화를 비롯한 정쟁에 연루된 관료들 중에는 이들 지역에 유배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조 중기부터 말기에 이르면 유배 경향이 변경 지방이나 내륙으로는 드물고 거의가 유인도, 무인도를 가릴 것 없이 물도 솟지 않고 생활수단조차 없는 절해의 고도에 보내졌다.

유배지-섬

(1) 외딴 섬으로의 유배가 갖는 의미
섬은 사방이 바다로 격리되어 있어서 유배인의 배소 이탈을 힘들이지 않고 막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중죄를 지은 죄인은 외딴 섬으로 유배 보냈다. 사실 세종 때의 규정은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바닷가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주도, 추자도, 진도 등 많은 섬들이 유배지로 선정되었다.

(2) 혹심한 형벌, 섬 유배의 시대별 양상
섬으로의 유배는 세상과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평생을 버려져 살아가는 혹심한 형벌이라 여겨져 어느 정도 제한을 두었다.

1) 경종 3년(1723)
김춘택의 아들, 아우, 조카 등 14명을 모조리 신지도, 추자도, 흑산도, 제주도, 거제도 등 절도에 유배 보내자 법률 적용이 너무 지나쳤다고 하여 문제가 되었다.



2) 영조 2년(1726)
왕의 특별한 교지가 없으면 흑산도에 죄인을 유배 보내지 못하게 하였다.

3) 영조 4년(1728)
관수(지역을 맡아 지키는 관리)가 없는 절도에는 죄인을 유배 보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3) 역사로 보는 섬으로의 유배
서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강화도(경기도), 백령도, 철도(鐵道 : 황해도) 등 도처에 많은 섬에 유배된 자는 극히 적었다. 대부분은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지방에 절도(絶島)에 유배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제주도를 비롯한 흑산도, 진도, 임자도, 금갑도, 지도, 군산도, 고금도, 완도, 신지도 등 전라도 연안의 여러 섬이 대상지로 되었다. 특히 제주도에는 당대의 명류(名流)가 많이 유배되어서, 조선시대의 지리서인「팔역지(八域誌)」에는 「조정진신 다찬어차(朝廷搢紳多竄於此)」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였다. 즉, 정부의 고관대작이 이 섬에 많이 유배되었다는 말이니, 제주도에 유배된 사람의 신분이나 수는 다른 섬과는 결코 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를 차지하였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영조 33년(1757) 2월 1일, 전라도 감사(監司 : 도지사) 이창수가 「유인이 제주목에 집중하고 있으므로 그 연좌인들을 제주삼읍에 분배하고 싶은데 어떤가」고 「비변사」에게 의견을 제시한 바, 그것이 인정되었다.

2) 제주도로 가는 뱃길
출항 후에는 사흘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를 저어 제주도를 향했는데 제주도에 이르기 전 먼저 추자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그곳에서 며칠을 더 가서 제주도 서쪽 애월포에 닿았다. 애월포에 이르는 길은 두 물길이 마주치는 곳으로 파도가 거칠어서 배의 운행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나주, 해남, 강진 → 추자도 → 제주도)

3)제주도의 유배생활
제주도는 가는 길이 멀고도 험하지만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등 고을도 셋이나 되는 커다란 섬으로 생활환경이 극도로 열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주도에 부속되어 있는 작은 섬들은 사정이 달랐다. 유배에서 풀려나거나 죽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인 절도(絶島-외딴섬)는 물자도 궁핍하고, 생활환경도 극도로 열악한 는 섬 생활에 익숙지 않은 유배죄인의 삶을 옥죄이기에 충분했다. 특히 땅도 넓지 않고,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흑산도, 추자도 등과 같은 절도는 유배지 가운데서도 최악의 곳으로 여겨졌다.

4) ‘유형의 섬’ 제주도
그 옛날 「제주도는 해로(海路) 9백리, 중죄대벌(重罪大罰)이 아니면 감히 여기에 부처(付處)하지 않는다. 조야(朝野) 모두가 그 때문에 무서워했다」고 했던 것과 같이 당시의 양반지배계급자들은 제주도 유배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주도라고 하면 곧 「유형의 섬」이라고 사람들은 연상한다. 더구나 제주도에 유배된 자는 몇몇 특례를 제외하고는 종신형인 자가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4. 고을 사정을 고려한 유배지 선정

(1) 고을 재정 참작
유배지의 결정은 죄의 성격에 따라 좌우되지만 고을 자체의 사정도 참작되었다. 그 고을이 유배죄인을 떠맡을 경제적 능력이 있는가가 문제였다. 왜냐하면 유배죄인이 자기 고을에 자리를 잡으면 생계를 이어가게 하는 것은 그 고을의 책무였기 때문이다. 고을의 입장에서는 군식구가 늘어나는 셈이라 지방 고을은 재정 문제상 유배죄인들을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2) ‘못살포’라 불러진 ‘모슬포’
중죄인일수록 생활형편이 피폐한 고을에 집중적으로 배정됐다. 제주도 가운데서도 대정현은 대표적인 유배지로서 중죄인들을 유배시키는 곳이었다. 이 대정현에 배가 닿는 모슬포에는 유배자들의 출입이 유달리 잦아 그곳 사람들이 하도 시달려서 모슬포를 속칭 ‘못살포’로 불렀다는 말이 전해올 정도이다.

(3) 유배인 때문에 피해 입은 고을 주민
유배죄인의 거처를 마련해 주느라 고을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었다. 인조 연간에 신하들을 남한산성에 유배 보낸 경우가 그러했다. 당시 양반관료로서 가벼운 죄를 지은 자는 남한산성에 도배(도형에 처한 뒤에 귀양을 보냄)를 보냈다.

고을에서는 이들이 아무리 죄인이라 하더라도 가벼운 죄를 지어 곧 풀려날 것이므로 소홀히 대우할 수가 없었다. 남한산성에는 죄인 몫으로 따로 집을 지어놓은 곳이 없었는데 이에 따라 거처할 곳이 없는 죄인들을 산성 안 주민에게 떠넘기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정작 집주인은 마당에 막을 치고 그곳에서 비바람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이런 일이 잦자 인조 6년(1628)에는 무관이나 천예 외에 조관으로 도형을 받은 자는 각 읍에 골고루 나눠 보내 폐단을 없애게 하였다.

(4) 한 고을에서 부양하는 유배인의 숫자
유배죄인 때문에 고을에 경제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까닭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유배죄인을 부양할 힘이 아예 없는 고을에 유배인을 보내기도 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유배죄인을 몇 군데에 편중되게 보냈다는 점이다. 정조는 그 폐단을 없애기 위해 정조 8년(1784)에 재상(천재로 말미암아 농작물이 입는 해)보고에서 우심읍(피해가 더 심각한 읍)으로 판정된 읍에는 죄인을 보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한 읍에 여러 명의 유배죄인이 있게 하지 않고 각처에 분산시키는 정책도 취하였다. 정조 10년(1786)에는 기장, 사천, 고성 등 경상도에서 재해가 심한 읍에 죄인이 10명이 넘게 보내져서 궁핍한 고을이 견디기 어렵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에 한 고을의 정배죄인이 10명을 넘지 못하게 정식으로 정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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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실록)’
‘阮堂先生全集 (완당선생전집)’
‘與猶堂全書 (여유당전서)’
‘燃藜室記述 (연려실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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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2005 「조선시대의 유배길」 ‘선비문화’ 5, 남명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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