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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문화 - 유배 행정

유배인 신분에 따른 호송담당

(1) 관직에 있던 죄인
관직에 있던 죄인들의 유배는 의금부에서 관할했다. 정2품 이상은 의금부 도사(都事), 종2품부터 정3품 당상관까지는 서리(書吏), 정3품 당하관 이하는 나장(羅將)이 압송한다. 압송관인 역졸은 죄인의 유배길 전체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지역의 역졸에게 죄인을 인계하여 유배지에 이르게 하였다.

(2) 관직에 없던 죄인
관직에 있지 않던 일반 백성들의 유배는 형조에서 관할했다. 경역자(京驛子)를 비롯, 죄인이 지나는 고을의 역자(驛子)가 압송했다. 그런데 지방에서 검율(檢律)의 도움을 받아 관찰사가 집행하는 유배자에 대한 압송 규정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분명치 않다.

유배지까지의 기간 및 방법

(1) 유배지까지 가는 방법
먼 길을 걸어서 가기엔 힘이 너무 들고, 또 기일 내에 도착하지 못 할 수 있기 때문에 양반들은 대게 유배지로 갈 때 말을 이용하였다.

TV 사극을 보면 유배죄인이 유배길을 갈 때 머리를 풀어헤치고 함거(檻車)라고 부르는 소달구지에 실려 가는 장면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는 잘못된 사례라 할 수 있다.

함거는 처형장에 갈 때 타는 것이었고, 대부분 양반이 유배길에 오를때는 시종과 함께 말을 타고 이동하였다.

(2) 유배지까지 가는 기간
유배인들은 대개 말을 타고 유배지로 이동하였는데, 며칠 만에 유배지에 도착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전해지는 바가 없다.

그러나 유배인들의 발배 일정을 추적한 논문에 따르면 조선후기에는 대략 하루 평균 80-90리를 가도록 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사례는 일률적이기 않았으며 신분 및 위리안치 여부에 따라 거리의 가감이 있었다고 한다.

유배형의 종류

(1) 안치형
안치형은 일정한 장소에 유배인을 보내어 거주를 제한하는 유형 제도를 말한다. 안치형도 죄인의 죄질에 따라 다양했다. 즉, 특혜를 베푸는 처분으로써 고향을 유배지로 정하는 본향(本鄕)안치, 그와는 정반대로 과혹(過酷)한 격리조치의 하나로 섬이나 산간지방으로 보내는 절도(絶島)안치, 그리고 거주지를 더 엄격하게 봉쇄했던 위리안치가 있다.

위리안치를 당하는 유배인의 집 주위에는 높다란 나무 울타리를 쌓아 막아두고 문에 자물쇠를 채워둔 후 바깥둘레에는 가시나무 울타리를 쳤다. 말하자면 이중 막을 설치한 셈이다. 가시나무 울타리 바로 앞에는 수직소를 두어 유배인을 감시하였다.

음식이나 물은 문 옆에 작은 구멍을 내어 그곳을 통해 전해주고 심지어는 마당에 우물을 파서 물도 스스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며칠에 한 번씩 음식을 전해주어 외부와 연락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2) 기록으로 보는 위리안치
19세기 선비 정온의 유배시절 편지을 살펴보면 “둘러쳐 놓은 (가시)울타리 안으로 들어 올 때에 금오랑(金吾郞.의금부 도사)이 관대를 갖추고 교상(轎 床)에 기대어 문밖에 앉아서 나장(羅將)으로 하여금 나를 잡아서 안으로 들여 넣게 하고 그 문을 닫아 봉함했다.” 라고 하여 위리안치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1614년 영창 대군을 죽인 강화부사 정항(鄭沆)의 처벌을 주장하다 광해군의 친국(親鞫)을 두 차례 받고 절해고도인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이 남긴 기록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유배생활의 실상을 보여준다.

유배지로 가는 동안의 비용

(1) 일반적으로 유배인 자비(自費)로 해결
유배 길의 비용은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고 개인적으로 노비를 거느릴 수 있었다. 유배인은 관직자일 때에는 국가에서 말을 지급하고, 유배 길목의 수령들은 말과 음식을 제공하도록 허용했다.

그래서 재산이 넉넉지 못하거나 동료, 친인척이 많지 않은 양반 관료들의 경우에는 큰 부담이 되었다. 선조 24년(1591) 정철이 실각하자 그 일파로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된 홍성민의 경우를 살펴보면 유배지로 떠나기 위해 타고 갈 말 여섯 필과 의식을 장만하는데 가산을 털어야만 했다고 한다.

(2) 유배 길에 대접 받는 양반 관료
상당수 유배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그와 정치적 견해를 함께하는 동료 관료들 또는 경유지역 수령들에게서 향응을 제공받았다. 성종 때 종묘사직에 관계된 유배인이 아닌 경우는 경유지 지방관이 술과 고기를 보내주고 전송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는데, 이 같은 사례는 조선후기에도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 때 이항복이 북청으로 유배 가는 과정에서 29일 중 하루를 제외한 나머지 날들을 모두 경유지 수령과 역촌(驛村)에서 후한 접대를 받은 일, 경종 때에 갑산에 위리 안치된 윤양래가 경유 지방관으로부터 제공받은 물품이 너무 많아 말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일화는 조선시대 영향력 있는 관료들의 유배 길을 충분히 짐작하게 하는 사례들이다.


[참고문헌]
‘續大典 (속대전)’
‘義禁府路程記 (의금부노정기)’
‘幷世才彦錄 (병세재언록)’
‘阮堂先生全集 (완당선생전집)’
‘燃藜室記述 (연려실기술)’
‘牧民心書 (목민심서)’
‘秋官志 (추관지)’
‘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실록)’
‘기행가사 자료선집’Ⅰ(최강현, 국학자료원)
정연식, 2002 '조선시대의 유배생활-유배가사에 나타난 사례를 중심으로-' ‘인문논총’ 9, 서울여대 인문과학연구소
심재우, 2000 '조선전기 유배형과 유배생활' ‘국사관논총’ 92
김경숙, 1998 '조선시대 유배형의 집행과 그 사례' ‘사학연구’ 55,56합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