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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문화 - 유배자의 처우

유배인의 가족동반 허용

조선 형법의 모체였던'대명률' 에는 처와 첩, 부(아버지).조(할아버지).자(자녀).손(손자, 손녀)이 원하는 경우 함께 사는 것을 허락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정조 때에는 이런 조항이 잘못 적용되면 전 가족이 유배지로 이동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므로 주의해서 형률을 적용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가족이 하나 둘 씩 유배지에 따라와 살다가 결국 그곳에서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가족이 유배지에 따라가 사는 것은 자금의 어려움을 감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생계에 위협도 따르고 집안이 쇠잔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또한 절도에 유배되면 현실적으로 가족이 따라가서 사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대개는 혼자 가거나, 종이 따라가든가, 아니면 가족들이 종종 왕래하면서 살아가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유배지에서의 의식주 해결자 보수주인

(1) 보수주인이란?
보수주인이란 숙식을 해결할 거처를 마련하고 죄인을 감시하는 직무를 맡은 자이다. 멀고 힘든 유배지로 보내는가, 아니면 가깝고 편안한 유배지로 보내는가 하는 일은 중앙정부가 결정할 일이었지만 유배지에서의 생활은 사실상 상당 부분 관찰사와 수령에 의해 좌우되었다.

특히 유배지에서 어떻게 생활할지는 보수주인에게 달려있다. 보수주인은 유배지의 고을 수령이 결정했다. 누구를 유배인의 보수주인으로 삼느냐에 따라 유배인의 유배 생활이 크게 달라졌다.

(2) 보수주인의 입장
보수주인에게는 유배인을 감시하고 한 달에 세 말 양식을 내어 먹여 살릴 책임이 있었다. 대부분의 보수주인은 관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죄인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귀찮은 존재가 달가울 리 없었다.

관노비로 정속되어 유배된 경우를 제외하고 생산 활동에 종사해 보지 않은 양반 유배자들은 고을에서도 골칫거리였다. 권력에서 버림받은 유배죄인에게는 보수주인을 정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고, 가까스로 주인을 정하더라도 유배죄인은 보수주인에게 박대를 받기 일 수 였다.

(3) 유배인을 먹여 살리기 위한 고을의 대책
보수주인으로서는 군식구인 유배객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 큰 고민거리였다. 그래서 죄인을 먹여 살리는 일을 보수주인에게 모두 떠넘기지 않고, 마을 공동의 책임으로 만드는 곳도 많았다.

유배인의 생계를 위해 마을 사람들이 교대로 먹을 것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관에서 일정 비용을 보수 주인에게 지급하여 해결하게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유배인을 관리하였다.

생계를 책임진 유배인

(1) 본가에서의 물품 공수
유배죄인이라도 집안에 권위가 있고 가세가 넉넉하면 종들이 오가며 필요한 물품을 대주었다.

(2) 고을 사람들의 도움
스스로 먹을 것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에는 고을에서 알아서 먹여 살려야 했다. 집집마다 날짜를 정하여 돌려가며 먹을 것을 대어 주기도 하였고, 혹은 고을 사람들로부터 양식이나 돈을 거둬들여 보수주인에게 지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집에서 먹을 것을 제공해 주지 않으면 유배죄인으로서도 일일이 대응하기 어려워 이러한 일이 지켜지지 않으면 굶어야만 했다.

또한 제도적으로 유배죄인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방식이 규정된 것이 없으므로 보수주인의 상황이 어려워지면 유배죄인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3) 스스로 생계 충당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거나, 글씨를 써서 팔아서 생활 물품을 얻기도 했다. 또 장사를 하기도 하거나 날품팔이를 했고 그것마저도 어려운 경우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동냥을 하기도 했다.

(4) 정약용이 제안한 겸제원
정약용은 유배인의 궁핍한 생활 폐단을 줄이기 위해 고을의 나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 겸제원이라는 기구를 창설했다.

고을의 기와집 한 채를 사서 죄인 열 명이 함께 지내게 하고 화속전 가운데 해마다 500냥을 덜어내어, 백성 가운데 뽑힌 관주에게 그 돈을 주어 곡식, 반찬거리, 자리, 그릇 비용을 대게 한 것이다.

이러한 제도를 통해 유배 온 사람이나 고을 사람 모두 흡족해 했다고 한다

유배지 이탈 금지

(1) 유배지 이탈 금지 규정
유배죄인이 지켜야 할 첫 번째 사항은 유배지를 이탈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배지를 이탈하지 못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고을 경계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섬에 유배된 경우에는 육지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이고, 위리안치는 거처하는 집 울타리 안에서 벗어 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형을 시행하였다. .

위리안치 이외에는 유배지 군현에서의 이동에 대해서는 법적으로는 제한을 가하지 않았기에 유배지를 이탈하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정조 후반에는 유배형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되는 암행어사에게 시찰하도록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유배인에 대한 정기적인 감시 : 점고(點考)

(1)점고의 정의
점고란 각 고을에서는 한 달에 두 차례씩 유배지 내에 죄인이 도망하지 않고 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을 말한다. 유배지 고을 안에서의 죄인의 이동이 자유로웠으므로 죄인의 이탈 여부를 확인하는 유일한 제도가 바로 점고였다.

(2) 점고하는 날짜
매달 초하루 보름에는 고을 수령이 망궐례(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각 지역의 수령이 궁궐에 있는 폐를 향해 배례하던 의식)를 치르고 난 후 모든 관속들을 점고를 하는데, 이때 유배 죄인도 점고를 받았다.

그러나 점고도 반드시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매달 한 번씩 첫째 날에 하기도 하고, 초하루 열흘에 하기도 해서 지방마다 시행하는 형태가 달랐다.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 별점고(별도로 행하는 점고)를 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3) 유배지에서 점고로 인한 여성유배인의 수모
죄인이 되고 나면 온갖 수모를 겪어야 하는데, 여자의 경우는 더 심했다. 집안사람의 역모에 연좌되어 유배당하거나 관비로 정속될 경우, 질이 좋지 않은 수령은 점고를 빙자해서 다른 마음을 품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여자 죄인은 관아 뜰에 얼굴을 가리고 들어오게 하되 고을 수령은 문을 닫아걸고 여자 죄인을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점고를 마친 뒤에는 관비를 시켜서 집에 호송하라고 하고, 남자들이 주위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4) 점고의 생략
고을에 유배되어 온지 오래되고, 또 아무런 힘도 없는 유배된 죄인에게는 점고를 생략하는 일이 많았다. 정약용도 '목민심서'에서 직접 관아 뜰로 불러들여 점고를 하기보다는 향승과 형리(지방 관아의 형방에 딸렸던 아전)를 보내 밖에서 동정을 살피게 하되 몇 달에 한 번씩 직접 살펴보라고 하였다.

또한 여자 죄인의 점고도 관아에 불러들여 하지 말고, 초하루 보름마다 관비를 유배죄인의 배소로 직접 보내어 살펴보도록 하라고 권하고 있었다.

(5) 점고 생략의 악용
점고 생략을 악용한 유배인도 있었다. 그래서 정조 7년(1783)에는 죄인들이 유배지에서 도망하는 일이 부쩍 많아진 원인이 점고를 엄격하게 하지 않은 탓으로 돌렸다. 그래서 죄인이 도망하면 해당 고을의 수령을 금고 6년에 처하도록 한 일도 있었다.

유배인의 합법적인 유배지 이탈

(1) 합법적 유배지 이탈 사유
죄인이라고 해서 완전히 유배지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후기에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말미를 얻어 합법적으로 유배지를 벗어나 활동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특별한 유교국가에서 최고의 덕목으로 효를 실천하는 일에는 예외를 주었다. 즉 유배지 이탈은 노부모의 위독과 사망 시의 상례에 국한되어 있었다.

(2)합법적 유배지 이탈의 사례
숙종 8년(1682)에는 전라도 강진에 유배된 신명규의 9순 노모의 병세가 위독하다 하자 왕복 소요 일수를 제하고도 한 달 동안 휴가를 준 일이 있었다. 또한 숙종 29년(1703)에는 유배 간 조대수의 8순 노모가 위독해서 죽기 전에 아들을 한 번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 하여 신명규의 예에 의거해서 한 달 휴가를 준 일이 있었다.

영조 2년(1726)에는 어머니 홍씨가 병이 나서 위독하게 되자 귀양 간 이진순, 이진수 형제를 서울 집으로 말미를 주어 보냈고 마침내 노모가 사망하자 장례까지 치르고 배소로 돌아가게 한 일도 있었다.

또한 숙종 때에는 이미 유배된 죄인이 상을 당하면 친아들이나 승중손에 국한하여 상을 치르러 유배지를 벗어날 수 있게 한 조항이 있었고, 사대부의 경우에는 상을 치르는 데 3개월이 소요되므로 3개월 동안 말미를 주기로 하였다.

정약용도 유배 온 죄인에게 휴가를 주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관대한 조처를 베풀어야 한다고 했다. 즉 죄가 무겁지 않고 근거가 확실한 자에게는 때때로 말미를 주는 것이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푸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참고문헌]
‘大明律 (대명율)’
‘北遷日記 (북천일기)’, 尹陽來-윤양래
‘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실록)’
정연식, 2002 '조선시대의 유배생활-유배가사에 나타난 사례를 중심으로-' ‘인문논총’ 9, 서울여대 인문과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