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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문화 - 여성 유배인

고달픈 여성 유배인 생활

유배형을 받는 자가 여성일 경우 여러 문제거리가 발생하였다. 여성 유배인은 사족의 신분을 띠고 귀양살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아예 관비로 정속되는 경우도 있었다. 더욱이 집안이 몰락하다 보니 처녀로 귀양 와서 백발이 다 되도록 홀로 사는 여자도 있었다.

또한 남자들로부터 희롱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여성 죄인들이 그 시대에 어떤 대우를 받았는가는 '패관잡기'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전가사변을 겪어 가족이 변방에 살다가 남자가 죽고 나면, 홀로 남은 여인을 관청의 백정이나 관노들이 온갖 수를 써서 자신들의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고을 수령도 그 집안에 위협을 가해 여자들이 이들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고 전하고 있어 당시 여성 유배인들에 대한 처우가 어떠했는지 짐작 할 수 있다.

자살에 이른 여성 유배인 사례

정약용은 사족 부녀가 유배되어 올 경우에는 마을에 엄히 일러서 남자들이 왕래하거나 엿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부녀자가 유배되어 어떤 억울한 일을 겪게 되는가는 정약용의 '기고금도장씨녀자사' 에 잘 나타나 있다.

'기고금도장씨녀자사' 는 고금도에 유배된 장현경의 처와 자녀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여 인동부사 이갑회가 장현경과 틈이 벌어져 정조 독살설을 제기했다. 장현경이 정조 독살설에 혐의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의금부에서 장현경을 체포하러 갔으나 장현경은 도주하였고, 장현경이 처와 두 딸 그리고 아들만 체포되어 강진현 관할의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그런데 순조 9년(1809)에 진에 있던 군졸 하나가 우연히 큰딸을 엿보고는 큰딸을 희롱하며 유혹하자 큰딸은 분한 나머지 물에 뛰어들었다. 장현경의 아내가 이를 보고 구하려다 그만 같이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사건을 작은딸이 관에 고발하였으나 결국은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으니, 이 사례는 당시 여성 유배자의 고충이 어떠했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유배지에서 점고로 인한 여성유배인의 수모

죄인이 되고 나면 온갖 수모를 겪어야 하는데, 여자의 경우는 더 심했다. 집안사람이 역모에 연좌되어 유배당하거나 관비로 정속될 경우, 질이 좋지 않은 수령은 점고를 빙자해서 다른 마음을 품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여성 유배인의 처우 개선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는 여성 거주지에는 남자들의 출입을 금하며, 관비를 파견해 보살피고 명절에는 쌀과 고기를 보낼 것을 수령들에게 권고할 것을 이르고 있다. 또한 점고로 인한 여성 유배인의 수모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자 죄인은 관아 뜰에 얼굴을 가리고 들어오게 하였고 이에 고을 수령은 문을 닫아걸고 여자 죄인을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점고를 마친 뒤에는 관비를 시켜서 집에 호송하라고 하고, 남자들이 주위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여 여성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지 않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慶尙道丹城縣戶籍臺帳 (경상도단성현호적대장)’
‘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실록)’
정연식, 2002 '조선시대의 유배생활-유배가사에 나타난 사례를 중심으로-' ‘인문논총’ 9, 서울여대 인문과학연구소
심재우, 2001 '조선후기 단성지역 정배인의 존재 양태' ‘한국학보’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