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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유배문화인조실록을 통해 본 인조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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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을 통해 본 인조반정

이반이 드디어 고변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12일 저녁이었다. 그리하여 추국청을 설치하고 먼저 이후배를 궐하에 결박해놓고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 하는데, 광해는 바야흐로 후궁과 곡연을 벌이던 참이라 그 일을 머물러 두고 재결하여 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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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윤리와 기강이 이미 무너져 종묘 사직이 망해가는 것을 보고 개연히 난을 제거하고 반정할 뜻을 두었다. 무인 이서와 신경진이 먼저 계획을 알렸으니, 경진 및 구굉•구인후는 모두 상의 가까운 친속이었다. 이에 서로 은밀히 모의한 다음, 문사 중 위엄과 인망이 있는 자를 얻어 일을 같이 하고자 하였다.

곧 김류를 방문한 결과 말 한 마디에 서로 의기투합하여 드디어 추대할 계책을 결정하였다. 그 후 경진이 전 부사(府使) 이귀를 방문하고 사실을 말하자 이귀도 본래 이 뜻을 두었던 사람이라 크게 좋아하였다.

드디어 그 아들 이시백•이시방 및 최명길•장유, 유생 심기원•김자점 등과 공모하였다. 이로부터 모의에 가담하고 협력하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임술년 가을에 마침 이귀가 평산 부사로 임명되자 신경진을 이끌어 중외에서 서로 호응할 계획을 세웠다. 그때 모의한 일이 누설되어 대간이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김자점과 심기원 등이 후궁에 청탁을 넣음으로써 일이 무사하게 되었다.
신경진과 구인후 역시 당시에 의심을 받아 모두 외직에 보임되었다. 마침 이서가 장단의 부사가 되어 덕진에 산성 쌓을 것을 청하고 이것을 인연하여 그곳에 군졸을 모아 훈련시키다가 이때에 와서 날짜를 약속해 거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훈련 대장 이흥립이 당시의 정승 박승종과 서로 인척이 되는 사이라 뭇 의논이 모두들 ‘도감군(都監軍)이 두려우니 반드시 이흥립을 설득시켜야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에 장유의 아우 장신이 이흥립의 사위였으므로 장유가 이흥립을 보고 대의(大義)로 회유하자 흥립이 즉석에서 내응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이서는 장단에서 군사를 일으켜 달려오고 이천 부사 이중로도 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와 파주에서 회합하였다.

그런데 이이반이란 자가 그 일을 이후배•이후원 형제에게 듣고 그 숙부 이유성에게 고하자, 유성이 이를 김신국에게 말하였다. 이에 신국이 즉시 박승종에게 달려가 이이반으로 하여금 고변하게 하고 또 승종에게 이흥립을 참수하도록 권하였다.

이반이 드디어 고변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12일 저녁이었다. 그리하여 추국청을 설치하고 먼저 이후배를 궐하에 결박해놓고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 하는데, 광해는 바야흐로 후궁과 곡연을 벌이던 참이라 그 일을 머물러 두고 재결하여 내리지 않았다.

승종이 이흥립을 불러서 ‘그대가 김류•이귀와 함께 모반하였는가?’ 하므로 ‘제가 어찌 공을 배반하겠습니까?’ 하자 곧 풀어주었다.

의병은 이날 밤 2경에 홍제원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김류가 대장이 되었는데 고변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포자(捕者)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 가고자 하였다. 지체하며 출발하지 않고 있는데 심기원과 원두표 등이 김류의 집으로 달려가 말하기를, ‘시기가 이미 임박했는데, 어찌 앉아서 붙잡아 오라는 명을 기다리는가.’하자 김류가 드디어 갔다.

이귀•김자점•한교 등이 먼저 홍제원으로 갔는데, 이때 모인 자들이 겨우 수백 명밖에 되지 않았고 김류와 장단의 군사도 모두 이르지 않은 데다 고변서가 이미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군중이 흉흉하였다.

이에 이귀가 병사 이괄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은 다음 편대를 나누고 호령하니, 군중이 곧 안정되었다. 김류가 이르러 전령(傳令)하여 이괄을 부르자 그가 크게 노하여 따르려 하지 않으므로 이귀가 화해시켰다.

임금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아가 연서역에 이르러서 이서의 군사를 맞았다. 장단의 군사가 7백여 명이며 김류•이귀•심기원•최명길•김자점•송영망•신경유 등이 거느린 군사가 또한 6∼7백여 명이었다.

밤 3경에 창의문에 이르러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다가, 성문을 감시하는 자를 만나 그를 참수하고 드디어 북을 울리며 진입하여 곧바로 창덕궁에 이르렀다.

이흥립은 궐문 입구에 포진하여 군사를 단속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항이 돈화문을 열어 의병이 바로 궐내로 들어가자 호위군은 모두 흩어지고 광해는 후원문을 통하여 달아났다.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침전으로 들어가 횃불을 들고 수색하다가 그 횃불이 발(簾)에 옮겨 붙어 여러 궁전이 연소하였다.

상이 인정전에 앉았다. 궁중의 직숙관(直宿官)이 모두 도망쳐 숨었다가 잡혀왔는데, 도승지 이덕형과 보덕, 윤지경은 처음엔 모두 배례를 드리지 않다가 의거임을 살펴 알고는 바로 배례를 드렸다. 새벽에 백관들이 다 모였다.

박정길이 병조 참판으로 먼저 이르렀는데, 판서 권진이 뒤미처 이르러 ‘정길이 종실 항산군과 함께 군사를 모았는데, 지금 들어왔으니 아마도 내응할 뜻을 둔 것 같다.’라고 하였으므로 곧 정길을 끌어내어 참수하였다. 항산군을 잡아다 문초하니, 혐의 사실이 없어 석방하였다. 그런데 정길은 당연히 참형을 받아야 할 자라 사람들이 모두 그의 참수를 통쾌하게 여기었다.

상궁 김씨와 승지 박홍도를 참수하였다. 김 상궁은 궁인으로 광해가 총애하여 그녀가 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줌으로써 권세를 내외에 떨쳤다. 또 이이첨의 여러 아들 및 박홍도의 무리와 결탁하여 그 집에 거리낌 없이 무상으로 출입하였다.

이때에 와서 맨 먼저 참형을 받았다. 홍도는 흉패함이 흉당 중에서도 특별히 심한 자라 궐내에 잡아들여 참수하였다. 광해는 상제가 된 의관(醫官) 안국신의 집에 도망쳐 국신이 쓰던 흰 의관을 쓰고 있는 것을 국신이 와서 고하므로 장사들을 보내 떠메어 왔고, 폐세자는 도망쳐 숨었다가 군인들에게 잡혔다.

<인조실록 1년 3월 13일조 (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