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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유배문화광해군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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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업적

당파를 불문하고 어진 인재만을 거두어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나가고자 했을 것이다. 연배가 지긋한 서인과 남인의 원로들이 정승으로서 광해군을 보좌하고 국정의 전반을 챙기는데 주력했다면 상대적으로 연소했던 북인들은 주로 인사권이나 언론을 담당하면서 광해군 왕권의 보위를 위해 애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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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연립 정국을 펼쳤다.

당파를 불문하고 어진 인재만을 거두어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나가고자 했을 것이다. 연배가 지긋한 서인과 남인의 원로들이 정승으로서 광해군을 보좌하고 국정의 전반을 챙기는데 주력했다면 상대적으로 연소했던 북인들은 주로 인사권이나 언론을 담당하면서 광해군 왕권의 보위를 위해 애쓰고 있었다.

비록 대북과 소북 사이에는 미묘한 알력의 조짐이 있었지만 적어도 광해군 4년경까지는 정파 사이의 다툼이나 대립이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광해군이 연립정국의 중심에 서서 신료들 사이에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열세인 남인이나 서인들은 왕에게 기대어 북인들을 견제하려 했고 북인들은 자신들의 우세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또한 광해군은 민생안정에 힘썼다. 광해군은 등극하자마자 1608년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민간의 세금 구조를 일원화시키고 세무 부담을 줄여주었다. 1611년에는 농지를 조사하고 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점검하는 정책인 양전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확대하고 국가 재원을 확보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부터 전란 중에 흩어져버린 서적들을 수습하고 새로 찍어내는데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각종 서적들을 수습하여 바친 사람들에게 후한 상을 내리는 한편 명나라에 들어가는 사신들에게도 거금을 들여 책을 구입해 오도록 지시했다. 왕실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용비어천가] 와 같은 서적들을 복간해 냈다.

특히 역사책을 구비하는데 기울였던 노력이 각별했다. [고려사], [국조보감] 등을 새로 찍어냈고 사신들 편에 서적을 구입해 오도록 하여 수시로 열람했다. 또한 선조의 죽음을 막지 못한 죄를 뒤집어쓰고 귀양을 가 있었던 허준을 신료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도성에 출입하여 내의원 의서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것은 광해군의 의서에 대한 높은 관심과 허준에 대한 배려 때문에 가능했다. 광해군은 어릴 적부터 잔병 치레가 많았고 즉위 이후에도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왕세자 시절 허준에게 치료를 받았다. 광해군은 누구보다 명의 허준의 기예를 아꼈고 질병이 만연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독자적인 의서에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바로 그 같은 배경에서 허준의 작업을 적극 지원했던 것이다. 동의보감은 이후 동양최고의 의서로서 추앙을 받았거니와 광해군 때 그것이 간행되었던 것은 실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광해군은 조선의 역대 임금 가운데 유례가 없을 만큼 궁궐 등 왕실과 관련된 건축물을 새로 짓고 화려하게 꾸미는데 열심이었다.

선조 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즉위 년인 1608년에 준공하고, 1619년 경덕궁, 1621년에는 인경궁을 중건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력을 무리하게 동원하는 일이 생기기도 해 민간의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당시 상황으로서 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임진전쟁으로 궁궐이 완전히 소실되어 국사를 월산대군의 서가에서 논의해야 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광해군은 왜 궁궐을 짓는데 그토록 집착하였을까 생각해 보면 그의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과 관련지어 생각 할 수 있다.

여러 번 거론했듯이 전쟁 중에 겪었던 간난신고, 맏아들이 아닌 상태에서 왕세자가 되었던 콤플렉스, 아버지 선조와의 미묘한 갈등, 적자 영창군의 출생과 즉위를 방해했던 유영경 일파에 공작,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승인을 미루었던 명 조정의 딴죽, 즉위 이후에도 그치지 않던 역모 사건 등 이러저러한 경험 등을 통해 그는 소심해졌을 뿐만 아니라 운수에 대한 집착이 병적으로 심해졌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