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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난

나는 왕이 되고 싶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정의 세력 구도는 방원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방원은 이러한 구도를 안정시키기 위해 자신이 정도전에게 위협 당했던 사병혁파의 칼을 쥐고 반란 가능성이 있는 자신의 동복형제들에게 휘둘렀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다음 왕위 계승자의 분위기가 방원으로 굳어져가고 있었다.

권력욕이 심한 방간은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중에 박포가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확인되지 않은 밀고를 듣고는 아직 잃지 않은 사병을 일으켜 조속히 난을 단행하였다. 방간은 왕이 되고 싶었다.

조정의 분위기는 모두 방원에게로 가있었다. 방간은 방원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왕이 되고 싶은 의욕만으로는 모든 것이 너무나 부족했다. ‘방간의 난’, ‘제2차 왕자의 난’은 이렇게 쉽게 진압되었다. 방간은 유배당하였고, 거짓 밀고한 박포는 붙잡혀 사형 당하였다.

2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의 반대세력이 모두 제거되었고 따라서 조정은 방원에게 더욱더 유리한 쪽으로 전개되었다. 모든 권력이 방원에게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방간의 난이 있은 지 한 달 뒤인 1400년 2월에 방원은 세자로 책봉된다. 그리고 11월에 방원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나는 왕이 되기는 싫다.

1398년 8월 26일, 방원은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일파를 살해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도당이 소집되어 회의를 하였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리고 방원은 궁중 호위군인 갑사를 무장 해제시켰다. 도당과 임금도 어쩔 수 없이 난을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신하들은 방원의 눈치를 보며 정안군(방원)을 세자로 삼으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방원은 왕이 되지 않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영안군(방과)을 세자로 삼아야 한다고 청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맏아들을 세자로 세우는 것은 만세(萬世)의 상도(常道)인데, 전하께서 장자를 버리고 어린 아들을 세웠으며, 정도전 등이 세자를 감싸고서 여러 왕자들을 해치고자 하여 화(禍)가 불측한 처지에 있었으나, 다행히 천지와 종묘사직의 도움을 입어 역적들이 참형을 당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맏아들인 영안군(방과)을 세워 세자로 삼게 하소서."

방원의 상소대로 방과가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병약해진 태조는 1398년 9월에 왕위를 내어 놓아 정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사실상 방원 덕분에 왕위에 오른 정종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사실상의 실권은 이제 이방원이 쥐게 되었다.

신하들과 방과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왕이 되기 싫다고 거절했던 이방원, 그는 정말 왕이 되기 싫어했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자기 형을 우선 왕위에 앉힘으로서 명문을 얻으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뒤에서 정종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며 다음 왕위 자리를 차근차근 준비하였다.

섭섭한 이방원

태조의 다섯째아들 이방원은 개국의 큰 공로를 세웠다. 그는 정몽주를 살해하여 개국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왕대비 안씨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위에 즉위시킨 주인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는 이방원의 공로를 크게 인정해주지 않았다.

태조는 개국 후 1개월 만에 서둘러 세자를 책봉하였다. 그러나 세자 책봉 대상은 예상과 빗나갔다. 태조는 장성한 한씨의 소생들이 아닌 자신이 총애하는 강씨의 소생 중에서 그것도 장자가 아닌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던 것이다. 정도전, 남은 등의 신하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그들은 공로가 혁혁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를 경우 자신들의 입지가 줄어들 것을 경계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강씨의 장자였던 방번은 광망하고 경솔하다는 이유로 세자 책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나이 어린 방석의 세자책봉에 방원을 비롯한 한씨의 소생들은 자연히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다 장성하고 개국에 큰 도움이 되었던 자신들이 왕위를 계승하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장남 방우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시다가 사망하였고, 방우의 사망 후 실질적인 장남이 된 방과와 넷째아들 방원은 세자 책봉에 실망하여 난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이방원에 대한 아버지의 섭섭한 대우와 그에 따른 방석의 세자 책봉은 이방원으로 하여금 난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정도전 VS 이방원

정도전은 조선왕조가 들어서는데 최고 역할을 하였다. 그는 먼저『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한 나라의 근본이 되는 법제를 확립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천도를 단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개국 이념이자, 왕조 500년을 이끌어갈 유교사상을 사회 속에 제일 먼저 확립시켰고,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를 내세워 왕의 바른 길을 가르쳤다. 또한 명의 공물 요구가 지나치자 요동 정벌론을 맞서며 정치적 독립을 실행했고, 병권 집중화운동을 펼쳐 군권을 안정시켰다. 그는 정치, 경제, 사상, 병법 등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조선 개국을 이끌었다.

특히 정도전은 재상중심의 왕도정치를 꿈꾸었다. 그는 재상이 언제나 왕권을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세자 책봉에 있어서 나이 어린 방석을 추천하였던 것도 재상중심 정치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가 편찬한『조선경국전』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국왕의 자질에는 어리석음도 있고 현명함도 있으며,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으니 재상은 국왕의 좋은 점은 순종하고 나쁜 점은 바로 잡으며, 옳은 일은 받들고 옳지 않는 일은 막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대중(大中)의 경지에 들게 해야 한다.

왕이 되고 싶은 이방원에게 정도전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자신의 입지 약화와 직결되는 것이었다. 정도전은 강력한 재상중심의 정치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도전과 이방원 사이의 갈등은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이 갈등은 어린 세자 방석을 키우려는 정도전의 계획에서부터 서서히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이방원은 난을 계획하였다.

정도전과 남은이 이방원을 비롯한 한씨 소생의 왕자들의 불만을 모를 리 만무하였다. 왕자들의 난도 우려하여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여 난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하였다. 왕자들을 각 도로 보내자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여 신권중심정치를 펴려는 정도전, 자신이 왕이 되어 왕권중심정치를 펴려는 이방원. 그들의 대립은 갈수록 심화되었고 이윽고 ‘방원의 난’, ‘제1차 왕자의 난’이 터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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