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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문화 - 성취 및 업적

[교육 및 교육활동] 김굉필의 제자 양성과 조광조에게 성리학 계승

성종대 유학자 김굉필(1454-1504)은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서 2년동안 유배살이를 하였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힘썼는데, 특히 조광조와의 만남은 큰 의미가 있었다. 당시 조광조는 17세살이었는데, 어천찰방(魚川察訪: 어천은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왔다가, 인근에서 유배 중이던 김굉필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조광조는 개국공신 조온의 5대손으로 훈구계열 출신이었지만, 김굉필에게 성리학을 전수받음으로써 중종대 사림파의 영수가 될 수 있었다. 김굉필은 유배 중이었음에도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교육 및 교육활동] 김정희의 제주도에서의 교육 활동

추사 김정희는 9년 동안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지방 유생들과 교유하는 한편 찾아와 배움을 청하는 지역 자제들에게 경학, 시문, 서예 등을 가르쳤다. 제주도 출신 제자들로는 이한우, 강사공, 박혜백, 허숙, 이시형, 김구오, 강도순, 강도휘, 오진사 등이 알려져 있다.

[교육 및 교육활동] 정약용의 강진 유배 시절의 교육 활동과 제자들

다산 정약용은 1801년부터 1818년까지 40세에서 57세에 이르는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살이를 하면서 교육 활동을 통하여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다산의 강학 활동과 제자 양성은 그의 유배지에서의 상황과 관련하여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1801년 강진에 도착하여 8년 동안 읍내에 거처할 때의 교육활동이다. 그가 강진에 도착했을 때 대부분의 고을 사람들이 그를 기피하여 매우 외롭고 힘든 유배살이를 했는데, 이 때 다산의 학문적 명성을 듣고 '읍중제생(邑中諸生)'으로 일컬어지는 학동들이 그를 찾아와 학연을 맺게 된다. 손병조, 황상, 황취, 황지초, 이청, 김재정 등이 그들이었다. 다산은 어려운 시절을 함께한 이들 제자들에 대하여 우환을 같이한 사람들이다고 평가하고 있다.

다산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직접 교재를 만들었다. ‘천자문’, ‘소학’과 같은 기존의 교재들이 어렵고 조선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음을 인식하고, 새로운 교재를 편찬하였는데, 1804년 천자문을 대체할 ‘아학편(兒學篇)’을 짓고, 효경, 소학 등에서 아동들이 지켜야할 예의범절을 담은 구절을 뽑은 윤리교과서인 ‘제경(弟經)’을 편찬하였다.

이 시기 읍내 제자들은 대체로 신분이 향리층에 속하며 대부분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 두었으나 황상과 이청 두 사람만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 상당한 성취를 하였다. 황상(黃裳)은 다산이 강진땅에서 얻은 첫번째 제자로서 특히 시학(詩學)에 대성하여 추사 김정희로부터는 "지금 세상에 이런 작품이 없다.[今世無此作]"는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다산이 황상을 만난 것은 1802년이었는데 그는 당시 15세의 소년이었다. 다산은 그에게 공부하는 데 병폐가 되는 세가지 경계에 대하여 글을 지어 주었는데, 황상은 이 글을 '삼근계(三勤戒)'로 마음에 세겨 평생을 잊지 않고 지켰다고 한다. 다산이 귀양살이에서 풀려 돌아간 이후로는 나무심기와 원예에 힘쓰며 칩거하였기 때문에 '황처사'라 불렸다. 다산이 사망한 후에 황상은 다산의 아들 형제와 더불어 정황계(丁黃契)를 맺어 정씨와 황씨 두 집안의 인연은 후대에까지 이어졌다.

이청은 1792년생으로 황상에 비해 4년 연하였다. 그는 황상보다 어린 나이로 문하에 들어왔는데, 다산은 1806년 가을부터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이청의 집에 머물기도 하였다. 이청은 다산이 다산초당으로 옮긴 뒤에도 읍내 제자로서는 유일하게 초당에 합류하여 다산의 방대한 저술 작업을 옆에서 보좌하였다.

둘째는 다산초당 시절의 교육활동이다. 다산은 1808년 봄 귤림처사 윤단의 별장인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고, 주변 조경을 하고 건물을 새로 짓고 장서 천여권을 비치하였다. 다산초당을 자신의 학문 연구 및 교육 활동의 장으로 조성을 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활발한 강학 활동과 제자 양성에 힘쓴 결과 제자층이 대폭 확대되면서 변화하였다. 읍내에 머물 때의 제자들이 주로 향리층 자제들이었다면, 이때의 제자들은 사족층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의 제자들은 이유회(李維會), 이강회(李綱會), 이기록(李基祿), 정학가(丁學稼), 정학포(丁學圃), 정수칠(丁修七), 윤종문(尹鍾文), 윤종영(尹鍾英), 윤종기(尹鍾箕), 윤종벽(尹鍾璧), 윤종참(尹鍾參), 윤종진(尹鍾軫), 윤종심(尹鍾心), 윤종두(尹鍾斗), 윤자동(尹玆東), 윤아동(尹我東), 이택규(李宅逵), 이덕운(李德芸) 등 이른바 '다산 18제자'들로 대표되는데, 다산초당을 제공한 윤씨 집안의 자제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 시기는 다산의 학문이 무르익던 시기로 제자들에 대한 교육과 학문적 토론이 활발한 때였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이들 제자들의 도움으로 방대한 저술활동을 이룩할 수 있었으며, 해당 지역사회에 끼친 학문적 영향은 매우 컸다. 그는 유배생활을 마치고 떠나기 직전인 1818년 8월 그믐날 다산초당의 제자들과 작별을 아쉬워하며 ‘다신계(茶信契)’를 결성하여 우의를 다질 것을 기약하였으며, 해배 이후에도 수시로 제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연을 이어갔다.

추사 김정희 또한 다산의 아들들을 통하여 이들 제자들과 교유관계를 맺었으며, 그 결과 다산의 제자들은 다산과 추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다산은 불가의 인물들과도 깊은 학연을 맺었는데, 초의선사와 아암(兒庵:1772∼1811)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기타] 모주(母酒)

모주는 청주를 뜨고 나서 막걸리를 거르고 난 술찌끼[糟糠]에 다시 물을 부어 만든 찌끼 술이다. 술 중에서 가장 질이 떨어지는 천품(賤品)이요 빈한한 자들이 마시던 술이다.

모주는 인목대비의 모친이 유배지에서 만든 술에서 유래하였다.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이 '조선문화총화' 에서 '대동야승' 을 인용하여 모주의 유래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광해군 대에 계축옥사로 인목대비가 폐위되고 서궁에 유폐되면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은 처형되고 어머니 노씨는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노씨는 제주도에서 유배인에게 배급해주는 양식만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생계를 꾸리기 위하여 마을에서 술지게미를 얻어다 다시 물을 부어 술을 걸러서 팔아 생활했다고 한다.

제주도 사람들은 이 술을 대비의 어머니가 만든 술, 곧 대비모주(大妃母酒)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대비’ 두자를 빼버리고 그냥 ‘모주’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백범 김구의 자서전인 '백범일지' 에도 모주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그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군을 살해하고 사형선고를 받고 옥에 갇혔다가 1898년 3월 탈옥하는데, 탈옥할 때의 상황을 “그날 오후에 간수를 불러 돈 150냥을 주고 내가 오늘은 죄수에게 한턱 낼 것이니 쌀과 고기와 모주 한통을 사오라고 부탁하였다.… 석식에 50여명의 징역수와 30여명의 잡범들까지 고깃국과 모주를 실컷 먹었다.”('백범일지' , '식민지의 시련' )고 하여, 모두들 모주에 취해 어수선한 틈을 타서 탈옥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처럼 모주는 인목대비의 모친이 유배지 제주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만들어 팔았던 질이 낮은 술로 주로 하층민들 빈한한 사람들이 즐겨 마셨다. 오늘날까지도 모주는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제주도와는 거리가 먼 전주 콩나물국밥집에서 파는 모주가 유명하다. 그런데 콩나물국밥에 제격인 오늘날의 모주는 막걸리에 한약재와 흑설탕을 넣고 끓여 따뜻할 때 마시는 술로 술찌끼로 만들던 원래의 모주와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기타] 이문건의 가옥건축

이문건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1545년 경상도 성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는 유배살이하는 동안에도 전답개간, 노비관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재산을 증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유배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처향(妻鄕)인 괴산에 가옥 건축을 시도하였다.

가옥 건축은 1551년 2월 집터를 선정한 후 5월부터 본격적으로 목재를 마련하고 건축하기 시작하여 다음해인 1552년 8월에 완공하여, 1년 6개월 정도 걸렸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목재, 일꾼 뿐만 아니라 연장, 못에 이르기까지 가옥건축에 필요한 모든 물력(物力)을 유배지에서 마련하여 제공하였다.

그는 새집을 단장하는 데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성주에서 화초 및 나무를 보내 뜰에 심게 하고, 훼손된 곳은 곧바로 보수하는 등 집이 완공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관리했다. 이처럼 그는 유배지에서 후손들을 위하여 괴산에 입향(入鄕)의 터전을 다졌으며, 뿐만 아니라 아들의 분묘를 괴산에 조성하고 결국 자신까지 괴산에 입장(入葬)하였다.

이로써 선산과 종가가 결합된 완벽한 세거지의 형태를 조성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괴산에 세거하게 되었다. 결국 이문건의 유배살이 결과 이 집안의 근거지는 서울에서 내려와 괴산으로 옮기게 된 결과를 가져왔고, 그의 후손들은 현재까지 괴산에 세거하고 있다.

[일기 및 서간] 김정희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

추사 김정희는 1840년부터 1848년까지 제주도에서 유배살이를 하였는데, 유배살이 동안 부인에게 보낸 편지들이 확인되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게 한다.
그는 먹는 것, 입는 것에 대해 매우 예민하고 까다로웠던 것 같다. 편지에 의하면 당시에는 서울에서 제주까지 빠르면 두 달, 늦으면 일곱 달이나 걸렸는데, 부인에게 밑반찬 일체를 보내게 하였다.

김치 보내라는 요구외에도, 음식이 변질됐다고 불평하고, 소금을 넉넉히 친 김치를 보내면 ‘너무 짜다’고 잔소리를 하였다. 예를 들면, 1841년 4월 20일 편지에서는 “인절미는 모두 썩어 버렸습니다… 장아찌는 괜찮고 무장아찌는 또 변하였습니다. 젓 무는 조금 쉬었으나 먹을 수 있겠습니다”는 구절이 보인다. 1841년 6월 22일 편지에서는 “민어를 연하고 무롬한 것으로 가려서 사 보내게 하십시오. 내려온 것은 살이 썩어 먹을 길이 없습니다. 겨자는 맛난 것 있을 것이니 넉넉히 얻어 보내십시오. 어란도 거기서 먹을 만한 것을 구하여 보내주십시오… 좋은 곶감이 거기서는 얻기 어렵지 아니할 듯하오니 배편에 4~5접 얻어 보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러한 추사의 까다로운 요구를 잘 들어주던 부인 예안이씨는 그만 추사가 유배 생활 중이던 1842년 11월 13일 사망하고 말았다. 추사가 그 사실을 전해들은 것은 부인이 사망하고 한달이나 지난 뒤였다. 그 사이에도 추사는 부인의 건강을 염려하는 편지를 두 통이나 보냈다고 한다.

12월에 부인의 부음을 들은 추사는 내세에는 부부가 서로 바꿔 태어나서 내가 죽고 그대가 살아 나의 이 슬픔과 고독을 그대가 한번 체험했으면 하고 부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절한 ‘도망처가(悼亡妻歌)’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월하 노인 시켜 명부에 하소연하길
내세에는 우리 부부 운명 맞바꿔 달라 하리라
나는 죽고 당신은 천리 밖에 살아 남아
당신이 내 슬픔 맛보게 하리다

[일기 및 서간] 윤양래의 <북천일기>

윤양래(尹陽來: 1673-1751)가 1722년(경종 2) 갑산으로 유배갈 때 기록한 일기이다. 그는 경종 2년에 중국에 사신가서 왕세제 책봉을 인준받고 돌아오지만, 사행후 소론의 탄핵으로 유배길에 올랐다가 영조 즉위후 노론이 집권하면서 유배에 풀려났다.

이 일기에는 그가 중국에 사신갔다가 돌아오는 1722년 4월 18일부터 유배지인 갑산에 도착하여 압송관이 떠난 7월 10일까지의 일들을 기록하였다. 특히 유배지까지 가는 여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경유지 수령들의 후한 접대와 선물 증여 등이 확인된다. 조선시대 고위직 관료의 실제적인 유배길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일기 및 서간] 이문건의 <묵재일기>

명종대 묵재 이문건(1495∼1567)이 1545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경상도 성주에서 유배살이를 할 때 생활을 기록한 일기이다. 일기는 그가 유배가기 이전부터 쓰고 있던 것으로 유배살이 중에도 계속되었다.

'묵재일기' 는 총 10책으로 여기에 수록된 일기는 1535년부터 유배지에서 사망하기 직전인 1567년까지 총 31년 동안의 기록으로 중간에 결락된 부분을 제외하면 17년 8개월분의 일기가 남아있다.

그 가운데 3책에서 10책까지가 유배생활에 관한 기록으로, 그가 유배를 떠나게 된 배경, 유배 행정, 유배지에서의 일상생활 및 관혼상제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임진왜란 이전의 역사 자료가 매우 귀한 상황에서 '묵재일기' 는 사료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특히 조정에서의 국가 대사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 유배생활 중의 일상생활을 기록하였다는 측면에서 조선전기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추사 김정희는 1840년부터 1848년까지 제주도에서 유배살이를 하였는데, 유배살이 동안 부인에게 보낸 편지들이 확인되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게 한다.
그는 먹는 것, 입는 것에 대해 매우 예민하고 까다로웠던 것 같다. 편지에 의하면 당시에는 서울에서 제주까지 빠르면 두 달, 늦으면 일곱 달이나 걸렸는데, 부인에게 밑반찬 일체를 보내게 하였다.

김치 보내라는 요구외에도, 음식이 변질됐다고 불평하고, 소금을 넉넉히 친 김치를 보내면 ‘너무 짜다’고 잔소리를 하였다. 예를 들면, 1841년 4월 20일 편지에서는 “인절미는 모두 썩어 버렸습니다… 장아찌는 괜찮고 무장아찌는 또 변하였습니다. 젓 무는 조금 쉬었으나 먹을 수 있겠습니다”는 구절이 보인다.

1841년 6월 22일 편지에서는 “민어를 연하고 무롬한 것으로 가려서 사 보내게 하십시오. 내려온 것은 살이 썩어 먹을 길이 없습니다. 겨자는 맛난 것 있을 것이니 넉넉히 얻어 보내십시오. 어란도 거기서 먹을 만한 것을 구하여 보내주십시오… 좋은 곶감이 거기서는 얻기 어렵지 아니할 듯하오니 배편에 4~5접 얻어 보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러한 추사의 까다로운 요구를 잘 들어주던 부인 예안이씨는 그만 추사가 유배 생활 중이던 1842년 11월 13일 사망하고 말았다. 추사가 그 사실을 전해들은 것은 부인이 사망하고 한달이나 지난 뒤였다. 그 사이에도 추사는 부인의 건강을 염려하는 편지를 두 통이나 보냈다고 한다.

12월에 부인의 부음을 들은 추사는 내세에는 부부가 서로 바꿔 태어나서 내가 죽고 그대가 살아 나의 이 슬픔과 고독을 그대가 한번 체험했으면 하고 부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절한 ‘도망처가(悼亡妻歌)’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월하 노인 시켜 명부에 하소연하길
내세에는 우리 부부 운명 맞바꿔 달라 하리라
나는 죽고 당신은 천리 밖에 살아 남아
당신이 내 슬픔 맛보게 하리다

[일기 및 서간] 이필익의 <북찬록>

조선후기 경기 유생 李必益이 함경도 안변에서 유배살이 동안의 일상생활을 기록한 일기이다. 이필익은 숙종 즉위는 2차 예송 때에 송시열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려 유배되었다가 숙종 즉위 후 해배되었다. 일기에는 그가 상소를 올리는 1674년 10월부터 시작하여 蒙放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1679년(숙종 5)까지의 일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유배지 안변에서 부사를 비롯한 지역인사와 교류한 내용, 유배가는 宋時烈을 찾아가 위문한 일, 宋時烈과 편지를 왕래한 내용, 각지의 서원 및 향교들의 도움, 妻子息이 유배지로 찾아와 함께 거주한 일 등 안변에서의 유배생활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유배생활 중에도 朝報를 통해 중앙정계의 동향을 파악하고, 안변부사와 만나 時事를 토론하는 등 조정의 동향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일기 및 서간] 조헌의 <북적일기>

선조대 중봉 조헌(1544∼1592)이 함경도 길주로 유배가는 길에 쓴 일기이다. 그는 1589년(선조 22) 5월 東人의 전횡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길주로 유배되어 6개월 후인 같은 해 11월 3일에 몽방되어 돌아왔다. 일기는 그가 유배지로 출발하는 1589년 5월 8일부터 함경도 단천에 도착하여 잠시 머무는 6월 17일까지의 여정이 기록되어 있다. 일기에는 뒷부분이 남아있지 않아 유배지 길주에서의 생활을 파악할 수 없다.

[저술활동] 김구의 <화전별곡>

중종대 학자 김구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경상도 남해(南海)에 유배되었을 때 그곳의 승경(勝景)인 화전의 풍경을 노래한 작품이다. 그의 문집 <자암문집(自菴文集)>에 실려 전한다. 모두 6장으로 되어 있으며, 1장은 화전의 경치, 2장은 교우(交友), 3장은 연락(宴樂), 4장은 연락 중의 음악, 5장은 술과 안주의 풍부함, 6장은 자신의 생애를 읊고 있다.

[저술활동] 김만중의 <구운몽>

김만중(金萬重:1637~92)이 지은 고전소설이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그가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귀양지에서 지었다고 하며, 그가 중국 사신으로 다녀오던 중 중국 소설을 사오라는 어머니의 부탁을 잊고서 급히 지은 것이라는 얘기도 전해진다. 한문본과 한글본이 모두 전하는데 어느 것이 앞선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한문목판본.국문방각본.국문필사본.국문활자본 등 많은 이본이 있으며, 이본에 따라 1책에서 4책까지 다양하다.

내용은, 육관대사의 제자인 성진이 용왕의 대접을 받고 술에 취해 돌아오던 길에 8선녀를 만났는데, 선방(禪房)에 돌아온 후에도 8선녀의 미모를 떨치지 못하여 지옥으로 추방당한다. 그는 양소유라는 이름으로 인간세상에 다시 태어나 8선녀의 후신인 여덟 여자와 차례로 인연을 맺고, 하북의 삼진과 토번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워 크게 출세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러다가 생일을 맞아 종남산에 올라 가무를 즐기던 양소유는 영웅들의 무덤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그때 나타난 호승의 설법을 듣던 중 꿈에서 깨어나 본래의 성진으로 돌아온다. 그 후 성진과 8선녀는 열심히 도를 닦아 극락세계로 들어갔다는 내용이다.

구운몽은 영웅의 일생을 그린 영웅소설이지만 투쟁성은 약화되고 남녀의 만남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천상계에서 죄를 지은 주인공이 지상으로 떨어진 적강(謫降)소설이면서 그 과정이 꿈으로 처리된 점이 특이하다.

꿈속에서 이룬 일들이 오히려 허망하고 꿈에서 깨어나 진정한 삶을 산다는 점이 일반적인 몽유소설과 다른 점이다. 구성이 치밀하며 8선녀 각각의 개성을 뚜렷이 나타내는 등 성격묘사.심리묘사의 방법을 적절히 갖추었다. 〈구운몽〉은 이후의 소설에 큰 영향을 미쳐 이 작품을 모방하고 변형시킨 작품들이 계속 나오게 되어 고전소설 창작의 하나의 전형적인 모범을 이루었다.

[저술활동] 김만중의 <사씨남정기>

김만중(金萬重:1637~92)이 기사환국으로 남해 절도에 유배살이할 때 쓴 국문 소설로,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한 것을 비판 풍자하여 숙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지었다고 한다.

내용은 명나라 때 유현과 최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연수는 재질이 뛰어나 15세에 급제해 한림학사에 제수된다. 유현은 덕이 뛰어난 사소저 정옥을 며느리로 맞이하는데, 자식을 낳지 못하자 스스로 유한림에게 취첩을 권유하여 교씨(喬氏)를 첩으로 맞이한다. 그런데 교씨는 성품이 사악하여 아들 장주를 낳은 후 사씨를 모해하여 내쫓고 정실부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유한림도 교씨의 간계로 행주로 유배된다. 후에 우연히 교씨의 간계와 전후의 모의 사실을 알게 된 유한림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부인을 만나 사죄하고 교씨는 벌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에는 임진.병자의 양 난 이후 피폐화된 현실, 특히 예송(禮訟)과 그에 따른 수차례의 환국(換局), 그리고 사족 가문 내부의 처첩갈등과 같은 여러 문제가 반영되어 있으며, 작품 구성의 신비적이고 환상적 요소를 많이 띠고 있다. 이 작품은 후대 소설 창작의 모범이 되면서, 많은 모방작들이 산출되었다. 17세기 중.반기에 들어 본격적인 소설시대를 열어준 작품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저술활동] 김정의 <제주풍토록>

조선 중기의 문신 김정(金淨:1486~1521)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보고 겪은 독특한 풍물을 기록한 기행문으로, 그의 문집인 '충암집(沖庵集)' 에 실려 있다. 그는 기묘사화로 인해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1520년 8월 제주도로 이배되었는데, 그 때부터 사형당한 1521년 10월까지의 기록이 담겨있다.

이 책에서는 귀양살이하는 자신의 처지와 심정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지형.기후.동식물.특산물을 다루었으며, 특이한 가옥구조와 언어, 무당이 많고 뱀을 섬기는 신앙이 성행하는 것을 세심하게 살폈고, 주민의 생활상과 관원의 횡포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 이전까지의 기행문학들이 대개 빼어난 경치를 보며 감회를 얻고 기개를 기르자고 외칠 뿐 지방의 생활풍속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과 달리,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기행문학의 성향을 크게 바꾸어놓은 특이한 작품으로 꼽힌다.

[저술활동] 김진형의 <북천가>

조선 철종 때 김진형(金鎭衡 : 1801~65)이 홍문관 교리로 있다가 함경도 명천으로 귀양갔을 때의 일을 읊은 장편가사 작품이다. 귀양살이의 고통보다는 주로 풍류를 즐긴 내용을 담고 있는데,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령을 받은 신세, 북관 수령의 융숭한 대접과 경치구경, 기생과의 사랑, 북관에서 유배지까지 가는 과정, 명천에 도착하자마자 방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 등을 그리고 있다.

귀양을 가게 된 사정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않았으며, 좋은 구경을 하다가 이름난 기생을 만나 마음껏 즐긴 행적을 늘어놓아 흥미거리를 찾는 독자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경상도 안동 일대의 규방가사로 수용되어 애정소설의 구실을 하기도 했다.

[저술활동] 김춘택의 <별사미인곡>

조선 숙종때 문신 김춘택이 1706년(숙종 32) 제주도에서 유배살이할 때 임금을 그리워하며 읊은 작품이다. 그의 문집 '북헌집' 에서 저술 동기에 대하여, "내가 제주에 와 우리말로 별사미인곡을 지으니, 이는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에 추화(追和)한 것이다"라고 하여, 송강의 작품을 모방하여 창작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용은 국왕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충성을 두 여인에 빗대어 토로하였다. 작품의 구성은 두여인의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인이 상대여인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즉, 자신은 광한전 백옥경에서 임을 뫼시다가 아양을 부려 그것이 재앙이 되어 이렇게 이별하게 되었음을 토로하며, 스스로 아무런 재주도 없어 임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임에 대한 자기의 사랑이 변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생에서 임을 가까이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차라리 후생에서 구름이 되어 임에게 덮이고 싶고, 바람이 되어 임을 부쳐주고 싶고, 명산대천이되어 임에게 가까이 하고 싶다고 하였다.

이 작품은 대화체 구성이라는 점에서 속미인곡에 가까우나 내용에 있어서는 사미인곡의 영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군주에 대한 원망은 거의 보이지 않고 간절한 충성을 읊었다는 점에서 연군가사의 면모가 두드러지며, 유배가사로서도 가사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저술활동] 안조원의 <만언사>

조선 정조 때의 문신 안조환(安肇煥)이 34세 때 추자도로 유배되었을 때의 어려운 생활을 읊은 장편가사이다. 전.후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전편 〈만언사〉는 귀양살이를 하면서 겪는 모멸을 자학과 해학을 섞어서 솔직하게 표현하였고, 후편 〈만언사답(萬言詞答)〉은 이웃사람이 그를 위로하는 형식으로 썼는데, 사대부 취향의 관념적인 말을 늘어놓으면서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참으며 자신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이 작품은 고난과 궁핍을 절절하게 묘사한 것이 여성 취향에 맞아떨어져 서울의 궁녀들 사이에 널리 읽혔다 하며 〈청년회심곡(靑年悔心曲)〉이라는 소설에 삽입되기도 하였다. 김진형의 〈북천가(北遷歌)〉와 함께 조선 후기 유배가사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북천가〉가 유배지에서도 대접을 받으며 기생을 데리고 풍류를 즐긴 사설을 늘어놓은 것에 비해, 이 작품은 유배생활의 고통을 실감나게 표현해 유배가사의 여러 모습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저술활동] 유의양의 <남해견문록>

1771년(영조 47) 유의양(柳義養)이 경상도 남해도로 귀양갔던 일을 기록한 유배 기행문이다.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보기 어려운 곳의 생활상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장례와 혼인의 절차가 이상해 이해하지 못할 점이 많다고 하면서도 유교의 교화가 미치지 않는 곳의 기층문화에 진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산문으로 된 유배기행문 가운데 국문으로 된 최초의 작품으로서, 국문 기행문학을 성장 정착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저술활동] 유의양의 <북관노정록>

1773년(영조 49) 유의양(柳義養)이 유배생활을 소재로 하여 지은 기행수필문이다. 그가 함경도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가 3개월 동안 머물고 돌아와서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의 딸이 구술(口述)을 전해 받아 적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총 4권 4책으로 구성된 필사본인데, 그 중 제1권 1책을 제외한 제2∼4권의 3권 3책이 전해지고 있다. 권2에서는 북청에서 방원(防垣)까지의 유배 행정, 권3에서는 방원에서 종성까지의 유배 행정과 종성에서의 유배생활, 권4에서는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개인적인 기록 외에도 각 지방의 풍속.언어와 설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남자들은 개 가죽옷, 여자들은 삼베옷을 입고 부엌을 넓게 만든 집에서 추위를 견디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었고, 잃어버린 북쪽의 국토를 되찾자는 염원도 실려 있다. 또한 황소를 '둥구레', 돼지 부르기는 '오루러'라고 한다는 등 함경도 방언 30여 개가 수록되어 있어, 함경북도 지역의 방언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는 이외에도 1771년의 경상도 남해에서의 유배 경험을 바탕으로 <남해문견록(南海聞見錄)>을 서술하여 국토의 남북 양단에 대해 중요한 자료를 남겼다. 조선 후기의 한글 기행문이 대개 가사로 만들어졌던 것에 반해, 18세기 말에 산문으로 된 한글 기행문의 전통을 정착시킨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술활동] 이건의 <제주풍토기>

조선 인조 때의 예술가인 해원군 이건이 역모혐의로 그의 형 이길, 이억과 함께 인조 6년(1628)에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저술한 한문수필로, 그의 문집인 '규창집' 에 수록되어 있다.

모두 15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주도의 지리적 위치와 특성, 기후, 제주도 도내에 산재하고 있는 뱀에 대한 두려움과 뱀신앙, 목축생활과 목자의 어려움, 농경생활, 제주도 여인의 생활, 귤 진상, 해산물과 잠녀의 풍속, 이에 따른 관의 민폐, 민간신앙, 제주도의 동식물의 현황, 탐라의 개국 신화인 고, 양, 부 삼성(三姓)신화, 김만일의 둔마 등에 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마지막에서는 바다로 둘러 싸인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제주도의 동식물 특성을 논한 글에서는 제주도에는 곰 호랑이 승냥이 이리 등의 야수가 없고, 토끼 여우 까치 등의 동물이 없으며, 식물 중에는 생강이 전혀 없다고 하였다.

이 작품은 이보다 앞서 씌여진 김정의 '제주풍토록' 이 16세기의 제주 풍토와 상황을 보여주는데 비하여 17세기 제주도의 풍속과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며, 제주도 민속을 연구하는 데에도 큰 의의가 있다.

[저술활동] 이언적의 <구인록>

조선 중기 유학자인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1550년(명종 5)에 유배지인 평안도 강계(江界)의 적소(謫所)에서 저술한 책이다. 4권 2책 목판본으로, 내용은 인(仁)에 관한 학설을 종합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구성은 권1.2는 내편, 권3.4는 외편으로 분류되었는데, 권1∼3에는 경전의 본문을 쓰고, 그 아래 주자(朱子).정자(程子)의 대주(大註)를, 그리고 제가(諸家)의 소주(小註)를 병행하여 기재하였으며, 권4에는 <논어> <맹자> 등 제가의 설을 모으고 편자의 견해를 ‘우안(愚按)’이라 하여 덧붙였다. 이 책은 인을 공자의 기본사상이자 유학의 본질로서 파악하고, 각 경전과 제설(諸說)을 종합하여 이를 종류별로 고찰한 최초의 저술(著述)이다.

[저술활동] 이언적의 <봉선잡의(奉先雜儀)>

조선 중기 유학자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이 강계에서 유배살이를 할 때 저술한 책이다. 책의 권말에 ‘경술(1550) 팔월갑자’라는 작성 일자가 기록되어 있어, 저술 연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63세로 사망할 때까지 유배지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이 책은 그 가운데 하이다. 책의 내용은 제사예절에 관한 이론적 학설을 모은 책으로 상, 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물 586-5호로 지정되어 있다.

[저술활동] 이진유의 <속사미인곡>

조선 영조때 문신 이진유가 1727년(영조 3) 추자도에 위리안치되어 있을 때 지은 작품이다. 그는 1724년(영조 1) 경종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에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등용됨으로써 추자도에 유배되었는데, 작품 첫머리에 "삼년을 임을 떠나 해도에 유락하니"라는 기록을 통해 저술연대가 1727년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내용은 그가 유배되는 경로 및 3년간의 유배생활의 사정과 회포를 읊고 있는데, 정철의 사미인곡처럼 남편을 이별하고 그리워하는 아내의 심정에 의탁하여 쓰고 있다. 구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는 그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압송되어 나주에 잠시 머물렀던 때까지, 후반부는 다시 추자도에 위리안치된 후 섬에서의 생활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는 전반부에서는 원근친척이 손잡고 이별하고, 거처나 의식도 과분하여 염려 없으며 임의 은혜도 빛난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후반부에서는 만사여생이 살아남아 있음을 다행이며, 양식도 떨어지고 환경은 덥고 습하여 이겨내기 어려운 고초를 호소하고 있다.

[저술활동] 자산어보

정약전(丁若銓)이 흑산도 유배 중에 쓴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필사본 어류학서(魚類學書)로 1814년(순조 15)에 간행하였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으로 흑산도(黑山島)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지로 조사하고 채집한 기록이다. 책명에서의 자산(玆山)은 흑산(黑山)이라는 뜻이다. 수산동식물 155종에 대한 각 종류의 명칭.분포.형태.습성 및 이용 등에 관한사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현재 동해와 서해에 회유하는 청어와 고등어의 실태를 그당시와 비교하는 데 유일한 자료이다.

[저술활동] 정약용의 <경세유표>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강진 유배살이 동안에 저술한 책으로 국가기구 전반의 개혁원리를 밝힌 책이다. 저술 시기는 그가 강진(康津) 읍내에서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옮긴 1808년(순조 8)부터 1817년(순조 17)까지 10년 사이로, 총 44권 15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내용은〈주례 周禮〉의 이념을 근거로 조선의 현실에 맞추어 중앙의 관제, 전제, 세제, 각종 행정기구, 국가경영 일반에 관한 일체의 제도법규에 대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먼저 개혁의 대강과 원리를 제시한 후 기존제도의 모순, 실제의 사례, 개혁의 필요성 등을 논리적이고 실증적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정약용의 사회경제사상을 대표하는 책으로, 조선 후기 정치사.사회사.경제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저술활동] 정약용의 <흠흠신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강진 유배살이 동안에 저술한 형법연구서이며 살인사건 실무지침서이다. 책의 명칭인 흠흠(欽欽)이란 걱정이 되어 잊지 못하는 모양을 말하는 것으로, 죄수에 대하여 신중히 심의하는 흠휼(欽恤) 사상에 입각하여 재판하라는 뜻이다.

살인사건은 인명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지방 수령들이 어려서부터 시부(詩賦)만 논하여 법률을 모르고, 재판하는 법을 알지 못하여 아전들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발생하는 자의적 재판과 형벌 부과의 폐단을 방지하고 흠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지방관이 법률에 근거하여 직접 형사사건을 심문 처리할 것을 주장하며, 이를 위하여 재판을 맡은 관리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흠흠신서〉를 저술하였다.

총 30권 10책의 필사본으로, 〈경사요의(經史要義)〉 3권, 〈비상전초(批祥雋抄)〉 5권, 〈의율차례(擬律差例)〉 4권, 〈상형추의(祥刑追議)〉 15권, 〈전발무사(剪跋蕪詞)〉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사요의〉는 유교경전에 나타난 형정(刑政)의 기본 이념을 밝히고, 중국과 조선의 대표적인 형사판례를 뽑아서 고금의 변천을 소개하고 목민관(牧民官)이 참고하도록 했다.

〈비상전초〉는 판결문과 재판관련 공문서를 작성하는데 장황하거나 잡스러운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중국의 모범적인 판례를 뽑아 제시한 것이다. 〈의율차례〉는 살인사건의 유형과 그에 따른 적용법규 및 형량이 세분되지 않아 죄의 경중이 구별되지 않음을 고치기 위해 중국의 판례를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

〈상형추의〉는 정조(正祖) 대의 인명사건 판결집인 〈상형고 祥刑考〉가운데서 144건을 골라서 최종판결의 당부(當否)에 대하여 논평하였다. 〈전발무사〉는 그가 곡산부사(谷山府使).형조참의 등에 재직할 때에 관여한 인명관계 판결과 유배 중에 보고 들은 인명에 관한 옥안(獄案).제사(題辭).검안발사(檢案跋辭) 가운데 의심가는 것 17건을 모아서 분류하고 평한 것이다.

이 책은 정약용의 많은 저술 가운데서도 〈목민심서〉.〈경제유표〉와 함께 1표2서로 불리는 대표적인 저술로서, 그의 형정에 대한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기본 자료이며, 18세기 조선의 살인사건 판례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저술활동] 조위의 <만분가>

조위가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에서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전라남도 순천(順天)으로 유배되었을 때 지은 작품이다. 누구에게도 호소할 길 없는 슬픔과 원통함을 선왕인 성종(成宗)에게 하소연하는 심정을 읊었다. 한국 최초의 유배가사(流配歌辭)이다.

[저술활동] 홍섬의 <원분가>

1535년(중종 30) 홍섬이 유배생활의 원통함을 읊은 가사이다. 그는 김안로(金安老)의 전횡(專橫)을 탄핵하다가 그 일당의 무고로 흥양(興陽)에 유배되었다가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후 풀려났는데, 이때 그 원회(寃懷)를 읊은 것이다. '원정가(寃情歌)' 라고도 한다. 현재 가사 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며, 조위(曺偉)의 <만분가(萬憤歌)>가 홍섬의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