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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어 항구 플래시관

김구 탈옥 이야기

1896년 2월 치하포 나루터...
주막에서 칼을 찬 남자를 발견, 일본인인 것을 확인 후 국모를 시해한 미우라가 아닐까 고심 끝에 국가의 치욕을 씻고자 그 일본인을 맨손으로 살해하였다.
그 후 석 달이 지난 5월 11일 체포되어 해주옥에 들어갔지만 체포 영장문제로 풀려나고, 그로부터 두 달 후 인천감리서에 투옥되었다.

탈옥을 계획한 인천감리서에는 소리를 배운 기둥서방 조덕근과 절도 재범으로 10년 형을 받고 몇 달이 되지 않은 열예닐곱 살의 강백석과 3년 형을 받은 양봉구 등이 있었다. 그밖에 절도죄로 3년 형을 받았다가 만기를 거의 채우고 출옥 일이 보름밖에 남지 않은 강화 출신의 황순용이란 자도 있었다. 김창수는 이 네 명을 데리고 함께 탈옥하기로 결심했다.

김창수는 아버지를 면회 오게 하여 대장간에 가서 한자쯤 되는 삼지창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 역시 아들이 무슨 일을 벌이는 줄 짐작하고 그날 저녁으로 새 옷 속에 삼지창을 싸서 들여보내 주었다.

그 날 오후에 김창수는 당번 간수를 불러 돈 150냥을 주면서 자기가 오늘 저녁에 한턱 낼 터이니 쌀과 고기와 모주 한 통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전에도 이따금 그렇게 한 적이 있었으므로 간수는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날 밤 감옥 안은 때 아닌 잔치가 벌어졌다. 약 50여 명의 징역수와 30여 명의 잡범들은 그 동안 주렸던 창자에 고깃국과 모주를 실컷 먹고 마셨다.

흥이 오를 즈음에 김창수는 간수더러 도적 죄수 칸에 가서 소리나 시켜 듣자고 말했다. 간수는 생색이나 내듯이 이를 허락했고 명령이 떨어지자 죄수들은 노래를 하느라고 야단들이었다. 간수는 자기 방에 들어가 아편을 실컷 피우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까무러쳤다. 김창수는 노래를 듣는 척하다가 슬쩍 마루 밑으로 들어갔다. 그는 깔아놓은 벽돌을 창끝으로 들추고 땅을 파서 마침내 감옥 밖으로 나왔다.

김창수는 나왔던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서 천연스럽게 자기 자리에 앉아 조덕근 등 네 명을 눈짓으로 내보낸 후 마지막으로 나왔다. 이처럼 용의주도한 탈옥준비와 아울러「죄인의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위험한 상황에서도 죄수들과의 의리를 지킨 행동에서 청년 김창수의 지도자 자질을 엿볼 수 있었다.

김창수가 감옥 밖으로 나오자 뜻밖의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앞서 나온 네 명이 담을 넘지 못하고 담 밑에 앉아서 벌벌 떨고 있었다.

김창수가 한 사람씩 담 밖으로 넘겨 보내고 마지막으로 담을 넘으려고 할 때였다. 별안간 담 밖에서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경무청과 순검청 쪽에서 비상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울렸다. 담장을 넘다가 그만 소리를 내고 만 것이었다. 옥문 밖에서는 순검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김창수는 아직 담 밑에 서 있었다. 다른 죄수들을 넘겨주기는 쉬웠으나 혼자서 한 길 반이 넘는 담을 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줄사다리를 타고 넘는 것이 제일 수월한 방법이었으나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문밖에서도 옥문 여는 소리가 나고 감방에 있던 죄수들도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는 죄수들이 물통을 메는 데 쓰는 한 길쯤 되는 몽둥이를 이용하여 몸을 솟구쳐 담장을 뛰어넘었다.

담장을 넘은 그는 누구든지 앞길을 막는 자가 있으면 처치해 버릴 생각으로 쇠창을 손에 쥐고 곧바로 정문인 삼문으로 나갔다. 삼문을 지키던 파수 순검도 비상소집에 들어간 때문인지 인적이 없었다. 이렇게 하여 1896년 5월 11일에 체포된 이래로 1898년 3월 20일까지 약 2년 동안 계속된 김창수의 첫 번째 옥중생활은 끝이 났다.

닥터 랜디스 이야기

1890년 9월 29일, 파란 눈의 젊은 청년이 상기된 얼굴로 제물포항구에 도착했다. 이 젊은 청년이 후에 인천사람들에게 약대인이라 칭송받게 되는 랜디스이다. 그는 당시 영국해군 종군신부였던 고르페 신부를 만나 인천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랜디스가 인천에 도착했을 때, 인천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치료도 못 받고 병명도 모른 채 그냥 죽거나 한방으로 겨우 치료할 뿐이었다. 1883년 인천주재 일본영사관 내에 현대 의료시설을 갖춘 병원이 있었으나 일본인들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랜디스는 가슴아파하며, 1891년 4월 20일 송학동 3가 3에 2백50달러를 주고 외국인 조계지역 터를 구입하여 진찰실과 입원실을 갖춘 병원을 개설했다. 이것이 바로 인천 최초의 서구식 병원인 '성(聖) 누가(Luke)' 병원이다. 그리고 한국인, 일본인 차별 없이 치료하기 시작했다.

랜디스는 처음에 '성누가병원'이라는 병원의 이름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한국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랜디스가 내건 이름이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선행을 함으로써 기쁨을 주는 병원) 이다.

금세 죽을 것 같던 사람도 랜디스 박사 병원을 다녀온 뒤 씻은 듯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병원을 개원한지 약 3개월 동안 34명의 입원환자와 76명의 외래환자, 왕진진료 25명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치료비를 받지 않았으며 한국 사람들의 문화를 존중하여 병실에 침대가 아닌 온돌방으로 꾸미는 등 세심하게 배려했다. 또한 응급환자가 생기면 앰뷸런스가 아니라 가마로 환자를 수송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어 한국 사람들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그는 아침 7시부터 몰려드는 환자들을 오후까지 진료를 계속했다. 또한 그는 의료선교에 그치지 않고 1891년 인천최초의 영어학교를 개설하여 40명의 학생들에게 근대식 교육을 시켰다. 낮에는 환자들을 돌보고 밤에는 학생들을 가르친 것이다.

1892년에는 부모를 잃은 6살 정도 된 고아를 데려다 함께 생활하기 시작해 1896년 쯤에는 그 수가 5명으로 늘어났다. 랜디스는 이러한 봉사뿐 아니라 학문에도 열정을 쏟아 많은 번역 책과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그는 진심으로 한국을 사랑했고, 인천주민을 사랑했으며 그렇게 참사랑을 실천했다.

그러나 의료선교를 비롯한 너무 많은 봉사에 매달린 탓에 자기 몸을 돌볼 여유를 갖지 못하고, 1898년 3월 결국 과로로 쓰러졌다. 랜디스는 병석에 누운 지 불과 한 달 여 만인 4월 16일에 32세란 짧은 삶을 마감했다.

랜디스 박사는 죽어서도 한국을 떠나길 원하지 않아서, 현재 연수구 청학동 외국인묘지 양지 바른 곳에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