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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씨의 하루

상세설명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訖法, 紇法, 轄甫; 1863~1949)는 벙커(Dalzella A. Bunker, 房巨; 1853~1932)와 길모어(George W. Gilmore, 吉模; 1858~1933) 등과 더불어 1886년 9월에 개설된 관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미국인 교사로 초빙되어 우리 나라에 건너온 사람으로 1894년까지 이 학교에 재임한 인물이다. 그 이후 그는 주로 출판언론계에 종사하여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 The Trilingual Press),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 <더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의 발행과 운영에도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러일전쟁 이후 본격화한 국권피탈 과정에서 종종 고종의 밀사 역할을 수행했으며,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 때에도 직접 동행하여 밀사들의 활동에 크게 도움을 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요주의인물'이 되어 줄곧 일제가 설치한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로부터 감시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가 서울에 머물 때의 동태는 매일 경시총감부를 통해 보고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은 '역설적이게도' 서양인 헐버트의 일상이 어떠했는지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여기에는 헐버트의 일상뿐만 아니라 여타 주요한 외국인들의 거처와 동향에 대해서도 잘 채록이 되어 있는 편이어서, 한 세기 전 정동 일대에서 활동하던 서양인들의 생활을 살펴보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통감부문서>에 포함된 헐버트 관련 일일동태에 관한 비밀보고문서를 추출하여 보면, 대략 이렇게 정리된다.

(1) 1909년 9월 2일 헐버트의 내한목적과 그 행동에 관한 보고 :

주의인물(헤이그밀사사건) 미국인 헐버트, 이 사람은 8월 31일 밤에 서울로 들어온 것에 대해 도래의 요건 및 입경후의 행동에 주의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도한(渡韓)의 목적은 동인 소유토지를 일본인 모씨(야키미 우에몬, 燔彌右衛門) 매수한 일이 있어, 전번에 계약이 체결되었으나 이 계약이 이행되지 못함으로써 이를 소송하기 위해 온 것이며, 이밖에 한인 간에 토지매매 한, 두 건 집자중인 것이 있어서 이것도 차제에 처분하려는 것이라고 이르고 있다.

2. 입경후의 행동은 그저께밤에 도착하여 남대문밖 외국병원 '닥터 허스트'에게서 1박하고, 어제 2일부터 정동(貞洞)에 거처하는 미국선교사 벙커(배재학교장)에게 숙박하고 있으며, 체재는 약 1개월 간의 예정인 것 같다.

(2) 1909년 9월 7일 헐버트에 관한 건 :

2. 동인의 행선 등에 주의하면 9월 1일 이케다병원(池田病院, 이 병원은 헐버트의 소유건물이라고)에 이르러 약 2시간을 보냈고, 9월 2일 명욱총영사관 및 구세군본영을 방문했으며, 9월 3일 통감부, 이케다병원, 미국총영사관 앞의 미국선교사를 방문하고, 9월 5일 영국총영사관 및 서소문내 미국구유장(米國毬遊場)에 이르러 저녁을 먹은 뒤에서 '애스터 호텔(Astro Hotel)'에 당도했다. 그리고 그가 외출할 제에 동반한 자는 '벙커' 배하에 한국인 황순도(黃順道) 혹은 김명옥(金明玉) 등이다.

(3) 1909년 9월 12일 헐버트의 행동 :

1. 헐버트는 오전 9시 40분 외인구락부 도서관(外人俱樂部 圖書館)에 이르러 책을 보았고, 동 10시 20분 서부 양생방 상동(西部 養生坊 尙洞) 미국인 '타쿠타쿠반' (한국어명칭)을 들르고 곧바로 같은 동네의 스크랜튼에게 나아갔다가 동 11시 50분 숙소로 돌아왔다. 또 오후 3시 종로청년회관(鍾路靑年會館, YMCA)에 이르러 한국인 약 3백명 외국인 약 50명의 회동하는 자리에서 한국말로써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연설내용 생략) 이상의 연설은 호감으로 환영을 받았고 오후 6시 20분 모임을 파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2. 당일의 내방자(來訪者)는 없다.

(4) 1909년 9월 14일 헐버트의 행동에 관한 추보(追報) :

우 행동에 주의중 9월 12일에는 종로청년회에서 종교상에 관한 연설을 하였으나 정치상의 것은 건너뛰었으며, 동일 헐버트와 한국인 5명이 함께 더불어 연설하였고 청중은 약 3백명으로 내외국의 선교사 약 30명이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본월 6일 이래의 행동을 열기하면 다음과 같다.

9월 6일 타츠이치변호사(辰市辯護士), 종로청년회, 이사청(理事廳), 남대문외 제중병원, 서부 정동 외인구락부 등을 역방(歷訪)했다.

9월 7일 미국영사관, 외인구락부, 제중병원에 들른 후 '패리스 호텔'에서 외국인 6, 7명과 더불어 만찬을 함께 했다.

9월 8일 종로청년외, 사직동 한국인목사 고모(高某)씨, 제중병원, 외욱구락부에 들렀다.

9월 9일 남부 장동 영국인댁, 종로청년회, 동대문내 미국인댁을 방문하고 동대문밖 청량리 및 홍릉을 유람하고, 여기에 더하여 외인구락부에 나아가서 이곳에서 미국선교사가 개최한 연회에 출석하였다.

9월 10일 서부 수각교동 전참장 엄준원(嚴俊源), 남대문밖 오기영(吳基永), 오성근(吳聖根), 미국선교사 게일, 외인구락부, 중부 사동 민영찬댁(閔泳瓚宅)을 방문했다.

여기에다 오늘밤은 윤치호(尹致昊), 민영찬(閔泳瓚) 양씨은 헐버트, 벙커 댁을 방문하여 헐버트, 정재관(鄭在寬, 이 사람은 약 10년 도래하여 지금 헐버트와 더불어 귀조했던 자)과 함께 길을 나서 오성근(吳聖根)을 방문했다. 북한인과의 회합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을 사료되나 아직 진상은 알지 못한다.

9월 11일 외인구락부에서 외인운동회에 출석한 후 서부 사직동 미국인선교사를 방문했다.

9월 12일 청구회(靑邱會)에서 연설하는 외에 외인구락부에 나아갔다.

(5) 1909년 9월 16일 헐버트의 행동 :

1. 작(昨) 16일 오전 8시 30분 외인구락부 도서실에 이르러 책을 보았고, 동 9시 30분 귀가하였다가 영시 30분 서부 황화방 정동(西部 皇華坊 貞洞) 청인양복점(淸人洋服店)에 나아갔다가 이내 이곳을 나서서 귀가하였다. 오후 1시 40분 다시 도서실에 이르러 동 2시 30분 종로 '콜브란'은행에 들렀다가 이로부터 청년회관(靑年會館)에 이르러 영국인 미스 핀다와 더불어 브랙만 등과 대담하고 동 3시에 다시 콜브란은행에 이르렀다가 곧장 종로의 타츠이치변호사(辰市辯護士)를 방문하여 미리 의뢰한 야키미 우에몬(燔彌右衛門) 토지매매에 관한 손해금요구사건의 상담을 하고 동 4시에 귀댁했다. 오후 4시 50분 외인구락부(外人俱樂部)에 나아가서 영국총영사(英國總領事) 외 수명(數名)과 더불어 옥돌(玉突, 당구)을 했고 동 6시 귀가했다. 또 동 6시 30분 동부 연화방 연동(東部 蓮花坊 蓮洞) 미국인 목사 '게일'을 방문하여 동 9시 40분 귀댁하였다

2. 당일의 내방자(來訪者)는 없다.

(6) 1909년 9월 18일 헐버트의 행동 :

9일 이후의 행동은 다음과 같다.

9월 13일 남대문밖 제중병원 동지 미국선교사 '언더우드'댁을 방문했다.

9월 14일 외인구락부, 종로전기회사, 동부 연동 미국선교사 '게일'댁, 제중병원 언더우드댁을 방문했다.

9월 15일 미국총영사관, 제중병원, 외인구락부에 이르렀으며, 밤에는 게일댁의 기도회에 참석했다.

9월 16일 종로기독교청년회, 외인구락부, 게일댁 교회, 타츠이치변호사댁 등에 이르렀다. 또 헐버트소유의 욱정(旭町)의 지소가옥은 목하 방매(가액 1만 9천원)에 부심하고 있으나 매수가 없는 탓에 약간 곤각(困却)한 상태라고.

(7) 1909년 9월 28일 헐버트에 관한 추보(追報) :

본월 20일부터 이후의 행동은 다음과 같다.

1. 20일 미국총영사관, 이사청, 남부 장동 거주 영국인 '미스틴'에게 갔으며, 재차 이사청에 찾아간 후 제중병원, 미국총영사관, 종로청년회, 동대문바께 미국선교사 '베론'을 방문했다.

2. 21일 종로청년회 및 제중병원, 미국총영사관, 외국구락부를 찾았다.

3. 22일 미국영사관 및 동부 연동 미국인 게일씨, 청년회, 외인구락부를 찾았다.

4. 23일 외인구락부, 미국영사관, 불국총영사관에 가서 동관에서 경매에 붙인 물품을 구경했다.

5. 24일 남부 장동 미국인 경영의 병원, 불국총영사관, 독일영사관 및 노국총영사관을 방문했다.

6. 25일 서부 사직동 거주 미국선교사, 남부 장동 미국병원, 종로 전기회사 및 청년회와 더불어 타츠이치변호사, 외인구락부에 왕림했다.

7. 26일 서대문밖 유동 거주 미국인 '모리스, 전 전기회사사원) 및 동부 연동 거주 미국인선교사, 서부 정동 이화학당 미국부인 '미스 펜' 장의에 참석했다.

이런 일들을 겪은 뒤에 헐버트는 본국에 남아 있던 자식과 부인의 병환소식에 관한 전보를 받고 1909년 11월 4일에 급거 시베리아철도편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가 다시 한국 땅을 찾은 것은 40여년이 지난 1949년 7월 28일이었다. 독립국가를 이룬 대한민국의 초청으로 90노구의 헐버트는 불과 1주일만에 장기간 항해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청량리위생병원에 입원하였다가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나는 웨스트민스터성당보다도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양화진 외국인묘소에 있는 그의 묘소 앞 묘비에 새겨진 말이다. 정말 그의 소원대로 그는 죽어서 한국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