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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과 흥천사

광교의 석물과 흥천사종


1408년(태종 8년) 5월 24일 태상왕(太上王) 태조가 승하한 이듬해 1409년 2월 23일에 도성밖 사을한[沙乙閑; 이곳은 사을한리(沙乙閒里), 남사아리(南沙阿里)로도 표기]의 산기슭으로 옮겨진 이후 '잊혀지고 버려진' 정릉(貞陵)이 200여년 만에 그 위치가 새삼 확인되고 다시 현종(顯宗) 때에 이르러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신주가 종묘(宗廟)에 모셔져 모든 것이 원상복구되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서는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1권 '태조조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의 '정릉(貞陵)의 폐복(廢復)' 항목에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 다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정릉의 내력과 관련하여 여전히 제자리를 되찾지 못한 유물이 두 가지 있으니, 청계천 광교 아래의 석물(石物)이 그 하나이고 덕수궁 안 광명문에 놓여진 흥천사종(興天寺鍾)이 그 나머지이다.

정릉이 파헤쳐진 뒤에 이곳에 남겨진 잔유물의 처리에 대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

우선 <태종실록> 1409년(태종 9년) 4월 13일자에 수록된 기사이다.

"태평관(太平館) 북루(北樓)를 새로 지었다. 상(上)께서 이귀령(李貴齡)에게 이르기를, '참찬(參贊)은 태평관감조제조(太平館監造提調)이니, 정릉(貞陵)의 정자각(丁字閣)을 헐어서 누(樓) 3간을 짓고, 관(館)의 구청(舊廳)을 가지고 동헌(東軒), 서헌(西軒)을 창건하면 목석(木石)의 공력을 덜고 일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 그리고 정릉의 돌을 운반하여 쓰고, 그 봉분(封墳)은 자취를 없애어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하는 것이 좋겠으며, 석인(石人)은 땅을 파고 묻는 것이 좋겠다' 고 하시었다."

그리고 <태종실록> 1410년(태종 10년) 8월 8일자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큰 비가 내려 물이 넘쳐서, 백성 가운데 빠져 죽은 자가 있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광통교(廣通橋)의 흙다리(土橋)가 비만 오면 곧 무너지니, 청컨대 정릉(貞陵) 구기(舊基)의 돌로 돌다리(石橋)를 만드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것이 곧 정릉에 있던 석물이 청계천 광교(광통교) 아래로 옮겨지게 된 연유이다. 이로부터 정릉 석물은 광통교의 석축을 이룬 상태로 무심히 500여년 이상의 세월을 보내기에 이른다.

그런데 1902년 여름에 우리 나라를 찾아온 일본 동경제국대학 건축과 교수인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1867~1935)에 의해 이 광교 석물의 모습은 사진으로 담겨지게 된다. 이 사진은 1904년에 발간된 <한국건축조사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에도 실리게 되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근대시기에 광교 석물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최초의 계기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 당시 세키노는 이 석물의 정체를 잘못 파악하였는지, 다소 엉뚱한 해석을 덧붙였다. 그는 '경성 종로부근 석교상(京城 鐘路附近 石橋上)의 석불상(石佛像)'이라는 항목을 따로 두어 이렇게 설명하였다.

"(104쪽) 경성 종로의 부근에 작은 돌다리가 있고, 그 다리 아래의 석벽(石壁)에 소불상 및 구름문양, 당초모양을 반육조(半肉彫)로 새긴 장방형(長方形)의 돌 여러 개가 쌓여 있는데, 아마도 예전 어느 사원(寺院)의 탑파(塔婆)와 같은 것으로 사용했던 것을 가져와서 여기에 이용했을 것이며, 그 불상, 운문, 당초모양이 간단하게 부각(浮刻)된 것에 지나지 않음에도 일종의 간박고아(簡樸古雅)한 취미(趣味)를 띠고 있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는 일찍이 불교를 배척했음에서 볼 때 이러한 종류의 조각물은 고려조(高麗朝)의 제작에 귀속되어 지는 것이 더욱 온당한 일임은 말할 것도 없고, 영쇄(零碎)한 것에 지나지 않음에도 당대의 유물로서 극히 희귀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거듭 다소의 참조에 기여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무수하게 발행된 경성관련 향토사자료에는, 그것이 일본인의 저술이건 아니건 간에, 광교 아래 정릉 석물의 존재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가령 <경성부사(京城府史)>와 같은 일련의 책에는 여러 장의 사진 자료와 함께 정릉, 흥천사, 광교 석물의 유래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하지만 광교 아래의 정릉 석물은 해방과 더불어 다시 한번 수난의 역사를 겪게 된다. 1958년 이후 청계천 복개공사가 본격화하면서 콘크리트 덮개에 갖혀 암흑의 공간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2005년에 이르러 청계천 복원공사에 의해 광교 석물은 반세기만에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나, 그 대가로 또 다른 수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의 '돌다리' 광교(광통교)는 콘크리트로 만든 새 다리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고, 정작 자신은 상류 쪽으로 수백미터를 옮겨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럴밖에는 차라리 암흑 속이나마 '안전하게' 보존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 대목이다.

현재 원래의 광교다리가 있던 자리는 한때 사적으로 가지정되었다가 지난 2005년 3월 25일 이후 수표교터, 오간수문터와 더불어 '서울청계천유적'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사적 제461호로 정식으로 지정관리되고 있는 형편이다.

신덕왕후의 정릉과 관련하여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의 하나는 바로 흥천사(興天寺)이다.

흥천사는 1397년 정릉이 만들어진 직후에 태조의 뜻을 받들어 정릉의 동쪽에 만들어졌다. 그러한 탓인지 간혹 이 절은 '정릉사(貞陵寺)'로도 표기되고 있다. 이곳에는 5층 높이의 사리각(舍利閣)을 만들어 통도사에서 옮겨온 불사리를 모시고, 보물과 불경도 그 안에 간직하였다고 전한다. 이 와중에 신덕왕후의 정릉은 조성된 지 12년만인 1409년에 도성밖으로 옮겨졌으나, 흥천사만은 그 자리에 잔존하였다.

그 후 사찰은 피폐와 부흥을 거듭하였고, 세조 8년(1462년)에는 세조의 명을 받들어 홍종(鴻鐘, 洪鐘, 대종)을 주조하여 걸게 되었다. 종이 만들어진 연원으로만 보면 신덕왕후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것이지만, 이 종은 그나마 흥천사의 존재와 관련하여 현존하는 유일한 징표로 남아 있다.

이 절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중종 때의 일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흥천사의 최후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능을 옮긴 뒤에 절은 예전대로 두었다. 연산군 때에 폐지하여 분사복시(分司僕寺)로 되었고, 중종반정 뒤에는 계속 관청으로 삼았다. 절은 이미 무너졌고 사리각만 남았는데, 경오년(중종 10년, 1510년) 3월에 이르러 중학(中學)의 유생들이 이단(異端)을 쓸어버린다고 부르짖으며 밤을 타서 부수고 불살라서 불길이 공중에 치솟고 불구름이 하늘을 덮었는데, 도성 안의 깊은 골짜기의 그윽한 굴 속의 조그만 것까지도 다 들어내어 불태웠다."

이리하여 흥천사는 모두 불타 없어지고, 홀로 남겨져 오갈데 없어진 흥천사의 대종은 1536년(중종 31년)에 김안로(金安老)의 건의에 따라 동대문 근처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당시의 형편에 대해서는 <중종실록> 1541년 6월 1일자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김안로가 늘 말하기를 '성밖에 사는 조사(朝士)의 집이 조시(朝市)에서 멀기 대문에 새벽 종소리와 저녁 북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조정에 출근할 때에도 그 때문에 지각을 하게 된다'고 하고서 병신년(1536년)에 정릉의 종을 남대문(동대문의 착오)에 옮기고, 원각사의 종을 동대문(남대문의 착오)에 옮기고서 각(閣)을 짓고 종을 달았다. 그리고 새벽과 저녁에 그 종을 쳐서 성밖에 사는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했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종의 용도는 이내 폐기되어 종각마저 헐어지고 공연히 빈종만 남아 이를 군사들이 애를 먹고 지키는 꼴이 되고 말았는데, 이에 중종은 이 종을 군사들을 시켜 훈련원(訓鍊院) 안에다 옮겨두도록 지시하였으나 이것이 그대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던 듯하다.

이렇게 방치되어 있던 흥천사의 대종이 다시 세간의 이목을 끈 것은 영조 때의 일이다. <영조실록> 1748년 5월 8일자에는 이때에 벌어진 일들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말하기를, '앞서 대가(大駕)를 타고 지나갈 때 보니 동대문 안과 광화문 밖에 모두 하나의 종이 있었는데, 종면(鍾面)에 단지 그때 감동(監董)한 신하들의 이름만 새겨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제 그 등서(謄書)를 보니 광묘(光廟)의 휘호(徽號), 내전(內殿)의 휘호가 아울러 새겨져 있었고, 또 어휘(御諱)와 어제(御製)도 있었다. 동대문의 종명(鍾銘)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부처를 송축하는 말들이니, 이는 틀림없이 여말(麗末)의 풍습일 것이다. 또 단종(端宗)이 피위(避位)한 뒤 찬양하는 말이 쓰여져 있는데, 이는 모두 휘(諱)해야 되는 것이다. 친제(親製)와 친필(親筆)은 이것이 얼마나 존경해야 될 것인데 수백 년 동안 방치함으로써 비 바람에 씻기게 내버려 두었으니, 매우 송구스런 일이다'라 하시고, 지부(地部)에 명하여 각각 한 칸 집을 지어 비바람을 피하게 하였다."

어떤 자료들에는 이 흥천사종이 동대문 문루에 달려있는 듯이 묘사되고 있으나, 동대문 안쪽에 별도의 종각을 지어 이 종을 놓아두었음은 그 시절의 고지도를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되고 있는 바이다.

다시 세월이 흘러 동대문의 흥천사종은 경복궁 광화문 문루로 옮겨가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청오 차상찬(靑吾 車相瓚, 1887~1946) 선생이 <조광(朝光)> 1938년 8월호에 기고한 '덕수궁으로 온 흥천종의 내력'이라는 글에서 잘 정리하고 있다.

"...... 어명으로 그 종각과 내 종각을 지어주시니 그때부터 명색 내 집칸이 있게 되고 몸도 또한 편안히 있게 되었다. 그 망극하신 왕은 지금까지 황감하여 참으로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근대에 와서 이태왕(즉 고종) 3년에 경복궁이 낙성되고 광화문이 또한 신축되니 대원왕(즉 대원군)께서는 그 문루에다 종을 둘 필요를 크게 느끼시고 물색하는 중에 내가 선두로 간택이 되어 그 문루로 옮겨가게 되었었다.그때만 하여도 지금과 같이 그저 나를 역사적 고물로만 취급하지 않고 호국(護國)의 신물(神物) 또는 법계(法界)의 중보(重寶)로 대우를 하였기 때문에 이번처럼 더러운 소나 무식한 노동자들로만 나를 운반하지 않고 판도의 승려들을 풀어가지고 분향염불(焚香念佛)을 하여 곱게곱게 모셔다가 그 높다란 광화문루에다 앉혀놓고 법회(法會)까지 열어서 축원발원을 하였다."

흥천사종이 광화문루에 매달려 있던 시절의 모습은 세키노 타디시의 <한국건축조사보고> (1904)는 물론이고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 魯士德; 1876~1948)가 남긴 <꼬레아 에 꼬레아니(Corea e Coreani)> (1904)에도 사진자료로 수록되어 있어, 그 단면이나마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대한제국이 쇠퇴하고 일제강점기로 접어들 무렵, 흥천사 종은 매우 황당한 일을 겪기에 이른다.

광화문루에 멀쩡하게 달려있던 흥천사종을 마키노 츠도무(牧野務)라는 일본인 골동상이 떼어다가 거금을 받고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 팔아먹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때가 바로 식민통치가 막 시작되던 1910년 9월이었다. 당시 이왕가박물관은 '어원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1909년 11월에 막 출범한 상태로 여러 궁궐과 관아 등지에 보관 중이던 유물의 수집에 열을 올리던 때이기도 하였다.

이로써 흥천사의 종도 이왕가박물관의 수집유물로 전락하여 창경궁 명정전 뒤편의 회랑에 진열전시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창경궁에 머물기를 28년의 세월을 보낸 끝에 흥천사종은 다시 이곳을 떠나 덕수궁으로 옮겨졌다. 이와 관련하여 <조광> 1938년 8월호에 수록된 차상찬 선생의 글에는 "흥천사 동종을 창경원에서 덕수궁으로 옮겨오는 데만 그해 5월 29일부터 6월 3일까지 무려 6일간이 걸렸다"고 적고 있다.

이른바 '창경원'으로 불렀던 시기에 만들어진 '이왕가박물관'이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덕수궁 쪽으로 옮겨온 것은 1938년의 일이었다. 이 당시 창경궁 쪽에 진열되어 있던 흥천사종을 비롯하여 보루각 자격루(報漏閣 自擊漏), 광주하사창리철불(廣州下司倉里鐵佛), 천흥사동종(天興寺銅鐘)과 같은 일체의 유물은 몽땅 덕수궁으로 옮겨졌는데, 이는 이것들 모두가 바로 이왕가박물관의 수장품이었던 까닭이었다. 현재 덕수궁 광명문(光明門) 안에 보루각 자격루와 흥천사동종이 나란히 놓여 있는 연유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해방 이후 이왕가미술관은 '덕수궁미술관'으로 개칭되었다가 1969년 5월에 마침내 국립박물관(國立博物館)에 흡수되어 사라지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이 당시 이왕가박물관의 수장품들이 국립박물관, 다시 말하여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일괄귀속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1972년이 되자 경복궁 내에 신축된 박물관으로 국립박물관이 통째로 이사를 가버렸으니, 덕수궁과 이왕가박물관의 결코 짧지 않았던 인연은 그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의당 경복궁으로 옮겨졌어야 할 광명문 안의 유물들은 덕수궁에 고스란히 남겨졌던 것이다. 국립박물관에 귀속된 유물이 확실하다면 박물관이 이사할 때 함께 수습해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유독 그것들만 덕수궁에 그대로 남겨진 까닭이 달리 있었던 것인지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이러한 와중에 흥천사종은 2006년 1월 17일 이후 보물 제1460호로 지정되어 국가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이것으로만 본다면 흥천사종은 나름의 호사를 누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나, 어쨌거나 아직은 딱히 오갈 데가 없는 신세인 셈이다. 청계천 광교 다리 아래의 정릉 석물이 바로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상세설명

정동(貞洞)은 조선 태조(太祖)의 계비(繼妃)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능침인 정릉(貞陵)이 있었던 곳이라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태조 이성계의 경처(京妻)였던 강씨는 1392년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현비(顯妃)로 책봉되었으나, 병을 얻어 판내시부사 이득분(李得芬)의 집에 피접하였다가 태조 5년(1896년) 8월 13일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곧이어 그해 9월 28일에는 봉상시(奉常寺)에서 현비의 존호(尊號)를 신덕왕후(神德王后)라 하고, 능호(陵號)를 정릉(貞陵)으로 정하여 함께 헌의하였으니, 이것이 '정릉'에 관한 최초의 흔적이다.

신덕왕후의 죽음을 크게 슬퍼한 태조 이성계는 몸소 능지(陵地)를 물색하는 일에 나서 여러 차례 안암동(安巖洞), 행주(幸州), 취현방(聚賢坊) 등지를 살펴본 끝에, 취현방에다 능소(陵所)를 정하였다. 이곳은 도성의 안쪽에 해당하였으므로 당연히 논란의 여지가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신덕왕후의 능지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신덕왕후를 생각하는 태조의 마음이 그만큼 깊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후 여러 달의 능역(陵役)을 거쳐 이듬해인 1397년 1월 3일에 신덕왕후를 정릉에다 모시게 되었으니, 파란만장한 정릉의 역사는 곧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와 아울러 정릉 바로 곁에는 흥천사(興天寺)의 건립이 이루어졌으니, 이곳 역시 정동의 역사와 관련하여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이 날짜의 <태조실록>에는 "신덕왕후를 취현방 북원(聚賢坊 北原)에 장사를 지냈으니 정릉(貞陵)이라 이름하였다"는 내용만 간략히 정리되어 있는데, 이것이 정릉의 원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단서이다. 정릉의 규모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으나, <태종실록> 1406년 4월 7일자에 "의정부에서 '정릉이 경중(京中)에 있는데도 조역(兆域)이 너무 넓으니, 청하건대 능에서 1백보 밖에는 사람들이 집을 짓도록 허락하소서'라는 청원이 있었고, 이에 이를 허락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걸로 봐서, 그 영역(塋域)이 매우 광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바대로 정릉은 1408년(태종 8년) 5월 24일 태상왕(太上王) 태조의 승하와 더불어 이내 그 이듬해인 1409년 2월 23일에 도성밖 사을한[沙乙閑; 이곳은 사을한리(沙乙閒里), 남사아리(南沙阿里)로도 표기]의 산기슭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곳에 정릉이 들어선 지 불과 12년만의 일이었다. 이때의 <태종실록>에는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이 묵는 관사(館舍, 태평관)에 가까우니 밖으로 옮기도록 한다"고 그 이유를 적고 있다.

더구나 <세종실록> 1418년 8월 20일자의 기록에 의하면, "정릉의 제사와 기신재제는 나라에서 행함이 마땅하지 않으므로, 이에 전세(田稅) 5결(結)을 주어 그의 족친(族親)들로 하여금 맡아 하도록 윤허되었다" 하였는데, 이로써 정릉은 이후 200년가까이 '잊혀지고 버려진' 왕비릉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비록 정릉은 성밖으로 사라졌으나, 그 대신에 원래의 자리에는 '정릉동(貞陵洞)' 혹는 '정동(貞洞)'이라는 지명을 만들어 놓았다.

<단종실록> 1452년 7월 3일자의 기사에 보면,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의 행태를 힐난하는 내용과 관련하여 '정릉동'이라는 표기가 등장한다. 이것으로 보아 '정릉동'이라는 말은 비교적 매우 이른 시기부터 해당지역의 지명으로 정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파생되어 대정동(大貞洞; 혹은 大貞陵洞)과 소정동(小貞洞; 혹은 小貞陵洞)이라는 지명도 고문헌과 고지도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릉'의 정확한 원위치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그 동안 여러 가지 논란이 있으나, 그 어느 것도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 듯하다.

우선 조선 순조(純祖) 때의 사람 유본예(柳本藝)가 저술한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정동' 항목에서 "개국 초기에 태조비 정릉의 옛터가 있었으므로 지금껏 정릉동이라 한다. 지금 서학재 바른쪽 언덕 인가 후원에 돌로 쌓은 단 있는 곳(今 西學峴 右岡 人家 後園 有石壇處)이 옛날 능터라 한다"고 채록하고 있다. 서학재는 지금의 조선일보사 뒤편 일대에 해당한다.

그리고 일제 초기에 이중화(李重華)는 <경성기략(京城記略)> (신문관, 1918)을 통해 "(권2, 32~33쪽) 태조 6년 춘정월(春正月) 서력기원 1397년에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를 서부 황화방 북원(西部 皇華坊 北原, 貞洞) 정릉(貞陵)에 장(葬)하다. 정릉(貞陵)은 금(今)에 영국총영사관(英國總領事館)이 기적(其跡)이라 운(云)하며 흥천사(興天寺)를 정릉동(貞陵洞)에 건(建)하니 명복(冥福)을 추(追)함이라"라고 하여 지금의 영국대사관 자리가 곧 정릉터라고 정리하였다.

이밖에도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여러 가지로 검토된 사실이 있으나, 이에 대해 통일된 의견이 취합되지는 못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경성부사> 제1권(1934)과 같은 자료에서조차도 "(211쪽) 능의 정확한 위치는 명확하지 않으나 생각컨대 정동일대의 고지(高地)에 있었을 것이며, 흥천사(興天寺)가 능의 동우(東隅)에 있었다는 것에 비추어 보면, 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 경성공립제일고등여학교(京城公立第一高等女學校) 부근인 듯하다"고 하여, 상당히 애매하게 서술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정릉의 역사와 관련된 대부분의 사료에는 정릉이 있었던 곳을 '취현방(聚賢坊)이 아닌 '황화방(皇華坊)'이라고 적고 있는 대목이 눈에 띈다. 황화(皇華)라는 것은 '중국 사신을 높여 부르는 말'이므로, 아마도 이 지역에 중국사신이 머무는 태평관(太平館, 서소문 안쪽)이 있던 데서 유래한 지명인 듯하다. 일찍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경도 한성부(京都 漢城府)' 항목에도, "서부(西部)에 소속된 8방(坊)으로 인달방(仁達坊), 적선방(積善坊), 여경방(餘慶坊), 황화방(皇華坊), 양생방(養生坊), 신화방(神化坊), 반석방(盤石坊), 반송방(盤松坊)"만을 적시하고 있으며, 이와 아울러 정릉과 이웃하는 '흥천사'는 '황화방'에 있다고 한결같이 표기하고 있다.

이에 앞서 <태조실록> 1396년 4월 19일자에는 '한성부로 하여금 오부(五部)의 방명표(坊名標)를 세우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기사에는 당시 서부(西部)에 소속된 곳으로 영견방(永堅坊), 인달방(仁達坊), 적선방(積善坊), 여경방(餘慶坊), 인지방(仁智坊), 황화방(皇華坊), 취현방(聚賢坊), 양생방(養生坊), 신화방(神化坊), 반석방(盤石坊), 반송방(盤松坊)" 등 11방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취현방(聚賢坊)'이라는 구역은 개국초에 잠깐 존재했다가 진작에 없어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황화방(皇華坊)'에 소속된 구역으로 서소문내계(西小門內契), 취현동계(聚賢洞契), 소정동계(小貞洞契) 등을 적고 있으므로, 당초의 취현방은 취현동계로 축소되어 겨우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렇게 본다면 일반적으로 정동 일대는 '한성부 서부 황화방'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제일 적합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