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대정동과 소정동

정동일대의 지번구성개요


"경성부의 시가에 관해서는 이조 국초 이래 부내에는 5부(部) 49방(坊)으로 구분되었고, 여기에 계(契), 동(洞), 기타의 명칭이 있었으나, 해가 지남에 따라 각종의 공칭(公稱), 속칭(俗稱)이 생겨나고 여기에 일본거류민단(日本居留民團)이 명명(命名)했던 공칭도 섞여 서로 착종(錯綜)이 혼란하여 거의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함에 이르렀다. 융희 4년(1910년) 임시토지조사국 관제(臨時土地調査局 官制)가 제정되면서, 경성시가와 기타 시가지는 명치 45년(1912년)부터 대정 2년(1913년)의 사이에 정리를 완결했는데, 경성에 있어서는 좌기(左記)의 6항(項)을 방침으로 삼았다.

1. 정동(町洞)의 구역은 원칙으로 하여 구역주의(區域主義)를 가미할 것.

2. 경복궁(景福宮)을 중심으로 삼아 사방(四方)으로 정(町)·동(洞)의 방향을 정할 것.

3. 남북(南北)으로 걸쳐있는 대로(大路)에 접한 구역을 통(通, 토리)으로 하고, 기타는 모두 정(町)·동(洞) 등의 명칭을 부여할 것. 단, 종로(鍾路)는 별도로 정, 동의 명칭을 부가하지 않을 것.

4. 동일구역으로서 일본 조선 양측의 명칭이 있는 경우에 있어서는 그 일본명이 민단(民團)에서 상당한 권한에 의해 부여된 것일 때는 그 일본명에 따를 것. 단, 민단에서 부여했던 것일지라도, 그 보통에 사용되지만 도로를 사이에 두고 그 정명(町名)을 달리하는 것과 같은 경우에는 도로를 낀 양정(兩町)은 이를 동일칭호에 따라 정리할 것으로 하며, 비교적 널리 행해지고 있는 어느 일방의 정명에 따를 것. 더욱이 이 경우에 정명의 하나가 민단에서 부여한 일본명으로서 보통 사용되고 있는 것일 때에는 그 정명에 따를 것.

5. 양구역이 교차하는 경우에 있어서 교차지역은 그 중요한 구역의 명칭에 따를 것.

이리하여 지형에 따라 도로, 하천, 구거 등을 고량하여 그 구역을 결정하고, 지역의 명칭은 이를 정(町), 동(洞), 통(通), 로(路)의 4종(種)으로 하여 구래의 360개를 정리하여 186개로 하였다. 이 가운데 로(路)로 칭한 것은 종로(鍾路)의 하나였을 뿐이다. 통(通)이라고 칭한 것은 광화문통(光化門通, 코카몬토리), 태평통(太平通, 타이헤이토리), 남대문통(南大門通, 난다이몬토리), 의주통(義州通, 기슈토리), 삼판통(三坂通, 미사카토리) 및 한강통(漢江通, 칸코토리)의 6개소가 있었는데, 이들의 명칭 및 구역은 대정 3년(1914년) 4월 1일에 결정되었다. 이 명칭은 단지 지적상(地籍上)의 명칭이었을 뿐만 아니라 민적(民籍), 기타 일반의 호칭이 되어 경성부의 시구는 이로써 시작되어 획연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지번(地番)에 관해서는 종래의 자번호(字番號)라는 것이 있어서 천자문자(千字文字)를 순차대로 집어서 여기에 숫자를 부가했던 것이다. 이 법은 통상 일부군(一府郡)을 단위로 삼아 객사(客舍)를 천자 일호(千字 一號)로 하고 순차적으로 그 기호를 붙여나갔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착란이 되어 토지조사국(土地調査局)의 지적조사 때에 지번은 한 동(洞)을 일괄하여 일필지매(一筆地每)에 순차로 이를 부여하였던 것이며, 경성부에는 대체로 정(町)·동(洞)의 동북(東北)에서 순차로 지번을 부여하고, 큰 정(町) 또는 통(通)에 있어서는 다시 이를 정목(丁目, 쵸메)로 나누어 정목마다 지번을 부여하였는데, 정목(丁目)은 우선 경복궁에 가까운 부분부터 시작하여 차례대로 먼쪽으로 나아감을 법으로 삼았다. 다만, 도로(道路), 구거(溝渠), 하천(河川) 등에 대하여는 지번을 부여하는 것이 드물었다. 그리하여 지번(地番)은 정(町), 동(洞)의 명칭과 마찬가지로 단지 지적상(地籍上)의 번호에만 그치지 않고 민적 호번(民籍 戶番), 기타 일반에 이를 사용하여 지번과 호번과는 상호 어긋남이 없는 것이 되었다."

이상은 1936년에서 발행된 <경성부사> 제2권 (293~294쪽)에 수록된 것으로, 일제 초기에 시행된 서울시내 구역개편과 이에 따른 지번부여의 원칙 등을 서술한 내용이다.

일제 초기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토지조사가 이뤄지고, 이와 더불어 정동의 관할지역개편은 물론 새로운 지번이 부여된 이래로 '행정구역상'의 정동에 존속했던 지번은 '정동 1번지'부터 '정동 35번지'까지에 이르는 구성이었다.

식민통치자들이 처음 지번을 부여할 때에 "특정구역의 동북쪽에서 번호를 붙여나가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정동 지역의 지번구성도 대략 이러한 원칙에 따라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번호가 빠른 1번지, 2번지, 3번지, 4번지, 5번지 등과 같은 번호는 정동의 오른쪽 어깨에 해당하는 태평로 인접지역 및 현 덕수궁 부근에 포진하고 있으며, 이와는 반대로 끝번호에 가까운 정동 29번지, 30번지, 31번지, 32번지, 33번지, 34번지 등은 정동의 왼쪽 아래에 해당하는 배재학당, 정동제일교회, 이화여고 등지에 몰려 있는 것이다.

다만, 정동 1번지의 경우 "덕수궁 선원전 구역과 이에 부속된 토지" 등으로 이뤄진 사사지(社寺地)로 2만여평의 크기에 달하여, 지번이 매우 세분화된 상태이다. 가령, (1927년판)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 보면, 정동 1번지 일대는 이미 정동 1-1번지에서 정동 1-34번까지 긴 가지번호가 달릴 정도로 지번분할이 빈번하게 이루어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은 그 후로도 시대여건의 변화와 인위적인 지형변동이 가져온 결과로 무수하게 지번분할과 합병이 거듭되었으며, 이에 따라 덕수초등학교 지역과 같은 경우는 원래 정동 1-6번지에 속했으나 지금은 정동 1-76번지로 편제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덕수궁 본궁 자체는 처음 3-1번지로 출발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초기에 이웃하는 덕수궁 돈덕전 (5-1번지) 지역과 지번합병이 이뤄지면서 줄곧 '정동 5-1번지'를 사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감리교선교회의 선교사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등이 처음 서울에 정착할 때에 확보했던 정동 34번지 일대도 비교적 지분변동이 심한 편인데, 1915년에 34-2번지(24평)과 34-3번지(689평)가 생성된 것을 시작으로 1927년에는 34-5번지(6,029평)와 34-6번지(1,425평) 등으로 나누어졌으며 해방 이전까지 34-12번지(554평)가 생성될 때까지 지번분할이 지속되었다. 최근에 이 지역에 들어선 러시아대사관은 정동 34-16번지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 앞쪽의 건물인 체이스맨하탄은행은 정동 34-35번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나마 가장 변동이 없는 곳으로는 미국대사관저(정동 10번지), 영국대사관(정동 4번지), 성공회성당(정동 3번지), 이화여구 구내 (정동 29번지, 30번지, 31번지, 32번지) 등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미국대사관저와 같은 경우에는 원래의 지번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에서 나아가 미군정기를 거치면서 1948년 한미행정이양협정을 통해 정동 일대의 토지 다수를 획득한 사실이 있다. 따라서 근현대사의 급변기를 통해 정동지역에서 가장 탄탄하게 그 영역을 확장한 주체는 바로 '미국대사관'이라고 지목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삼아, <서울신문> 1948년 9월 19일자에 보도된 '한미행정이양협정에 의해 미국이 취득한 토지건물의 명세'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가) 미군가족 주택 제20호 급 대지(138평) 정동 1의 39
(나) 러시아인 가옥 제1호(720평) 정동 1의 39
(다) 현재 미국영사관 서편 공지(1,414평) 정동 1의 9
(라) 현재 미국영사관 남편 공지, 서울구락부에 이르기까지 현재 미국영사관 곁으로 통한 도로의 일부, 정동 8의 1, 8의 3, 8의 4, 8의 5, 8의 6, 8의 7, 8의 8, 8의 9, 8의 10 및 8의 17
(마) 미군가족 주택 제10호 급 러시아인 가옥 제1호 정동편에 있는 삼각지형 대지 급 기타 지상에 있는 창고 1동, 가옥 3동 급 기타 건물(1675평) 정동 1의 39
(바) 전군정청 제2지구 전부 급 기타 지상에 있는 약 43동의 가옥 급 기타 건물. 차는 차지역에 있는 식산은행 소유재산 전체를 포함한 정동 9의 1 전부, 사간동 96, 97의 2, 98, 99, 102, 103의 1, 104의 1, 급 104의 2 급 그 대지상의 기타 건물 약 9915평
(사) 반도호텔 급 그 동편에 연접한 주차장 1944평 을지로 18의 2."

그러나 미국대사관저의 사례와는 정반대로 세월이 흐를수록 그 영역이 점차 줄어든 것은 바로 '덕수궁'이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다시피 '2만여평 이상'에 달하는 정동 1번지 구역을 합치면 덕수궁 (정동 5-1번지)은 한때 최소한 4만여평을 훌쩍 넘는 공간에 펼쳐져 있었으나 지금은 고작 2만여평 정도의 면적에 지나지 않는 상태이다. 그나마 최근인 2007년 2월에 '중명전' (정동 1-11번지) 지역이 '사적 제124호 덕수궁'에 편입되면서 '720여평'의 면적을 회복한 것이 전부이다.

이것이 아니더라도 지금 서울시청 앞 광장의 절반 가량이 한때 덕수궁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덕수궁의 수난사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일제강점기 때만이 아니라 해방 이후에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대한문이 뒤로 물러나고, 사고석 담장이 헐어지고 그 자리에 철책이 들어섰다가 다시 뒤로 물러나는 것을 조건으로 옛 담장이 복구된 데서도 거듭 확인되고 있다.

이렇듯 단순하게 보일지 모르는 '정동의 지번변천'에도 그 속에 공간변천과 시대사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는 사실은 분명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러한 역사라는 것은 필시 외세에 의해 강요된 달갑잖은 고난의 길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상세설명

조선 태조(太祖)의 계비(繼妃)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능침인 정릉(貞陵)이 있었던 정확한 자리가 어디인지는 오랜 논란이 되어온 바이지만, 정동(貞洞)이라는 이름이 이 정릉이 있었던 곳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임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정릉은 처음 이곳에 설치된 지 불과 12년만인 1409년에 도성밖으로 옮겨지지만, 정동이라는 이름만은 그 이후로 지금껏 그 자리에 남겨졌던 것이다.

<단종실록> 1452년 7월 3일자의 기사에 보면,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의 행태를 힐난하는 내용과 관련하여 '정릉동'이라는 표기가 등장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정릉동'이라는 말은 비교적 매우 이른 시기부터 해당지역의 지명으로 정착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어 대정동(大貞洞) [혹은 대정릉동(大貞陵洞)]과 소정동(小貞洞) [혹은 소정릉동(小貞陵洞)]이라는 지명도 고문헌과 고지도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정동'이라는 동네는 '대정동'과 '소정동'이 합쳐진 구역이며, 이 둘을 한꺼번에 놓고 보아야만 정동의 역사와 범위를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정동과 소정동은 각각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 작성된 각종 지도마다 그 위치가 반드시 일률적으로 표시되어 있지는 않은 편이나, 대체로 현재의 정동길을 중심으로 그 서쪽 일대를 '대정동'이라 하였고 그 동쪽 일대를 '소정동'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82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수선전도(首善全圖)의 사례에도 그와 비슷한 위치에 표시된 것이 확인된다. 다만 '대정동'과 '소정동'이 모두 서부 황화방(西部 皇華坊)에 속하였으나, 시대에 따라 소정동 지역이 여경방(餘慶坊)으로 표시된 경우도 자주 눈에 띈다.

더구나 이러한 대정동과 소정동의 개념이 근대개화기 이후에 정동 일대가 서양인촌으로 변하던 시절은 물론이고 일제 초반까지도 그대로 유효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아무튼 이것을 오늘날의 지명을 기준으로 설명하면, 대정동은 서울시립미술관이 자리한 서소문동 일부를 포함하여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지역까지 아우러는 지역을 말하며, 이에 반해 소정동은 지금의 덕수궁을 포함하여 특히 대한문 앞(서울시청광장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대정동과 소정동의 개념과 범위가 완전히 무력화한 때는 일제강점기로 막 접어든 1914년이었다. 이 당시 조선총독부는 전국적인 행정구역개편을 단행하였으며, 개별 단위의 동네까지도 자기네들의 편의대로 구역을 재편하거나 명칭을 변경하는 조치를 내렸던 것이다.

<조선총독부 관보> 1914년 4월 27일자에 게재된 '조선총독부 경기도고시 제7호 경성부 정동의 명칭 및 구역' (고시일자는 1914년 4월 1일)은 그러한 결과의 하나였다. 이로써 대정동과 소정동의 흔적은 완전히 지워지고 말았는데, 그나마 이러한 고시내역을 통해 기존의 구역이 어느 곳으로 편입이 되었는지는 대략 가늠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대정동이나 소정동과 관련된 구역을 추출해서 정리하면, 이러하다.

(1) 대정동과 소정동의 혼합지역 :

- [정동(貞洞)] 대정동일부(大貞洞一部), 소정동일부(小貞洞一部)

(2) 대정동 편입지역 :

- [태평통 일정목(太平通一丁目)] 구서부동일부(舊西部洞一部), 서학현일부(西學峴一部), 서학동(西學洞), 군기시(軍器寺), 사동일부(篩洞一部), 대정동일부(大貞洞一部)

- [태평통 이정목(太平通二丁目)] 석정동일부(石井洞一部), 복차교동(卜車橋洞), 전교(錢橋), 복차교(卜車橋), 양동일부(陽洞一部), 대정동일부(大貞洞一部), 관정동일부(井洞一部), 생사동일부(生祠洞一部), 상동일부(尙洞一部), 태평동일부(太平洞一部), 칠간동(七間洞)
- [무교정(武橋町)] 모교동일부(毛橋洞一部), 무교동일부(武橋洞一部), 상다동일부(上茶洞一部), 도자동(刀子洞), 모교(毛橋), 두죽동(豆粥洞), 무교(武橋), 대정동일부(大貞洞一部), 사동일부(篩洞一部), 국동(洞)
(3) 소정동 편입지역 :

- [서소문정(西小門町)] 소정동일부(小貞洞一部), 내천동(內泉洞), 왜송동(倭松洞), 학교동(鶴橋洞), 서소문내동(西小門內洞), 사창동(司倉洞), 관정동일부(井洞一部), 태평동일부(太平洞一部), 생사동일부(生祠洞一部)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아한 사실은 옛지도에 표시된 대정동과 소정동의 위치와는 다르게 서로 뒤바뀌어 나타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소정동은 원래 대한문 앞쪽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나, 관보고시내역에는 '서소문정'에 포함된 반면 대정동은 전혀 엉뚱하게도 태평통 쪽에 걸쳐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무교동까지 '소정동'이라면 몰라도 '대정동 일부'가 편입되었다고 표시한 대목은 옛지도의 기록과는 완전히 배치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무튼 1914년의 정동구역개편에 따라 새로운 '정동(貞洞)'은 대정동과 서정동을 다시 묶어놓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의 잔여지역은 인접하는 태평통(지금의 태평로), 서소문정(지금의 서소문동), 무교정(지금의 무교동) 등지로 흩어져 편입되고 말았다는 사실은 반드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행정구역명칭으로 접하거나 등기부의 지번상으로 접하는 '정동'이라는 존재는 실상 일제시대에 식민통치자들이 인위적으로 금을 그어놓은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새삼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정동 지역의 역사와 범위를 논할 때에 '행정구역상'의 정동만이 아니라 반드시 인접지역인 서소문동과 태평로 일대까지 두루 아울러 살펴보아야 하는 까닭이기도 한 것이다. 거듭 말하자면, 그것이 원래의 정동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