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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

"1월 28일(러시아력이므로 양력으로는 2월 9일을 말함) 저녁에 본국에서 의병들이 서울로 입성하였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서 공사관과 유럽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파병한 두 명의 장교와 100명의 수병들이 대포를 가지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에 따라 공사관에는 우리와 함께 장교 다섯 명과 카자크인 네 명, 수병 135명, 그리고 대포 한 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슈페이에르 공사는 내게 공사관을 방어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나는 공사관을 방어하기 위하여 공사관 주변을 소구역으로 나누고 주야로 감시하는 초소를 설치한 후, 총을 편히 놓을 수 있도록 발사지점의 벽에 흙을 더 쌓아 올렸다. 러시아공사관 주변지역 전체는 특수부대의 보호 아래에 들어갔고, 경보신호전달방법과 부대의 교신방법들을 시험하기도 하였다. 공사관에는 병사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으므로 길 건너 러시아 영사의 집에 나누어 묵기로 하였다.

1월 30일(=양력 2월 11일) 오전 일곱시 30분, 동쪽 담에 있는 쪽문 앞에 가마 두 대가 나타났다. 당시 공사관에 머물고 있던 이범진은 이른 아침에 왕이 궁을 떠나 우리 공관으로 오기로 하였다는 것을 미리 알고 우리에게 그 소식을 전해 주었다. 쪽문을 곧바로 열렸고 공관 안으로 가마들이 들어왔다. 가마 한 대에는 궁녀 한 명과 왕이 타고 있었고, 다른 가마에는 궁녀와 세자가 타고 있었다. 물샐 틈 없는 감시를 받아왔던 왕은 궁녀들과 장교 이기동의 도움을 받아 궁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듯하였다.

탈출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왕비의 빈전에는 궁녀들이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들은 아침 일찍 가마를 타고 궁궐의 안뜰까지 간 다음 다른 궁녀들과 교대하곤 하였다. 이 나라의 관습에 따라 여자들의 가마는 건드리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왕은 새벽까지 일하고 매우 늦게 잠자리에 드는 습관이 있어서 보통 정오에 일어났다. 왕의 이런 습관을 잘 알고 있어서 이른 아침에는 그 누구도 왕을 감시하지 않았다. 그날 아침에 왕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궁을 빠져나왔다. 가마꾼들조차도 공사관에 도착해서야 왕이 가마에 타고 있었음을 알았을 정도로 모든 것이 비밀리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 계획이 성공하였던 것이다." [카르네프 외, 이르계바예프·김정화, <내가 본 조선, 조선인> (가야넷, 2003)]

이것은 1895년말부터 이듬해초까지 우리 나라 남부지역을 두루 탐사했던 러시아 참모본부 소속의 육군대령 카르네프와 그의 보좌관 육군중위 미하일로프 일행이 남긴 아관파천에 관한 기록이다. 이들 일행은 때마침 아관파천이 일어나던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면서 직접 보고들은 얘기를 채록한 것이라서 그 시절의 정치적 상황과 사건의 실상을 이해하는 목격담으로서의 가치도 아주 높다.

그리고 이들의 목격담은 다음과 같이 계속 이어진다.

"공사관은 즉시 K. I. 베베르 전 공사가 묵고 있는 건물에 딸린 방 두 개를 왕에게 제공하였다. 그리고 왕의 위임을 받은 공사관 측은 조선내의 모든 외국대표들에게, 조선의 국왕이 현 정세가 불안하여 궁궐에 머무는 것이 자신의 생명에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세자와 함게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하기로 결정하였다고 알렸다.

이날 정오에 왕은 미국의 대리 공사실에서 보내온 편지를 읽는 것과 동시에 모든 외국대표단들에게 알현을 허락하였다. 모든 외국대표들은 왕의 결정에 찬성하였고, 본국의 대표들인 K. I. 베베르 전 공사와 A. N. 수페이에르 공사에게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일본 대리공사인 고무라는 일본의 영향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겉으로는 이 새로운 사태에 태연히 대처하였다.

...... 다음날 왕은 단발령으로 인한 모든 박해를 중지한다는 교시를 내렸다. 소요는 곧 진정되었다. 지방으로 내려갔던 군대들이 속속 서울로 돌아와 국왕을 배알하였다. 왕은 모든 병사와 장교에게 감사를 표하고 포상으로 100냥씩을 하사하였다. 군부협판이자 참장(參將)인 백성기와 그의 부대원에게도 이 포상금이 내려졌다. 돈을 자루에 넣어 짐꾼들에게 운반하도록 하였다. 왕은 포상금을 다 나눠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공관의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슈페이에르 공사의 응접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신들로 붐볐다. 그들은 자기 집에서 그곳까지 음식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슈페이에르 공사는 일본주재 러시아공사로서의 일시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도쿄로 떠나면서 출구가 따로 나 있는 오른쪽 끝방을 모든 각료들에게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었다." [카르네프 외, 이르계바예프·김정화, <내가 본 조선, 조선인> (가야넷, 2003)]

근대개화기를 거치는 동안 가장 극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아관파천은 직전년도인 1895년에 왕궁으로 난입한 일본인 낭인무리의 칼날에 왕비가 피살되는 참담한 을미사변을 겪은 고종(高宗)이 황태자를 데리고 한밤중을 다투어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버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와 더불어 국왕은 명헌태후 홍씨와 황태자비 민씨로 하여금 가까운 경운궁(慶運宮)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하였다.

단발령과 같은 과격한 개혁조치과 친일적 태도로 민심을 잃은 김홍집 내각은 졸지에 붕괴되고 그 자리는 친로파 내각으로 대체되었으며, 한 나라의 국왕이 자국의 공사관에 자국의 보호에 따라 거처하고 있는 형편이었므로, 러시아의 득세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세상을 순식간에 친로파(親露派)의 세상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은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구태여 '비좁은' 경운궁을 선택하였는데, 여기에는 정동 일대에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각국공사관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위급한 때에 이들의 지원을 요청하기가 용이하다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악몽과도 같은 경복궁으로 다시 돌아가기 싫은 것은 국왕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관파천이 진행되는 동안 고종은 러시아에 특사로 파견되는 민영환을 통해 재정지원과 군사에 관한 교섭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로 러시아정부로부터 군사교관이 파견되는 한편 이들을 통해 궁궐수비군사 800명을 양성하는 성과를 얻었는데, 이 모든 것이 바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이와는 별도로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는 사이 고종의 환어 등에 관해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었으니, 이것이 곧 1896년 5월 14일에 체결된 웨베르-고무라 각서(Waeber-Komura Momorandum, 京城議定書)였다. 이 각서는 다시 1896년 6월 9일에 체결된 로바노프-야마가타의정서(Lobanov-Yamagata Agreement)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경운궁의 수리완공을 기회로 이곳으로 환궁이 결정되니, 이로써 아관파천은 1년하고도 6일만에 막을 내렸다. <승정원일기> 1897년 1월 19일자(음력) 기사에는 고종의 환어장면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상이 왕태자와 경운궁(慶運宮)으로 환어하였다. ...... 때가 되자, 상이 포과익선관(布翼善冠)에 포원령포(布圓領袍)를 입고 보련(步輦)을 타고 러시아 공사관 앞문을 나왔다. 태의원 도제조 정범조(鄭範朝)가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해를 넘기도록 이차하셨다가 오늘 환어하시게 되니,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밤낮으로 우러러 바라던 차에 환호하며 경축드리는 마음을 우러러 아뢸 방법이 없습니다. 추위를 무릅쓰고 수고로이 거둥하셨는데,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지금까지 이차하였던 것은 부득이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여러 대신(大臣)들이 여러 차례 극력 말하였기 때문에 지금 환어하는 것이니, 참으로 매우 다행이다'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오늘 일진(日辰)이 길하고 좋으니, 이를 더욱 경축드립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날씨가 과연 좋다'하였다. 출발해서 인화문(仁化門)에 이르러 수안문(壽安門)을 경유해서 의록문(宜祿門)으로 들어갔다. 상이 대내로 돌아가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왔다."

곧이어 경운궁으로 되돌아온 바로 그해에 궁궐의 확장과 더불어 대한제국의 출범이 있었으므로, 정동 일대가 자연히 근대사의 중심지역로 부각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요컨대 이른바 '구한말' 풍운의 역사는 곧 러시아공사관에서 비롯된 셈이 된다.



[참고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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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일평(文一平), "금석(今昔)을 말하는 외국영사관(外國領事館)의 기지 유래(基地 由來)", <조광> 1938년 4월호, 170~175쪽
- 윤효정, "주간 포케트북 (24) 아관파천 전후", <주간조선> 1971년 3월 28일자, 15~18쪽
- 카르네프 외, 이르계바예프·김정화, <내가 본 조선, 조선인> (가야넷, 2003)
- 윤치호, 송병기 역, <국역 윤치호일기 1> (연세대학교출판부, 2001)
- 민경배, <알렌의 선교와 근대한미외교> (연세대학교출판부, 1991)
- 민영환 지음·조재곤 편역, <해천추범 : 1896년 민영환의 세계일주> (책과함께, 2007)
- 손정숙, <한국근대 주한 미국공사연구> (한국사학, 2005)
- 이민원,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 (국학자료원, 2002)
- 현광호, <대한제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 (도서출판 선인, 2007)
- 한국문화재보호재단·중앙문화재연구원, <덕수궁> (2003)
- <동아일보> 1936.1.7일자, "신춘각국영사관순방기 (6) 제3편 소연방총영사관 (1)"
- <동아일보> 1936.1.8일자, "신춘각국영사관순방기 (7) 제3편 소련영사관 (2)"
- <동아일보> 1936.1.9일자, "신춘각국영사관순방기 (8) 제3편 소련영사관 (3)"
- <동아일보> 1936.1.10일자, "신춘각국영사관순방기 (9) 제3편 소련영사관 (4)"
- <조선일보> 1992.12.24일자, "러시아군인 한국기행, 100년전 서울 1885~1896 (1) 진흙투성이 거리에 집 4만채"
- <조선일보> 1992.12.29일자, "러시아군인 한국기행, 100년전 서울 1885~1896 (4) 고종, 궁녀가마로 아관파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