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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공사관(독일영사관)

분류 : 외교건축
건축년도 : 1884년 10월 개설, 1890년 8월 현 위치 이전, 1902년 5월 회동(會同)으로 재이전
소재지 : 서소문동 38번지 (39번지 포함)

덕수궁돌담길의 구름다리

대한문 옆에서 시작되는 덕수궁돌담길을 따라 정동교회 앞 분수광장 쪽으로 죽 걸어올라가다보면 끄트머리의 휘어진 길 언저리에서 약간 색다른 담장구조가 눈에 띈다.여느 사고석 담장과는 다르게 7단높이의 석축으로만궁장(宮墻)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예전에 덕수궁 안쪽과 길 건너편 언덕 위쪽을 서로 이어주던 육교(구름다리, 무지개다리)가 놓여 있던 흔적이다. 이 다리가 놓여진 때는 1903년 가을 무렵이다.
지금은 서울시립미술관이 서 있지만, 원래 이곳은 육영공원 시절을 거쳐 독일영사관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아관파천을 끝내고 고종황제가 환궁한 이후 경운궁 영역의 확장을 꾀하던 대한제국 정부는 1900년 3월 독일영사관 일대를 직접 사들이기까지 하였으며, 나아가 궁궐 내에 포함될 기존의 도로(덕수궁돌담길)도 폐쇄할 작정이었다. 하지만1902년 5월 무렵에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의 외교가에 큰 파문과 반대여론을 일으켜 이 계획은 끝내 취소되고 말았다.
그 대신에 타협책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앞서'육교(Viaduct, Rainbow Bridge, 虹橋, 雲橋)'이다. 도로는 그대로 두는 대신에 두 지역을 연결하는 구름다리를 건설하여 상호간 통행에 불편함을 해소하자는 취지였다. 이에 관해서는<코리아 리뷰(Korea Review)> 1902년 7월호, 8월호, 10월호, 그리고 1903년 8월호에 걸쳐 잇달아 덕수궁 돌담길을 가로질러종전의 독일영사관 구역으로 건설될 예정이었던 육교(구름다리, 무지개다리)에 대해 보도하고 있어 이를참고할 만하다.
그런데 이 당시에 건설된 육교는 덕수궁돌담길 쪽 말고도 한군데가 더 있었다.
러시아공사관을 거쳐 흔히 뽕나무궁궐(Mulberry Palace)로 부르던 경희궁으로 넘어가는또 하나의 육교가 건설되고 있었다.이는 고종즉위40년을 경축하는 칭경기념식의 준비와 관련된 것으로,황제가 친림(親臨)할 때에 경운궁 쪽에서 대로를 거치지 않고 이곳으로 곧장 왕래할 수 있는 전용통로가 필요하였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서대문로 길위에 세워진 이 육교는 1902년 8월 23일에 착공되어 그 해 10월에 완공을 보았다.
폴란드 출신의 러시아 작가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W. Sieroszewski; 1858~1945)는 1903년 가을에 목격한 경희궁 방향의 육교에 대해 이러한 증언을 남겼다.
"...... 현대 한국의 건축중 유일하게 아름다운 것은 묵직한 아치형 구름다리로, 새로 건축한 궁성과 옛 성을 하나로 잇기 위해 도시의 거리 위를 가로지르고 있고, 그곳에서 열병(閱兵)이나 퍼레이드를 열기도 한다. 이 구름다리는 한국의 기술자들, 내 친구인 신문균과 규마(Kiuma)가 건축했다. 그 다리 덕분에 황제는 지나치게 돈이 드는 떠들썩한 '행차' 없이도 '안정하게' 군대행진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구름다리는 얼마 전, 국가의 재정이 아주 어려울 때 세워졌다. 이런 경우가, 국고회계장부에 '공공의 이익을 위한 작업'에 소요된 돈이라 비밀스레 표기된 액수가 어디에 쓰이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라 하겠다."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 김진영 외, <코레야 1903년 가을 : 러시아학자 세로셰프스키의 대한제국 견문록> (개마고원, 2006)]
이 '콘크리트' 육교가 이듬해에 덕수궁 돌담길 위에 들어서는 새로운 육교의 모델이 되었음을 물론이다. 이때에 세워진 육교는 그 후 언제 사라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경성부사> 제1권(1934)에서는 경희궁으로 넘어가는 육교가 1908년경에 철거되었다고만 적고 있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 일본인 사진사 무라카미 텐진(村上天眞)이 촬영한 사진자료(<일뤼스트라시옹> 1904년 6월 11일자에 수록)에 덕수궁 돌담길에 놓여진육교의 모습 일부가 살짝 보이긴 하지만 이 구름다리의 전경을 제대로 담아놓은 이미지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못내 아쉬운 대목이다.

상세설명

덕수궁돌담길과 정동길의 분기점을 이루는 정동제일교회 앞 분수광장 일대는 그야말로 정동의 한복판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약간 언덕길을 이룬 높은 자리에 서울시립미술관(서울市立美術館)이 서 있다. 지금의서울시립미술관이 들어서기에 앞서 이 건물은 해방 이후 1995년까지 줄곧 대법원(大法院)으로 사용되어 왔으므로, 이곳을 일컬어 '법원 자리'라고 하거나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현재는 전면의 외관만 달랑 남긴채 뒤쪽은 몽땅 고쳐 리모델링을 한 상태인데, 이러한 몰골로도 등록문화재 제237호로 등록되어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 일대는 단순히 지번(地番)으로만 보면 정동이 아니라 '서소문동'에 해당하지만, 이러한 지번체계는191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실시된 '정동명칭(町洞名稱) 및 구역변경(區域變更)'이라는 인위적인 지역조정에 따른 것이므로, 그 자체가 지역구분의 절대적인 잣대는 되지 못한다. 원래부터 이곳은엄연히 대정동(大貞洞)에 속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유래에 비춰보더라도정동권역의 핵심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건물이 들어선 자리의 내력을 죽 거슬러 올라가 보았더니, 지난 100여년 사이의 변천사가 다소 복잡하다.
우리가 익히 아는 법원 건물이라는 개념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고등법원, 복심법원, 지방법원 등 경성 3법원을 아우르는 청사가 들어선 데서 비롯되었다. 해방 이후의대법원이란 것은 그연장선상에서 존재했던 부수적인 결과물이었던 셈이다.이보다앞서1910년대에는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朝鮮總督府 臨時土地調査局)이 들어서서 한동안 이곳 서소문동 38번지의 언덕을 지켰다.
그리고 다시 세월을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면, 1890년에서 1902년까지 이곳에 머물렀던 독일영사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개화기에 우리 나라와 조약을 맺고 공관을 설정한 나라들 가운데 미국, 영국, 러시아와 같은 나라는 공사관을 한번 개설한 이후에 줄곧 한 군데에 머물렀으며,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도한 두번 정도 그 자리를 옮긴 것에 그친 반면, 독일의 사례는서소문동 38번지의 내력만큼이나 유달리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다.
그 시절에 흔히 덕국(德國), 덕의지(德意志), 독일(獨逸), 독을(獨乙),보로사(普魯士)등으로 표기했던 독일과 우리 나라 사이에 외교관계가 수립된 것은 1883년의 일이다. 하지만 이에 앞서 약간의 전력이 있었다. 이미1882년 6월에는 북경주재 독일공사 브란트(Max von Brandt, 巴蘭德; 1835~1920)가 제물포에서 우리 측의 경리사(經理事) 조영하(趙寧夏)와 김홍집(金弘集)을 상대로 상판(商辦)을 벌여 성사가 된 적이 있었으나, 이 조약은 독일정부의 비준거부로 인하여 그 결실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우연찮게도 영국과 독일은 한날 한시, 즉 1883년 11월 26일에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때 독일은 일본 요코하마주재 총영사인 짜페(Karl Edward Zappe, 擦貝; 1843~1888)를 파견하였으며, 우리 측에서는 교섭통상사무아문독판(交涉通商事務衙門督辦) 민영목(閔泳穆)을 전권대신으로 삼았다.이 조약을 체결한 민영목은 이듬해인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당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인물이다.
그 후 해를 넘겨 1884년6월 24일에 부영사 버들러(H. Budler, 卜德樂)가 먼저 서울로 찾아와조약비준을 위한 준비업무를 추진하였고, 곧이어그 해 10월 14일에 총영사 젬부쉬(Captain Otto G. Zembsch, 曾額德; 1841~1911)가 정식으로 부임하여 조약비준서를 교환한 뒤에야 독일의 공관개설이 진행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11월 28일에는 협판교섭통상사무아문(協辦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활동하던 독일인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ellendorf,穆麟德; 1847~1901)의 알선으로 현재의 충무로 1가 중앙우체국 뒷편에 해당하는 낙동(駱洞)에다 최초의 공관을 정하였다.
그러나 이곳은3개월에 한번씩 불입하는 조건으로 매달 15원에 임대를 하여 사용하는 한옥(韓屋)으로 건물 자체가좁고 낡았다는 이유로 다시 인근 서쪽에 있던 빈집을 빌려 사용하려고 여러 차례 조선정부 측에 청원하기에 이르렀는데,그곳은 이미 프랑스의 공관(公館)으로 사용하기 위해 비워놓은 집이었기 때문에 끝내 거절당하였다고 알려진다.
그러다가 독일영사관이 새로 터를 잡은 곳은 예전에 묄렌도르프가 살았던 박동(洞)의 저택이었는데, 이때가 1886년 11월이었다. 박동은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壽松洞) 일대를 말한다. 이곳은 원래 선혜청 당상관(宣惠廳 堂上官) 민겸호(閔謙鎬)의 집이었으나 그가 임오군란의 와중에 피살된 이후로는 흉가로 간주되어 집이 비어 있었다가 묄렌도르프에게 하사된 내력을 지녔다. 묄렌도프르는1885년 12월에 중국으로 소환될 때까지 이 집에 머물렀으며, 그 후로는 다시 빈집이 되었다가 독일영사관으로 사용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 당시 독일영사관은 조선정부와 교섭할 때에 조선정부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내어준다는 조건하에 임대기간을 2년으로 하여 계약을 체결하고 공관을 옮겼다고 전한다.
한편묄렌도르프의 집이 정확히 어디였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자료(가령 <서울특별시사> 제4권, 344쪽)에서는 이곳을'현재의 종로구청 자리'라고 표시하고 있으나,이는 정확한 고증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와는 달리 <경성부사> 제2권 (82쪽)에서는 '경성사범학교부속보통학교(京城師範學校附屬普通學校) 내의 일부'라고 설명하고있으며,육영공원에 관한 이광린의 논문(1963, 106쪽)에서는 '수송동 중동고등학교(中東高等學校)부근'으로 추정하였다.
이 부분은세밀한 재고증이 필요한 대목이겠지만, 여러 정황과 자료에 비추어보건대 일단 나중에 법어학교(法語學校)를 거쳐 각황사(覺皇寺) 자리로 전환되는 '수송동 82번지'(수송공원 일대)일 공산이 제일 크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박동 시절의 독일영사관은 생각보다 아주 오래 지속되질 못하였다. 1889년 5월 무렵 독일의세창양행(世昌洋行, Edward Meyer &Co.)은 "독일영사관이 사용하는 부지는 과거 묄렌도르프가 조선을 떠날 때에 자기네에게 매각하여 관리해 왔던 것이므로 세창양행의 소유"라는 주장을 제기하여 양국간의 의견충돌이 일어났으며, 나아가 1889년 9월 3일에는 독일영사가 이 문제의 땅을 육영공원(育英公院) 자리와 교환하기를 원한다는 조회를 발송하여 그 처리를 기다리는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이에 대한 해답은 즉각 주어지지 않았으나 1891년 1월 25일에 이르러 "원래 묄렌도르프의 것이라고 주장되던 양옥(洋屋)은 그의 것이 맞으나 그 집터는조선정부의 소유"라고 최종확인됨으로써 소유권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상관없이 육영공원 자리로 교환하여 옮겨가는 일은 그대로 성사되어 독일영사관은 마침내 정동 권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하지만 독일영사관이 정동의 육영공원 자리로 진입한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이 점에 관하여 <경성부사> 제2권 (81쪽)에서는 '1889년 봄'이라고 기록하고 있는가 하면, 이중화의 <경성기략> (권4, 124쪽)에서는 '1890년'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주한미국공사를 지낸호레이스 알렌의 <외교사연표>에도 '1890년'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어느 것인들 사실관계는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한독수교100년사> (1983)에 정리된 자료에 "정부에서 독일영사서리에게 독일공관과 육영공원 교환에 관한 파원(派員)을 면상(面商)하도록 통보한 것이1891년 11월 1일"이라는 설명을 수록하고 있으므로, 지금으로서는 이 기록을 취하는 것이 제일 합당할 듯하다.
영국인 여행가 새비지 랜도어(Arnold Henry Savage-Landor)가 남긴 기록도 독일영사관의 이전시기를 가늠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우리는 지금 새의 눈으로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멋진 지점에 서 있으므로 도시를 한번 죽 훑어보는 것이 좋겠다....... 새로운 붉은 벽돌집인 영국영사관은 공사가 진행중이다. 그리고 금방 말한 위치 옆으로는 미국공사관과 러시아공사관의 영내가 있다. 계속하여 궁궐 가까운 곳에 독일국기가 독일영사관 위로 솟아 있는 것이 보인다. 독일영사관은 유럽식으로 개조되어 매우 안락한 여러 채의 한옥들이 있는 담 안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궁궐 가까운 곳의 독일영사관'은 언뜻 정동 시절의 그것인 듯이 느껴지기 십상이나, 새비지 랜도어가 우리 나라를 찾아온 시점은 1890년 크리스마스 때이며 그후 1891년 1월 이후 몇 달을 서울에 머물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이 당시는 아직 정동 일대에 제 모습을 갖춘 궁궐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이므로 위에서 말한 궁궐은 '덕수궁'이 아니라 경복궁 내지 창덕궁을 가리키는 것이며, 또한 적어도 1890년말까지는 박동의 독일영사관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정동 시절의독일 공관은 흔히 '독일공사관'으로 오인되고 있지만, 엄밀하게는 '독일영사관'이었던 것이 맞다. 우리 나라와 조약을 맺은 서구 열강들은 거의 예외 없이 처음부터 '공사관' 수준의 공관을 개설하였거나 이내 영사관을 대체하여 공사관으로 승격조치를 내렸던 것과는 달리 독일 측은 어찌된 영문인지 대부분의 기간을 겨우 영사관 수준의 공관만을 유지했을 뿐이라는 점은 특이하다. 더구나 다른 나라들은 화려한 외관의 독자적인 공사관 건물을 건축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독일의 경우는 이때까지도 여전히 '기와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01년 6월에 우리 나라를 찾은 독일인 기자 지그프리트 겐테(Siegfried Genthe; 1870~1904)는 '초라한' 몰골의 독일영사관과 '격이 다른' 자기 나라 외교관 신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유럽각국의 수도에 있는 미합중국의 대사관과 공사관은 언제나 다른 외교관들의 조롱거리이자, 막강하고 부유한 정부에게는 영원한 비난대상이 되었다. 부유한 열강인 미 정부가 대사들에게 터무니없이 부족한 임금을 주는데다, 대개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한 공관에서 지내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의 작은 관저에서 자신들이 돋보일 수 있는 이웃 유럽관저들과 가까이 있다면, 미국공사들은 위로가 될 것이다. 독일제국의 외교관 역시 소박한 관저에서 고요하고 겸손하게 은닉하고 있다. 마치 백합과 장미가 하늘을 향해 자랑스럽게 머리를 쳐들고 있는데, 옆으로 남몰래 꽃을 피우고 검허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비꽃처럼 말이다. 독일 정부가 굳이 조선의 독일외교관들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놓고 자부심 강한 위대한 조국의 위신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영사까지 종종 아주 곤혹스럽게 하는 이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다른 모든 열강들이 보낸 공사나 변리공사들은 대한제국 황제의 궁전에서 나라를 대표하고 있다. 독일만은 영사 관저를 따로 두고 최전방에서 모든 공식적 업무를 보고 있어서 조선인들은 독일제국이 몬테네그로나 룩셈부르크 정도의 작은 나라라고 믿을 것이다. 작은 국가 벨기에조차 조선에 공사관을 두고 나라를 대표하고 있다. 미국은 지금까지 변리공사와 총영사관이었던 외교사절단을 실질적인 대사로 승격시켰다. 최근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는 외교관들의 지위를 승진시켜주면서 미국의 뒤를 따르고 있다. 독일만 부영사나 통역관조차 없는 초라한 서열의 영사만으로 만족하고 있다. 예전에는 독일영사관의 지속적인 이중역할을 충분히 보좌해줄 만한 부영사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독일제국의 신데렐라 역할을 강화하고 철저히 시행하기 위해 이 직책은 철수되었다."
궁내부 소속의 시의(侍醫)를 지낸 독일인리하르트 분쉬(Richard Wunsch, 富彦士; 1869~1911)가 작성한 1902년 8월 16일자 서한(書翰)에도 이러한 현상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 독일영사관에서는 영사관에서 고용한 많은 한국인, 일본인들에게 접종시키려고 1년에 100엔을 내고 접종약을 청약해두었는데, 영사관 예산이 아니라 영사의 쌈짓돈이었답니다. 제가 바라는 바는 영사관이 공사관으로 승격해서 독일정부에서 고용하는 공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겐테와 분쉬의 바람이 통했는지 독일은 1903년 3월 1일에 이르러 서울에 파견한 독일대표의 지위를 공사급으로 승격한다는 발표를 비공식적으로 내보냈다. 곧이어 그해 5월 6일에는변리공사 잘데른(Conrad von Saldern, 謝爾典; 1847~1909)이 새로 부임하여 기존의 바이페르트(Heinrich Weipert, 瓦以璧; 1855~1905) 영사를 대체함으로써 마침내 독일영사관은 정식으로 독일공사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이 당시는 이미 독일영사관이 정동을 벗어나 회동(會洞) 즉 지금의 남창동(南倉洞) 9번지로 옮긴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정동 시절까지는 '독일영사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뒤늦은 공사관 승격에도 불구하고얼마 후 이른바 '을사조약'이 강요됨에 따라 서울에 주재한 각국의 공사관은 일괄 영사관으로 격하되었으므로, 결국 독일의 경우 서울에 공사관을 둔 기간은 전부 합쳐도 2년여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정동 시절의 독일영사관은 정확하게 어느 위치에 자리하였을까 이 점에 대하여 <경성부사> 제2권 (1936)에서는 "정동(貞洞), 현 서소문정(西小門町) 38, 39번지 법원의 일부"라고 적고 있으며, <조광> 1938년 4월호에 수록된 문일평(文一平)의 기고문에는 "현 고등법원 정문부근(現 高等法院 正門附近)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이 정확한 고증인지는 다소 의문이다.
우선 <독립신문> 1897년 4월 13일자에 수록된 다음의기사는 독일영사관의 위치를 개략적으로 보여준다.
"정동서 서소문으로 넘어가는 길을 넓히고 고칠 터인데 이 길 좌우쪽 땅은 미국 미미교회와 덕국영사관 땅이라. 교회에서와 덕국 사람 월터씨가 자기들 땅 다섯자 넓이 씩을 한성부로 공히 주어 길을 더 넓히고 정하게 만들게 하였다니 이렇게 감사하게 조선 서울 도로를 잘 되도록 외국사람들이 자기들 땅을 주어가면서 도우니 이런 일은 세상 사람들이 칭찬할만 하더라."
이 신문기사는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으로 이어지는 서소문길의 건너편이 독일영사관 구역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리하르트 분쉬가 남긴 일기와 서한에도 독일영사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남아 있다. 그는1904년 4월 15일에 발생한 덕수궁화재사건 때에 "잘데른 공사와 클레어씨, 포르텐 씨와 나는 영사관이 있던 언덕으로 올라가 황제가 어디로 가셨는지 찾으러 다녔으며, 미국교회의 종탑 위에 올라갔더니 불길이 잘 보였다"고 목격담을 적었다. 여기서 말하는 '영사관이 있던 언덕'이란 현재의 서울시립미술관이 서있는 그 일대의 고지대를 가리킨다.
이와 아울러<코리아 리뷰(Korea Review)> 1902년 7월호, 8월호, 10월호, 그리고 1903년 8월호에는 잇달아 덕수궁 돌담길을 가로질러 건설될 예정이었던 육교(구름다리, 무지개다리)에 대해 보도하고 있는데, 그 위치를 일컬어 "궁궐구역에서 옛 독일영사관 구역"으로 넘어간다고 서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34년에 발간된 에밀 마르텔(Emile Martel, 馬太乙; 1874~1949)의 <조선외교비화>에는 "도이치영사관(독일영사관)은 현재 재판소의 자리에 있었으며, 도이치영사관은 조선가옥(朝鮮家屋)이었으나 이것은 나중에 취훼(取毁)되고 말았다"고 적었다.
이것으로 미뤄본다면, 독일영사관은 경성법원의 정문 쪽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동교회의 길 건너편은 물론이고 그 위쪽으로 연결된 구릉지 일대를 전부 포괄하는 너른 대지 위에 서 있었다고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독일영사관이 정동에서 회동으로 옮겨간 시기는 언제이며, 그 까닭은 무엇이었던 것일까
대한제국 궁내부에서 경운궁 건너편의 언덕 위에 자리한 독일영사관 일대의 부지를 매수한 것은 1900년 3월이었다. 이 당시 우리 측은 독일영사관 측에다 오만 오천원의 가액과 더불어 상동(尙洞)에 소재한 관유지를 함께 건네주었는데, 여기서 나오는 상동(尙洞)은 곧 회동(會洞)을 말한다.
아관파천을 끝내고고종황제가 환궁한 이후 경운궁 영역은 계속 확장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독일영사관 일대까지 사들여 궁궐 안으로 포함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와 아울러 궁궐 내에 포함될 기존의 도로(덕수궁돌담길)도 폐쇄할 작정이었던 모양이나, 1902년 5월 무렵에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의 외교가에 큰 파문과 반대여론을 일으켜 이 계획은 끝내 취소되고 말았다. 그 대신에 타협책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육교'이다. 도로는 그대로 두는 대신에 두 지역을 연결하는 구름다리를 건설하여 상호간 통행에 불편함을 해소하자는 취지였다.
1900년 3월에 정동의 영사관 자리를 넘겨준 독일 측은 곧장 공관을 이전하지는 못하였고, 그 사이에 대한제국 정부에서 넘겨받은 상동의 부지에다 지그프리트 겐테가 소원했듯이 제법 '번듯한' 영사관 건물을 짓는 공사를 진행하였다. 신축공사는 1901년 3월에 시작되었으며 이듬해인 1902년에 완공을 보았다. 이 건물의 구조는 지하 1층에다 지상 2층의 벽돌조로 설계자가 누군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연건평은 252평 규모였다.
새 건물의 완공과 더불어독일영사관이 이쪽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1902년 5월 16일의 일이다. 이후 독일영사관이 1903년 5월 이래 공사관으로 승격되었음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하지만 짧은 공사관 시대를 뒤로 하고 이른바 '을사조약'의 여파로다시 영사관으로 격하되자, 독일측은 1906년 초에 지체없이 서대문 밖 평동(平洞, 현재의 교남동) 26번지에 있던 한미전기회사(韓美電氣會社)의 콜브란(Henry Collbran, 骨佛安, 高佛安)과보스트윜(Harry. R. Bostwick, 寶時旭; 1870~1931)공동소유인저택으로 자리를 옮기고 만다.
상동에 그대로 남겨진 옛 독일영사관은 1910년에 궁내부에서 다시 매수하여 탁지부 관인(度支部 官人)의 구락부(俱樂部)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 경성구락부(京城俱樂部)로 바뀌었다가 일제 말기에는 남대문세무서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1970년경에 민간에 불하되어 헐리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평동 시절의 독일영사관은 1906년에 우리 나라를 찾아온 주일본 독일대사관 소속의 무관 헤르만 산더 대위(Herman Gustav Theodor Sander;1868~1945)가 남긴 사진자료에서 그 모습을 역력히 확인할 수 있다.그러나 이 건물은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1914년 8월 26일일본의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로 외교관계가 단절되자 덩달아 폐쇄상태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1920년 6월에는 옛 독일영사관이 조선식산은행에 6만원의 금액으로 매각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독일정부에서는 영사관 잔무를 정리하기 위하여 서기생(書記生)을 서울로 파견한 일도 있었다.<경성부사> 제2권에서는 이 건물에 대해 '청운료(淸雲寮)'라고 적어 놓았는데, 이것은 조선식산은행의 합숙사(合宿舍)로 운영될 때의 이름이다.
14년간에 가까운 공백을 깨고 서울에 다시 독일영사관이 복구된 때는 1928년 6월이었다. 이 당시 독일영사관은 일시 조선호텔에서 사무를 보다가 같은 달 25일부터는 광화문통 210번지에 있는 광화문빌딩에다 자리를 잡았으며,다시 같은 해 11월 1일에는 서소문정 55번지를 거쳐 12월 11일에는 서소문정 41번지로 전전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독일공사관관련 참고자료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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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1920.9.12일자, "매각된 독일영사관, 주인도 없는데 이사에 분주, 옛날의 영화는 일장의 춘몽"
- <동아일보> 1927.12.12일자, "독일영사관, 내년에 설치"
- <중외일보> 1928.6.4일자, "신흥독일의 기, 재차 경성상공에, 십오년만에 영사관부활, 개관식에는 주일대사 내참"
- <동아일보> 1928.6.13일자, "독일영사관의 부흥"
- <동아일보> 1928.6.13일자, "폐쇄전후 14성상, 부활된 독일영사관, 구라파전쟁으로 없어졌던 독일영관, 열네해만에야 다시 부활하게 된 경로, 신설은 46년전"
- <중외일보> 1928.6.26일자, "독일영사관은 광화문삘딩 속에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