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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공사관

분류 : 외교건축
건축년도 : 1888년 6월 개설, 1889년 10월 현위치 이전, 1896년 신축
소재지 : 정동 28번지

프랑스영사관의 통역관 생활

아래는 <조광(朝光)> 1937년 7월호에 수록된 일기자(一記者)의 각국 영사관 탐방기 "외국영사관 통역생활 사십년" (187~191쪽)의 일부이다. 이 가운데 프랑스영사관 통역관 이종엽(李鍾燁)씨와의인터뷰 내용은 이러하다.

불란서국기(佛蘭西國旗) 아래 27년(年)
경성불국영사관(京城佛國領事館) 통역(通譯) 이종엽(李鍾燁)씨
불란서영사관(佛蘭西領事館, 프랑스영사관)에서 반생(半生)을 보내여 검던 머리가 반백(半白)이 된 이종엽(李鍾燁)씨를 합정(蛤町) 불국영사관(佛國領事館)으로 찾게 되었다. 주황(朱黃) 칠한 큰 대문(大門)을 넘어 몇걸음 들어가니 몇 천평(千坪)이나 되는 넓은 정원(庭園)은 녹음천지(綠陰天地)오 꽃천지(天地)이다. 상나무, 느티나무, 떡갈나무, 회나무 등이 푸른 '스카트'로 천공(天空)을 가리우고 그 아래는 눈 같은 허연 철쭉이 백학(白鶴)의 떼와 같이 군데군데 버려있다. 활등 같은 길로 커브를 돌아 얼마를 올라가니 청벽(靑壁)의 양옥(洋屋)이 나를 맞아준다. 기자(記者)는 명함을 드리고 내의(來意)를 말하였더니 몸은 수척해뵈이나 매우 상냥해뵈이는 중년노인(中年老人)이 친절(親切)히 맞어준다. 이 분이 이종엽(李鍾燁)씨이시다. 기자(記者)는 다짜고짜로
"이곳에 계신 지가 몇해나 되었습니까"
하고 화제(話題)를 꺼냈더니
"네 벌써 그럭저럭 27년이나 되었습니다."
하고 씨(氏) 역(亦) 새삼스러이 감개(感慨)가 깊은 듯이 잠간(暫間) 얼굴에 붉은 빛이 지나간다.
"처음 들어오실 때 계시던 영사(領事)는 누구였습니까"
"네, 벨랭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불국영사관(佛國領事館)에 들어오게 된 동기(動機)로 혹(惑) 어떤 인연(因緣)이 있습니까"
씨(씨)는 이때 눈에 상냥한 웃음을 띠고 잠간(暫間) 생각하더니
"뭐 별(別)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하자면 이런 에피쏘드가 있지오. 그때 한국정부(韓國政府)에 내장원(內藏院, 皇室金庫)이라는 곳이 있어서 홍삼전매(紅蔘專賣)를 하였습니다. 그 홍삼(紅蔘)을 상해방면(上海方面)에 팔기 위하여 상해(上海)에 있는 영청회사(英淸會社)와 계약(契約)을 하여 가지고 상해(上海)에 수출(輸出)하였지요. 그러나 어떤 사건(事件)에 위약(違約)한 일이 있어서 상해영청회사(上海英淸會社)에서 한국정부(韓國政府)를 상대(相對)로 1907년(年)에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에 소송(訴訟)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청국총영사(淸國總領事), 영국총영사(英國總領事), 불국총영사(佛國總領事)가 그 재판(裁判)에 참석(參席)하는 국제적 대재판(國際的 大裁判)이 열리게 되었구려. 그래서 그때 내가 불란서변호사(佛蘭西辯護士)의 통역(通譯)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인연(因緣)이 되어 불어(佛語)를 잘한다는 관계(關係)로 불국영사관(佛國領事館)에 통역(通譯)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전(前)에 또 백이의영사관(白耳義領事館, 벨기에영사관)에서 일년(一年) 동안 통역(通譯)을 하였지오. 그리고 불국영사관(佛國領事館)에 들어간 후에도 일년(一年) 동안이나 백이의영사관(白耳義領事館) 일을 겸(兼)하여 보다가 그후엔 전(全)혀 불국영사관(佛國領事館) 일만 보게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모두 옛날 일이라 어쩐지 꿈같고 시원하여 듣기에 자미(滋味)가 있었다.
"그러면 불어(佛語)는 어디에서 배우셨습니까"
"네 관립한성불어학교(官立漢城佛語學校)에서 배웠습니다."
"통역생활중(通譯生活中)에 가장 긴장(緊張)되는 사건(事件)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영사관(領事館)이란 뭐 별(別)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1909년(年)인가 봅니다. 바로 합병전(合倂前)이지오. 지금(只今)의 경의선(京義線)은 그때의 서북철도(西北鐵道)인데 불국, 용동회사(佛國 龍洞會社)와 합변경영(合辨經營)이었고 불란서기사(佛蘭西技師)와 불란서고문(佛蘭西顧問)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란서화차(佛蘭西貨車)를 갖다 사용(使用)하고 그 대금(代金)을 주지 않은 일이 있어서 큰 문제가 생겼지요. 그래서 내가 한국탁지부(韓國度支部)에 돈을 받으러 여러번 다니고 불국영사(佛國領事)의 통역(通譯)도 하였는데 아마 내 영사관생활(領事館生活)로는 가장 큰 사건(事件)이었습니다."
하고 씨(氏)는 그때 일을 다시금 추상(追想)하시는지 눈을 들어 잠간(暫間) 창(窓)넘어 수림(樹林)을 바라본다.
"그러면 그간(間)의 영사(領事)를 몇분이나 뫼셨습니까"
"지난 달에 새로 오신 영사(領事)를 합(合)하여 도합(都合) 열네분을 뫼셨습니다."
"그중에 누가 가장 훌륭한 인물(人物)이었습니까 지금까지 잊어지지 않는 분으로 ......"
"모두 훌륭한 분들이지요. 그중에 가장 오래 동안 계시던 '갈와'라는 영사(領事)가 좀 수완(手腕)이 훌륭하였고 일본(日本)말도 유창(流暢)하여 당국(當局)과 교섭(交涉)도 잘 하였습니다. 그이는 지금(只今) 불국외무성(佛國外務省)의 동양과장(東洋課長)으로 있습니다."
이때 불국인 영사(佛國人 領事)가 들어와서 이씨(李氏)와 뭐라고 불어(佛語)로 한참 지꺼린다. 영사(領事)는 이 '구롬보'의 기자(記者)를 이상(異常)한 침입자(侵入者)로 생각한 모양이오. 이씨(李氏)의 '롱타임'이니 '쭈날리스트'니 하는 어조(語調)를 들어보면 아마 기자(記者)의 방문요건(訪問要件)을 말하는 모양이다. 얼마후 영사(領事)가 나간 후에
"미안(未安)합니다."
하고 이씨(李氏)는 기자(記者)를 대(對)하여 말을 건네운다.
기자(記者)는 다시 입을 열어
"영사관생활(領事館生活)을 하는 동안에 무슨 훈장(勳章)을 받은 일이 있습니까"
"네ㅡ 불란서(佛蘭西)에 가서 직접 받은 일이 있지요."
"그러면 불란서(佛蘭西)에 갔었던 일도 있습니까"
이때 옆에 있던 관원(館員) 안응렬씨(安應烈氏)가 말을 가로채여
"저 선생(先生)이 한국시대(韓國時代)에 한국공관 일등서기관(韓國公館 一等書記官)으로 파리(巴里)에 육개년간(六個年間) 계신 일이 있답니다."
"아 그렇습니까"
기자(記者)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씨(氏)의 말을 들어보면 민영찬씨(閔泳瓚氏)가 불국공사(佛國公使)로 가시기 전(前) 김만수씨(金萬壽氏)가 파리주재 한국공사(巴里駐在 韓國公使)로 계셨는데 그때 육개년(六個年) 동안이나 일등서기관(一等書記官)으로 계셨다고 한다. 씨(氏)는 그때 23세(歲)의 젊은 몸으로 파리무대(巴里舞臺)에 활약(活躍)하였다고 히니 놀랄만한 일이다. 이런 자미(滋味)있는 이야기는 후일(後日)로 미루고 다시 화제(話題)를 돌려
"여기서 매일(每日)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네ㅡ 별(別)것 없어요. 평범(平凡)한 일이지요."
"불국인(佛國人)의 가장 본받을 만한 일은 무엇입디까"
"그들의 친절(親切)하고 명랑(明朗)한 점(點)이 가장 좋습니다."
"이 영사관(領事館)에 다녀가신 불국고관(佛國高官)들이 있습니까"
"네ㅡ 있지요. 안남총독(安南總督)도 다녀가셨고, 대정(大正) 13년경(年頃)에는 쪼폴원수(元帥)도 다녀가셨습니다."
"영사관생활중(領事館生活중) 가장 자미(滋味)있는 것은요"
"뭐 있나요. 저 녹음(綠陰) 밑으로 꽃이나 보며 산책(散策)하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가장 괴로운 것은요"
"없어요."
"그럼 27년 동안이나 영사관생활(領事館生活)을 하셨으니 뭐 착실(着實)히 돈을 모으셨겠구려."
기자(記者)는 한번 웃으며 넘겨 짚었더니 씨역(氏亦) 쾌활(快活)히 웃으며
"호호 아무 것도 모은것 없습니다."
씨(氏)와 기자(記者)는 서로 바라보고 그만 웃음으로 회견(會見)을 끝내고 말았다.

상세설명

정동 구역의 시작이자 끝자락에 해당하는 서대문 언저리의 정동 28번지에는 창덕여중(昌德女中)이 위치하고 있는데,여기가 곧근대개화기의 각국공사관을 통틀어 가장 빼어난 외관을 자랑했던 옛 프랑스공사관이 있던 자리이다. 상림원의 고지를 차지한 러시아공사관과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이곳은서소문쪽에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뒤편을 끼고 서대문 방향으로 길게 이어지는 서울성벽이 자연스럽게 언덕을 이루고 있는데다 주변 일대가 제법 너른 지형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공사관의 터전으로서는 아주 마침맞은 장소였다.
다만 약간 후미지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한적하기는 했지만, 한적하다는 것은 곧 그 자체로 나름의 멋을 풍기는 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1892년 4월 8일에 전임 꼴랭 드 플랑시(V. Collin de Plancy, 葛林德, 佛郞是)에 이어 두번째의 프랑스 영사 겸 판무관의 신분으로 서울에 막 부임하던이폴리트 프랑뎅(Hippolyte Frandin, 法蘭亭; 1852~1924)은 그가 접한 프랑스공사관 일대의 첫인상을 이렇게 남겼다. 물론 프랑뎅이 보았던 이 풍경은 아직 '한옥 구조'의 프랑스공사관이 존재하던 시절의 것이다.
"더러운 골목길을 지나 십오분쯤 걸어가니 드디어 널찍하고 바람이 잘 통하며 깔끔하게 유지된 길이 나타났는데 그 길은 프랑스공사관까지 뻗어 있었다. 이 거리는 프랑스공사가 만든 작품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깨끗이 정돈했고, 건물을 세우는 데 온갖 열성을 다 했기 때문에 그 결과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역이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높직한 곳에 자리잡은 공사관에서는 북쪽의 메마른 벌판이 내려다 보였다. 그곳은 황량하고 모래로 덮여 있었으며 군데군데 짙은 덤불과 타는 듯한 붉은 색채로 얼룩져 있었다. ...... 북쪽의 풍경이 나에게 한심스럽게 느껴진 반면, 남쪽으로 펼쳐진 풍경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족했다."
그런데 그 시절에 흔히불란서(佛蘭西), 법란서(法蘭西), 법국(法國), 불국(佛國) 등으로 표기했던 프랑스와 우리 나라사이에 외교관계가 정식으로 성립한 것은 1886년의 일이다. 천주교 박해와 병인양요 등 유달리 갈등과 충돌이 심했던 양국간에 조약체결시도가 본격화한 것은 1880년대로 막 접어들던 무렵인데, 그 사이에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이 속속 우리 나라와 외교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중국과 베트남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적극적인 외교교섭이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베트남 문제가 정리된 이후에는 프랑스 정부가 외교접촉을독자적으로 재개하기로 하고, 꼬고르당(F. G. Cogordan, 戈可當)을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서울에 파견하였으니 이때가 1886년 5월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꼬고르당은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과 교섭을 개시하였으나 자국 선교사의 보호를 포함하는 종교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앞세우는 바람에 협상의 진척을 보지 못하다가, 조선측 전권대신이 한성부판윤 김만식(金晩植)으로 교체되면서 조영수호통상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을 모델로 하되 이를 일부 수정한 타협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논의가 진척됨으로써 최종협상타결을 보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86년 6월 4일에 양측은 마침내 조약에 체결하였으니 이를 조법수호통상조약(朝法修好通商條約)이라 불렀다. 이 당시 협판내무부사겸외아문당교당상(協辦內務府事兼外衙門掌交堂上)인 미국인 데니(Owen N. Denny, 德尼; 1838~1900)도 우리측 대표로 참가하여 조약에 최종 서명날인하였다.
그후 1년이 지난 1887년 5월 30일에는 프랑스 전권특사로 플랑시가 파견되어 양국간 조약에 대한 비준서의 교환이 있었다. 하지만 이 당시 플랑시는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관련업무를 러시아공사 웨베르에게 위임하고 귀국길에 올랐으므로, 즉시 공사관이 개설되지는 못하였다. 정식으로 프랑스의 공사관이 개설된 것은 그가 다시 해를 넘겨 서울로 귀임한1888년 6월 6일의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각국과의 조약체결 이후 조선으로 파견되는 외교관은 공사(公使, minister)의 지위이거나 아니면 영사(領事, consul) 내지 총영사 (總領事, consul general)가 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프랑스의 경우는 다소 특이한 신분구조를 지녔다. 그 시절에 서울에 주재한 프랑스외교관의 신분은 '카미세어(commissaire)'라고 불렀으며, 이는 '판무관(辦務官)' 정도로 번역된다. 흔히 프랑스 초대공사로 소개되고 있는 플랑시 역시 이 '칸설' 겸 '카미세어'의 신분이었는데, 이를 그대로 옮기면 '영사 겸 판무관'이 되므로 엄밀하게 말하여 그가'공사'의 지위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훨씬 나중의 일이지만, 그가 정식으로 공사의 신분이 되는 것은 1901년 4월 24일이며, 이때에 이르러서야 프랑스공사관은 비로소 명실상부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가 1888년 6월 서울에부임하여 개설한 프랑스공사관은 처음부터 정동지역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점에 관하여 <경성부사> 제2권(1936)에서는 "수표교(水標橋) 부근의 북방도로의 오른편 현 관수동(觀水洞) 126번지"에 있었다고 적고 있으며, 주한미국공사를 지낸호레이스 알렌(Horace Allen)이 정리한 <외교사연표> (1904)에서는 "첫해 프랑스공사관은 현재의 터를 구입하는 일이 지연되어 허치슨씨(Mr. Hutchson, Supiotady)의 주택에 설치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프랑스공사관이 정동지역으로 터를 옮겨온 것은 그 이듬해인 1889년 10월 1일이다.이곳의 지형과 주변상황에 대해서는 앞서프랑뎅의 목격담을 통해 소개한 바와 같으므로 새삼 부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후 1896년에 이르러서는 5년 가까운 공백기간 끝에 다시 서울로 복귀한 플랑시의 주도하에 완전히 새로운 프랑스공사관 건물이 세워진다. 다만, 건축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있다.
알렌의 <외교사연표>에는 1895년 6월에 프랑스공사관 건물의 정초석이 놓였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정작 창덕여중 구내에 남아 있는 정초석 잔석에는 "RF 1896"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이 다르다.정초석에 새겨진 '1896'이란 연도가 착공시점을 표시한 것인지, 준공시기를 표시한 것인지는 잘 분간할 수 없다. 여기에 표시된 RF는 'Republique Francaise'의 약어로 '프랑스공화국'이라는 뜻이다.
이 건물의 설계자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으나, 그 시절에 프랑스 출신 건축가 살라벨(Joseph Auguste Salebelle)가 조선정부에 초빙되어 궁중건축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작품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없지 않다.
이 당시 건립된 프랑스공사관의 규모와 세부구조에 대해서는 1935년에 경성부 영선계 기사인 미우라 노보루(三浦昇)가 정밀측정한 도면자료와 내부장식 스케치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많은 참고가 된다. <조선과 건축> 1935년 4월호에 수록된 이 자료의 개요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장소 서대문소학교 교정내, 건평 423.72평방미터, 연건평 1370.95평방미터, 지하층 413.35평방미터, 1층 423.35평방미터, 2층 423.35평방미터, 3층 36.72평방미터, 4층 36.72평방미터, 5층 36.72평방미터, 높이 지반에서 탑옥의 꼭대기까지 26.32미터."
이와 아울러 구조는 벽돌조 프랑스치장쌓기에 대석, 창대, 장식기둥 등은 화강석으로 다듬어 넣었고, 지붕은 순아연판이었으며, 내부는 바닥이 티크재 및 테라조, 벽은 벽지, 천장은 회칠이었다고소개하고 있다. 그 당시 영사 내외는 본건물 내에서 기거하였으며, 주방은 2층에 설치하는 한편 부속창고는 지하실에 두었는데, 각층의 각방에는 세면 수세기 등을 달았으며, 탑층에는 '탱크'를 설치하여 각방에 급수장치로 연결되게 하였다.
이 자료를 남긴 미우라 노보루는 "당시의 건축으로서 명치정(明治町)에 소재한 불란서교회(즉 명동성당)와 더불어 동서고지(東西高地)를 새롭게 장식한 당시를 추억하면 확실히 일 이채(異彩)를 보여준 것으로 생각되며, 외관의 결구는 좌우간 내부의 벽, 마루, 창호 등의 재목, 수공 등에 상당한 고심을 기울인 것으로 인정되고, 사용된 각재료는 금일로서 보더라도 우수한 것이 사용되어진 것으로 볼 때, 이것이 건축비도 상당히 올려놓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는 견해를 덧붙였다.
자국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의도가 고스란히 배어있던 탓이기도 하겠지만, 서대문 성벽 밖으로 삐죽이 솟아오른 프랑스공사관의 외경은 누구에게나 나름의 깊은 인상을 남겨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근대시기에 서양인을 통해 유통된 이미지자료에는 서울성벽과 그 위로 올라앉은 프랑스공사관의 풍경이 유달리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이러한 프랑스공화국의 위세 역시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1905년 이른바 '을사조약'의 체결과 더불어 프랑스공사관은 프랑스영사관으로 격하되어 외교진영이 완전히 축소개편되었고, 그나마 경술국치가 가시화한 1910년 10월 1일에는 프랑스영사관이 20년간을 머물러온 정동땅을 버리고 서대문밖 합동(蛤洞) 30번지(番地)에 있던 충정공 민영환(忠正公 閔泳煥)의 구기(舊基)를 구입(購入)하여 이곳으로 옮겨가 버린다.
그리고 정동에 남겨진 옛 프랑스공사관 건물의 운명은 더욱 기구하다.
1914년에는 이곳에 서대문소학교(西大門小學校)가 건립되어 옛 프랑스공사관은 학교 운동장의 한가운데에 갖히는 몰골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총독부에 매수된 이 건물은 한때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 구매조합(構買組合), 수양단조선지부(修養團朝鮮支部), 동민회(同民會, 1924년 창립) 등으로 두루 사용되기에 이르렀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동민회'와 '수양단'의 정체에 대해서는 1926년에 발행된 후지이 카메와카(藤井龜若)의<경성의 광화> (109~111쪽)에서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으므로 참고가 된다.
하지만 그 사이 2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건물이 더욱 퇴락하고, 특히 서대문소학교의 교정 중앙에 솟아 있는 형국이 되어 걸리적거리게 되자 1935년 정초에 끝내 철거되어 사라지는 길을 걸었다. 프랑스공사관이 있었던 정동 28번지에 들어선서대문소학교는 해방 이후 서울서대문국민학교로 전환되었다가 1973년에 폐교되었으며, 그해 2월 18일자로 종로구 재동에 있던 창덕여자중학교가 곧장 이곳으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는 프랑스공사관 시절의 흔적도, 서대문소학교 시절의 흔적도 더는 찾아볼길이 없지만, 서울성벽에 가까운 운동장 안쪽의 화단 위에 간신히 남겨진 "RF 1896"이라고 새긴 정초석 하나만이한때 '잘 나갔던' 옛 시절의 영광을 묵묵히 입증해주고 있다.

[프랑스공사관관련 참고자료목록]
- 小坂貞雄(코사카 사다오), <外人の 觀たる 朝鮮外交秘話)> (朝鮮外交秘話出版會, 1934) [에밀 마르텔(Emile Martel)의 회고]
- 윤일주, <한국양식건축80년사> (야정문화사, 1966)
- 한국사연구협의회, <한불수교 100년사> (1986)
- 조선일보사·주한프랑스문화원, 한불수교백주년기념전시회 <격동의 구한말 역사의 현장> (조선일보사 출판국, 1986)
- 끌라르 보티에·이뽀리트 프랑뎅, 김상희·김성언,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 (태학사, 2002)
- 경기도박물관, "먼나라 꼬레 - 이폴리트 프랑뎅의 기억속으로" (경인문화사, 2003)
- 김정동,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2004)
- 한불수교 120주년 기념행사, "서울의 추억, 한·불 1886-1905" (프랑스국립극동연구원·고려대학교박물관,2006)
- 藤井龜若(후지이 카메와카), <京城の 光華> (朝鮮事情調査會, 1926)
- 三浦昇(미우라 노보루), “朝鮮に 於ける 初期洋風建築に 就いて (舊佛國公使館)”, <朝鮮と建築> 第14輯 第4號 (1935年 4月號) pp.14~18
- 일기자(一記者), "외국영사관 통역생활 사십년", <조광> 1937년 7월호, 190~192쪽 [불란서국기(佛蘭西國旗) 아래 27년(年), 경성불국영사관(京城佛國領事館) 통역(通譯) 이종엽(李鍾燁)씨]
- 문일평(文一平), "금석(今昔)을 말하는 외국영사관(外國領事館)의 기지 유래(基地 由來)", <조광>1938년 4월호, 170~175쪽
- <조선중앙일보> 1934.12.23일자, "물환성이한 오늘에 헐려질 전법국공관(前法國公館), 석일 영화도 일장춘몽"
- <동아일보> 1936.1.12일자, "신춘각국영사관순방기 (11) 불국영사관 (1)"
- <동아일보> 1936.1.13일자, "신춘각국영사관순방기 (12) 불국영사관 (2)"
- <동아일보> 1936.1.14일자, "신춘각국영사관순방기 (13) 불국영사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