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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영사관

분류 : 외교건축
건축년도 : 1901년 10월 개설, 1905년 회현동 2가 78번지로 신축 이전
소재지 : 정동 16-1번지

조선호텔의 로즈가든

한때 한국주차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대관정(大觀亭)을 자신의 관사로 삼아 머물렀던 동네라 하여 일본인들이 자기네식으로 고쳐부른 지명이 '하세가와쵸(長谷川町, 장곡천정)'이며, 이는 지금의 소공동(小公洞)에 해당한다. 이곳 소공동에는 오늘날에도 조선호텔이 남아 있는데, 그 연원은 일제 초기에 건립된 철도호텔에 두고 있다.
원래 남별궁의 터였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이 성립할 때에는 고종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던 원구단이 있었던 곳이기도 한 이 자리에 철도호텔이 착공된 것은 1913년 봄이었다. 그리고 이듬 해인 1914년 10월 10일에는 낙성을 보았는데, 이때에 호텔의 이름을 '조선호텔'로 고쳐 사용하기로 확정하였다.
이 호텔의 건립에는 막대한 예산이 투여되어 실내장식품 등의 일체를 독일과 영국에서 직수입하여 설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실을 겸한 중앙홀, 프랑스식 응접실과 특별식당, 독일식 식당, 끽연실, 바, 오락당, 집회실, 귀빈접대실, 무도회장, 부인담화실, 독서실에다 객실마다 욕실과 화장실을 설치하는 등 최고수준의 시설을 갖춤으로써 이내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이와 아울러 조선호텔이 자랑하던 또 하나의 명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로즈 가든(Rose Garden)'즉 '장미원(薔薇園)'이었다. 해마다 여름이 가까워지면 황궁우(皇穹宇) 일대에 만개한 희고 붉은 장미꽃 동산을 개방하여 음악감상과 산책은 물론 음료와 다과를 즐기는 공간이 마련되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장미원이 생겨난 연원이 흥미롭다. 이 장미들은 원래 욱정(旭町) 2정목, 즉 회현동 2가 78번지에 있던 벨기에영사관 뜰에 심어져 있었던 것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이 영사관을 처분하면서 건물은 요코하마생명보험회사에 넘겨지고, 대부분의 장미는 조선호텔로 옮겨심어져 로즈가든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마침<매일신보> 1918년 6월 16일자에는 "공개(公開)한 장미원(薔薇園), 15일 저녁부터 조선호테루에서"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로즈가든 첫 공개 때의 풍경과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참고삼아, 그 내용을 여기에 덧붙여 둔다.
"서늘한 때를 찾아서 조석으로 산보를 다니는 사람이 많아진 이즈음에 이러한 사람들이 유람장으로 조선호테루에서는 후정의 환구단 부근에 월계화원을 베풀고 이를 공개하게 되었는데 그 동산의 월계는 삼백여 주이나 되는 것을 욱정(즉 회현동)의 백이의(白耳義, 벨기에) 공사관에서 옮겨 심은 것이 요사이 만발하였다. 동산 안에는 여러 개의 당교의를 벌여놓고 소쇄한 사각정과 분수 등이만발한 장미꽃과 배경의 채색 고아한 명선루와 서로 비추어 매우 풍광이 청량하다. 여기서 15일부터 '로-스 까든'을 열게 되었는데 이것은 저녁 일곱 시부터 열한 시까지 보통요리는 물론이오 아이스크림, 맥주, 시도론, 레모나드 등의 청량음료로부터 가피(=커피), 홍다(=홍차), 과자, 과실의 종류까지 주문에 응하며 또 일반 놀러오는 이를 위하여 저녁마다 호테루 '오케스트라' 음악이 있고 수요, 토요의 이틀 저녁은 야외활동사진도 영사한다더라."

상세설명

경기도 과천으로 넘어가는 남태령길과 남부순환도로가 교차하는사당동네거리의 남서쪽 모퉁이에는 사적 제254호로 지정된구벨기에영사관 (서울 관악구 남현동 1095-13, 지정일 1977.11.22)이 남아 있다. 이 건물의 소유자는 우리은행(옛 한국상업은행)이지만 2004년 9월 2일 이후 서울특별시에 무상임대되어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 옛 벨기에영사관 건물은 현재 우리은행 본점이 들어선중구 회현동 2가 78번지 일대(현행 우리은행본점의 주소는 서울 중구 회현동 1가 203번지를 사용)에 있었으나, 지난 1980년에 도심재개발사업에 밀려 지금의 장소로 해체이전이 착수되고 이듬해인 1981년 11월부터 1982년 8월까지 복원공사를 벌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에 앞서 일제 때인 1919년에는 요코하마생명보험회사(橫濱生命保險會社)에 매각되어 지점과 사택으로 이용되다가 일제 말기에는 다시 일본 해군성(海軍省) 무관부관저로 전환되었으며,해방 직후에는 국유재산으로 귀속된 이곳을 한때 공군이 사용하였고 1953년부터는 해군 헌병감실 등으로 줄곧 사용하다가, 1970년에 옛 상업은행이 이 건물을 불하받아 소유권을 취득한 내력을 지녔다.
이 건물은 애당초 1902년 10월에 벨기에 측에서 총영사관부지로 구입하여 그 이듬해인 1903년에 착공하여 1905년에 준공을 보았던 것인데, 벽돌조에 석조기둥을 세운 지하1층 지상 2층의 총건평 454평 규모였다. 설계자는 일본인 코다마(小玉)이고, 호쿠리쿠토목회사(北陸土木會社)의 니시무라(西村)가 청부하여 공사를 벌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는 옛 벨기에영사관의 모습과 이에 관한 사실관계는 바로 여기까지이다. 그러나 회현동에 있던 벨기에영사관은 그들의 첫 영사관터가 아니었다. 벨기에는 이보다 앞서 그들의 영사관을 정동지역에다 두었는데, 이 사실은 어찌 된 영문인지그리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일찍이 정동권역에 벨기에영사관이존재했었다는 점은 몇 가지 자료에 뚜렷히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우선 호암문일평(湖岩 文一平)이 <조광> 1938년 4월호에 기고한 "금석(今昔)을 말하는 외국영사관(外國領事館)의 기지 유래(基地 由來)"라는 글에 따르면, 그 연혁은 이렇게 정리된다.
"영미로 이외(英美露 以外)에 독일(獨逸)도, 불란서(佛蘭西)도, 백이의(白耳義)도 모두 정동(貞洞)에 공사관(公使館)을 두었으니 그 유지(遺址)로 말하면 전자(前者)는 현 고등법원 정문부근(現 高等法院 正門附近)에 해당(該堂)하고, 중자(中者)는 현 서대문공립심상소학교(現 西大門工立尋常小學校)가 되었고, 후자(後者)는 영인 부암돈(英人 夫岩敦)의 가(家)가 되었다가 오늘날은 박영균(朴永均)이란 문패(門牌)가 붙어 있는데 정동정(貞洞町) 46번지(番地) 1호(號)이다. 백이의공사관(白耳義公事館)은 그 후 정동(貞洞)에서 떠나 삼월오복점(三越吳服店) 미국인 흘법(美國人 訖法, Hulbert)의 집터에 신축(新築)하고 그리로 옮겨갔다. 현 욱정(現 旭町) 2정목(丁目) 78번지(番地)의 본권번(本券番)이 그 구기(舊基)로 꽃 같은 4백의 예기(藝妓)가 들락날락하는 것도 자미(滋味)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적어놓은 '정동정 46-1번지'라는 위치표기는착오이다. 정동에는 애당초 이러한 지번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박영균'이라는 이름을 단서로재확인해보았더니 해방 직후의 지번목록에 '정동 16-1번지, 조선토지경영회사(朝鮮土地經營會社), 박영균'라는 소유자명이 보인다.이로 미뤄보아 문일평의 글에 잘못 기재된 '정동정 46-1번지'는곧 '정동 16-1번지'을 표시하려 했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아울러 이곳이 '영국사람 부암돈(G. Russel Frampton, 佛巖敦, 夫岩敦)의 집'이었다고 적어놓은 대목 역시 이 자리가 곧 '정동 16-1번지'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 있어서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그는 1900년 12월 29일에 관립영어학교교장으로 초빙되어 우리 나라에 들어오는 인물이다.
다음으로 벨기에영사관이 정동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적어둔 또 하나의 근거자료는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 1922~1988)의 것이다. 그는 1948년에서 1950년까지, 그리고 다시 1958년에서1963년까지 7년간에 걸쳐 주한미국대사관의 문정관(文政官)과 정무참사관(政務參事官)을 지냈으며, 이 과정에서 우리 도자기의 수집가로 악명()을 날렸을뿐만 아니라 한국정치의 본질을 설파한 <한국 : 소용돌이의 정치> (1968)를 비롯하여 우리 나리에 관한 숱한 저작물을 남긴 사람이다.
그는 1959년 '로얄 아시아틱 소사이어티 한국지부 회지' 제35권에 기고한 "정동지역과 미국대사관저의 역사"라는 글에서 벨기에영사관 관련사항을 이렇게 정리했다.
"(16쪽) 한국의 독립시기 동안, 대부분의 외국공관은 정동 또는 인근에 집중되었다 : 미국(1884)과 영국(1890)은 둘 다 현재의 위치에 있었고; 프랑스는 뒤늦게 1896년경 이화여고의 옆구역에화려한 공사관 건물을 지었으며; 벨기에는 정동의 단층벽돌건물(나중에 이화학당의 음악당으로 전환)에 자리잡았는데, 이곳은 러시아공사관의 입구 바로 서측에 붙어있는 위치에 여전히 남아 있다. (벨기에영사관은 그 후 동화백화점 뒤편의 기둥이 늘어선 벽돌건물로 옮겨갔다); 독일은 1889년 현재 서울지방법원이 서 있는언덕에 자리했다가, 나중에는 서대문로타리의 안쪽 3, 4백 야드 부근에 설치하였고; 이탈리아는 1901년 이후 어느 땐가 서소문 근처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러시아는 가장 인상적이게도 1885년 이래로 정동구역의 핵심 고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이유로 정동은 여러 해 동안 공사관거리(Legation Street)로 알려졌다."
그는 이 기고문에서 벨기에영사관의 위치를 '러시아공사관의 입구 바로 서측에 붙어 있는 위치'라고 구체적으로 적시하였다. 그리고 이 건물은 이화학당의 음악당으로 사용된 적이 있다고도 적고 있다. 이것으로 미뤄보더라도 이 위치는 '정동 16-1번지'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그의 글에 부속된 지도자료에는 '벨기에공사관(Belgian Legation, 엄밀하게는 영사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음)'의 위치를 이화학당 건너편의 '옛 장로교 선교부 영역'에다 표시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위치고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와 벨기에 사이에 처음 외교관계의 수립을 본 것은언제였을까
기록에 따르면 양국간에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것은 1901년 3월 23일의 일이었다. 우리 나라는 외부대신 박제순(外部大臣 朴齊純)에 특명전권대사로 나섰고, 벨기에는 레온 방카르트(Leon Vincart, 方葛)가 진작에 1900년 11월 5일부터 서울에 도착하여 교섭에 임하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시절에 가장 흔하게는 벨기에를 백이의(白耳義)로 부르곤 하였으나 그에 못지않게 비리시(比利時), 비국(比國), 대비리시국(大比利時國)으로도 표기하였으므로, 이 당시의 조약은 한비수호통상조약(韓比修好通商條約)이라는 명칭으로 정리되었다.
곧이어 1901년 10월 17일에는 비준서의 교환과 더불어 영사관도 설치되었는데, 당초 특명전권대사로 왔던 방카르트가 그대로 총영사(總領事, Consul General)로 임명되었으며 그는 을사조약 이후에도 교체없이 1909년 9월 30일까지줄곧 우리 나라에 상주하였다.
근대개항기 이후 대한제국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와 통상조약을 체결한 나라는 일본(1876년), 미국(1882년), 영국(1883년), 독일(1883년), 이탈리아(1884년), 러시아(1884년), 프랑스(1886년), 오스트리아(1892년), 청국(1899년), 벨기에(1901년), 덴마크(1902년) 등 11개국에 이른다. 이 가운데 공사관 또는 영사관을 개설한 나라는 모두 아홉 나라이며,별도로 공관을 개설하지 않았던 나라는 오스트리아와 덴마크 등 두 나라에 그쳤다. 따라서 우리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공관까지 개설한 나라들을 통틀어 그 말미를 장식한 나라가 바로 벨기에였던 셈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벨기에가 첫영사관을 개설한 정확한 시점이 언제이고, 또 언제부터 언제까지 정동에 그들의 영사관을 두었던 것이며, 정동에 두었던 영사관이 과연 그들의 첫 영사관이 맞는지 등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정확한 관련자료가 잘 눈에 띄질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에 덧붙여 회현동으로 넘어가기 이전에 정동 이외의 지역에다 영사관을 다시 이전한 적이 있었는지의 여부도 분명하지 않다.
가령, 1902년 11월부터 이듬해인 1903년 6월까지 8개월 가량을 이탈리아 영사의 신분으로 한국에 머물렀던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 魯士德)는 귀국 후 1904년에 <꼬레아 에 꼬레아니>라는 저술을 남겼는데, 거기에 수록된 '서울지도'에는 벨기에영사관이 표기된부분이 등장한다. 그런데 정작 벨기에영사관은 정동 쪽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남대문 바로 안쪽에 있었던 선혜청(宣惠廳) 자리에 그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것이 단순한 착오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적어도 이 부분까지 감안한다면 벨기에영사관의 위치고증문제는 다소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어쨌거나 분명하게 확인되는 부분은 1905년에 현존하는 회현동 신축공관으로 옮겨가기 이전의 어느 시점엔가 정동 구역에 벨기에영사관이 존재했으며, 그 위치는 곧 정동 16-1번지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동 16-1번지의 내력은 어떠했던 것일까
정동 16-1번지는 그레고리 헨더슨의 글에 나와 있듯이 "러시아공사관의 입구 바로 서측에 붙어 있는 위치"에 해당하는 지번이다. 비교적 근년까지 하남호텔(何南호텔)이 있었던 자리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그 건물 바로 앞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회화나무 (정동 16-2번지, 지정번호 : 서 2-3)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어서 정동의 이정표를 만들어 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이 자리는 손탁호텔의 여주인 앙트와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 孫澤, 孫鐸, 宋多奇; 1854~1925)의 행적에 관한 자료에도 고스란히 등장한다. 즉,<구한국외교문서> 권 18, 아안(俄案) 2에 보면'부로공관좌변 양관(附露公館左邊 洋館)을 손탁여사에게 하사하는 증서'가 수록되어 있고, 여기에 "1898년 3월 16일자로 황성 정동 러시아공사관 대문 왼쪽 편에 황실소유의 방 5개가 딸린 벽돌건물(塼屋) 한 채를 덕국규녀(德國閨女) 손탁(宋多奇)에게 상으로 내려, 이로써그 노고를 치하한다"는 구절이 나와 있다.
이로 인하여 흔히 이곳을 손탁호텔 자리라고 오인하는 경우도 없지 않으나, 손탁호텔은 이 자리의 길건너편인 정동 28번지에 있었으며,더구나 고종에게서 하사된 것이 아니라1898년에 미국인 선교사 기포드에게서 직접 사들인 것이라는 점에서 취득경위도 완전히 다르다.1917년에 발행된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 보면 손탁호텔 자리인 정동 29번지 (1,184평)와 더불어 정동 16번지 (418평) 또한 그 소유자가 모두'독일국 손탁'이라고 표시되어 있다는 점은 이러한 관계를 잘 입증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문일평과 헨더슨의 글에 나오는 정동 시절 벨기에영사관이란 것은 모두가 1898년에 손탁이 하사받은 양관(洋館)과 동일한 건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를 실제로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더 있다.
프랑스 기자 빌타르 드 라게리(Villetard de Laguerie)가 1898년에 저술한 <라 꼬레(La Coree)>에는 러시아공사관을 원경에 두고기념촬영한 세 종류의 인물사진이수록되어 있는데, 그 배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단서가 들어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우선 여기에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이른바 '러시안 게이트(Russian Gate; Russian Arch)'가 등장하므로, 이곳이 곧 러시아공사관의 정문 앞쪽이라는 사실이 저절로 드러난다. 그리고 개선문(凱旋門)을 쏙 빼어닮은 이 문의 왼쪽 옆으로 나란히 붙어 양관(洋館)이 세워져 있는 바 이것은 손탁이 하사받은 그 '러시아공관 좌변의 벽돌집'이라는 것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미국의 사진여행가 엘리아스 버튼 홈즈(E. Burton Holmes)의 저작물(1901)에 수록된 러시아공사관 관련 사진자료는 이 건물이 아관파천 무렵에 건설된 것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훨씬 나중의 일지만 1920년대 이후 이화여전 음악당 시절의 사진자료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 하남호텔 시절의 사진자료와 비교해보면, 이것들은 모두 라게리의 책에 등장하는 러시안 게이트 옆의 양관과 동일한 건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해묵은 회화나무(서울시 보호수)의 모습까지 사진 속의 구도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따라서 이곳은 곧 '정동 16-1번지'에 해당하는 구역이라는 것은 당연한 논리의 귀결이다.
손탁이 하사받은 양관 자리에 벨기에영사관이 입주한시점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없다. 다만, 우리 나라와 벨기에 사이에 조약비준서가 교환된 것이 1901년 10월이므로 그때를 영사관 개설시기로 짐작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 이후 회현동에 신축한 영사관건물로 들어간 것이 1905년이므로 적어도 그 사이에 어디가 됐건 별도의 영사관시설을 갖추고 있어야 했던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기간을 오롯이 정동에서보냈던 것인지, 아니면 제3의 다른 장소로 영사관을 옮긴 사실이 있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한편, 벨기에영사관이 떠난 이후의 '정동 16-1번지' 양관은 어떻게 변천되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명칭은 프램톤 하우스(Frampton House)라는 것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프램톤은 1900년말에 관립영어학교 교장으로 초빙되어 서울로 온 사람이며, 흔히 '부암돈' 또는 '불암돈'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으나, 1930년대 경성사범학교 영어교사로 그의 이름이 보이는 걸로 봐서 그가 국내에 오래도록 체류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렇게 본다면 프램턴은 1905년 이후 1920년대 초반 사이의 어느 때인가 손탁의 소유였던 이 양관을 빌렸거나 아니면 그에게서 구입하여 자신의 거주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프램톤 주택으로 알려진 이곳이 이화학당(梨花學堂) 쪽으로 넘겨진 것은 1924년이었다. 당시 이화학당 측에서는 이 건물을 사들여 이화여전(梨花女專)의 음악관(音樂館)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는데, <이화 80년사>에서는 이곳에다 "음악훈련을 위한 1개 합창실, 2개 연습실, 피아노 22대, 오르간 12대를 비치하였다"고 적고 있다. 앞서 그레고리 헨더슨의 기고문에서 "벨기에영사관이 자리잡은 단층벽돌건물이 나중에 이화학당의 음악당으로 전환하였다"고 채록한 것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음악관은 이화여전이 신촌에다 새터전을 마련하여 자리를 옮겼던 1935년까지 사용되었다. 그 당시 이화여전 측에서는 학교이전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이 음악관을 처분하였으며, 이에 따라 소유권은 조선토지경영회사로 넘겨졌던 것으로 확인된다.
바로 이 자리에 낯익은 '하남호텔'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다. 이 하남호텔은 손탁호텔의 후신으로 자주 언급되기는 하지만, 애당초 건물의 소유주가 모두 손탁이었다는 것말고는 아무 관련이 없는 별개의 건축물이다. 한때 '손탁호텔터'의 역사유적 표지석(제148호, 1990년 7월, 서울특별시 설치)이 이 하남호텔의 앞에 놓여져 있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오해가 빚어낸 어이없는 해프닝이었다.
하남호텔의 연혁에 대해서는 목원대 김정동 교수의 <근대건축기행> (1999)에 일부 정리되어 있어 도움이 된다. 이 자료에는 "...... 그후 1969년 최금준(崔今俊)이 3층짜리 신관을 덧붙여 지었다. 동네 집장사를 통해 지은 것인데, 건축가 없는 건축의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호텔은 두 동으로 이어져 헐리기 전까지 존재했었다. 이후 1973년 일본 오사카에서 거주하는 재일동포 사업가 서재식(徐在植)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그는 그 호텔을 본격적으로 키우려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하남호텔의 사진자료를 보면, 새로 지은 3층짜리 신관의 모습이 더 돋보이기는 하지만 아관파천 직후부터 존재하던 손탁의 양관은 전면 외관만 약간 다듬어졌을 뿐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음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다시 세월이 흘러 1990년대 이후 경영난에 빠진 하남호텔의 주인은이 건물을 캐나다대사관 측에 처분하였고, 1995년 5월 18일에는 끝내 철거작업이 개시되었다. 1898년에 손탁이 하사받은 유서깊은 정동의 벽돌양관은 딱 100년의 세월을 넘기기 직전에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 사이에 대사관 건물의 신축공사는 묵묵히 진행되어 얼마 전인 2007년 7월 24일에는 프레스센터 뒤편의 코오롱빌딩에서 정동으로 이전까지 완료하고 대사관 업무를 재개하였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은 이곳을 자신들의 대사관터로 선정했던 전임 캐나다대사조차도 이곳을 여전히 손탁호텔이 있던 자리로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일보> 2007년 11월 12일자에 따르면, 11월 9일에 개최된 신축개관식에 참석한 렌 에드워즈(Len Edwards) 캐나다 외교부 차관은 이러한 소감을 술회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주한캐나다대사로 재직하면서 이곳을 대사관 부지로 선정하여 매입작업을 벌였던 당사자였다.
"서울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동네가 정동이에요. 특히 대사관을 지은 이곳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이 있던 곳으로 옛날의 향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곳이어서 대사관 부지로 매입했죠."
이러한 그의 역사인식 자체는 가상한일이라 하겠으나, 그의 뇌리에 잘못 입력된 사실관계는 누군가 꼭 바로잡아 귀뜸해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외교사와 관련된 내력만을 간추려 말한다면, 캐나다대사관이 들어선 자리는 곧 그 옛날 벨기에영사관이 있었던 곳이다.

[벨기에영사관관련 참고자료목록]
- 이중화, <경성기략> (신문관, 1918)
- 경성부, <경성부사> 제2권 (1936)
- 윤일주, <한국양식건축80년사> (야정문화사, 1966)
- 정충량, 이화팔십년사편찬위원회, <이화팔십년사> (이대출판부, 1967)
- 김정동, <김정동 교수의 근대건축기행> (푸른역사, 1999)
- 김정동,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2004)
- E. Burton Holmes, (The Little-Preston Co., 1901)
- Villetard de Laguerie, (1898, 1904)
-長野末喜(나가노 스에키), <京城の面影> (內外事情社, 1932)
- 문일평(文一平), "금석(今昔)을 말하는 외국영사관(外國領事館)의 기지 유래(基地 由來)", <조광>1938년 4월호, 170~175쪽
- Gregory Henderson, "A Histiry of the Chong Dong Area and the American Embassy Residence Compound", Vol. 35 (1959)pp.1~31
- <대한매일신보> 1904.8.9일자, "비관축재"
- <매일신보> 1918.6.16일자, "공개한 장미원(薔薇園)"
- <매일신보> 1920.6.3일자, "낙원(樂園)=장미원(薔薇園), 하루 날에 삼백 명의 입장한 자가 있었다"
- <매일신보> 1925.6.30일자, "지상피서(紙上避暑) (2) 조선호텔의 장미원(薔薇園)"
- <조선일보> 1969.7.11일자, "하남호텔 등서 점유, 구 제정러시아 공관 땅 460여평"
- <조선일보> 1995.5.28일자, "하남호텔 헐렸다, 국내 첫 서양식 손탁호텔 자리, 구한말 적별돌 다량 쏟아져, 캐나다대사관 들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