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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공사관

분류 : 외교건축
건축년도 : 1901년 12월 개설, 1902년경 현위치 이전, 1908년 5월 서문외 미국선교사 쓰레와트가옥으로 재 이전
소재지 : 서소문동 41번지

카를로 로제티의 '꼬레아 에 꼬레아니

우리 나라와 이탈리아는 일찍이 1884년에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해묵은' 우방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로부터 십수여년이 지난 1901년에 와서야 겨우 서울에 이탈리아영사관이 개설될 만큼 이렇다 할 외교현안이 존재하거나 이해관계가 크게 충돌할 사이는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두 나라 사이의 외교관계가 만들어준 매우 특출난 성과물로 딱 한 가지는 꼽을 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제3대 이탈리아영사를 지낸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 魯士德; 1876~1948)가 남긴 <꼬레아 에 꼬레아니(Corea e Coreani)> (Part I 1904, Part II 1905)라는 책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은 서울학연구소 번역으로 나온 <꼬레아 꼬레아니> (숲과 나무, 1996)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
현역 해군중위의 신분이었던 로제티는 1902년 11월부터 이듬해인 1903년까지 8개월 가량을 한국에 머물렀다. 원래는 호주와 중국 등지를 순방 중이었으나 그 무렵 서울 주재 이탈리아 초대 영사 프란체세티 디 말그라 백작(Count Ugo Francesetti di Malgra, 佛安士瑞德; 1877~1902)이 급작스레 사망하는 바람에 그를 대신하여 서울에 급파되었던 것이라고 그는 한국으로 오게 된 연유를 적고 있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25살이었다. 그는 또 이에 앞서 프란체세티가 살아 있던 당시 1902년 8월의 한달을 '절친한 친구'였던 그와 함께 서울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는 나중에 귀국하여 이내 한국에서 머물 때의 체험과 수집자료를 바탕으로 두 권으로 구성된<한국과 한국인(Corea e Coreani)>라는 책을 펴냈으니 이때가 "1904년"이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책의 Part I은 1904년, Part II는 1905년으로 약간의 시차를 두고 잇달아 발행되었다.) 러일전쟁의 와중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으나 이를 충족할 수 있는 마땅한 이탈리아어 기초자료가 없었던 것이 출판을 서둘렀던 이유가 되었다.
그의 책이 지니는 가치는 여기에 수록된 이미지 자료들에서 크게 돋보인다. 이 시기에 간행된 외국인의 저작물에도 엇비슷한 형태의 사진자료들이 채록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선 로제티의 책에서는 그 수량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다.
그의 책에 수록된 사진은 모두 420여장을 넘어 선다. 물론 이 가운데에는 간단한 형태의 삽화나 인물사진과같은 것도 다수 섞여 있기는 하나, 다른 여행기나 개설서와 같은 저작물들은 따라오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화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시절에 서양인들의 저작물에 수록된 우리 나라의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이란 것은 대개 상업용으로 제작된 도판이나 사진엽서의 형태로 구매되어 통용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이 점에 있어서는 카를로 로제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스스로 밝혀놓았듯이 그의 책에 수록된 서울의 거리풍경이나 일상생활에 관한 사진들은 무라카미사진관(村上寫眞館)을 통해 수집한 것들이었다.
하지만그의 책이 지니는 최대의 강점은 그 자신이 직접 촬영한 사진자료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는 부분이다. 이로한 종류의 사진은 150장에 이르며,이로써 그는 의도했던 아니건 간에특정시대의 단면들을 고스란히우리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한 셈이다.
경운궁 남쪽에서 정동 일대를 담아낸 전경, 서소문 쪽에서 정동교회 부근을 담아낸 모습, 이탈리아공사관거리라는 이름으로 통용됐던 서소문 일대의 풍경, 한성전기회사와 종각 일대를 담아낸 전경, 그리고 영어, 법어, 독어, 아어 등 외국어학교와 해당학교의 수업장면에 대한 탐방사진 등은 그 어느 곳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소중한 사진자료들이다.
이와 아울러 그 당시 한국의 실상과 운명에 대한 담담한 목격담 역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모든 것들은 1902년에서 1903년으로 넘어가는 8개월이라는 짧은 재임기간에 촬영되고 채록된 결과물이었다.이렇게 본다면 다소 허술하거나 깊이가 없는 듯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결코 그러하지 않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초대 영사였던 프란체세티 디 말그라 백작이 급작스레 죽지 않았던들, 그리하여 그가 짧게 나마 우리 나라에 머물 수 있는 기회가 애당초 생겨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카를로 로제티라는 낯선 이방인이 남겨준 <꼬레아 에 꼬레아니(Corea e Coreani)> (1904, 1905)라는 너무도 소중한 선물을 결코 전해받지 못하였을는지도 모른다.

상세설명

흔히 이탈리아라고 하면 으레 이태리(伊太利)라는 표현부터 퍼뜩 떠올리지만, 예전에는의태리(義太利), 의태리(意太利), 이국(伊國), 의국(義國) 등의 표기도 제법익숙하게 사용하였다.이러한 이탈리아와 우리 나라와 이탈리아 사이에 외교관계가 성립되는 과정은여느 나라와는 다르게 여러모로 순탄하지 못하였다. 조약의 체결은 일찍이 1884년에 성사되었던 것에 반해외교공관의 설치는 정작 17년이라는 세월을 넘긴 1901년에 와서야 겨우 실행되었던 까닭이다.
일본과의 병자수호조규(강화도조약; 1876년) 이후 우리 나라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서구열강의 대열을 통틀어 이탈리아는 결코그 순서가 뒤지지 않았다. 미국(1882년), 영국(1883년), 독일(1883년)보다는 약간 늦지만 러시아(1884년), 프랑스(1886년), 오스트리아(1892년), 청국(1899년), 벨기에(1901년), 덴마크(1902년)보다는 그 시기가 훨씬 앞섰다.
그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페르디난도 데 루카(Ferdinando de Luca, 盧嘉德)를 전권대신으로 파견하였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교섭통상사무아문독판(交涉通商事務衙門督辦) 김병시(金炳始)가 나서서 1884년 6월 26일에 양국간 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보았다. 그러나어떠한 이유에선지 조약비준서의 교환은 다른 나라의 사례에 비해 훨씬 늦어지고 있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이듬해인 1885년 7월 10일에는 중국 상하이주재 이탈리아 겸 스페인 총영사가 제물포에 당도하여 조약비준서의 교환이 연기될 것임을 확약하고 돌아간 사실도 있었다. 두 나라 사이에 조약비준서가 정식으로 교환된 것은 다시 해를 넘긴 1886년 7월 24일이었다. 이때 이탈리아 대표로는 해군 대위 프레데리코 크라비오사(Captain Frederico Craviosa, 管樂所)가 파견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이후 이탈리아는 조선 내에 자국의 공관설치를 서두르지 않았으며, 그 대신에 영국공사관에 맡겨 모든 외교통상업무를 대리케 하였다. 실제로 1891년 5월 4일에는 이탈리아 공사 슈발리어 판사(Cheval!ier A. Pansa, 潘薩)가 서울로 와서 한 달 가량을 머물며 영국총영사관에서 이탈리아의 권익을대변하는 일을 의뢰하고 돌아갔다. 그러므로 이 기간 동안 이탈리아의 외교공관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관계를 청산하고 이탈리아가 직접 자기 나라의 외교관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은 1901년 12월의 일이었다. 이 당시 신임 이탈리아 영사로 서울에 부임한 사람은 프란체세티 디 말그라 백작(Count Ugo Francesetti di Malgra, 佛安士瑞德; 1877~1902)이었다.
그는 정치적 전통을 지닌 이탈리아의 귀족가문 출신으로 당시 24세에 불과한 현역해군소위의 신분이었으나, 불어, 독어, 영어 등 각국 말에 능통하고 학문과 예술의 능력이 뛰어나 존경받는 청년신사로 촉망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가 우리 나라로 건너오기 직전에는 중국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상태였는데,여러가지 임무를 수행하는 능력이 특출난 관계로 서울에 이탈리아영사관을 설치하는 일에도 적임자로 선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특히 그는이탈리아영사로 부임한 이래로 자신의 정부를 위해 유용한 존재가 되어야 하며,이러한 이유로 이 나라에 대한 지식을 철저하게 갖추는 데에 전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02년 9월초에 이르러 이러한 목적을 이루고자 우리 나라의 내륙으로 막여행을 떠날 참이었는데, 불행하게도 그 순간 장티푸스(typhoid fever)에 걸려 한 달 후인 10월 12일에젊은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10월 13일에 일단 양화진외국인묘소에 묻혔다가, 두 달이 지난 그해 12월 20일 서울까지 직접 찾아온 어머니 말그라 백작부인 일행에 의해 이탈리아군함 롬바르디아(Lombardia)편으로 운구되어갔다.
그의 빈 무덤 옆에는 지금도 그 당시에 만들어세운 묘비 하나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새겨져 있다. "He the young and strong who cherished noble longings for the strife by the roadside fell and perished (투쟁을 위한 숭고한 갈망을 소중히 여기던 그 젊고 강한 자는 길가에 쓰러지고 죽었도다)."
고작 1년을 넘기지 못한 체류기간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우리 나라에 처음 이탈리아영사관을 개설한 인물로 기록된다.
그렇다면 그가 정한 첫 영사관 자리는 어디였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코리아 리뷰(Korea Review)> 1901년 12월의 '뉴스칼렌다' 항목에 실린 기사 하나를 참조할 수 있다.
"새로 부임한 이탈리아 영사 프란체세티 디 말그라는 이달 14일 궁정에 나가 신임장을 제정했다. 이탈리아와 한국 간의 관계는 지금까지 영국공사관을 통해 수행되어 왔으나 이제부터 이탈리아는 직접 대표하게 되었다. 디 말그라는 최근에 무어 목사가 퇴거한 곤당골의 집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곤당골'은 원래 보은단골(報恩緞洞)이 변해 생겨난 말이며,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는 이 명칭을 조선 선조 때의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사신단을 수행하여 중국에 갔을 때에 벌어진 일화에서 유래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대개 '곤당골'은 '곤담골(美墻洞, 곤담골)'이라고도 쓰는데, 이로 인하여 그 시절의 지도에는 흔히 이곳을 '미동(美洞)'이라고 표시하였다. 이 지역은 지금의 '을지로 1가' 일대를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경성부사> 제2권 (1936)에서는"현 황금정(現 黃金町)1정목(丁目) 181번지(番地) 아서원(雅敍園)의 인접지(隣接地)"로 그 위치를 표기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아서원'은 1918년경에 개업하여 1970년까지 존재했던 대표적인 중국요리점으로, 이 자리에는 지금 롯데호텔이 들어서 있다.
그런데첫 이탈리아영사관의 위치고증을 위한 단서가 되는 말은 뭐니뭐니해도 '무어 목사가 퇴거한 집'이라고 적어둔 대목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무어 목사(Rev. Samuel Farman Moore, 毛三悅, 毛三栗; 1860~1906)는 1892년에 북장로교 선교사로 우리 나라에 건너와서 이듬해인 1893년에 승동교회(勝洞敎會)의 모체가 되는 '곤당골교회'를 세웠으며, 특히 당시로서는 최하층 천민이었던 백정(白丁)을 상대로 포교를 벌였던 것으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프란체세티 디 말그라 영사가 머물렀던 곤당골의 집이란 것은 '곤당골교회'에 부속된 무어 목사의 사택일 가능성이 높지만, 이 부분에 대한명확한 판단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곤당골교회의 모습은 승동교회의 역사와 관련한 교회사 계통의 사진자료에 간간히 등장하므로 이를 참고하여도 좋겠다. 후임 이탈리아영사를 지낸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 魯士德; 1876~1948)가 펴낸 <꼬레아 에 꼬레아니(Corea e Coreani)> (1904, 1905)에는 '이탈리아 옛영사관'으로 표시된 사진자료가 등장한다. 아마도곤당골이탈리아영사관의 모습, 바로 그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곤당골 이후에 두번째 이탈리아영사관이 된 장소는 바로 서소문동 41번지이다. 이곳은 현재 대한항공 서소문빌딩이 서 있는 자리인데,<조광> 1938년 4월호에 수록된 문일평(文一平)의 기고문에는 "이태리(伊太利)만은 특례(特例)로 처음부터 그 공사관(公事館)이 정동(貞洞)에 있지 아니하고 서소문내(西小門內)에 있었는데 현 경성 서소문정(現 京城 西小門町) 41번지(番地)의 덕영소아과(德永小兒科)가 되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물론 이탈리아영사관이 처음부터 서소문에 있었다는 대목은 그의 착각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탈리아영사관이 서소문 쪽으로 옮겨온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한 자료가 없다. 이 때문인지 <경성부사> 제2권 (1936)에서도 '일자미상(日子未詳)'이라고만 표기하고 있다. 다만, 로제티의 책에서는 '이탈리아영사관의 옛터'라는 제목의 사진자료 하나만 소개되어 있을 뿐 곤당골 시절의 영사관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고 줄곧 서소문 쪽에 있는 영사관에 관한 얘기에다 여러 장의 사진자료까지 등장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그가 이탈리아 영사의 신분으로 우리 나라에 재임했던 때가 1902년 11월부터 이듬해인 1903년 6월까지 8개월 가량이었다. 그는 또 이에 앞서 프란체세티가 살아 있던 당시 1902년 8월의 한달을 '절친한 친구'였던 그와 함께 서울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맥락을 종합하면, 로제티가 부임하기 훨씬 이전이거나 그가 막 서울에 도착하던 무렵에 이탈리아영사관은 벌써 서소문동 41번지에 정착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서소문동의 영사관 건물을 언제 누가 지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점에 있어서도 다음에 나오는 로제티의 글은 건물의 정체를 판단하는 데에 약간의 도움이 된다.
"나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이제는 고인이 된 나의 선임자가 갖지 못했던 행운을 얻어 작지만 안락하고 아담한 집 한 채를 거처로 구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서울에 있던 유럽인들의 숫자가 극히 적고 유럽식 임대주택도 거의 전무한 상태였으므로 집을 구한 것은 완전히 운이었다. ......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집을 구하는 것이 절실한 몇 안되는 외국인들 중의 한 명이었다. 나를 구원해준 것은 바로 당시 제물포에 부영사관을 짓기 위해 서울에 있던 부영사관을 폐지한 러시아정부의 조처였다. 조그마한 일로 내가 러시아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어쨌든 분명 러시아는 나를 궁지에서 구해주었고 그때부터 나는 러시아에 대해 깊은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 구절로만 본다면, 로제티의 거처라는 곳은 서소문동에서 새로 구한 영사관 건물을 말하며, 그렇다면 이 건물은 혹여 '러시아 부영사관'의 용도로 사용된 그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을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로제티 이후 이탈리아는 기존의 영사관을 승격시켜 공사관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이때가 바로 1903년 5월 6일이었다. 첫이탈리아 공사가 되어 서울로 새로 부임한 사람은변리공사 모나코(Attilio Monaco, 毛樂高)였다.브라질 상파울루 주재 이탈리아 총영사였던 그가 서울로 발령이 난 것은 전년도인 1902년 7월 28일이었으니,초대 영사였던 프란체세티 디 말그라가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도 그가 서울로 오던 도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 영사의 자리는 즉시해군중위의 신분이었던 카를로 페치아 디 코사토 백작(Count Carlo Fecia di Cossato, 葛魯智)에게 맡겨졌다가,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이내 카를로 로제티 중위로 다시 교체되기에 이른 것이다. 로제티 영사의 임기가 8개월여에 불과했던 것도 애당초 모나코 공사의 현지 부임이 지연됨에 따라일시적으로 그 자리를 메우고자 급파된성격이 강했던 탓이다.
여타의 각국공사관이 주로 정동 안쪽에 밀집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탈리아공사관은 이보다 약간 벗어난 서소문 방면에 자리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두곳은각각 공사관거리(Legation Street)와이탈리아공사관 거리(Italian Legation Street)로 따로 구분하여 불렀다. 이탈리아공사관거리는 곧 지금의 서소문로를 말한다.
그런데 어느 시점엔가 이탈리아공사관 건물은 약간의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카를로 로제티의 책에 소개된 사진자료에는 애당초 기와지붕을 올린 서양식 2층건물에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5칸의 창문을 지닌 구조였으나, 을사조약 이후에 발행된한국명소(韓國名所) 시리즈에 포함된 '이태리영사관(伊太利領事館, 1909.8.8일자 우편소인이 찍힌 개인소장자료) 사진엽서에는 좌측으로 창문 3칸이 더 증축된 상태로 변한 것을확인할 수 있다. 이 부분 역시 관련자료의 보완이 필요하다 하겠으나, 아쉽게도 더 이상의 자료는 잘 찾아내기가 어렵다.
그리고 <대경성사진첩> (1937) 156쪽에 보면,서소문정 41번지에 있던 토쿠나가 이사오(德永勳)의 '토쿠나가 소아과의원(德永小兒科醫院)' 전경사진이 하나 수록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는 흐릿하나마 병원의 담장 안에 서 있는 건물이 옛 이탈리아공사관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이 건물의 최후가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상당히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적어도 1930년대 후반기까지도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이른바 '을사조약' 이후의 이탈리아공사관은 어떻게 변하였던 것일까
가장 큰 변화는 일제에 의한 외교권의 박탈로 기존의 각국공사관이 일제히 영사관으로 격하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서울육백년사> 제4권 (1981)과 같은 자료에서는, "이태리공관에 관한 기록에 전혀 보이지 않고 있어 타국과는 달리 을사조약 당시 공관을 철수한 후 폐쇄된 것 같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탈리아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공사관은 철수하였으나 '영사관'만큼은 계속 유지하는 정책을 사용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 대신에 기존의 공사관 시설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던지, 영사관의 위치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눈에 띈다. <황성신문> 1908.5.28일자에는'이영관 이접(伊領館 移接)'이라는 제목으로 "이태리영사관(伊太利領事館)을 금번(今番) 서문외(西門外) 미국선교사(美國宣敎師) 쓰레왓도씨가(氏家)의 기지(基址)로 이접(移接)하였다더라"는 신문기사가 남아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기에는 말하는 미국선교사 쓰레왓도가 누구이며, 그의 집은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잘 알기 어렵다.
이 당시의 이탈리아 총영사는 카사티 (Luige Casati; 1850~1909)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병을 얻어 대한의원에서 여러 날을 치료하다가 결국 1909년 12월 11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곧장 양화진외국인묘지에 묻혔으며, 우리 나라와 일본에서 이십여년 이상을 체류한 이력 탓인지 프란체시티 디 말그라 영사 때와는 달리 시신을 본국으로 옮겨가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의무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카사티 총영사의 죽음은 이탈리아영사관의 폐쇄를 불러왔다. 그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1910년 1월 4일에는 이탈리아영사관의 업무 일체가 영국영사관으로 위임되었다. 이로써 1901년 이후 설치되었던 이탈리아의 외교공관은 이 땅에서 영구히 사라진 듯이 보였지만, 실상은 꼭 그러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 관보> 1919년 9월 3일자에는, "체자레 티리오로(Cesare Tiriolo)가 조선을 관할하는 경성주재이태리국영사에 임명됨에 붙여 그 직무집행에 대해 8월 16일 인가장을 발급하였다"는 내용이 눈에 띈다. 이로써 영국영사관에 맡겨진 영사업무에 관한 권한일체는 다시 본국에서 직접 파견한 이탈리아 영사에게 회수되었고, 당연히 조선주재 이탈리아영사관도 함께 부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이듬해인 1920년 3월 30일에 그가 휴가차 본국으로 떠남에 앞서 영국영사관에 다시 사무를 인계하였다는 내용이 보일 뿐, 그것을 끝으로 이탈리아영사의 이름은 더 이상보이질 않는다.
영사관과 공사관 시절을 다 협쳐도 10년을 넘기지 못한 사이에 두 명의이탈리아 영사가 이 땅에서 목숨을 다 한 것은 분명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그들의 흔적은 양화진 언덕에 묘비와 무덤으로 고스란히 남아 전해지고 있으니, 두 나라 사이에 그것보다 더 끈끈하고 인상적인 인연은 찾기내기 어려울 것이다.

[이탈리아공사관관련 참고자료목록]
- 이중화, <경성기략> (신문관, 1918)
- 경성부, <경성부사> 제2권 (1936)
- 리하르트 분쉬, 김종대,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 (학고재, 1999)
- 전택부, <양화진 선교사 열전> (홍성사, 2005 개정판)
- 이덕주, <종로 선교이야기> (도서출판 진흥, 2005)
- 이덕주,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 (홍성사, 2006)
- 까를로 로제티, 서울학연구소, <꼬레아 꼬레아니> (숲과나무, 1996)
- 문일평(文一平), "금석(今昔)을 말하는 외국영사관(外國領事館)의 기지 유래(基地 由來)", <조광>1938년 4월호, 170~175쪽
- 이재곤, "서울지방의 전래동명고", <향토서울> 제48호 (1989년 10월) pp.177~204
- 허인, "한이수교사소고(韓伊修交史小考)", <한국외국어대학교 논문집> 제18집 (1985) pp.535~549
- Gregory Henderson, "A Histiry of the Chong Dong Area and the American Embassy Residence Compound", Vol. 35 (1959)pp.1~31
- D. Pegorini, "In Memory of the Late Count Ugo Francisseti di Malgra", (Nov. 1902) pp.462~463
- <황성신문> 1908.5.28일자, "이영관 이접(伊領館 移接)"
- <대한매일신보> 1909.12.12일자(국문판), "이태리총영사 별세"
- <대한매일신보> 1909.12.14일자(국문판), "이태리영사 장례"
- <대한매일신보> 1910.1.23일자(국문판), "이태리국 영관의 경매"
- <신한민보> 1910.2.2일자, "이태리영사관은 폐쇄"
- <조선총독부관보> 1919.6.6일자, "휘보: 이태리국이익대표자 교송"
- <조선총독부관보> 1919.9.3일자, "휘보: 경성주재이국영사어인가"
- <조선총독부관보> 1920.4.5일자, "휘보: 이태리영사관 사무처변"
- <조선총독부관보> 1927.1.7일자, "재경성이국영사관 사무위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