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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구락부

분류 : 외교건축
건축년도 : 1894년 이후 정동 17번지에 건물 신축,1892년 6월 2일 결성, 1894년 5월 28일 정초석, 1903년 1월 31일 해산
소재지 : 지번미상 (프랑스공사관 인접가옥)

상세설명

무릇 외교관이라고 하는 직업은 국가간 이해관계의 조정과 교섭을 벌이는 것을 본연의 존재이유로 삼고 있으므로, 어느 나라에서건 간에 그 나라에 주재하는 외교관들 사이에 원활한 정보교환이나 이들만의 사교활동을 위한 별도의 조직체가 결성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한다. 우리 나라에서도 당연히 이러한 조직이 있었으니 '외교관구락부(外交官俱樂部, Diplomatic Consular Club)'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주한미국공사를 지낸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 安連; 1858~1932)이 정리한 <외교사연표> (1904)에 따르면, 외교관구락부는 1892년 6월 2일에 처음 결성된 이래로프랑스공사관에 인접하는 가옥('마르텔'의 집으로 표시)에서 회합을 갖다가 1894년 5월 28일에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한 정초식(定礎式)이 거행된 것으로 확인된다. 정식명칭은 "외교관 및 영사단 클럽(Cercle Diplomatique et Consulaire)"였으며, 이러한 명칭에서 보듯이 회원자격은 서울에 주재하는 외교관에 한하여 주어졌다.
이 당시까지 서울에 자국의 공사관이나 영사관을 설치한 나라가 일본을 비롯하여 미국(1883년 5월 개설), 영국(1884년 4월 개설), 독일(1884년 10월 개설), 러시아(1885년 10월 개설), 프랑스(1888년 6월 개설)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외교관구락부가 결성되던 초기의 풍경에 대해서는 법어학교 교장이었던 에밀 마르텔(Emile Martel, 馬太乙; 1874~1949)의 회고록에는 이렇게 그려져 있다.
"(259~261쪽) [서양인구락부(西洋人俱樂部, 서울구락부)] 외국에서 온 서양인은 집단적인 장소로 구락부(俱樂部)를 설치하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다. 이 구락부는 매우편리한 사교기관이었고, 역소(役所, 관청)에 근무하는 자도, 상매(商賣, 장사)를 하고 있는 자도 하루의 일과를 마치면 매일저녁 그곳에 모여들어 당구(撞球)를 즐기거나 트럼프 놀이에 흥을 내거나혹은 도서신문의 열람에 시간을 보내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 구락부는 꽤나 번잡하였다.
경성에 있어서 최초의 구락부는 외교관구락부(外交官俱樂部, Diplomatic Consular Club)라는 이름을 내걸고 정동의 현재 외인학교(外人學校)가 있는 장소에서 창설되었는데, 당초에는 간판(看板)에서 나타내는 것과 같이 경성주재의 각국공사관이랑 영사관에 근무하는 자들로만 하였고, 상인(商人)은 여기에 가입하지 않았다. 설비는 이들 사람들이 4천원을 갹출하여 설행하였으며, 얼마 안 있어 정부에 고문(顧問)으로 봉직하고 있는 서양인들을 회원(會員)으로 추가한 다음에, 1901, 2년경에는 전기회사(電氣會社)를 경영하는콜브란·보스트윜사무소의 사람들도 여기에 가입을 시킴에 따라 외교관구락부(外交官俱樂部)의 명칭을 폐기하고서울구락부(서울俱樂部)로 고침과 아울러 실로 재성외인(在城外人, 재경외국인)을 두루 망라하는사교기관이 되게 하였다. 서울구락부의 건물은 원래 이왕가(李王家)의 도서관(圖書館)이었던 것이나 이를 무상으로 불하를 받아 그 대상(代償)으로 구락부에서 매년 몇백원의 순익금을 고아원경영비(孤兒院經營費)로서 정부에 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돈은 정부가 그것을 보조금으로하여 여러곳의 고아원에다 분배교부하고 있었다.
[번잡했던 예전의 구락부(俱樂部)] 생각해보면 외인(外人)의 구락부(俱樂部)도 지금보다는 예전 쪽이 훨씬 더 번잡했고, 친밀도(親密度)도 훨씬 농후하였다. 외교상의 일, 기타 이런저런 관계로 돈도 적잖이 사용되었지만, 물가도 역시 쌌다. 예를 들면, 한 병의 위스키는 금일 7, 8원도 하는 것이지만 당시는 1원 50전짜리를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구락부의 멤버도 예전 쪽이 지금보다 많아서 80명 이상도 되었으나, 금일에는 모두 모여도 가까스로 25, 6명에 지나지 않는다. 사뭇 적요(寂寥)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초기 외교관구락부가 창설된 곳으로 표시된 '외인학교(外人學校)'는 정동 17번지에 있던 서울외국인학교(Seoul Foreign School)를 말한다. 서울외국인학교가 1923년에 이 자리의 부지와 건물을 매입했을 때, 기존의 건물은 '플레상 하우스(Plaisant House; 부래상 가옥)'로 부르고 있었는데, 이 건물은 아마도 예전의 외교관구락부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이 부분은 별도의 자료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외교관구락부는 1902년말에 이르러 해체가 결정되기에 이른다. 더 이상 외교관들만의 사교모임이 꾸려지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던 까닭이었다. 알렌의 외교사연표에는 다시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1902년 12월] 외교관 및 영사단 클럽(Cercle Diplomatique et Consulaire)을 대체하는 새로운 클럽이 서울에서 조직되었고, 이전의 클럽은 1903년 1월 31일 해산하였다.서울클럽(Seoul Club)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조직은 스타인(E. Stein)을 회장으로, 찰머스(J. L. Chalmers)를 회계로, 라페이리에르(J. de Lapeyriere)를 간사로 하는 임원선출을 하는 것으로 1903년 2월 5일에 공식 출범하였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대한제국 시절 궁내부 소속의 시의(侍醫)를 지낸 독일인리하르트 분쉬(Richard Wunsch, 富彦士; 1869~1911)가 작성한1903년 2월 6일자 서한(書翰)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등장한다. 분쉬 그 자신도 새로운 서울구락부의 위원회 임원으로 선출된 신분이었기 때문이었다.
"[1903년 2월 6일자 편지] ...... 클럽이 꼭 필요해 하나 만들었는데 회원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일본, 독일, 덴마크, 이탈리아, 벨기에, 미국 등지에서 온 60여명이랍니다. 이 클럽을 만드느라고 협의하는 동안 언어 때문에 정말 혼란스러웠습니다. 영어와 프랑스어 가운데 어느 언어가 주도적인 언어가 되어야 하는지 논쟁이 붙은 것입니다. 결국 결정하지 못하고 두 언어를 겸용하는 것으로 낙착되었습니다. 클럽위원회는 러시아공사, 프랑스공관서기, 영국세관관리, 미국총영사, 그리고 저 이렇게 다섯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회장으로 러시아공사가 선출되었습니다. 미국 총영사와 제가 표를 많이 얻어 아주 자랑스러웠습니다."
원래의 외교관구락부가 해체된 뒤에 새로 결성된 '서울구락부'의 내력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을 더하기는 어려우나,1912년부터 정동 1-11번지에 있던 이왕직(李王職) 소유의 옛 수옥헌(중명전)건물을 빌려 사용한 외국인클럽이 곧 이 '서울구락부'였다는 사실만큼은 여기에 덧붙여 둔다. 그리고 이 건물을 사용하던 도중 1925년 3월 12일에는 이곳에 화재가 발생하여 이층이 전소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옛 수옥헌은 상당부분 원형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서울구락부는 해방 이후에도 동일한 장소에서 한동안 그대로 유지되었으며,현재는 서울 중구 장충동 2가 208번지로 옮겨진'서울클럽'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참고 삼아 말하면, '서울구락부'와 자주 혼동되는 것으로'서울유니온구락부(Seoul Union Club; 1888년 9월에 결성)'라는 조직체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이에 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기 곤란하지만, 때마침 <삼천리> 1937년 10월호에 "조선 있는 외국인 영사와 선교사의 활동 현상"이라는 제목으로 이와 관련된 글이 하나 수록되어 있으므로 짤막하나마 이것을 곧장 인용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것이 좋겠다.
"(18쪽)...... 외국인들은 만리 타향에 있는 때문에 더군다나 단결을 굳세히 하고 영사관(領事)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단체를 조직하고 있다. 대개는 위안(慰安), 취미(趣味)의 단체로서 시시(時時)로 집합하여 차(茶)를 마시며 담소한다. 원산(元山), 구미포(九味浦)에 해빈피서지(海濱避暑地)의 단체가 있고 또 별개로 기독교 관계자의 지리산(智異山) 기타에 피서회(避暑會)가 있스며 취미의 회(會)로는 애독자연맹(愛讀者聯盟), 음악부(音樂部), 부인구락부(婦人俱樂部)가 있고 경성(京城)에는 서울구락부(서울俱樂部) 급(及) 서울유니온구락부(서울유니온俱樂部)가 있다. 전자(前者)는 선교사(宣敎師)를 제(除)하고 각 국 영사를 포함하고 거기에 옥돌(玉突, 당구), 가르다, 서적(書籍), 주류(酒類), 영화(映畵)의 설가(設價)있서 순연한 구락부(俱樂部)를 형성하며, 후자(後者)는 주로 선교사의 멤바로 체육을 주로 하나 테니스코트, 풀 운동의 설비가 있다."
[참고자료목록]
-코사카 사다오(小坂貞雄), <외국인이 본 조선외교비화(外人の 觀たる 朝鮮外交秘話)> (조선외교비화출판회, 1934) [에밀 마르텔(Emile Martel) 회고]
- 호레이스 알렌(Horace Allen),"Chronological Index(외교사연표)", (1904)
- 경기도박물관, "먼나라 꼬레 - 이폴리트 프랑뎅의 기억속으로" (경인문화사, 2003)
- 리하르트 분쉬,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 (학고재, 1999)
- (Dec. 1897), "[Notes and Comments]The Seoul Union is an organization for recreation and for the social and literaryimprovement of its members. ......"
- <매일신보> 1925년 3월 13일자, ""작효(昨曉) 정동(貞洞)에 대화(大火), 외교단구락부 소실(外交團俱樂部 燒失), 덕수궁이 가까웠음으로 군대까지 출동하였었다"
- <동아일보> 1925년 3월 13일자, "양인구락부(洋人俱樂部)에 화재(火災), 작일 오전 두시, 손해 삼만원"
- <조선일보> 1925년 3월 13일자, "정동(貞洞) 서울구락부(俱樂部), 금효(今曉) 2시(時) 소실(燒失), 원인은 누전인 듯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