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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제일교회

분류 : 선교건축
건축년도 : 1887년 10월 달성위궁 부근 한옥에서 시작, 1895년 8월 현위치 착공, 1897년 10월 준공, 1916년 1차 증축,1926년 2차 증축, 1953년 수리복원
소재지 : 정동 34-3번지 (정동 34-2번지 포함)

상세설명

정동 34-3번지에 위치한 정동제일교회(貞洞第一敎會, The First Methosist Episcopal Church)는 비록 그 규모는 압도적이지 않으나 오랜 역사와 더불어 정동의 한복판에 해당하는 장소성으로 인하여 이 지역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이로 인하여 일찍이 1977년 11월 22일에는 이러한 역사성과 건축적인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56호 '정동교회' (정동 32-2번지 대지 438.4평중 36평, 정동 34-3번지 사사지 565.6평중 284평, 도로 26평, 합계 3필지 346평 지정대상)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동제일교회의 역사는 1887년 10월 9일에 개설한 벧엘예배당(Bethel Chapel)에서 비롯되었다. 이곳은 성경사업을 사들인 공간으로, 이날 4명의 조선인 신자가 모여 아펜젤러의 인도로 첫 예배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몇 주 후에는 처음 집의 옆으로 그 크기가 배가 넘는 공간을 구입하여 방 가운데에 휘장을 늘이고 예배를 올렸다. 방 한가운데에 휘장을 늘인 것은 남녀가 한 방에 모이는 것이 공연한 시비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아직도 남녀가 엄격히 구분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빚어진 풍경인 듯하다.
하지만 이 벧엘예배당은지금의 정동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는 지적이 거듭 제기되고 있다. 1897년 12월 26일에 벌어진 새 예배당의 봉헌식 때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亞扁薛羅; 1858~1902)가 낭독한 '교회약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 교회는 이리저리 옮겨다녔습니다. 10년전, 지금 스크랜튼 대부인의 소유로 되어 있는 달성주택의 뒷문에서 돌 하나를 던질 만한 거리에 있는 벧엘(Bethel)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1888년 나의 지방여행 중에 내려진 포교금지령은 모임을 중지시켰고 벧엘은 처분되었으며 지금은 이곳에 한국사람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후 여성집회는 이화학당에서 열렸고, 남성집회는 지금 응접실로 쓰고 있는 내집의 방안에서 열렸습니다. 나중에 여성집회는 이화학당 언덕 아래 예배실에서 모였고, 남성집회는 배재학당 예배실에서 모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스크랜튼 대부인의 '달성주택(Tal Sung house)'은소공동에 있는 저경궁(儲慶宮) 안쪽의 달성위궁(達城尉宮)을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한국은행 바로 뒤편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이곳은 상동교회(尙洞敎會, 남창동 1번지)가 자리한 상동(尙洞)과는 길건너편에 해당하며, 조선호텔 대각선 방향에 있던 대관정(大觀亭)과는 남북으로 서로 등지고 있는 위치에 있었다.대한제국시절 궁내부 시의를 지낸 독일인 의사 리하르트 분쉬(Richard Wunsch, 富彦士; 1869~1911)도1901년말부터 2년 남짓 이곳을 임대하여살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정동제일교회의 머릿돌에도 이와 같은 맥락의 구절이 새겨져 있다는데, 여기에는 "이 교회는 1889년 12월 7일 계삭회(Quarterly Conference)를 구성함으로 조직되었다. 설교와 기도회는 그 2년전에 시작되었다"는 글귀를 통해 이 교회의 탄생시기를 명확하게 밝혀놓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소공동 언저리에 위치했을 거라고 추정되는'첫' 벧엘예배당 이후로 정동 일대의 이곳저곳을떠돌던 감리교회는 1895년 8월 5일에 이르러 해묵은 숙원사업이었던 그들의 새로운 예배당의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이 당시 교회의 설계도안은 미감리회 교회확장국(Board of Church Extension)에서 발간한 1894년판 <교회설계도안집>의 "25번 도안'을 골랐다고 알려진다. 이것은 미국북동부에서 유행하던 전형적인 조지안 고딕 양식(Georgian Gothic Style)을 따랐던 것으로 미국에서 설계도가 들어오자 건축에 조예가 있던 의사 맥길(William B. McGill)이 원산에서 올라와 감독을 맡았으며, 시공은 조선인 건축가 심의석(沈宜碩, 1854~1924)이 이를 맡아 처리하였다.
곧이어 1895년 9월 9일에는 이 교회의 정초석(定礎石)이 놓이게 되었다.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 1895년 9월호에는 이에 대한 간략한 기사가 정리되어 있다.
"정동감리교회의 정초석이 이달 9일 W. B. 스크랜튼 목사에 의해 놓여졌다. 참석자는 성황이었으며, 언더우드 목사, 외부참판이며 이 교회의 신도이기도 한 윤치호(T. H. Yun)와 다른 성직자들의 연설이 있었다. D. A 벙커 목사, W. M. 정킨 목사, D. L. 기포드 목사, 그리고 G. H. 존스 목사 역시이 식에 참여하였다."
이리하여 건축공사는착착 진행되었으며, 1897년 10월에 대체적인 준공을 보기에 이른다.
그런데 <독립신문> 1897년 5월 11일자의 기사에 보면, 이 건물이 완공을 보기도 전에 새로 지은 교당을 열고 이곳에서 주일전도를 하였다는 내용이 눈에 띈다. 그리고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 1897년 7월호에 수록된 '배재학당 졸업식' 관련기사에도 "정동의 제일교회(First M. E. Church)가 아직완공이 멀었다"고 지적하면서도 이곳에서 졸업식이 거행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곧이어 <독립신문> 1897년 10월 2일자에는 "내일 오전 10시에 미미교회에서 정동 새예배당에 처음으로 들어가 주일예배들을 할 터이다"는예고기사가 나와있다. 그리고 그해 연말인 12월 26일에는 예배당 준공에 따른 성대한 봉헌식이 거행되었는데, 이 당시 정동예배당의 위용에 대해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7년 12월 29일자에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회당의 장은 70척(즉 21.2미터)이요 광은 40척(즉 13.2미터)이요, 높기는 25척(7.6미터)인데 종을 다는 칸은 고가 50척(15.2미터)이며 회당 안에 좌우로 협방이 하나씩 있는데 장이 28척(8.5미터)이요 광이 14척(4.2미터)이며, 지붕은 함석으로 꾸미고 사면에 유리로 창을 하여 심히 명랑한지라."
이렇게 보면 대략 십자가의 형태를 닮은 교회의 평면적은 100평 규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아올러 종탑의 경우 뾰족탑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 평탑모양을 따른 것도 특징적이었다.
이렇게완공된 정동제일교회는 단순히 신앙을 위한 공간이었다기보다는 때로 주요한역사의 현장으로 자리매김이 되고, 또한 ㅡ신앙인이건 아니건 간을 막론하고 ㅡ 이웃하는 배재학당이나 이화학당과 어우러져 서양의 근대문물이 널리 전파되는 주요한 통로가 되기도 했다는 것은 잘알려진 사실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교회 자체에서도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나서 191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남녀신자를 구분했던 중앙의 휘장이 치워지고예배용 의자를 새로 들여 마루에서 예배를 보던 시대도 마감이 되었다. 그리고 신자의 수가 두드러지게 늘어나자 1916년에는 교회의 북쪽 벽이 허물어질 위기에 처한 것을 계기로 이곳을터서 교회당을 넓혔고, 다시 1926년에는 도로면에 접한 쪽을 포함하여 기존의 종탑 위치까지 옮기는 등 큰 증개축공사를 단행하였다.
이때의 공사는 교회의 신자이었던 이명원(李明遠)에게 맡겨졌는데, 그는 곧 1922년에 이화학당에서 심슨홀을 서북쪽으로 증축할 때에 이 공사를 책임졌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 당시 60여평 규모를 늘리는 공사로 인하여 정동제일교회는 총면적 175평의 규모로 늘어나게 되었다.
정동제일교회는그 후 한국전쟁 때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에 1953년 11월 20일에 예배당중수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수리작업이 진행되었으며 한달여가 지난 12월 23일에는 거의 옛모습 대로 복원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이후 1977년에는 정동교회에 대한 문화재 지정(사적 제256호)이 있었고,1987년 3월 8일에는 화재가 발생하여 교회의 일부(약 50평)이 불에 타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그 사이에 1979년에 완공된 '선교백주년기념예배당'의 건립, 그리고 1990년에 세워진 '교회창립 100주년기념 사회교육관'의 완공 등으로 이 일대의 풍경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으나, 100년이 넘도록 이 자리를 지켜온 정동제일교회의 위상과 의미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으니 그것으로 옛 풍경이 사라진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참고자료목록]
- 정동제일교회역사편찬위원회, <정동제일교회 구십년사> (정동제일교회, 1977)
- 김정동,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2004)
- 이덕주, <개화와 선교의 요람 정동이야기> (대한기독교서회, 2002)
- 이만열, "아펜젤러의 초기 선교활동과 '한국감리교회'의 설립", <한국기독교와 역사> 8 (1998년 3월) pp.35~78
- (Aug. 1892), "[Editorial Notes] The Eighth Annual Meeting of the Methodist Episcopal Mission is in session ...... "
- (Sep. 1895), "[Editorial Notes] TheAnnual Meeting of the MethodistMission"
- (Sep. 1895), "[Notes and Comments] The Corner-stone of the Chong Dong Methodist Church was laid by Rev. W. B. Scranton on the 9th inst."
- C. C. Vinton, "Statistics of the Protestant Churches in Korea", (Oct. 1895) pp.382~385
- (May 1897), "[Editorial Department] The Annual Meeting of the Methodist Mission"
- (July 1897), "[Editorial Department] The Closing Exercises of Pai Chai"
- M. Bernita Block, "The House Nobody Knows", (May 1930) pp.102~103
- "문화재위원회회의록 (1977년도)", 문화재관리국, <문화재> 제12호 (1979년 10월) pp.195~198
- <대한민국 관보>1977년 11월 25일자, "문화공보부 고시 제376호 약현성당 등 6건 사적지정"
- <독립신문> 1897년 5월 11일자, "지나간 일요일에 조선 서울 미미교회에서 처음으로 정동에 새로 지은 교당을 열고 주일 전도를 하였는데 ......"
- <독립신문> 1897년 10월 2일, "내일 오전 십시에 미미교회에서 정동 새 예배당을 처츰으로 들어가 주일예배들을 할 터인데 ......"
- <독립신문> 1897년 11월 25일자, "요전 일요일 오전에 장로교 교회와 미미교회 회원들이 정동 새 예배당에 모여 명성황후 폐하 혼백을 위하야 ......"
- <독립신문> 1897년 12월 28일자, "요전 일요일 오전에 정동 미미교회에서 새예배당을 하나님께 들이는 예식을 행하였는데 ......"
- <동아일보> 1934년 6월 13일자, "50년기념전도, 정동예배당에서"
- <동아일보> 1936년 4월 11일자, "기독교선교 오십주년, 기념비석 제막식, 12일 정동예배당에서"